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선교의 대부 조지송 목사 소천 오늘(1월 22일) 오전 8시 22분경에 노동자들의 아버지요, ‘바보들의 행진’ 을 이끌어 주셨던, 사랑 많으신 조지송 목사님(1933년 8월 28일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능산리 137번지에서 출생) 께서 86세를 일기로 영원한 본향을 향해 먼 길을 떠나셨다는 소식이다. |   | | * 지난해 11월 조 목사님과 명노선 목사(전 실무자) |
조 목사는 영등포노회 소속으로 영등포교회 전도사 시절에 영등포교회 청년 박길순 청년과 1955년 결혼하셨다. 총회 전도부와 영등포선선에서 일하시고 은퇴하신 분이다. 조기 은퇴는 건강 이상으로 청주 옥화대로 이주하셔서 농사도 지으시고 사시다가 10여년전 년노하셔서 자녀들이 있는 판교로 오셔서 노후를 보내고 계셨다. 그러나 2년전 알츠하이머 병이 악화되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침대와 집안 생활만 하셨다. 그러나 정신만은 뚜렷하여 촛불집회에 대한 관심과 이후 구페의 청산과 새로운 정부에 대한 희망를 갖고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기를 염원하셨다. 영등포선선과 성문밖교회 교인줄은 매년 2회 이상 조 목사님을 찾아 뵈었고 가까운 지인들의 방문을 받으셨지만 명이 다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가족으로는 장남 성철은 미국에 따님인 향숙은 인근예서 조목사님 부부를 돌보아 왔다. 이후 장례절차는 영등포산선이 주관하여 사회와 노동 종교계로 구성하여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장은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7호실인데 오늘 22일(화) 오후 8시에 '일하는 예수회' 주관 추모예배가 있으며 입관은 1월 23일(수) 낮 12시에 영안실에서 장례는 1월 24일(목) 오전 10시에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서 한후 파주 동화 경모공원으로 발인하여 12시 30분에 하관한다. |   | | * 1977년 뉴욕 타임즈에 소개된 조지송 목사 기사 | 조지송 목사느 누구인가?조지송 목사는 1961년 서울 장신 야간과 경기대를 졸업하시고, 1963년에 산업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후 20년간을 산업선교에 헌신했는 데 건강악화로 조기 은퇴를 하셨다. 1964년 2월에는 태백의 탄광, 철광, 섬유공장과 중공업 공장에서 노동체험을 직접 하기도 했다.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 URM의 주선으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학의 도서관에서 산업선교 관련자료와 연구의 기회를 얻었고 세계교회 현장을 방문하시기도 하였다. 아시사교회협의회(CCA)의 URM의 일원으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이름을 알려신 분이다. 이런 기회로 목회자들에 비하여 사회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비교적 이르게 개화가 되셨고 국제적인 네트웍을 갖으시고 활동을 하셨다. 한국목사들 중에 서양 사람이면 사족을 못쓰고 딸라 몇푼 받으려고 안달이 난 분들과 달리 관심있는 외국의 기관이나 교회가 준다는 돈도 마다한 분이다.
그러나 2010년 4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주화운동 사건, 인물 기록수집사업의 일환 중 하나인 평전 공모에 목사로 써는 유일하게 선정되셨다. 이 원고 집필은 예장 선업선교 훈련을 받고 민중목회를 하던 시인인 서덕석 목사(열린교회)가 집필했다. |   | | * 80회 생신에 영등포선선에서 인명진 목사등 |
“우리 바보들은 행진은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웃사랑을 배우고, 희생과 봉사를 배우고,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며,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실천적으로 배우고, 참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은 산업선교 실무자들의 목회현장이고 노동자 구원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평소 조 목사는 생일이나 가족의 애경사나 교회가 목회자에게 대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을 싫어하신 분이다. 서울로 오셔서도 외부 모임이나 방문을 꺼려하셨는 데 뵙고 싶어하는 분들의 열화로 지난 2012년 영등포선선에서 80회 생신을 맞아서 한 행사가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이었다. |   | | * 산선 1세대인 조지송, 조승혁, 조화순 목사등의 구술을 기초로 | 조지송 목사 평전에 소개된 일부 내용1950년 6월 25일 새벽, 남북 전쟁이 일어난 그 해 12월 5일, 나는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 길을 떠나면서 “3, 4일만 피해 있다가 돌아오겠다” 고 어머니와 약속했지만,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1955년 5월 7일,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두 자녀들도 각각 결혼하여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그러니까 사위와 며느리를 합해서 8명의 가족이 된 셈이다. 손자 하나는 서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1963년 11월 21일, 1954년, 신학교에 입학했었지만 경제 사정으로 휴학을 했다가 몇 년 후에 복학했기 때문에 7년이 지난 1961년에야 졸업했으며, 63년 11월 21일에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산업전도 (Industrial Evangelism) 목사가 되었다. 1961년, 8월, 나는 신학교 3학년 시절에 산업선교(UIM) 일을 시작했으며, 시작과 동시에 강원도 석탄이나 철광 등 여러 공장에서 노동체험을 했고 산업사회와 경제, 그리고 노동문제에 대하여 연구하는 과정을 3년간 이수했다. 1964년 2월 14일은 영등포 산업선교(Yong Dong Po UIM) 취임예배를 드린 날이다. 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땀과 눈물로 일했다. 지금에 와서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면 노동자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온 수많은 날들이 벅찬 감격이며 보람이다. 이 산업선교 운동에 참여했던 국내외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1985년 3월 25일, 나는 영등포를 떠나 충청도 옥화리(Ok Wha Ri) 농촌으로 이사 갔다. 나는 소규모 농사일을 하며 농민들과 이웃 해 살면서 땀 흘려 일하며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살고 있는 농민들의 숭고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2009년 6월26일, 나는 서울 근방인 성남시 판교(Pankyo) 신 도시로 이사 했다. 현대식 첨단 기술로 건축한 아파트라서 일상생활에 불편은 없지만 가까운 이웃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그러나 TV도 보고 음악도 감상하고 가까이 사는 자식들도 만나고 멀리 사는 자식과 전화대화도 나누고 옛 친구들과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며 살련다. |   | | * 1965년 산선지도자들과 함께한 조지송 목사(왼쪽 뒤로 3번째)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모 조지송 평진조지송 목사의 전기는 집필이 끝났지만 조지송 목사가 생전에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앞으로 소개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전도목사로 총회 전도부 간사를 거쳐서 영등포 지구 산업전도를 위하여 파송받아 공장전도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의 영등포산업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조 목사는 6.25 전쟁시 미군 부대에 근무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미군 군목의 주선 한때 유학주선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배운 영어로 당시 세계교회가 주도하는 중요한 선교적인 흐름에 합류할 수 있었다.
|   | | * 조지송 목사가 인명진 목사, 원풍모방 방용석 지부장(평민당 전 의원)과 노동자들 | 조지송 목사 연혁 1933년 8월 28일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능산리 137번지에서 출생 1945년 일본 소학교 3학년 중퇴 공산치하의 인민학교 3학년에 편입 1947년 인민학교 졸업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8월 부친 작고 12월 5일 남쪽으로 피난, 어머니와 7남매가 뿔뿔이 헤어짐 1951년 미군부대 노무자로 시작, 군목실에서 일하게 됨 (미 8사단 865고사포대대, 김포 비행장 방위부대) 1955년 박길순과 결혼하여 1남 1여를 둠, 1958년 미 24사단 제6전차대대(문산) 군목실에 근무 중 군목의 장학금 지원으로 장로교 총회 신학교에 진학 1961년 3월 장로교 총회 신학교 졸업(야간) 1961년 2월 경기대학(초급) 국문학과 졸업(주간) 1961년 12월 장로회신학대학교(별과) 졸업 1961년 8월 산업전도와 만남 제1회 산업전도사 연구회에 참가 1962년 탄광, 철광, 제철, 방직공장에서 노동체험 1962년 총회 산업전도 연구원으로 일함(인턴), 산업실태, 경제문제, 행정에 관해 연구 1963년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 받음, 신학생과 기독교 학생 훈련을 담당 노동체험과 산업문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 1964년 영등포산업전도 목사로 부름 받음 (총회전도부, 영등포노회 산업전도위원회, 영락교회전도부 지원) 1965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노동교육 과정 이수 1966년 아시아 노동교육원(Asian Labor Education Center, University of the Philippine) 노동조합 간부교육 수료 1968년 아시아 산업선교 협의회 참가(태국)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1968년 대만(Committee of Church and Society)과 일본(Occupational Evangelism Committee) 산업선교 견학 1970년 미국 시카고 지역사회 조직 활동 본부 견학 (Alinsky's Industrial Area Foundation) 미국 시카고 루즈벨트 대학 노동조합 간부교육 과정 이수 (Labor Education Division, University of Roosevelt) 미국 시카고 도시문제연구소 연구 과정 이수 (Chicago Urban Training Center for Christian Mission) 미국 전국에 산재한 지역사회 주민조직 단체들 (Community Organization) 견학 미국 시카고 오스틴지역 주민조직운동 (Organization for Better Austin) 참가 미국 장로교 산업문제연구원 아시아 노동문제 Seminar 참가 (Presbyterian Institute of Industrial Relation)1971년 미국 농민노동조합운동(United Farm Workers) 참가 1971년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ridrich Ebert Stiftung)의 초청으로 독일 노동운동 견학 독일 개신교 원조기관(EZE : Evangelische Entwicklungshife)을 방문하여 영등포산업선교 회관 건립 협의 및 결정, 프랑스 파리 빈민가 주민조직운동 견학 1975년 장로교총회 산업선교 훈련 담당 1978년 영등포산업선교 회관 건축 1980년 호주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대회 World Council of Churches) 참가, 호주 세계교회협의회 산업선교 자문위원회의 참가 (World Council of Churches-Urban Rural Mission) 1982년 사회선교협의회 훈련 담당 1983년 영등포산업선교회 사임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로 이주하여 “하나의 집” 운영 1990년 아시아 산업선교 정책협의회 참가(대만), (Christian Conference of Asia-Urban Mission) 2009년 경기도 성남시 판교로 이주 2019년 1월 22일 오전 8시 22분 자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