한국 13팀 네팔히말라야로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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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계의 해외원정 활동은 84년과 다를 바 없이 히말라야 등반에 편중되었다. 82년부터 매년 늘어나던 히말라야 원정대 수는 85년에 와서는 13개 팀으로 늘어나 또다시 기록을 갱신하기에 이르렀다. 특이한 것은 13개 팀 모두가 네팔히말라야로만 집중되어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국내산악계의 한계를 드러냈다.
85년의 또다른 특징은 7개 팀이 한꺼번에 겨울시즌에 몰렸으며 그들 중 3개 팀이 에베레스트에 몰렸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경향, 즉 네팔히말라야 편중 현상과 동계원정대 급증, 그리고 최고봉 에베레스트 선호 경향은 이후 한동안 한국원정대의 원정 패턴으로 자리잡게 된다.
▲ 85년 3월 청주대팀의 허영호와 윤홍근에 이어, 9월에는 부산교대팀의 양정환이 정상등정 송공한 투쿠체(6,920m)
85년도의 프레몬순에는 단지 두 한국원정대만이 장도에 올랐다. 청주대산악부가 투쿠체(6,920m)등반을 위해 출국했고, 이 등반에 참가했던 허영호 개인이 로체샤르(8,400m)에 도전장을 냈다. 제천산악회원인 그는 전해인 84년에 청주대학 체육과에 특기생으로 입학, 투쿠체 원정에 대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그 등반이 끝난 후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단신으로 로체샤르 원정에 나선 것이었다.
투쿠체(Tukuche)는 세계 제6위의 고산인 다울라기리 북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의 이름은 동쪽 기슭에 위치한 다카리 종족의 마을 투크체에서 따온 것이다.
청주대의 투쿠체원정대는 남기창대장(44)의 지휘아래 김학영등반대장(26), 윤홍근(23), 임해훈(24), 정창혁(24), 이동환대원(25)과 여기에 허영호대원(31)이 합류, 7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차 정상공격에 실패한 후 대원들만으로 등반을 속개 1캠프(6,100m)에서 정상공격에 나섰다. 3월 12일 허영호, 윤홍근 두 대원이 2차 공격에서 정상에 올랐다. 경비 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루어 낸 충북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이었다.
투쿠체 등반을 마치고 귀국한 허영호는 곧바로 로체샤르 원정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마나슬루를 등정한 83년 이 산의 입산허가를 받아놓았던 것이다. 대원은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카트만두 현지에서 두 명의 셀파를 고용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은 5월 10일, 프레몬순의 등반기간을 불과 20여일 남긴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등반을 개시한 그는 4캠프(7,300m)까지 진출한 후 5월 29일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8천미터 지점의 플라토까지 오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해 그곳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마지막 캠프를 너무 낮게 설치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등정을 재시도할 기간이 남아 있질 않았다. 네팔정부가 공식 허가한 프레몬순 기간의 종료일은 5월 31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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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출리 북봉 초등정으로 빛난 8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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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산악회 가우리샹카르원정대
서울의 가우리샹카르원정대는 박종수대장(31)을 비롯해서 송종만(25), 선형근(29), 박종윤(25), 이정신(23) 등 5명의 히말라야 초행자들로 꾸려졌다. 로왈링 산군의 맹주격인 가우리샹카르(Gauri Shankar)는 등정로의 어려움으로 인해 6번의 시도끝에 79년에 가서야 미국대에 의해 초등정된 산이다. 그후에도 84년 가을까지 모두 11개 팀이 정상등정을 노렸으나 오직 84년의 미국대에게만 두 번째 등정을 허락할 정도로 도도하기로 이름난 험봉이다. 이 산은 19세기 중엽부터 금세기 초반까지 세계 최고봉으로 인식될 정도로 네팔히말라야에서는 명봉으로 꼽힌다. 산의 이름은 ‘화려하게 빛나는 여신’이란 뜻이다.
가우리샹카르에 도전한 한국대는 미국대가 초등한 남서릉을 따라 등반을 개시했으나 2캠프에서 눈사태를 만나는 등 고전을 거듭하다가 맥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부산의 투쿠체원정대는 신호진대장(32)과 이동본(31), 양정환대원(22) 등 3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히말라야는 초행길이었다. 이들은 카라반 도중 카메라 장비를 도난당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봄시즌에 청주대산악부가 오른 북릉 루트를 따라 2개의 캠프를 전진시킨 끝에 무난히 등정에 성공했다.
한편 가네쉬 1봉에 도전한 대구의 에이스산악회는 서릉의 대암벽을 돌파하지 못해 힘없이 물러났다. 이 산의 등정 가능한 루트는 55년에 초등정된 동남릉이나 그곳의 베이스캠프는 중국의 티베트 영토였기 때문에 네팔정부로부터 입산허가를 받아내질 못했다. 현지에 가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원정대는 어쩔 수 없이 서릉 등반을 시도했지만 단지 3명으로 구성된 약체의 원정대로 대암벽을 뚫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 원정대의 대원은 박지원대장(36)과 안승호(24),이심희(여·24)대원 등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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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부 현대중공업 합동 히말출리북봉원정대
울산 지역 최초로 꾸려진 히말출리 북봉원정대는 대산련 울산지부와 현대중공업이 합동으로 추진한 팀이었다. 원정대는 김억석(65·부산운봉산악회장)단장과 이규진(42·울산지부 전무이사)대장의 지휘아래 박경서(34·진산악회), 신영철(34·미도알파인클럽), 이재홍(31·진산악회), 김성출(29·가지산우회), 남봉희(26), 이용순(20·이상 진산악회)대원 등 총 8명으로 구성되었다.
히말출리 북봉은 주봉인 히말출리(7,893m)에서 북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위성봉으로 주봉이 60년에 일본대에 초등정되고 서봉(7,540m)이 78년에 역시 일본대에 의해 초등정된 후 마나슬루 산군의 마지막 미답봉으로 남아 있었다. 85년 가을 이 봉의 초등정을 노리고 한국대와 폴란드대가 동시에 들어오게 되었다.
한국대는 북등릉을 택했고 폴란드대는 반대쪽인 남서릉으로 등반을 개시했다. 한국대는 10월 2일 베이스캠프(4,050m)에 도착, 10월 23일까지 세 개의 캠프를 전진시키며 6,400미터 지점까지 고정로프 설치를 마쳤다. 드디어 10월 26일 6,800미터까지 올라가 설동을 파고 비박을 감행한 공격조가 정상공격을 단행, 27일 오후 3시 이재홍대원과 4명의 셀파가 미답의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대는 그로부터 5일 뒤인 11월 1일 2명의 대원이 정상에 섰으나 이미 세계 초등정의 영광은 한국대에게 와 있었다.
울산산악인들의 히말출리 북봉 등정은 82년의 고줌바캉, 83년의 바인타브락 2봉 초등정에 이어 또 하나의 세계기록을 추가한 값진 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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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사상최다팀 기록한 한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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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겨울은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상 가장 특이한 시즌으로 꼽힌다. 겨울 한 시즌에 전부 7개의 원정대가 네팔히말라야로 몰린 것이다. 그것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만 한꺼번에 3개 팀이 집중되어 네팔 관광성을 놀라게 했다.
에베레스트(8,848m)에 몰린 한국대는 동남릉을 노린 고려대팀과 서릉의 전국합동대, 그리고 남서벽원정대 등 3개 팀이 각기 다른 루트를 목표로 삼았다. 그밖에 진주 초모롱마산악회가 가우리샹카르(7,134m), 대구-부산합동대가 캉테가(6,779m), 한일합동대가 타우체(6,501m), 그리고 은벽산악회가 카료룽(6,511m) 등 대부분 동계초등정을 목표로 한 원정대들이었다.
히말라야에서의 동계등반은 공식적으로는 80년 2월에 폴란드팀에 의해 이루어진 에베레스트 등정을 최초로 꼽는다. 그후 네팔히말라야에는 겨울철 원정대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매년 7천~8천미터봉들에 대한 동계초등정 기록이 속출했다. 그 결과 자이언트봉에서는 82년에 다울라기리, 83년에 마나슬루, 84년에는 초오유와 안나푸르나가 각각 동계초등정되었고 85년에 와서는 캉첸중가가 폴란드대에 의해 등정되었다.
때마침 히말라야 원정 전성기를 맞은 한국산악계도 82년 푸모리(7,145m) 동계원정을 시발로 83년에 아마다블람(6,812m)과 틸리초 피크(7,134m)를 등정했고, 84년에는 에베레스트 원정과 안나푸르나와 쟈누봉 동계초등정을 이룩해 냈다. 그리고 85년에 와서 그 기세가 더욱 고조되어 에베레스트에만 3개 팀이 도전장을 냈는가 하면 7천미터급 동계초등정을 노린 원정대가 대거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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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에베레스트에서 한국 3팀 각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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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계에베레스트 서릉원정대
가장 먼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팀은 김기혁(31·하켄클럽, 양정산악회)대장이 이끄는 서릉 원정대였다. 84년 캉첸중가 산군의 쟈누(7,710m)봉을 동계 초등정한 바 있는 김기혁대장은 그 여세를 몰아 에베레스트에 도전장을 냈다.
전국에서 희망자를 선발해 조직한 이 등반대는 김대장을 중심으로 조동혁부대장(33·양정산악회), 임삼균(28·대전쟈일클럽), 박계현(27·경남동악회), 정용선(27·제주오현등고회), 김영환(27·대전쟈일클럽), 서성수(27·부산뫼우리산악회), 이재하(27·악우회), 유의선(27·대전클라이머스), 최태수(26·충남고OB), 박성만(26·울산산악회), 이상헌(26·부산뫼우리산악회), 안일섭(26·인덕산악회), 박정식(24·양정산악회), 이상구(23·인천교대산악회), 위용범대원(21·하켄클럽)대원 등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에베레스트 서릉 동계등반은 80년 영국대가 최초로 시도했으나 패퇴하였고 82, 84년에 프랑스대가 공략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서릉은 난이도가 높을 뿐더러 겨울철에는 강력한 제트기류에 노출되는 지형이라서 등반이 극도로 곤란한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한국대는 11월 30일 서릉의 첫 번째 관문인 수직벽을 돌파하고 로-라(6,050m)라 불리는 안부 위에 제1캠프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두 번째 캠프까지는 고도 900여 미터의 암설벽을 올라야 하는 난코스였으나 대원들은 3명의 셀파들과 함께 6일간의 작업끝에 12월 5일 2캠프(6,950m)를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8일부터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 아래 캠프로 피신해야 했고, 급기야 그곳마저도 강풍으로 텐트가 찢겨나가자 12월 15일 전원 베이스캠프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텐트를 포함한 많은 장비와 식량이 유실되어 더이상 등반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서릉에 대한 한국대의 첫 도전은 등반 개시 21일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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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동계에베레스트원정대
한편 노말루트인 남동릉을 목표로 한 고려대팀은 14명의 셀파를 고용해 11월 26일 베이스캠프에 들어왔다. 79년 알래스카 매킨리 원정을 성공리에 마친 바 있는 고려대산악회는 84년에 에베레스트 정찰을 마치고 입산허가를 받아놓았었다. 이들은 세 팀 중 유일하게 매스컴(한국방송공사)을 후원처로 잡아 원정을 꾸렸다. 참가 대원은 김상겸단장(50·고려대 교수)과 남상태대장(44)의 지휘아래 김종호부대장(32), 홍성암(32), 장경순(28), 김영대(27), 박동석(22), 박성우대원(22)과 한국방송공사에서 파견한 정성근(30), 백승민(29), 김창훈기자(27)를 포함하여 총 11명으로 구성되었다.
▲ 85년 12월 에베레스트 3캠프를 떠나 사우스콜로 향하고 있는 고려대팀 대원. 같은 시즌에 서릉과 남서벽에도 각각 한국원정대가 도전했으나 악천후로 모두 고배를 마셨다.
12월 1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14일 만에 3캠프(7,400m)까지 설치하고 12월 20일에는 사우스 콜(8,000m)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는 빠른 전진을 보였다. 그리고 21일 새벽 1시 30분 김종호부대장과 박동석대원이 앙리타 셀파와 함께 1차 정상공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들은 혹독한 추위로 해드랜턴이 작동되지 않고 산소마스크도 얼어붙자 200여 미터를 전진하다가 후퇴했다.
사우스 콜로 내려온 공격조는 하루를 더 기다려 다음날 아침 재차 정상공격에 나섰다. 셀파없이 두 대원만이 나선 것이다. 그러나 8천미터의 고도에서 이틀을 지낸 이들의 체력은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8,500미터 지점에 다다른 시각이 오후 3시. 더이상의 전진은 과욕이라고 생각한 김부대장은 후퇴를 결심했다.
일단 베이스캠프로 철수한 대원들은 이후 닥쳐온 악천후로 15일 만에야 다시 사우스 콜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의 텐트는 모두 찢겨져 있었고 날씨마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 철수했다. 그후 원정대는 남체바잘(3,440m) 마을까지 하산, 휴식을 취하고 1월 22일 등반을 재개했지만 3캠프에 도달하는 것을 끝으로 2월 13일 통한의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장장 75일 동안 주어진 동계등반 기간을 모두 사용하면서 끈질기게 버텼지만 에베레스트의 가공할 겨울바람은 정상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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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계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편 박영배대장(39·크로니산악회)이 이끄는 남서벽원정대는 세 팀 중 가장 늦은 12월 14일에야 쿰부빙하에 들어왔다. 서릉대와 마찬가지로 전국에서 자원한 대원들로 구성된 이 원정대도 자금 사정이 원활치 못해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참가 대원은 박대장 외에 서봉준부대장(33), 도종득(33), 정계조(30·강원대산악회), 김보열(25·대륜고OB), 한성환(29), 김영복(30), 김환중(27·충남의대), 엄홍길대원(26·크로니산악회) 등 9명. 대장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가 히말라야는 초행길이었다.
에베레스트의 남서벽은 75년에 영국대에 초등정된 후 82년에 소련대가 남서벽의 왼쪽 벽을 통과하는 독자적인 루트를 뚫은 것 외에는 이때까지 재등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겨울철 등정은 외국대도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오직 프랑스대가 82년 겨울 이 벽을 오르고자 시도했지만 초입에서 포기했었다.
한국대는 5명의 셀파와 함께 등반을 개시했다. 이들은 남동릉으로 등반중이던 고려대와 2캠프(6400m)까지 루트가 같았기 때문에 아이스폴에 사다리나 고정로프 설치 작업이 없이 손쉽게 웨스턴 쿰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독자적인 등반에 나선 이들은 그러나 남서벽을 등반하기에는 경험과 물자 등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3캠프(약 7200m)까지 오르는 데도 대원들은 고소순응이 안돼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오직 엄홍길, 김보열대원이 1월 10일 7,500미터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계를 절감한 박대장은 1월 18일 베이스캠프를 철수했다.
85년 겨울 한국대의 가장 큰 성과는 가우리샹카르 동계초등정이다. 네팔의 7천미터급 산 중에서는 쟈누, 가네쉬 1봉, 록 노어, 팡, 눕체 등과 함께 난이도가 높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가우리샹카르의 동계초등은 이 원정대의 전력으로 보아 예상 외의 성과로 평가되었다.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가 파견한 이 팀은 선적서류 분실로 화물 통관이 지연돼 12월 18일에야 베이스캠프(4,800m)를 설치할 수 있었다. 대원은 서정배대장(43)과 성락건(40), 최한조(33), 이희봉대원(29) 등 4명이었는데 히말라야는 모두 초행길이었고 실제 등반이 가능한 인원은 더 적었다. 7천미터급 봉우리 중 상급의 난이도를 가진 이 봉을 동계등반하기에는 너무 적은 대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5명의 등반 셀파를 고용해 부족한 전력을 보충했다.
셀파들과 함께 등반을 시작한 한국대는 1캠프를 설치해 놓고 해를 넘겨 1월 9일 2캠프(6,300m)를 설치했다. 이어서 13일에는 남서벽의 6,800미터 지점에 3캠프를 설치 완료했다. 몇 차례의 기상악화로 텐트가 찢기고 장비가 유실되었지만 16일 최한조대원과 2명의 셀파가 정상공격을 감행, 드디어 정상에 섰다. 이 등정은 최초의 동계등정이며 통산 세 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비록 셀파 의존도가 높았지만 무려 13개 팀에게 실패를 안겨준 이 봉의 등정은 괄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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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파라마운트 캉테가원정대
▲ 대구 파라마운트산악회가 85년 12월 31일 동계초등정을 기록하며 오른 쿰부히말라야의 캉테가(6,779m)위용
한편 대구의 파라마운트산악회가 부산, 마산의 한국산악회원들과 합동으로 꾸린 캉테가 원정도 10명의 인원으로 이 산에 도전, 동계초등정을 이루었다.
캉테가(Kangtega)는 쿰부히말라야에서 이웃한 탐세르크, 타우체, 아마다블람 등과 함께 6천미터급 봉우리 중에서는 등반성이 인정되고 있던 산이다. 이 산들이 히말라야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리던 60년대 초에 차례로 등정된 것은 곧이어 등장하는 철의 시대를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캉테가는 63년 힐라리가 이끄는 뉴질랜드대에 의해 초등정된 후 79년에 일본대가, 그리고 84년에 스페인대가 등정했을 뿐 겨울철에는 미등인 채로 남아 있었다.
이 산의 동계 초등정을 노리고 들어온 한국대는 전경수대장(37)의 지휘아래 신재호(40), 노종백(37), 윤용수(35), 민진기(34), 한창복(27), 이대석(26), 박창우(22), 손병진대원(22) 등 10명이었는데 전년도에 탐세르쿠를 등정한 바 있는 노종백대원을 제외하곤 모두 첫 히말라야 원정이었다. 12월 1일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한 이 원정대의 이대석대원은 남릉을 경유 남서벽으로 붙었다. 그리고 12월 31일 새벽 4시 셀파 1명과 함께 3캠프를 출발, 오후 4시에 정상에 섬으로써 또 하나의 한국대 동계초등정 기록을 남겼다.
▲ 86년 1월 14일 쿰부히말라야 타우체(6,501m) 정상에 오른 허영호대원. 최초의 한일합동 히말라야 등반에서 동계초등정을 달성했다.
한편 이 해 겨울에는 사상 최초로 한일합동 히말라야 등반이 있어 관심을 끌었다. 쿰부히말라야에 있는 타우체(6,501m)봉을 목표로 한 이 원정대는 한국측에서 오인환(39·한국측 대장), 김태섭(42), 이봉훈(40), 허영호(31) 등 4명과 일본측에서 오니시 다모쓰대장(43) 외 5명이 참가했다.
타우체는 74년에 프랑스대가 초등정을 했으나 허가를 받지 않고 등반한 것이 밝혀져 5년간 입산금지 처분을 받았고 동계시즌에는 미등으로 남아 있었다. 산 이름은 티베트어로 ‘커다란 말’이란 뜻이다.
본래 한일 양측 대원은 함께 정상등정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먼저 등반에 나선 일본대의 가다모또 아쓰요시(26)가 해를 넘긴 1월 5일 남릉 5,100미터 지점에서 고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일본대원들은 철수해버리고 한국대원들만이 셀파들과 함께 등반을 속개해 1월 13일 6천미터 지점에 1캠프를 설치하고 다음날 등정에 성공했다. 등정자는 허영호대원과 앙 푸르바 셀파. 이들의 등정은 동계초등정으로 기록되었다.
한편 로왈링 지역에 위치한 카료룽(6,511m)에 도전한 은벽산악회팀은 이 산의 북동벽을 통하여 등정을 시도했지만 6,400미터 지점에서 간단히 돌아섰다. 대원은 84년 안나푸르나 동계원정대를 지휘했던 안창열(35)대장과 김영호(28), 박문석(28), 고흥렬대원(26) 등 4명으로만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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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3년 연속 히말라야에 13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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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을 맞은 한국산악계의 해외원정 양상은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히말라야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갔다. 전부 18개 팀이 해외의 고산을 찾았는데 히말라야로는 13개 팀이 나간 반면 알프스를 목표로 3개 팀, 그리고 알래스카 매킨리로 2개 팀이 진출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전부 13개 팀이 몰린 히말라야는 시즌별로 봄에 3개 팀, 여름에 1개 팀, 가을에 5개 팀, 겨울에 4개 팀이 등반활동을 펼쳤다.
이들 원정대들 중 봄과 가을시즌에 7천미터급 준봉을 택한 원정대들은 주로 지방의 단위산악회들이 꾸린 것으로 대부분 초행자들로 구성된 팀들이었다. 이것은 히말라야 원정이 지방으로 확산되어 그 저변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이에 비해 여름과 겨울의 원정대는 거의가 경험자들 중심으로 조직된 8천미터급 대규모 원정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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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혼성팀 강가푸르나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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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강가푸르나원정대
▲ 86년 4월 15일 2캠프 루트공작 중인 강가푸르나원정대. 동릉루트를 택한 이 원정대는 4월 18일과 20일 두차례에 걸쳐 4명의 대원을 정상에 올렸다.
86년 들어 가장 먼저 히말라야 등정보를 보내온 팀은 강가푸르나 원정대였다. 남녀 혼성으로 구성된 합동대가 두 차례에 걸쳐 남녀 각각 두 명씩 등정한 이색 기록이었다. 총 8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김기철대장(33)을 비롯하여 남난희(여·29), 정영희(여·26·이상 록파티산악회), 엄개성(31), 남용현(45), 민경영(24·이상 강릉대설산악회), 심건식(39·시민산악회), 석채언대원(25·양정산악회) 등 4개 산악회에서 참가했다.
강가푸르나는 네팔 중부 안나푸르나산맥 중앙부에 위치한 봉우리로 서쪽에 타르케 캉과 동쪽에 안나푸르나 3봉을 사이에 두고 솟아 있다. 이 산은 65년 독일대에 의해 초등된 이래 85년 가을까지 11개 팀이 도전하여 5개 팀이 정상에 섰다. 국내에서는 83년 겨울시즌에 이석우(피톤산악회)가 단신으로 도전했다가 북면 7,100미터에서 패퇴한 바 있었다.
3월 16일 78명의 포터와 함께 이 산의 남면 4,200미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원정대는 29일 빙탑지대에 1캠프(4,800m), 4월 10일 2캠프(5,600m), 14일에는 3캠프(6,300m), 그리고 17일에는 동릉을 올라 4캠프(6,800m) 설치를 완료했다. 22일 동안 4개의 캠프를 전진시키면서 정상공격 채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4월 18일에 엄개성, 남난희대원이 오전 7시 40분 정상을 향해 출발, 오후 1시 42분 등정에 성공했다. 이어서 20일에는 2차 공격조 석채언, 정영희대원이 정상에 섬으로써 국내 최초로 혼성 등정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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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등정된 다울라기리 2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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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악회 다울라기리 2봉원정대
한편 다울라기리 2봉에 도전한 한국대는 국내 히말라야 원정사의 첫 장을 장식한 산을 목표로 했다는 데서 관심을 끌었다. 62년 가을에 경희대산악회가 히말라야의 장을 열었으나 여러가지 여건상 정찰등반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이 산을 24년 만에 한국산악인의 이름으로 재도전에 나선 것이다.
이 산은 그후 10여 년 동안 처녀봉으로 남아 있었으나 71년 오스트리아팀이 동릉으로 초등정했다. 그 다음에 일본대가 78년과 79년에 등정했고 86년까지 어느 팀에게도 정상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대구 팔공산악회원들로만 구성된 한국대는 이돈용대장(36)과 김성규(26), 조명호(27), 김기태(24)대원 등 4명으로 짜여졌다. 우연히도 24년 전과 같은 대원 수였다. 이들은 먼저 산의 남쪽 마양디빙하 위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4월 11일부터 본격적인 등반을 개시했다. 19일에 1캠프(5,400m), 21일에 2캠프(6,000m), 27일에 3캠프(6,500m)가 구축되었고 5월 4일에는 마지막 캠프가 7,300미터 지점에 설치되면서 정상공격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눈사태가 발생, 밤 10시에 3캠프로 탈출해야만 했고 정상공격은 지연되었다. 5월 9일, 식량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음을 깨달은 이대장은 2차 정상공격 대원들만 남기고 포카라로 철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5월 12일 김성규대원과 두 명의 셀파는 세 번째 캠프를 떠나 12시간 30분 만에 고도 800미터를 극복하고 오후 4시 30분 드디어 정상에 섰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12시간 이상의 고소등반에 지친 김대원이 탈진한 몸을 이끌고 하산하다가 추락하고 만 것이다. 다울라기리 2봉 원정은 네 번째 등정이란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86년 봄시즌에 유일하게 등정에 실패한 팀은 서강대산악회의 가네쉬 2봉(7,111m) 원정대였다. 서강대 개교 25주년 기념으로 추진된 이 원정은 경비 마련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당초보다 대원을 줄여 3월 20일 장도에 올랐다. 참가자는 박종태대장(34)을 비롯 박춘상(29), 이태열(28), 김철한(24), 최억림(21), 이강오대원(21) 등 6명 이었다.
일명 랍상 카르보(Lapsang Karbo)라고도 불리는 이 봉은 대단한 험봉으로 79년에 와서야 일본대에게 북면루트로 정상을 허락했다. 그후에도 5개의 원정대가 등정을 시도했으나 84년 봄 프랑스대가 남서벽으로 두 번째 등정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서강대의 당초 목표는 79년 초등루트인 북면이었으나 이곳은 네팔정부가 중국과의 국경분쟁으로 84년 이후 입산을 제한해 부득이 서릉으로 루트를 바꿔야 했다. 85년 가을 가네쉬 1봉에 도전했던 대구 에이스산악회와 같은 경우였다.
원정대는 4월 10일 4,100미터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개시 15일에 1캠프(5,000m), 5월 3일에 2캠프(5,700m), 그리고 8일에는 3캠프(6,200m)를 설치하고 정상등정 태세를 갖추었다. 이어서 5월 9일 새벽 4시 40분 박춘상부대장과 최억림대원이 1명의 셀파와 함께 설릉으로 이어진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능선은 예상보다 길고 경사가 급해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모되었다. 급기야는 날이 어두워져 비박을 해야 했고 다음날 기력이 쇠잔해진 일행은 등정을 포기했다. 이들이 도달한 지점은 서릉 6,600미터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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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봉 K2에 세 대원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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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산악연맹 K2원정대
86년 여름, 한국산악계는 또하나의 8천미터급봉 등정을 성공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대한산악연맹(회장 오한구)이 파견한 K2원정대의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대원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8,611미터의 정상에 선 것이다. 이들 세 대원은 8월 3일 새벽 5시 다섯 번째 캠프(8,250m)를 출발하여 11시간 16분간의 등반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들은 등정 후 그날로 최종 캠프까지 귀환하지 못하고 8,400미터 지점에서 악몽같은 비박끝에 다음날 생환할 수 있었다.
▲ 86년 8월 3일 대한산악연맹 소속 장봉완(좌), 김창선(우), 장병호대원이 남동릉으로 K2 정상에 올랐다. 이 등정은 77년 고상돈의 에베레스트 등정에 버금가는 성과였다.
대산련이 77년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9년 만에 추진한 이 원정은 86년 아시안게임을 기념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국고지원과 한국방송공사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원정대는 3년 여에 걸친 준비끝에 전국에서 16명의 대원을 선발, 5월 31일 장도에 올랐다. 77년 에베레스트원정대원이었던 김병준대장(37)의 지휘아래 윤대표등반대장(34), 장봉완부대장(34), 정상모(32), 김현수(31), 김창선대원(26) 등 80년대 전반기의 히말라야 원정을 주도한 경험자들과 홍옥선(30), 배종원(33), 유재일(31), 박승기(30), 송정두(29), 권순호(29), 하관용(26), 장병호(25), 송영호(30), 정덕환대원(34.의사) 등 총 16명이 선발되었다. 여기에 한국방송공사에서 파견한 민상기(36), 임경수(34), 최덕신기자(29)가 합류해 전체 인원은 19명이나 되었다.
K2는 그 높이에서 뿐만 아니라 등반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 봉우리가 세계 두 번째 고봉으로 알려진 것은 1858년의 일이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이 산을 측량한 결과 8,611미터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이때까지 이 산은 K2(카라코룸 제 2봉이란 뜻)란 기호로 쓰여왔던 것인데 우연하게도 세계 2위의 고봉으로 밝혀지자 그대로 `케이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한국대가 도전하게 된 86년까지 이 산은 19개의 원정대가 들어와 10회의 등정기록을 냈다.
한국대가 도전한 86년에는 전부 13개 팀이 한꺼번에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국대는 6월 20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27일 1캠프(6,300m), 7월 3일 2캠프(6,900m), 7일 3캠프(7,500m)를 설치하는 빠른 전진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날씨가 악화되고 전진이 지연되어 8월 2일에야 최종 캠프(8,050m)를 설치하고 다음날 정상공격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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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에 7천미터급 지방원정대 대거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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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가을에는 7천미터급 산의 국내 초등을 겨냥한 5개의 원정대가 네팔히말라야로 몰렸다. 포항 향로산악회가 캉충체(7,678m)봉에 도전장을 낸 것을 비롯, 충남대산악회가 랑탕리룽(7,234m), 서울산악회가 강가푸르나-안나푸르나 3봉 종주, 한국산악회 대구지부에서 참랑(7,319m), 한국중공업산악회에서 팡(7,647m)봉을 목표로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이들 5개 원정대 중에서 강가-안나 3봉 종주에 도전한 서울산악회를 제외하면 모두가 지방원정대였다. 지방팀들의 히말라야 진출은 84년 이후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왔는데 86년에 와서는 서울의 원정대 수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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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충체에 초행자 3명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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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향로산악회 캉충체원정대
▲ 86년 10월, 캉충체(7,678m) 북서릉의 4캠프로 루트공작에 나선 이동연대장(위)과 문민식대원. 10월 9일 이동연, 박태규, 심재영대원이 정상에 올랐다.
마칼루 2봉이라고도 불리는 캉충체(7,678m)에 도전한 포항 향로산악회는 83년에 인도히말라야의 눈(7,135m)봉을 등정한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9명의 대원으로 원정대를 꾸렸다. 참가자는 이동연대장(29)을 비롯하여 문민식(28), 도재율(29), 김영범(29), 김춘배(28), 권오석(27), 박태규(27), 심재영(27), 권필화대원(여·23) 등 20대의 초행자로만 구성되었다.
캉충체(Kangchungtse)는 마칼루 주봉에서 북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위성봉으로 티베트 쪽으로 캉슝빙하, 남서쪽으로는 바룬빙하를 사이에 두고 있다. 54년 마칼루를 정찰차 온 프랑스대에 의해 마카루 라를 거쳐 남릉으로 초등정되었다. 산 이름은 작은 빙하란 뜻의 ‘캉슝’과 봉우리라는 뜻의 ‘체’의 합성어이다.
향로산악회팀은 9월 17일 베이스캠프(5,100m)를 건설하고 북서릉으로 등반을 개시, 이로부터 17일간 세 개의 캠프를 전진시켜 3캠프(7,080m)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10월 6일 1차 정상등정을 노렸으나 악천후로 7,400미터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10월 9일 재차 정상공격에 나선 이동연, 박태규, 심재영대원이 오후 1시 45분 한평 남짓한 조그마한 정상에 올랐다. 전원 초행자로 구성된 원정대가 이룬 최대 성과였다.
▲ 86충남대산악회 랑탕리룽(7,234m)원정대원들. 남서릉을 처음 공략한 이들은 10월 10일 5명의 대원이 한꺼번에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한편 충남대산악회에서 꾸린 랑탕리룽(7,234m) 원정대는 10월 10일 윤건중대장(33)과 윤계중(30), 송석희(28), 신창진(25), 전언식대원(22) 등 5명이 한꺼번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등정자 외에 홍봉식 단장, 차용석(31) ,박홍범대원(30) 등 전부 8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6천미터의 제 3캠프에서부터 알파인스타일로 등반, 6,800미터 지점에서 한 번의 비박을 하고 7천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치고 다음날 10시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랑탕리룽(Langtang Lirung)은 1949년 영국의 틸만 일행이 이 산을 최초로 답사한 이후 59년부터 78년까지 일본대가 6차례나 공략한 끝에 78년 10월 24일 리룽빙하를 통과해 동릉으로 초등정하는 데 성공한 산이다. 그후 한국팀이 도전한 86년까지 일본대가 80, 81년에 두 차례, 그리고 82년에 이태리팀이 등정을 추가해 모두 4번의 등정이 이루어졌고 82년 가을시즌부터 85년까지는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3개국 5개 팀에게 계속적인 패배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팀들이 등정한 곳은 남릉과 남동릉이었고 한국대가 입산허가를 받은 남서릉으로는 등정한 팀이 없었다.
86년 가을 이 산의 다섯 번째 등정과 남서릉 초등을 노리고 랑탕계곡으로 들어온 한국의 충남대팀은 9월 18일 베이스캠프(4,280m)를 건설하고 곧바로 등반에 들어갔다. 20일 4,850미터에 전진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남서릉을 향해 출발 23일 1캠프(5,100m), 27일 2캠프(5,500m), 10월 1일 3캠프(6,100m) 설치를 마쳤다. 여기서 5명의 대원과 1명의 셀파가 3일분의 식량을 지참하고 정상공격에 나서 2일 만에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이들은 전 등반과정을 비디오 카메라로 생생히 기록하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 86년 10월 10일 참랑정상에 올른 한산 대구지부팀 대원들, 좌로부터 허긍열, 김위영, 옹추셀파, 배효순대원.
한국산악회 대구지부가 창립 40주년 기념사업으로 파견한 참랑(7,319m)원정대도 랑탕리룽원정대와 같은 날짜인 10월 10일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김위영(31), 배효순(26), 허긍렬(22) 등 3명의 대원은 셀파 2명과 함께 이날 6,980미터의 남릉 비박 지점을 출발 5시간 만에 정상에 섰다. 이 원정대는 우종덕대장(31)을 비롯하여 정상등정자 세 대원과 최재료대원(25)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9월 18일 베이스캠프(4,830m)를 구축한 원정대는 곧바로 등반을 개시해 20일에 전진캠프(5,180m)를 설치하고 21일 1캠프(5,510m), 23일 2캠프(5,940m), 26일 3캠프(6,430m), 10월 5일 4캠프(6,650m) 설치를 마쳤다. 이어서 9일 4캠프를 출발한 세 대원은 하룻밤을 비박하면서 정상에 올랐다.
‘날개치는 큰 새’라는 뜻을 가진 참랑(Chamlang)은 쿰부히말라야에 위치한 산으로 62년에 일본대에 의해 초등된 이후 78년까지 입산이 금지되다가 78년에야 해금되었다. 그후 81년과 84년 영국 합동대가 도전했으나 각각 중앙봉과 동봉에 도달하는 데 그쳤다. 그러니까 한국대의 등정은 62년 초등 이후 두 번째 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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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3개 봉 도전한 두 팀 역부족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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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산악회 강가푸르나-안나푸르나3봉원정대
한국중공업 안나푸르나 팡봉원정대
한편, 국내 최초로 히말라야 2개 봉을 종주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강가푸르나와 안나 3봉에 도전했던 서울산악회팀은 뜻하지 않는 폭설로 이렇다 할 등반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왔다. 대원은 김정대장(33)을 비롯해서 한상원(29), 한익희(32), 원장연(30), 김학주(28), 조중호(26) 등 6명으로 이루어졌었다.
또한 안나푸르나 산군에서는 가장 등반이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는 팡(Fang)봉에 도전하여 주목을 받은 창원 한국중공업산악회팀도 루트의 어려움과 계속되는 악천후로 초반에 간단히 물러섰다. 한때 핑거봉이라고도 불렸던 팡봉은 영어로 어금니를 뜻한다. 이 산은 안나푸르나 주봉에서 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돌출되어 있는데 접근이 어려워 80년에야 오스트리아팀에 의해 남쪽루트로 초등정되었다. 김종덕대장(35)을 비롯해서 최영대, 김성모, 윤대원, 김원득, 신현욱대원 등 6명으로 구성된 한국대는 이 산을 동벽으로 등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5,450미터에서 맥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이로써 5개의 원정대가 활약했던 86년 가을시즌은 3개 봉 등정성과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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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에베레스트 동계원정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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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부터 시작된 한국대의 에베레스트에 대한 동계원정은 85년에 3개 팀이 모두 패퇴했는데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86년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통상루트인 남동릉과 어렵기로 유명한 남서벽에 각각 한국대가 출사표를 던졌다.
86년 겨울에 히말라야를 찾은 4개의 한국대 중에는 8천미터급 원정대가 3개 팀이나 되었다. 두 팀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그리고 한 팀은 다울라기리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결과는 세 팀 모두가 정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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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남동릉팀 사우스콜에서 단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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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계 에베레스트원정대
오인환대장(40)이 이끈 에베레스트 남동릉팀은 히말라야 등반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허영호대원(32)을 비롯하여 바인타브락과 알프스 3대 북벽을 등정한 바 있는 유한규(30), 그리고 허종행(24·동국대), 한숙(21·이대법정대), 남기탁(43·부산산악인), 이상만(23·서유여행사)대원 등 전부 7명으로 구성되었다. 오대장은 84년 겨울에 이미 고배를 마셔본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소수정예로 대원을 편성해 속전속결로 등반을 끝낸다는 전략을 세웠다. 셀파는 에베레스트를 세 번 등정한 순다레를 비롯해 6명을 고용했다.
11월 29일에 등반을 시작한 이들은 빠른 전진을 보여 12월 9일에는 허영호대원과 앙체링 셀파가 고소순응을 위해 사우스 콜(8,000m)까지 진출했다. 12일에는 유대원과 순다레 셀파가 사우스 콜까지 도달하고 하산했다. 그리고 17일부터 정상등정을 위한 본격등반에 들어갔으나 때마침 폭설이 내려 등반이 지연되었다. 12월 22일 허대원과 순다레 셀파는 다시 사우스 콜에 올라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동계의 강풍은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고생 끝에 밤 10시가 넘어서 2캠프(6,400m)로 내려왔다. 그동안 이들과 연락이 두절되자 실종된 것으로 판단, 2캠프를 철수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것으로 남동릉팀의 등반은 간단히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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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벽팀 8,300미터 지점까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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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니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편 남서벽에 도전한 크로니산악회팀은 12월 14일에야 베이스캠프에 들어왔다. 전년도에 남서벽 하단부에서 고배를 마신 바 있는 박영배대장(38)이 조직한 이 원정대는 남순철(35), 진설희(28), 엄홍길(26), 김상일대원(24) 등 전부 5명의 소수인원으로 꾸려졌다. 남서벽을 등반하기에는 아무래도 적은 수였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이들은 10명의 셀파를 고용했다.
12월 18일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극심한 일기변화와 강풍에 시달리면서 25일에야 남서벽이 시작되는 2캠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등반은 수월치 않아 해를 넘긴 87년 1월 20일에야 7,500미터 지점의 급경사면에 1동의 박스텐트를 설치했다. 그곳은 과거 원정대들이 4캠프를 설치한 곳으로 한국대에 의해 최초로 1개의 캠프가 단축된 것이다. 이어서 27일에는 약 8천미터 지점에 또 하나의 박스텐트를 가설하면서 네 번째 캠프가 완료되었다. 이제 걸리를 통과하여 록 밴드에 한 개의 캠프만 더 설치하면 곧바로 정상공격을 단행할 수 있게 되었다.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한 원정대는 다음날부터 남서벽 등반의 최대 관건인 걸리(Gully)에 고정로프를 설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3일 뒤인 1월 30일 드디어 엄홍길대원과 두 셀파가 낙석이 심한 걸리를 통과하여 록 밴드 8,300미터지점까지 고정로프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상공격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닥쳤다. 이날 4캠프에서 5캠프로 짐을 수송하던 셀파가 고정로프가 끊기면서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셀파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등반을 거부했다. 몇몇 셀파는 등반의사를 밝혔으나 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원정대로서는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했다. 남서벽대는 겨울시즌 허가기간을 전부 소모하면서 지구전을 펼쳤으나 8,300미터 록밴드까지 진출하는 성과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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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140미터 남기고 후퇴한 다울라기리 원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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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공고OB산악회 동계 다울라기리원정대
한편 다울라기리 동계등반에 나선 경남공고OB산악회는 11월 24일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1캠프(5,600m) 설치에 이어 북동릉에 2캠프(6,400m), 3캠프(7,000m)를 올렸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중간에 4캠프(7,400m)를 설치했다. 이어서 다음날 정상호대원과 셀파 1명이 공격에 나섰지만 정상을 불과 140여 미터 남긴 8,025미터 지점에서 심한 바람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미 손과 발이 얼어오고 있는 것을 느낀 두 사람은 정상을 불과 140미터 남겨두고 통한의 후퇴를 하게 되었다.
84년 푸타히운출리 등정을 성공으로 이끈 바 있는 조정술대장(41)을 비롯 정상호(32), 윤대효(31), 양학술(26), 김진관대원(26) 등 5명의 정예대원이 참가한 이 원정대는 지방에서 시도한 최초의 8천미터급 원정이었기에 주목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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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제 서봉에서 동계초등정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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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운고OB산악회 로부제 서봉동계원정대
86년 동계시즌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6천미터급 원정대였던 로부제 서봉(6150m)원정대는 해를 넘긴 87년 1월 1일에 출국해서 15일에 4,8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이어서 동릉으로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1캠프(5,300m)와 2캠프(5,800m)를 전진시킨 후 31일 박재홍, 최상현, 심상일대원과 셀파 2명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희봉대장(32)의 지휘아래 윤석영(34), 박재홍(33), 최상현(32), 심상일(21), 김일권대원(39) 등 6명으로 이루어진 이 원정대는 이 산의 제2등과 동시에 동계초등정이란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