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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울터미널
친구들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고건73 지리산 원정산행은 일주일 연기되었다.
오늘 6월4일 금요일 , 동서울터미널에서 24시 백무동행 심야버스를 타고 우리 지리산으로 떠난다. 영경이와 밤 10시에 만나 아직 준비하지 못한 식품을 구매하기로 했지만 영경이는 또 무슨 사연이 많은지 밤 11시나 되어야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11시쯤 만나기로 했던 천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될 수 있으면 빨리 와 달라고 했다. 지금은 대합실에 혼자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 사실 TV를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짐을 지키고 있다. 그 짐은 35리터 빨강색 배낭 하나와 이마트 쇼핑백 2개에 가득한 식품류들이다. 상봉이는 김치가 없으면 라면을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와이프가 김치와 오이소배기 2통을 싸주었다. 그 김치통과 코펠, 버너, 가스와 여벌의 등산복이 배낭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집에서 달아본 배낭무게는 대략 8kg. 보통 무게가 아니다. 쇼핑백 2개에는 친구들과 나누어 들고 갈 행동식 식품류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중 백미는 마늘먹인오겹살 700g 과 후레쉬칵테일새우 500g, 국내산 갑오징어 3마리이다. 오늘 낮 창동 이마트에서 사서 냉동을 해 가지고 왔다. 내일 장터목산장까지 가는 길에 지리산바람에 스스로 해동이 되면 저녁에 끓이고 굽고 해서 별 반짝이는 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줄 놈들이었다. 이에 걸맞게 상봉이가 양주한 병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그 생각을 하면 그 무거운 짐을 창동에서 동서울터미널까지 지고 온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0시30분쯤 천필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천필이 배낭이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것 내가 혼자 준비하고 옷가지만 가지고 오라 했는데 나눌 짐을 배낭에 다 넣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천필에게 짐을 맡기고 테크노마트 밑에 있는 롯데마트로 향했다. 내일 새벽 백무동에서 끓여 먹을 컵라면, 참치캔, 생수, 그리고 스포츠 음료와 이틀 동안 우리의 주식이 되어 줄 라면을 이곳에서 사야 한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내려가다 벽에 붙은 안내문을 유심히 보았다. 롯데마트 영업시간이 밤11시까지였다. 아이고 서둘러야한다.
11시가 넘어 영경이가 도착하고 11시 30분쯤 상봉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 배낭의 용량도 작지 않았지만 옷가지만 챙겨오라는 내 말을 흘려듣고 천필이처럼 배낭이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누어 들고 갈 짐들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할지 난감하다. 어떻게 쑤셔 넣고 안 들어가는 것들은 할 수 없이 쇼핑백채로 들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생의 업보처럼 짊어져야 할 무게는 각각 10kg 정도가 될 듯싶었다. 적지 않은 무게. 예전 혼자 지리산 종주 할 때는 배낭무게를 6kg 정도에 맞추어 갔었는데 설레임으로 가득할 이 자리에 걱정이 교차한다. 심야버스에 오르기 10분전, 상봉이는 터미널 밖으로 뛰어 나가 막걸리 3병을 사가지고 왔다. 엎친 데 덮친 무게를 어찌 감당하려는지. 그래 잘 사왔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보자.
평소 1대인 백무동행 심야버스가 오늘은 특별운행차량 포함 3대가 34번 승차홈 주변에 정차해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승객들. 다들 지리산 가는 우리의 동반자 들이다. 이 밤 이곳 젊음의 열기가 이글거리고 이내 걱정은 사라지고 만다. 잔잔한 설레임이 물결쳐 온다.
함양고속
24시 백무동행 심야고속버스가 출발을 한다. 우리는 21,22,23,24번 좌석에서 캔맥주를 얌전히 들이켜고 있다. 차가운 액체가 목젖을 적시고 내려가는 느낌이 시원하고 좋다. 우리 지금 지리산에 간다. 더 무엇을 바랄까. 버스는 중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거쳐 새벽 3시 40분 지리산 백무동에 도착할 것이다. 그사이 우리는 잠을 자야 한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을 생각하며 깊은 잠을 자자. 잠을 자자.
백무동
새벽 3시 40분 심야버스가 백무동에 도착했다. 이곳은 나의 지리산 사랑이 시작된 곳이다.
오래전 여름 가족들과 설악산 휴가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갑자기 대청봉을 오르고 싶었다. 집근처 북한산 몇 번 오른 것이 산 경력의 전부인 내가 그 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대청봉이 나를 부른 것이었을까. 손위 동서가 설악동까지 태워다 주어 이른 새벽부터 대청봉을 오르다 나는 천불동 계곡의 장관에 반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웅장하고 씩씩하고 아름다운 계곡이 있을까. 감동스러웠다. 대청봉을 오르고 바로 하산하여 그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그날 밤 콘도 PC방에서 천불동 계곡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 천불동계곡과 함께 지리산의 칠선계곡과 한라산의 탐라계곡이 우리나라의 삼대계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에서 어른거리는 천불동계곡의 영상은 상사병처럼 지리산의 칠선계곡으로 옮겨졌다. 칠선계곡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한동안 기다림이 있었고 다음해 여름 나는 칠선계곡을 찾아 무작정 이 백무동에 왔었다. 그 곳에서 천왕봉을 오르고 칠선계곡으로 하산할 계획. 그런데 백무동 국립공원 안내표지판을 보고 칠선계곡이 휴식년제가 적용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나는 남한 땅 최고 1915m 천왕봉을 오르는 것에 의미를 두고 그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지만 그 곳은 내가 지리산과 맺은 첫 인연, 나의 오랜 지리산 사랑이 시작된 곳이다. 우리들은 그 때의 나의 행적처럼 오늘 지리산을 오르게 될 것이다.
먼저 떠난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주차장 이 곳 저곳에 둘러 앉아 아침을 해 먹고 있었다. 그 시간의 백무동은 랜턴이 필요한 시간. 우리들도 머리에 해드랜턴을 켜고 아침 준비를 했다. ‘왕뚜껑’ 컵라면을 끓이고 김치가 가미된 참치캔을 열었다. 그 시간 배낭 속 김치통을 꺼내기는 어렵다. 상봉이를 위한 맞춤 식품인데 상봉이는 참치캔에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어둠 속 백무동. 밤하늘엔 별빛이 가득하고 기운 달도 밝았다. 계곡을 병풍처럼 두른 검은 색 산의 음영이 조금씩 조금씩 푸른빛으로 변해간다. 싱그러운 산 공기와 우렁찬 계곡물 소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비워 준다. 이제 시작이다. 새벽 5시. 우리 지금 지리산에 들어간다.
한신계곡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산장에 이르는 길은 거리 6.5km로 10시경 도착 목표이다. 지리산 종주가 서쪽 성삼재에서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길을 품으며 동쪽 천왕봉으로 흐른다면 우리는 북쪽 지리산의 한 지점에서 남쪽으로 산을 올라 종주길의 한 지점인 세석산장에서 만나게 된다. 아직도 주변이 어둡다. 계곡물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를 지나고 장터목 산장과 한신계곡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지름길은 장터목산장을 통해 오르는 길이다. 그 길은 천왕봉까지 짧게 끊어 오를 수 있을지 몰라도 계곡이 주는 시원함도 부족하고 오르는 길 내내 숲속 가파른 돌길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오르는 길은 천왕봉까지 조금 먼 길을 돌아서 오르는 길이지만 한신계곡의 시원함도 있고 풍광도 아름답다. 중요한 점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장인 세석산장을 들리고 세석산장에서 장터목산장까지 흐르는 능선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설악산을 아무리 많이 다녔어도 공룡능선을 가보지 않고는 설악에 들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 마찬가지로 세석산장과 장터목산장 가는 길을 걸어보지 않으면 지리산에 들었다 말 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한신계곡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숲속 계곡 길은 어두웠다.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완만한 오름 길이 이어진다. 배낭의 무게가 우리의 발걸음을 어지럽힌다. 바닥의 돌길도 우리의 속도를 자꾸 떨어뜨린다. 천필이는 보폭이 넓어 앞서서 오르고 그 뒤를 상봉이가 따른다. 나는 그 다음에서 뒤에 오는 영경이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영경이의 배낭에 담긴 햇반과 칵테일새우의 무게가 영경이를 자꾸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 길 우리밖엔 없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등산객들은 대부분 장터목산장으로 직행하는 길을 올랐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만 이 길을 오르고 있겠지만 출발시간이 다르고 산 능력이 다르니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지리산 첫 산행 때는 새벽어둠 속에서 이 길을 혼자 걸었다. 그 때는 사실 무서웠었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가내소폭포를 지나고 오층폭포를 지났다. 오르면 오를수록 계곡은 그 웅장함에 높이에서 떨어지는 고저차가 더해지고 큰 바위들을 넘고 돌고 튀며 부서지며 모이고 고이며 맴돌고 흩어지며 흘러 흘러내렸다. 우리는 그 계곡의 한쪽 면을 통해 오르면서 국립공원이 정성스레 설치한 운치 있는 다리를 건넜다. 그 때는 계곡 흐름축의 정중앙에서 계곡의 모든 것을 보았고 계곡은 거리낌 없이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었다. 숨김은 하나도 없었다. 다리를 건너면 우리는 계곡의 반대쪽 면을 통해 산을 오르게 된다. 한쪽 면과 반대쪽 면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서로 바뀌었다.
천필이도 사진을 부지런히 찍는다. 요즈음 본인의 개인 블로그를 만든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상봉이도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둘의 모습이 주로 내 사진기에 담겨졌다. 영경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오르며 수도 없이 영경이를 불러 보았다. 영경이에게 배당해준 짐의 무게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등산화도 말썽을 부리는 것 같았다.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아 오던 길을 조금 되돌아가 영경이를 불러보았다. 한 참을 지나서 나타난 영경이는 등산화대신 운동화를 갈아 신고 있었다. 도대체 신발도 여분으로 배낭에 넣어 오다니. 속세에 놓고 오지 못한 것들이 다 업보가 되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잠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전날 새벽 스페인하고 축구 평가전을 보느라 밤잠 설치고 심야버스에서도 잠도 자지 못했다 하니 그 배낭무게에 졸음까지 얹어 걷고 있는 형국이었다. 상봉이는 거기에 막걸리 세병을 더 짊어지고 오르고 있다. 좋아서 가지고 온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 내려오는 등산객이 있으면 주어 버렸으면 좋겠다. 셋이서 영경이를 기다리려고 조그만 철다리를 건너 계곡에 들어가 머리와 얼굴을 씻었다. 머리와 얼굴이 시원해진다. 배낭을 열어 개인별로 나누어준 행동식 꾸러미에서 참외와 찹쌀떡과 과자를 꺼내 먹었다. 지금은 배낭무게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다. 문득 어제 냉동을 해 가지고 온 오겹살과 갑오징어들이 상하지 않고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겹살은 내가 갑오징어는 천필이가 운반 담당자였다. 오겹살을 배낭에서 꺼내 보니 해동은 이미 되어있고 아직 상하지는 않았지만 장터목산장에서의 저녁시간까지 지금의 선도를 유지할지 걱정이 되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담가 놓아보자. 그렇다고 걱정이 가시지는 않지만. 천필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나 보다. 세석산장에 올라가 이들을 모두 끓여서 갈무리하자 제안을 한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그러는 사이 영경이가 올라왔다. 나는 영경이의 짐에서 칵테일새우 무게를 덜어주었다. 그리고 우리 셋이 먼저 세석산장에 올라 식품가공을 하고 있겠다 설명을 해주었다.
세석산장까지 남은 거리는 1.3km.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오름길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만하다 할 수 있었다.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면 이제 앞으로 남은 길은 고바위길이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고바위길이 이어진다. 계곡물 소리도 점점 줄어들고 바위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전형적인 산의 모습이다. 그 숲길에 다른 등산객들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다들 젊은 친구들. 우리 나이의 등산객은 없었다. 우리 장하지 않는가. 우리 발걸음이 그들을 따라 잡고 있다니. 이제 계곡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고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흘렀다. 그 소리의 빈자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대신했다. 우리를 따라 다니며 울었다. 적당한 거리가 지나고는 다른 파동의 지저귐으로 바뀌었다. 인적이 드문 곳 찾아줌이 반가워서 그런 것인지 새들의 세계에서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twitter를 주고 받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천필이의 체력이 대단하다. 이번 산행을 위해서 지난 5월8일 북한산종주훈련을 했지만 사실 이번 지리산 산행이 더 난이도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들어보니 그 공백기간 사당동에서 연주암까지 관악산 주종주 산행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한다. 산에 가까이 하려는 정성이 오늘의 천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봉이는 또 어떤가. 준공을 앞둔 현장 구석구석 펀치리스트를 지우며 붙은 근력일까. 힘들어 하지만 그래도 끈기있게 오르고 있다. 얼마를 올랐을까? 저 멀리 숲사이로 능선 같은 곳의 밝음이 흩날리듯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이젠 세석산장에서 내려오고 있는 등산객들도 만난다. 친구들을 위로하고자 그중 한 젊은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얼마나 남았어요?” “....” 순간 그 젊은 친구의 입에서 튀어 나올 숫자가 걱정이 되었다. 바로 그 젊은 친구의 말문을 막았다. “남은 숫자를 크게 말하지 마세요.” 주변에 있던 등산객들이 다 웃었다. 그래도 그런 대화가 오고 가니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천필이를 앞질러 내가 오르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젊은이들도 추월하며 올랐다. 사진을 찍어 주려면 먼저 올라야 했다.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고바위길이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어가며 한참을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이전 한라산 오를 때 진달래밭을 지나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탁트인 구릉지까지의 그 길었던 구간마냥 하염없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끝이 없을까? 오르며 느끼는 고통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즐기지는 못해도 적어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오를 때 마주치는 모든 것, 자연은 나와는 다른 남이 될 수밖에 없다. 흙, 바위, 나무, 꽃, 풀, 물소리, 바람, 빛, 새소리도 남일 뿐이고 다툼의 대상도 된다. 모든 것이 다 귀찮아 진다. 그런데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떻게 될까. 그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자연이 되는 것이다.
없었던 꽃이 피었다. 철쭉꽃이었다. 순간 오르며 다가가고 있는 곳이 ‘세석평전 細石平田’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우리가 왜 이곳으로 오르고 있는가. 왜 6월 초에 이곳을 찾아 오르고 있는가. 그것은 철쭉. 세석평전에 가득한 철쭉 군락지를 보기 위함이었다. 오르다 보니 나 혼자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문득 발아래 이름 모를 작은 꽃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어 그 가녀린 보라색 꽃을 사진기에 담았다.
세석평전細石平田
하늘은 옥빛 구름은 새털
영신봉 촛대봉이 감싸 안은
넓은 평전
한 섬 땀을 계곡에 뿌리고
먼 길 힘들게 힘들게 오른건
네 모습 보고 싶어서
소박하게 느낌을 말하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아
가슴은 콩닥 콩닥
설레임을 밀어내고
그냥 뱉은 말
눈이 부셔
구상나무 사이 사이
이곳 저곳 철쭉 철쭉
나를 기다리다 지친듯
창백하고 애절한 모습
그 연분홍 얼굴이 요염하지 않아
너를 사랑해
세상 모든 철쭉을 사랑하진 못해
오직 세석철쭉뿐
그 연분홍 얼굴이 너무 소박해
너를 사랑해
영신봉 밑자락에는 세석산장
오고 가는 모든 인연을 품고
올 때 마다 아름다워
내 정서의 밑바탕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샘물이 있다면
그것은 세석에서 솟을 것이다.
9시50분쯤 먼저 세석에 도착했다. 아름다웠다. 사실 세석의 철쭉은 본적이 없었다. 여름과 가을에만 이곳을 와 보았다. 어떤 철쭉일까. 새빨간 철쭉일까. 그러나 처음본 세석철쭉의 느낌은 화려하지 않았다. 요염하지도 않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미인처럼 희고 연한 분홍색 철쭉이 잔잔히 그 평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소박해서 좋았다. 순결한 여인을 보는 듯 좋았다. 천필과 상봉은 조금의 시차를 두고 세석에 도착했다. 영경이만 30여분 늦게 도착했다.
버너에 불을 켜고 코펠 두개에 물을 가득 담고 끓이기 시작했다. 요리사는 천필이었다. 먼저 갑오징어와 후레쉬칵테일 새우를 넣고 삶았다. 보랏빛이 감도는 힌색 오징어살과 주황빛이 감도는 힌색 새우살이 먹음직스럽게 코펠 뚜껑에 쏟아졌다. 주변에 있던 다른 등산객들이 부러운 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돼지 오겹살도 삶았다. 대부분 저녁에 먹을 수 있게 지퍼백에 갈무리하고 그중 일부를 상봉이가 짊어지고 온 막걸리와 함께 들었다. 환상적이었다. 막걸리를 힘들게 짊어지고 온 보람이 느껴진다. 막걸리 3병이 다 비워지고 라면4개를 끓여서 점심으로 들었다. 와이프가 싸준 김치 한통도 그 자리에서 비워졌다. 영경이가 오늘 세석에서 그냥 자자고 제안을 한다. 다른 친구들도 그랬으면 하는 표정들이다. 너무들 힘들었나보다. 사실 오늘 하루의 산행일정은 여유가 많았다. 오늘 남은 일정은 이곳에서 두시간 거리인 장터목산장까지만 가면 된다. 일단 산장에 들어가 2시간여 잠을 청하자 했다. 산장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우리가 산장에 들어가자 다른 등산객들이 따라 들어왔다. 딱딱한 침상 바닥이지만 피곤이 쏟아져 내리는 몸에게는 더 없이 편안했다.
연하선경煙霞仙境
오후 2시경 장터목산장을 향했다. 구간거리 3.4km, 2시간여 거리이다. 촛대봉을 오르며 뒤돌아보면 세석평전에 아담하게 자리한 세석산장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 지리산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장이다. 주변의 철쭉들과 어울려 울긋불긋 꽃대궐 같은 봄 풍광을 보여준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정말 아름답다.
촛대봉 정상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진행 방향으로 천왕봉이 우뚝 그 웅장한 몸체를 보여준다. 구름이 지나가다 걸릴 듯 정말 높은 봉우리이다. 반대방향으로는 멀리 노고단 반야봉 삼도봉 형제봉 그리고 벽소령과 지척의 영신봉의 지리산 종주길 여러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파노라믹한 장관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장터목산장 가는길.
내 기억에 종주 능선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그 느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지리산 10경중‘연하선경煙霞仙境’이 이능선길에 있다.
친구들은 어찌 느낄지 모르겠다.
배낭의 무게는 조금 줄어 있었다.
이제 그 능선길을 들어가 보자.
지리산에 처음 와 이 능선 길을 걸었을 때였다.
바람이 심하진 않았다.
산은 大靑이었고 비가 조금 내렸다.
산 밑 구름은 능선으로 오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주황색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이리 가고 저리 가도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섰던 능선 길.
그때가 없었으면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2000년 8월 나는 그렇게 능선에 있었다.
(2008년 9월 지리산 칠선계곡 탐방기에서)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와는 다른 계절, 다른 풍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많은 등산객들이 함께 이 길을 걷는다. 내리고 오르고 다시 내리고 오르고 그런 길들이 반복된다. 키 작은 나무들이 가까스로 햇빛을 피하게 해주는 오솔길이 이어지고 키 큰 구상나무가 그 길에 강렬한 악센트를 준다. 때론 기이하게 생긴 고사목의 가지들도 신비스런 느낌을 더해 준다. 철쭉꽃도 피어 있었다. 철지난 진달래도 눈에 들어온다. 재작년에 왔을 때는 나를 날려 보낼 듯 극성이던 바람도 오늘은 불지 않았다. 덥지는 않았다. 삼신봉을 지나고 연하봉을 오른다. 사방이 탁 트여 있는 내리고 오르는 능선길을 걷는다. 먼 산들은 서로 다른 색으로 겹겹이 겹쳐져 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들은 기암들을 병풍처럼 둘러 신비스럽게 빛나고 녹음도 햇빛을 받아 푸른빛을 눈부시게 반사시킨다. 가끔 지나가는 구름이 그 넓은 산자락에 빗질하듯 시원한 그늘을 몰고 다니다. 연하봉을 지났다. 천왕봉의 모습도 점점 더 가까워 온다.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수도 없이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이전에도 셔터를 눌렀을 이 능선길은 다시 보아도 항상 새롭다. 이정표의 연하봉煙霞峯 한자가 눈에 들어온다. ‘煙’자는 ‘연기’‘霞’자는 ‘논다’라는 뜻이다.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는 말이 있다.‘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는 굳어진 버릇.’ 한마디로 신선들이 놀며 보는 경치라는 뜻일 것이다.
장터목산장
4시30분경 장터목산장에 도착했다. 많은 등산객들이 장터에 사람 모이듯 북적였다. 이곳이 오늘 우리들이 일박할 산장이다. 그런데 우리는 산장 예약을 하지 못했다. 예약하려면 숙박예정일 15일전 아침 10시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인터넷 예약을 해야한다. 그런데 영경이와 내가 함께 시도 했는데 당첨이 되지 못했다. 당시 예약은 시작 후 4초 만에 종료되었다. 우리의 컴퓨터는 그 시간 먹통이 되어 예약화면이 뜨지 않았다. 전국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 접속한 결과였다. 천필과 상봉은 예약을 못한 사실을 지금 알게 되었다. 산장 배정은 6시부터 시작된다. 이제는 이전 경험에 의지해 국립공원직원들에게 불쌍하게 보여 복도 자리라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장 밑 음수대에서 머리에 물을 뿌리고 수건을 적셔 가볍게 몸을 닦았다. 그런대로 몸이 개운해진다. 취사장에서 식사를 준비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야외의 한 장소에 자리를 마련했다. 분홍색 바닥 시트를 깔고 그동안 배낭 속에서 숨도 못 쉬고 이 시간 기다렸을 모든 것 들을 꺼냈다. 미리 익혀둔 오겹살, 오징어와 새우, 오이소배기 한통, 햇반과 라면, 당근, 초고추장과 쌈장이 오늘 우리의 저녁이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그리움. 상봉이가 양주를 한 병 꺼냈다. 그것은 헤네시 꼬냑. 황금빛 액체가 너무도 아름답다. 황제도 부럽지 않은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산장배정 시간이다. 예약을 하고 온 사람들 먼저 배정을 하고 예약을 하고 오지 않은 사람들 빈자리는 공원규정에 의해 배정을 하게 된다. 예전의 기억으로는 50세 이상 고령자가 1순위였으나 이번에는 여자들에게 먼저 배정을 하고 남자 고령자순으로 배정을 했다. 내 앞에 줄을 선 68세와 65세 두 분이 먼저 배정을 받았다. 다음이 내 순서. 3개의 빈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 자리는 포기하고 우리 함께 있을 수 있는 복도자리를 배정받았다. 올 때 마다 느끼지만 공원직원들이 처음 산장 배정할 때는 예약자인지를 칼처럼 확인하고 조금 매정하게 보일 정도로 따지지만 나중에는 될 수 있으면 많은 등산객들을 잘 수 있게 배려를 해 주었다. 그 시간 산을 내려 갈 수도 없고 산장에서 쫓아내면 안전에도 문제가 생긴다. 될 수 있으면 다 재워주려고 한다. 지리산처럼 모두를 품어 주려 한다. 저녁 만찬도 마무리되고 배정받은 자리에 모포 한 장을 깔았다. 양쪽 침상 사이의 폭 좁은 복도가 우리의 자리이다. 머리는 한쪽 침상 밑에 조금 들이 밀어야 하고 뻗은 다리는 반대쪽 침상 밑에 조금 집어넣어야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키가 큰 천필과 상봉이도 그런대로 만족하는 표정이다. 내일은 새벽 3시15분에 일어나야 한다. 천왕봉일출 때문이다. 배낭은 놔두고 해드랜턴과 물통등 필요한 물품만 미리 챙겨서 몸만 조용히 빠져 나와야 한다. 다들 착하고 귀여운 학생들처럼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있다.
잠시 산장을 빠져 나왔다. 해는 지고 어두운데 산장 바깥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 침낭을 준비해서 온 많은 등산객들이 침낭 위에 색색의 일인용 천막시트를 펼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다. 거리낌 없고 매이지 않은 산행. 젊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들이 진정한 산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었다. 하늘에는 구름도 보이지만 별도 보인다. 으악. 우리는 산장에서 잘 수 있어. 들어가자. 보금자리로.
첫댓글 우와! 아름다운 지리산,아름다운 산행기, 읽는 동안 나도 행복했다.고맙고,같이 못가서 아쉽고. 같이 갔더라면 체력상 민폐가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럽다,그 용기들!!!!
힘들었지만 지리산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 이번 19,20일 고건 고건축기행 함께 가보자.
이제야 들어와 잘 보고 가네~~4친구들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구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