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7월 19일 서소문 CBMC
“사랑 안에 뿌리박힐 때... ”
본문:
[개역] 엡 3장 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개역] 엡 3장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And I pray that you, being rooted and established in love,
[개역] 엡 3장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may have power,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개역] 엡 3장 19절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개역] 엡 3장 20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Now to him who is able to do immeasurably more than all we ask or imagine, according to his power that is at work within us,
[개역] 엡 3장 21절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서론 :
먼저 보잘 것 없는 저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하는 자리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서소문 CBMC에 몸을 담은지 수 개월이 지났음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성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제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에 서게 하시니 사실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CBMC임원들이 저를 설교자로 불러주실 때 그 부름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고 섰습니다.
사실상 말씀은 그 자체로 힘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선포하는 자의 어떠함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될 것을 믿으며 인간 김석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은혜를 누리는 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며칠 전 한 신문을 통해 한국의 종교단체의 통계 자료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기독교는 1200만 성도라고 하였던 과거와는 달리 870만 성도로 전년도 대비 15만명 정도가 줄었고 천주교는 250만 규모에서 500만명이 넘는 성도로 성장했다는 통계였습니다. 이 통계가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도 기독교는 천주교보다 열성적이고 뛰어나다, 천주교는 역시 우리의 상대가 안된다, 아니면 기독교가 이렇게 교세가 줄고 있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던지, 어쩌면 이 숫자는 기독교의 미래가 더 심각함을 암시하고 있다든지...등등...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숫자를 통해서 아주 단순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왜 기독교는 이렇게 후퇴하고 있을까요? 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곳저곳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게 되나요?
그것은 기독교가 이 세상에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했던 것의 결과요, 그리스도인이 맛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밟힐 뿐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 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맛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토록 이 세상에 주고 싶어 했던 것, 그래서 그 분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기까지 하셨던 그것..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를 찾는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신구약을 합쳐서 824번 나오는 단어...거룩(685)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요한1서3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제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안에서 지체된 CBMC회원들과 이 말씀을 나누며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우리의 첫 사랑이 회복되고 깊이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 :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14절에서 시작되어 19절까지 이르는 바울의 기도와 20절과 21절에서 기도 끝에 의례적으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입니다. 그 첫 번째 단락인 16절에서 19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개의 기도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 16절에서 19절에 이르는 바울의 기도는 두 가지입니다. NIV성경으로 보면 pray 가 두 번 나옵니다.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첫째는 16절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강건하게 하시기를.....둘째는 18절에서 너희가 능력을 갖게 되기를....입니다.
오늘 바울의 이 두 가지 기도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운행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은혜주시길 기도합니다.
1. 16절 :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16절은 자세히 살펴보면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고”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기도의 중심입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거의 대부분 우리 내부에 "inner being" 내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다 몸 짱이다. 명품이다....모두들 난리입니다.,사실 속사람이 더 중요한데 사람들은 겉사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속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이 강건해야 한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는 이는 누구냐? 바로 성령님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우리들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탐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생각이다” 라는데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결국 우리의 생각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떠함을 알면 그 사람의 어떠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45 [개역]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성경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말이 따뜻하면 우리의 생각도 마음도 따듯한 것이며, 우리의 말이 차가우면 우리의 생각도 마음도 차가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속사람 즉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이 강건해 지길 소망합니다.
둘째가 영광의 풍성을 따라..즉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되 -얼마나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강건케 됨이 그 분의 영광의 풍성한 분량 이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 영광은 어떠합니까?
영광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하였을 때 3개월의 고된 훈련 과정(피멍든 발바닥, 비오는 날의 올챙이 포복, 사격장 사건)을 마치고 임관식을 할 때입니다. 마지막 날 부모님들이 오시고 그 앞에서 열병을 하여 각자의 자리로 오면 부모님들이 나와서 직접 계급장을 어깨에 달아 줍니다. 그때의 그 감동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철거민 집성촌의 코흘리개 문제아가 어느덧 장성하여 대한민국의 어엿한 장교가 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올림픽 영웅들 앞에서, 특별히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수여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 모두는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그들의 고생과 노력, 땀과 눈물,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승리로 나아가는 선수들의 모습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와 그 분의 영광을 다시 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은 조금 전에 열거한 어떤 영광도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너무나 풍성합니다. 너무나 큽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영광이요. 구름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시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 아버지 보좌의 우편에 앉게 되는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풍성함 이상으로 강건케 될 것이라는 것이 16절의 첫 부분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통한 능력(power)으로... -어떻게의 문제-입니다.
우리를 강건케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이며 그 성령님의 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지칠 때에 위로자 되시는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그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강건해 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성령,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 하여 간구 하시는 성령,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강건해 집니다.
어제 한 모임에서 한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갑자기 꼬여서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하나님이 뱀 여러마리를 목졸라 죽이는 꿈을 꾸게 하셨고. 그로인해 모든 두려움을 떨치게 되었는데. 그날 모든 소송이 취하되고 오히려 소송을 했던 사람이 자신이 자문을 구하던 동자승에게서 당신은 지금 신과 싸우고 있으니 빨리 소송을 취하하라고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말씀하십니다.
[개역] 엡 3장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사실 17절의 앞부분은 16절에 붙어 있는 구절입니다. 즉 바울이 그 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것을 기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거주하실 성전이 든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늘 넘어 질듯 한다면 그 속에 누가 맘 편히 거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속사람이 늘 비실비실 한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주하시겠습니까?
2. 17절, 18절, 19절입니다.
[개역] 엡 3장 17,18절,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And I pray that you, being rooted and established in love, may have power, together with all the saints, 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 and to know this love that surpasses knowledge--that you may be filled to the measure of all the fullness of God.
두 번째 기도의 주체는 이제 우리들입니다.
17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기도 한다-사랑안에 뿌리를 박은 너희가 힘을 갖기를...may have power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17절 하반절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굳어져서 튼튼히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떤 힘(붙잡고, 알고)을 갖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분량까지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홍수 때문에 온 나라가 어수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또 열매를 잘 맺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사랑이라는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때 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사랑의 어떠함을 붙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 박힐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17절에서 19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깨닫는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더럽고 추하고 어두운 땅에 직접 찾아 오신 사랑의 높이를...그분이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였던 깊이를..그 분이 온 인류를 품었던 그 사랑의 넓이를...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고 계시는 그분의 사랑의 길이를....감히 우리가 쉽게 따라 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까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다고 말하는 우리 자신은 예수님이 그토록 관심을 가지셨던 가난한자와 핍박 받는자, 고아와 과부들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사실상 구로동의 냄새나는 쪽방들이 있는 뒷골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육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망가져 가는지 알지 못하며, 서울역에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그 노숙자들이 한 끼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주변의 고아원과 양로원의 아무런 능력없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시절을 좇아 아주 작은 금전을 내 놓으며,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맙니다.
이런 우리가...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우리가 목에 달고 다니는 알량한 십자가 뱃지는 우리를 더욱 혐오스럽게 보이도록 만드는 표징은 아닌지요?...우리가 차량 뒤에 붙이고 다니는 익투스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더욱 욕되게 하는 상징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전 오늘 하나님이 이일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치 않고 인내하고 계심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박히고, 터가 굳어질 때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둘째는 To know(알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지식에 넘치는 이란 표현은 지식을 초월하는, 지식을 뛰어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 지식을 초월한 사랑에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6.25와 어머니)
1950년 6.25 전투가 한창일 때 피난길에 나선 모녀가 있었다. 그들은 피난길에서 겨울을 맞았고 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새 인민군이 그들을 앞서 나가게 되어 다리 밑에 숨어야만 했다. 인민군의 대열이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대열은 끝이 없었고, 모녀는 다리 밑에서 밤을 새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바람은 세지고 기온은 급강하하였다. 이대로 가면 아이도 엄마도 모두 얼어죽을 판이었다. 결국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서 아이를 감싸주고는 자신의 온몸으로 아이를 끌어안아서 그 밤을 새었다. 결국 어머니는 그 밤에 얼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연합군의 반격공세로 다시 전선은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한 미군부대의 장교가 다리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만 다리 위에서 휘발유가 떨어져 차가 서게 되었다. 미군장교는 휘발유를 보충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잠시 기다리다가 다리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그는 깜짝 놀랐다.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얼어 죽어있고, 그 품에서 한 아이가 힘없이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군장교는 급하게 아이를 엄마의 품에서 꺼내어 차로 데려갔고, 어머니는 그곳에 묻어 주었다. 그 후 어린아이는 미군장교의 집에서 장성하였고 나중에 그녀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양아버지인 미군 장교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기를 원했고 한국을 찾은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울며 울며, 자신의 옷을 벗어 어머니의 무덤 위에 올려놓으며 “어머니 추우셨죠?” 하며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이토록 처절하게 아름다운 것이지요.
지식으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머니이니까...자식에겐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이지? 이렇게 해서는 절대로 옷을 벗을 수 없습니다.
참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의 이야기 앞에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러한 표현으로도 표현 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을 아는 것도 바로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터가 굳어질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은지, 얕은지는 그 나무가 호된 바람을 맞을때, 그리고 열매를 맺는 계절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 사랑에 대하여 깨닫고 있는지는, 호된 시련이 닥치고, 열매를 요구하는 계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9절 하반절은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 모든 결과로, 드디어 하나님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지식에 초월하는 사랑,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아는 사랑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충만한 분량이 어디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이 땅에는 사랑밖에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어둡고 힘들고 불확실하고, 거칠은 이 땅에 우리가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알고 붙잡고 그 사랑 안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삶을 사는 것”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는 자를 위해 용서를 구할 때 이 사랑의 넓이는 나타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을때 이 사랑의 길이는 나타납니다,
얼어 죽어 가는 딸을 위해 어머니가 자신의 옷을 벗어 줄때 이사랑의 깊이는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질때 이 사랑의 높이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위해 한 걸음을 떼어 놓을때 우리의 사랑은 뿌리를 좀더 깊이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날 터가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 안에 흠뻑 잠겨서,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터가 굳어질 때까지 인내하며 함께 이길 가길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