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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乙巳義兵의 개요
러일전쟁․한일의정서․을사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이 강화되면서 1904년 일련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1907년 정미의병 이전까지의 의병을 말한다. 을사의병은 을미의병시에 봉기하였던 의병장들이 재봉기하기도 하였으며 당시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생들이 참여하였다.지역적으로는 강원․경기․충남․경북․전라도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당수의 포수와 포군등이 가세하고 전투능력을 위한 노력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 정미의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을사의병은 유림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비록 양반유생이기는 하지만 위정척사적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구하려는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거병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을사의병은 화적이나 활빈당과 같은 계층과도 연대하였으며 신돌석 의병진과 같이 평민의병이 독자적으로 봉기하기도 하였다. 홍주의병의 민종식, 태인의병의 최익현․임병찬, 산남의진의 정환직 등 관리출신 의병장들이 활약도 두드러졌다. 이러한 성격으로 볼때 을사의병단계에 들어서면 을미의병단계까지 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던 지역성․학통성․혈연성이 극복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을사의병은 단절없이 바로 정미의병으로 발전하여 1908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2. 의병 봉기원인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한일협약 등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준식민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남으로서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고 우리 민족은 분연(憤然)히 일어났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썼고,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다. 우리 스스로 힘을 키우자는 자강운동과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투사들도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 등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고,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3.의병부대의 활동
을사의병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경기․강원도의 원용팔․정운경․김하규․박장호․최도환․이범주․박석여의병부대, 경상도의 김도현․유시연․신돌석의병과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의병, 전라도의 최익현․백낙구․고광순의병등이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1)원용팔부대
원용팔은 1905년 8월중순경 박수창등과 원주에서 거병하였다. 원용팔의병부대는 포수들이 중심이 되어 편성되어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양․영춘․영월․정선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는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원용팔이 체포되고 활동이 해체되었다.
원용팔 의병부대가 해체된 후 단양지역에서는 정운경을 중심으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그러나 정운경의 의병부대는 3․4백명의 의병을 모으기는 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전에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이밖에 김하규(삼척)․박장호(홍천)․최도환(양구)․이범주(양평․여주)․박석여(죽산․안성)가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 홍주의병
을사의병 중 대표적인 의병진은 홍주의병이었다. 이조참판을 역임한 민종식과 안병찬․박창로․이세영 등은 1906년 3월 광수에서 1차 봉기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5월에 홍산에서 다시 거병한 후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한 이후에 각 지역의 유생등이 가담하면서 의병의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잔혹한 진압이 시작되었으며 홍주의병부대는 성이 함락될 때까지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무장한 일본군과 분전하면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하고 성이 함락되었다.
3)최익현의병부대
최익현은 전북 태인에서 그의 제자들과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유생 고석진과 함께 거병하였다. 최익현은 정읍․순창․곡성을 거쳐 북상하던 중 전주․남원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교전을 회피하였으나 진위대의 공격으로 의병은 흩어지고 최익현과 임병찬․고석진 등이 체포됨으로서 의병은 해체되었다. 체포된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에 유배되고 최익현이 순국함으로서 국민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켰으며 이후의 의병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최익현의 거병이후 백낙구(광양)․양한규(남원)․고광순(담양)이 의진을 편성하고 구국항전의 기치를 올렸었다.
4)신돌석의병부대
신돌석은 1906년 음력 3월경에 영해에서 거병한 뒤 동해안 일대와 경상북도와 강원도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신돌석은 원래 평민출신으로 활빈당이나 농민들을 규합하여 농민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신돌석은 산남의진과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으며 유격전술이 뛰어나고 규율이 엄격하여 많은 전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정미의병때까지 계속 활동한 부대이기도 하다.
5) 山南義陣
산남의진은 정환직․정용기부자를 중심으로 경북남동부지역에서 활동하였다.산남의진은 중추원의관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의병봉기의 밀지를 받고 그의 아들 정용기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정용기의 석방을 계기로 의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의병등 인근의 의병부대들과 연합작전을 벌이기도 하고 혹은 독자적으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그러나 일본군의 야음을 틈탄 공격을 받아 의진은 괴멸되고 정용기이하 참모진이 전사하였다. 그후 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을 중심으로 1908년까지 경북일대에서 활동하였다.
6) 유시연의병부대
유시연은 진보․영덕등지에서 거병하여 활동하였다. 유시연은 을미의병당시에 안동의병의 선봉장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1906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유시연의진은 신돌석․이강년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이밖에 영양지역에서 을미의병때 활동했던 김도현이 거병하였으나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동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김도현이 체포됨으러서 무산되었다.
4. 山南義陣의 結成
산남이라 함은 조령(문경새재) 이남의 영남지방을 일컫는 말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기개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도 하였다. 당시 산남도찰사 정환직은 평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몸으로 황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밀지와 군자금 5만량을 받은데서 애국충정이 시작되었다.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써, 정환직으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진 ‘짐망’(朕望: 짐은 바란다.) 두 자의 비밀 조칙을 내렸다. 이에 정환직은 을사조약 직후 12월5일 바로 관직을 사퇴하고 아들 정용기와 함께 계획을 수립하여 먼저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山南義陣이 조직되었다. 정환직, 정용기, 최세윤으로 이어진 산남의진은 신돌석 부대와 함께 구 한말 제2단계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의진으로 포항, 영천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고 나라를 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만민공동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며 애국 활동을 하던 아들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 1862-1907)는 대장이 되고, 동엄(東嚴)은 총수가 되어 각지에 격문을 돌려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영천, 포항, 청송을 중심으로 맹활약을 한 ‘산남의진’ 의병이 1906년 3월에 일어난 것이다. 영천 충효리의 본진을 중심으로 경북 동남지역 원근의 각 지역 산악을 근거지로 하는 분진이 세워졌다. 경북 북부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남북에서 활약한 산남의진은 강원도로 북상하고 이어 서울로 진공해 왜적을 몰아내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였다. 의진은 지방유생, 농민, 전직관료, 전직군인, 포수, 광부 등 양반과 상민 신분의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하였다.
짐망 화천지수 전세비
영천 자양면 충효리 충효재
5. 산남의진의 활약상
산남의진은 세계최고 수준의 연발총을 가진 왜병에 맞서서 화승총과 죽창과 단검과 맨주먹으로 기록상 57회의 치열한 접전을 했다. 청하, 흥해 읍성을 3번이나 점령하고, 장기, 청송, 의성, 신령 읍성을 불 지르고 무기를 탈취했다. 청송 신성리, 건천, 자양, 북안, 신광, 기북, 주사산, 비학산, 남동대산, 북동대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청송 월매, 두마, 상하옥, 영양, 영덕, 일월산, 청도 운문산 등지에서 선전하였다. 영덕 유암, 청송 고아실, 팔공산 접전에서는 많은 희생이 났으며, 광천, 청송 도평 전투에서는 냇물이 의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보경사, 천곡사, 법광사, 해봉사, 기림사, 은해사, 대전사, 운문사 등 많은 사찰이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18세기에 중수된 운주산 안국사와 보현산 비상사는 전란 중에 불탔다.
안국사가 있는 기계면 운주산
자양 전투에서는 연병장 우재룡(禹在龍) 등이 적을 추격해 자양 분파소장과 적졸 3인을 잡아 목을 쳐 매달고 배를 갈라 쓸개를 이한구와 같이 씹으며, 을사오적과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고기로 여겼다. 다음날 왜병이 충효리 동엄, 단오 선생의 집을 불태웠고, 단오 대장은 그 적을 추격해 죽였다.
청송 방면에서 죽장면 입암(立巖)으로 들어 온 왜적을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을 하던 중 뜻밖의 전투가 일어나, 많은 의병들이 밤새 산화했다. 새벽에 촌가에 들어가 군사들을 막 먹이려다 들이닥친 왜적의 총탄에 단오 대장, 이한구(李韓久) 중군장, 손영각(孫永珏) 참모장을 비롯한 본진의 많은 의사들이 희생되었다. 1907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독립운동사상의 대혈전이었다. 45세에 먼저 순국한 아들의 주검을 보고 조금도 슬퍼하지 않으며, 64세의 백발 노장 동엄 선생이 흩어진 의진을 수습하여 청하, 의흥, 흥해, 영덕 등의 읍성을 공략하며 노도와 같은 항쟁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청하, 청송, 기북 삼면에서 압박해 오는 적에게 북동대산에서 7일간 포위되었다가 청하 각전(角田-뿔밭-불밭-火田)에서 동엄 선생이 체포되어 영천 조양각(朝陽閣) 아래 금호강에서 1907년 음력 11월 16일에 총살당했다. 선생의 절명시가 눈물겹다.
<檀紀4176年朝鮮24代憲宗9年癸卯淸宣宗道光23年1843~~1907檀紀4240年朝鮮26代高宗44年大韓帝國建陽光武11年(朝鮮27代)大韓帝國2代純宗隆熙元年丁未=中國光緖33年=日本明治40年>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며.
義重死猶輕(의중사유경) 의로움은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 뒷일은 누구에게 맡길까?
無言坐五更(무언좌오경)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
동엄, 단오 부자 양세(兩世) 대장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생존한 의사들이 일제강점기에 참동계(參同契)를 맺어 일제의 눈을 피해 불탄 집터에 충효재를 세웠다. 광복의 고유제를 올리고, 마을 이름도 해방 뒤에 검단리에서 충효리로 고쳤다. 양세 대장은 포은(圃隱) 정몽주의 방손이고, 임진왜란 때 영천성 수복 의병장 剛義公 호수(湖叟) 鄭世雅의 파손이다. 멧비둘기 구슬피 울고 흰 찔레꽃이 피어 창천(蒼天)의 의혼(義魂)인양 하였다.
죽장면 입암리
충효리 동엄 정환직, 단오 정용기 양세 대장 묘소
죽장면 입암리의 산남의진 발상지 사적비와 충의단
이후 의진은 흥해 학전의 선비 최세윤(한)<崔世允(翰)>을 거동사에서 3代 대장으로 맞아들이고, 각 분진에서 독립적으로 항쟁했다. 최세윤은 일찍이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일어난 을미의병 당시 포항의병을 이끌고 안동의 김하락(金河洛)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했던 터다. 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은 장기 용동에 은신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의진은 해산되어 지하로 잠복하고, 또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최세윤 선생은 체포되어 형산강을 지날 때 왜적에게 더러운 죽음을 당하기 싫어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랜 옥고 끝에 1916년 11일간의 단식 끝에 50세로 순국하였다. 아들 산두(山斗)는 일제에게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죽고, 부인 윤씨는 옥바라지를 하여 원수의 밥을 먹지 않게 하였으며, 남편의 체백을 고향에 모셨다. 양세대장과 최세윤 선생은 조선 양반의 ‘노블레스 오블레주’의 꽃이었다.
ㅁ 향토유적 채악당(釵岳堂) 위치 :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1리 833번지
ㅁ 건 물 : 목조와가 우진작(정면 1칸, 측면 2칸) 1동, 대지 : 397제곱미터, 건평 : 20坪
ㅁ 건축년대 : 조선 인조 21년(1643년)에 건립되었다가 소실되어 숙종 26년에 재건함
ㅁ 소 유 자 : 매현 경주 손씨 문중
노잠(魯岑) 손여두(孫汝斗)는 숙종 계미년(1703년) 8월 28일 손현(孫鉉)의 장자로 태어났다. 병오년(1726년) 10월 부(父) 손현이 내환으로 생명이 위독하자 무명지에 피를 내어 부친을 살렸으며 부친 별세 후 묘소 옆에 연락을 세워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세인들로부터 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병진년(1736년) 4월 두 형제인 손여두와 일휴제 손여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한 정자로 71세 나이로 사망한 뒤 행상걸인의 방화로 소실되었는데 손여두의 7대손인 손수기가 경신년(1800년)에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2년 일부를 보수하였다.
산남의진에 대거 참여한 월성 손씨 동성촌 죽장면 매현리 833번지
숙종 때 입향 형제분이 세운 채악당(釵岳堂). '채악'은 형제우애를
상징한 산앵두나무꽃 받침을 말하는데, <시경>에 나온다.
영천 충효리 충효재 뒤의 충효사 경내의 작약꽃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여헌 장현광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의병 투쟁 때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정용기, 손영각, 이한구 의병장 등 많은 의병들이
적탄에 순국한 곳이 입암리와 원촌(院村)이다.
鄭煥直(1843 ~ 1907) 선생은 본관이 延日로 호(號)는 동엄(東嚴). 이명(異名)은 관직(寬直), 치우(致右). 1887년에 북부도사(北府都事)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888년 의금부의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東學革命이 발발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을 제수받고 동학군 토벌에 임하였다가 그해 겨울 토포사(討捕使)를 제수받고 황해도로 갔다.
그리하여 구월산에 모여 있던 동학군을 권유하여 평정한 뒤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그 공로가 인정됨에 태의원 시종관의 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1899년에 삼남검찰 겸 토포사가 되어 삼남으로 내려갔다가 그해 8월에 다시 상경하여 시종관으로 재직하던 중 11월 20일 밤 종묘에 불이 나자 금군(禁軍)을 불러 4문을 잠그고 종묘로 가서 불 속에서 묘주(廟主)를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안치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 이르는 고종황제와 태자를 모시고 피신케 하니 이에 황제는 정환직을 사랑하여 금은 패물 등을 하사하고 1900년에 원수
그 후 아들 정용기와 상의한 후 그에게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명하였으며 자신은 서울로 재차 올라와 관직에서 물러난 동 지들과 협력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으로 보내서 진이 합세한 후 일제의 감시하에 있던 황제를 모시고 탈출한 후 재차 서울로 진공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용기가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계획이 늦어지므로 1907 년 9월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해 10월 7일에 아들 용기가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맞아 격렬히 싸우다 적이 쏜 포탄 에 피격되어 전사하니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4개 소대로 재편성분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鄭鏞基 (1862년 철종 13 ~ 1907년) 선생은 자는 관여(寬汝), 호는 단오(丹吾). 경상북도 영천출신. 의병장 환직(煥直)의 맏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각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였다. 1906년 아버지가 고종황제로부터 항일거병의 뜻이 담긴 밀지를 받아오자 아버지에게 거병을 간청하였다. 그 해 6월에 영덕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이지포(李芝圃) 등과 대구 등지에서 의병 600여 명을 규합, 거병한 뒤 청송·의성·영덕·영해·영양·평해·울진·삼척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본경찰에 잡혔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경주로 가던 중 경주진위대에 잡혀 대구형무소에 체수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를 잡기 위한 일제의 간계였다. 고종은 그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칙령을 내려 곧 석방시켰다. 그 뒤 항일운동의 재기를 다짐하고 흩어진 의진을 재규합, 정비한 뒤 영덕의 신태호(申泰浩)와 합세하여 청송·영천·청하·신령 등지에서 일본헌병분파소 등을 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1907년 음력 10월 7일 미명에 영천수비대의 야습으로 전개된 입암전투에서 이한구·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일본군의 흉탄을 맞아 순절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첫댓글 귀한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가슴을 울리는 역사 읽었다. 어릴때 우리마을에 하루저녁에 여러분 재사가 있어서 물어보니 우리 할배 의병 들이 왜적과 싸우시다 몰살당했다하시더라. 그때 사실을 공부해서 문중역사에 올릴수 있겠나? 하여튼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역사를 읽어야 되는데
좋을글 고맙다.
형님, 그간 별고 없으신지요.. 위에 적힌 1907 정미년 10월에 있은 일본군대의 야습으로 많은 의병 일가어르신들이 떼죽음을 당하시고 안마을의 가옥도 대부분 잿더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 부터 막연히 들어 왔었는데, 이렇게 소상히 파악을 하고 나니 울분이 치밀어옴을 억제할 수 없어 정리해 올려 본 것입니다. 형님, 내내 건강하십시오. 서울 오시면 뵙지요..
그래 건강하다. 서울서 만나다
그때 할배 들 자세한 기록해서 잘보관하자
드뎌 올리셨군요. 유익한 글 찬찬히 읽고 갑니다. ^&^. 사진 설명 중 매현 월성손씨 소유의 건축물 이름은 '채악정'이 아니라 '채악당'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번 확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태일아제 화이팅입니다!!!
좋은 지적 고맙네. 채악당 관련 자료를 보완해 두었고.. 大자 震자 할배 관련 자료는 문중역사보록에 올려 두었네.
알찬 한 주 되시게..
형님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정미년 난리로 집안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정자와 가옥들등 소중한 문화재들이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고 난리를 피하여 집안 일가들이 골안으로 들어가서 초가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종가집 냇가 건너편 현 권영훈 유사님집 앞 쪽 공터가 정미년때 일본놈들의 만행으로 정자와 가옥이 불타
소실되고 재건하지 못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역시 이런 자료 물색 및 정리에 있어서는 아재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알만한 어른들 다 가셨다.소정형님 가시기전에 부탁했는데. 이제 두암 태수형 님 도 가셨고.
시간 날때 마다 우리 문중 역사도 좋고 야화도 좋고 정리해봐라 부탁한다. 영훈유사와 자네가 힘써야겠 다. 포항 영세선생과도 협력하고. 이번 대를 넘기면 영원히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