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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眞心無知 (37)
又妄心은 在有着有 하고 在無着無하야
우망심 재유착유 재무착무
常在二邊하야 不知中道 하나니
상재이변 불지중도
永嘉가 云하사대 捨妄心取眞理하면 取捨之心이 成巧僞라
영가 운 사망심취진리 취사지심 성교위
學人이 不了用修行 하야 深成認賊將爲子라 하시니
학인 불료용수행 심성인적장위자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 하야 常處中道 일새
약시진심 거유무이불락유무 상처중도
진심직설! 열 네 번째 진심무지(眞心無知)를 공부하다가 덜 끝나고 마쳤지요. 53쪽 위에서 넷 째줄 중간부터 이야기입니다.
又妄心은 在有著有하고
우망심 재유착유
이런 말이 시작이 되는데, 진심과 망심의 차이점을 이야기 해가는 과정이죠. 이 경전의 제목이 진심직설이라고 그렇게 보조 스님이 붙였습니다. 우리의 참마음! 우리가 마음 마음 하지마는, 마음에도 아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심의식(心意識)이라고 해서 크게 세 가지도 또 나누기도 하지마는 또 거기서 심앙(心仰)과 심소(心所)! 이렇게 또 나누면은 七識悟法(칠식오법)이니, 또 百法(백법)이니 이런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한데, 크게 나누면은 진심과 망심이다. 이렇게 나눌 수가 있겠죠.
불교는 결국 마음공부다 라고 이렇게 단언을 해도 크게 틀린 대답이 아니듯이, 마음의 문제를 가장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알고 보면은 모든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마음 하나로 돌아가고 있고, 또 사람 마음먹은 데 따라서 세상이 달라지고, 인생살이가 달라지고. 모든 생활여건이 달라지고. 행복과 불행이 또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전부 우리 마음 여하에 달렸다고 라고 하는 것이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 도리를 깨달았고, 또 불교 안에 모든 역사상의 큰 도인들! 또는 성자들! 뭐 이런 분들도 한결같이 가장 중심적으로 근원되는 그런 삶의 요체는 결국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이 마음의 도리를 잘 깨닫고, 그리고 마음을 잘 운용을 잘 할 것 같으면은 그 삶의 성공과 실패! 또는 아주 유익하고 보람된 삶! 이런 것이 전부 내 손 안에 달려 있다 라고 하는, 그런 한결같은 깨달음이 불교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심의 문제를 더없이 소중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조 스님께서 진심직설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많은 가르침 속에서도 가장 근본 되는 것, 가장 핵심 되는 것,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자는데 뜻이 있어요. 여타 다른 이야기도 불교 안에는 많습니다. 별별 이야기가 많지마는 특히 진심의 문제! 이 마음의 문제는 가장 요체가 되고, 핵심이 되고 가장 근간이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 보면은 아주 수준 높은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다 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쭉 진심에 대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가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제 진심과 망심의 그런 관계! 그리고 진심은 무지(無知)다. 라고 하고 망심은 반대로 유지(有知)다 라고 할 수가 있겠죠.
진심은 앎이 없이 아는 것, 또 알되 아는 어떤 조작이 없는 것이고, 또 망령된 마음! 우리들이 흔히 쓰고 있는 망심(妄心)은 앎이 있으면서 아는 것이고, 알되 앎이 있는 것! 어떤 조작이 있고. 자기가 있고 하는 것이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자연스럽지가 못한 그런 입장이라고 이해해도 좋겠죠. 그런 관계를 이야기를 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늘 진심과 망심! 두 가지를 대질을 해가면서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데, 그 앞에 이야기가 “만약 진심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無知而知(무지이지) 해 가지고서. 平懷圓照(평회원조) 한다.” 그랬어요. 아주 평탄한 생각으로 원만하게 비춘다.
우리 마음이 뭐 이렇게 계산하고 저울질 하고 저 사람이 나에게 소득이 있을까? 해치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아무 사심 없이 비추듯이, 뭐 거기에 꽃이 오든지 또 가시가 오든지. 아니면 악인이 오든지 선인이 오든지 전혀 거울은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삿된 생각을 결부시키지 않습니다. 오는 대로 다 비추어주는 거죠.
그와 같이 진심의 입장에서 어떤 마음의 작용을 굳이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마음이라고 이야기 했고 지난 시간에 “哀而不傷 樂而不淫 (애이불상 낙이불음)”그런 말을 했죠. 어떤 슬픔과 즐거움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때 예컨대 아무리 애절하고 슬픈 일이 있다 하더라도, 도인의 마음. 성인의 마음. 부처님의 마음은 상하기 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슬픔을 모르면 그것은 아예 목석이 되니까요. 충분히 어떤 중생들 보다도 더 슬퍼할 수가 있어요. 슬퍼할 수가 있지마는 그러나 거기에 상하기까지 하는 그런 일은 없다. 또 즐거움이 있는데, 기쁨의 문제 같으면은 중생들 보다도 더 기뻐하고 더 즐거워 합니다. 흥에 겨울 때는 더 흥겨워 할 수 있지마는,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거나 거기에 도취하지 않는다. 낙이불음(樂而不淫)! 참 멋진 표현이죠.
결국 우리는 불교 공부를 해서 수행을 해서 또는 기도를 해서 참선을 해서 결국은 어떻게 살자는 말인가 라고 했을 때, 그런 상태로서 그런 어떤 여유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슬퍼할 때 중생보다 더 슬퍼하고. 기뻐할 때 더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더 즐거워 하지마는, 중생들처럼 그렇게 마음이 상하거나 빠지거나 정신을 못 차리거나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는 그런 어떤 삶을 도인의 삶! 불교적인 이상적인 삶이다 이렇게 정리 할 수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 계속 그 이야기가 이어지는데요. 또 망심은,
在有着有(재유착유)하고
보통 망심 하면은 우리 중생들의 마음 씀씀이라고 생각하면은 틀림이 없습니다. 거의 그렇지요. 우리는 진심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상태! 저 내면에 있지 만은 그것이 내 것이 안된 상태! 망심은 그냥 우리가 보통 쓰는 마음이 예요. 그래서 망령된 마음 그래요. 이것을 몹쓸 생각이라고 나 할까요? 아주 순수한 우리말로 하면은 몹쓸 생각! 그것은
在有着有(재유착유)야.
유(有)에 있으면 유에 착(着)하고,
在無着無(재무착무)야.
무(無)에 있으면 無에 착(着)해.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집착하고, 눈에 안 보이면은 또 없다고 거기 없는 대로 집착하는 거예요. 그래서
在有着有하고 在無着無라.
재유착유 재무착무
유에 있으면 유에 집착하고 무에 있으면 무에 집착해서,
常在二邊(상재이변)하야
항상 이변에 있어서
그러니까 중생들의 마음은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 소설을 보던지. 만화를 보던지. 이야기를 하던지 그럴 때 이야기 줄거리가 잘 안 잡히고 그러면 “그래 그놈이 나쁜 놈이란 말인가 착한 놈이란 말인가?” 무조건 그것부터 묻지 않습니까? 그래서 착한 놈이라고 하면은 “아, 그래 착한 놈이구나.” 그러고 나쁜 놈이라고 하면은 무조건 “나쁜 놈이야.” 딱 둘로 나누어 놓고 보는 거예요.
이것이 서양에서 들어온 흑백론이라고 흔히 이야기 하는데, 서양 사람들의 논리는 이 깨달음에 의한 논리가 아니고 사고(思考)에 의한 논리, 어디까지나 생각을 깊이해서 거기서 짜낸 논리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그것은 망심이고, 또 설사 서양 사람들의 논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보통 우리들의 마음도 역시, 편을 갈라놓습니다.
착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내편이냐? 네 편이냐? 이렇게 갈라놓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망심! 몹쓸 생각이죠. 그렇게 나누어놓고 생각할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곧잘 그렇게 나눕니다. 네 편이냐 내편이냐? 착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그런 식으로 나누는데, 그래서
常在二邊(상재이변)이다.
이변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저쪽 두 쪽에,
선이 아니면 악! 내 아니면 너! 손해 아니면 이득!
대개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한다. 사랑하고 미움하고 두 가지 뿐인 것처럼 그렇게 알고 있는 거에요. 그것이 常在二邊(상재이변)이다.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봐주는 것. 그런 그대로 사실 그대로 그냥 봐 주는 그것이 바람직한 소견인데, 그렇지 못하다 하는 것입니다. 常在二邊(상재이변)해서
不知中道(불지중도) 하나니
중도를 알지 못하나니
중도라고 하는 것은 이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이변이라고 하는 것은 나쁜 놈이냐 착한 놈이냐 라고 하는, 그 양쪽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사실대로 봐주는 것. 나쁜 사람도 착한 면이 있고. 착한 사람도 나쁜 면이 있어요. 그러면 나쁜 사람에게서 착한 면이 있으니까 그것을 또 나쁜 것을 안 볼 수도 없고, 또 흔히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면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착한 면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그대로, 사실 대로 봐주는 이것이 중도입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런데 우리들 소견은 한 가지 나쁘다 이렇게 하면은 그대로 나쁘게 보는 거예요. 좋은 것 까지도 나쁘게 보는 거예요. 좋다 하면, 내 마음에 든다 하면은 나쁜 것 까지도 좋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생기고 온갖 문제가 야기하고 거기서 문제가 생겨 가지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그러죠.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봐 주지 못하는, 실상을 실상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중도를 알지 못하나니,
永嘉(영가)가 云(운)하사대
영가가 이르대
捨妄心取眞理하면 取捨之心이 成巧僞라 그랬어요.
사망심취진리 취사지심 성교위
捨妄心取眞理하면
사망심취진리
捨妄心(사망심) 망심을 버리고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면, 여기 진심직설 말대로라면은 진심이라 그래도 좋죠. 진리를 취할 것 같으면은
그러면 뭘 하나 버리고 뭘 하나 취하게 되는 거죠. 보통 우리가 하는 짓대로, 그러면
取捨之心(취사지심)이
취사 하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마음,
망심은 버리고 진심은 취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成巧僞(성교위)라 한다.
교위를 이룬다. 교위라고 하는 것은 아주교묘 한 거짓,
巧僞(교위)! 거짓이라면 그냥 거짓이라 해도 좋을 텐데 교묘한 거짓이라. 그러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안 맞는 거예요. 틀림없이 착한 사람을 착하다고 했는데 왜 그것이 틀렸나 이거예요. 그것이 왜 잘못이냐 이겁니다. 옳은 것 같은데 내용에 있어서는 잘못이니까 그래서 교위라. 교묘한 잘못이다. 교묘한 거짓을 이룬다. 교 위를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보기에는 다 착한데 내용에 있어서는 사실은 그것이 착한 것이 아니니까. 내 생각에는 틀림없이 맞는데 내용에서는 안 맞으니까 그것은 교묘한 거짓이 되는 거예요. 교위를 이룬다. 그래서
學人이 不了用修行하야 深成認賊將爲子라
학인 불료용수행 심성인적장위자
學人(학인)!
여기서 학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
불교를 믿는 사람, 또는 수행하는 사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뭔가 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부단히 자기 발전을 꾀하는 사람. 이런 사람 모두 여기 학인 속에 다 들어가요. 학(學) 하는 사람, 이 학(學)이라고 하는 말은요, 본래 이렇게 책을 보고 글자를 익히고 무슨 글을 쓰고 학문적인 그것을 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 만드는 일! 사람 좋도록 하는 그 일을 학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지금은 공부라고 그렇게 잘못 되어 있는데 사람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뭐 시험에 합격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공부가 되어버렸어요. 그것은 참 크게 잘못 되었어요. 유교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잘못도 있지마는, 그래도 거기는 사람만 드는 공부라고요. 옛날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사람 만드는 교육이지 뭐 어디 가서 취직하기 위한 교육 또는 시험 합격하기 위한 그런 교육은 아니 였어요.
그래서 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되려고 어떤 수행을 한다든지 어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운다든지 하는, 이런 사람들이 공부하는 사람을 학인 이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가지고서 교육이 아주 바람직한 궤도에 올라서 제 할 일을 제대로 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야 되는데 큰 일이죠. 그런데
學人이 不了用修行이라.
학인 불료용수행
수행할 줄 모른다 이거죠. 수행 할 줄을 몰라서
수행을 제대로 못한다 이거예요. 왜냐? 늘 취사하는 마음이 있어 가지고 그렇다 이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深成認賊將爲子라
심성인적장위자
깊이 이룬다. 뭐를 이루는가 하니
認賊將爲子(인적장위자)!
도둑을 오인해서 장차 아들을 삼는 그런 것을 만든다 이 말입니다. 밤에 어두운데 사람 소리가 나서 이렇게 내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아, 아들이 목이 말라서 물 마시러 잠깐 나왔다가 저렇게 들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 놓고 잤는데 그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 그것이 도적이 말하자 면은 물건 훔치러 들어왔다가 가는 것을 잘 모르고 아들인 줄 오인했다 그 말 이예요.
認賊將爲子(인적장위자)라고 유명한 말입니다. 능엄경에 나오는 말인데 도둑을 오인해서 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어요. 도둑을 도둑으로 보고, 아들은 아들로 봐야지 도둑을 잘못 봐 가지고서 아들로 여겼으니, 그 집안 뭘 다 훔쳐가도 모르고 마음 놓고 태평스럽게 자기할 일 하고 자기 잠 잘 잤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捨妄心取眞理하면
사망심취진리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는 이런 취사의 마음은 전부 잘못된 공부다. 다시 말해서 중도적인 공부가 아니라 바람직한 공부가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밑에도 보면은
若是眞心(약시진심)인댄
만약에 진심이라면은, 앞에는 망심 이야기고 오늘 공부 시작한데서부터 여기까지 망심 이야기고, 만약에 진심이라면은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거유무이불락유무
유와 무에 거하되, 거기에 있으되,
유와 무에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래서
常處中道(상처중도)일새
항상 중도에 처한다 이 말입니다
참 이것이 좋은 말입니다.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약시진심 거유무이불락유무 상처중도
이것은 밑 줄 그어놓아야 돼요. 유와 무에 거하되, 산다 이 말이죠. 유와 무에 있으되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거기에 어두워지지 않는다. 이런 뜻이 예요. 그래서 항상 중도의 입장에 처한다. 常處中道(상처중도)에 처할새,
불교는 팔정도(八正道) 중에서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 말이 있죠. 바를 정(正)자 볼 견(見)자. 정견! 무엇이든지 바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첫째 바로 봐야 되고, 사물을 바로 봐야 되고. 사건을 바로 봐야 되고, 모든 삶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그리고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 이것이 불교의 중요한 그런 요체입니다. 불교 공부에서 뭘 하자고 하느냐? 바로 보자고 하는데 있습니다.
중도정견(中道正見)! 여기 중도에다가 붙이면 정견이 돼요. 중도적인 바른 견해!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뭘 바로 보고 정확하게 봐야 그것을 제대로 쓸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이것을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을 했을 때, 이 인생이라고 하는 기계를 우리가 바로 파악을 하면은 잘 쓸 수 있어요.
아주 효과적으로 쓸 수 있고. 이것을 잘 활용을 해서 아주 행복을 만들어 내는 거라. 행복을 무한히 만들어 내고 아주 멋진 삶으로 그것을 아주 유익하고 보람된 삶을 계속 만들어 낼 텐데, 인생이라고 하는 이 기계를 우리가 바로 못 보면, 정상적으로 파악을 못하면은 어떻게 돼요?
그 기계를 제대로 돌릴 수가 없지요. 제대로 못 돌리면 그 가지고 있는 기능을 발휘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능력! 그것이 나타나지 가 않고 그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손해를 많이 봐요, 손해를 봐도 보통 보는 것이 아니라고요.
같은 인생을 뭐 칠 십이면 칠십, 팔십이면 팔십을 산다 하더라도, 제대로 자기 인생이라고 하는 이 기계를 파악하고 십분 그것을 활용하느냐 못하느냐? 거기에 따라 가지고 큰 이익을 보는 그런 삶이 되기도 하고, 아주 손해 보는 그런 삶이 되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어떤 좋은 기계를 가지고 있는데, 한 칠 십년 팔 십년 가지고 있었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기계의 용도를 잘 몰라. 무엇에 쓸 줄을 몰라. 써도 조금밖에 못 써요. 그러면은 그 값진 기계! 그 훌륭한 기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계의 어떤 활용 가치를 제대로 파악을 못 했으니까 제대로 못썼죠. 그러면 얼마나 손해가 많았겠어요? 그것은 보통 손해가 아니 예요. 우리 인생을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도정견(中道正見)! 중도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우리 인생에 대해서 바로 보고. 바로 파악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과 가치를 제대로 이해했을 때, 거기서 얻어지는 효과! 보람! 이익이 그냥 수없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굳이 성공이라고 해도 좋고. 행복이라고 해도 좋고 온갖 그런 소득이 쏟아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중도라는 말이 나와서 내가 불교 경전 가운데서 아주 좋아하는 게송을 오늘 유인물로 이렇게 찍어서 돌렸는데, 이것을 그전에 더러 소개한적도 있지마는 없는 사람 여기 몇 장 있어요. 이것을 한번 보면은 여기에는 우리가 불교의 여러 가지의 수행 법 가운데 ,뭐 육바라밀이 어떻다. 또는 불사를 어떻게 한다. 부처님께 예배를 어떻게 한다.
또 부처님 앞에 올리는 공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불자가 늘 하는 일이죠. 뭐 촛불 공양도 공양일 것이고, 뭐 음식을 올려도 공양이고. 돈을 올려도 공양이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이, 온갖 불자가 불교라고 하는 안에서 실천하고 있는 여러 가지 수행에 대한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마음가짐! 다시 말해서 중도적인 그런 마음가짐과 중도적인 그런 소견을 여기서 피력해 놓은 내용입니다.
이분은 영명 연수선사라고 아미타불 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뛰어난 그런 스님이 있었는데, 이분의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 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그 뒤에 결론적으로 이 게송으로서 말하자 면은 요약한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보면은 쭉 첫 줄부터 한번 살펴보지요.
菩提無發而發이라 그랬어요.
보리무발이발
우리가 보리심을 발한다 그러죠. 그래서 동물을 만나도 "발 보리심 하라."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보리심을 발하는 것은 무슨 조작이 있는 것이 아니 예요. 그래서 "무발이 발이라." 보리심을 발하지마는 발함이 없이 발한다.
또 우리는 불도(佛道)를 구한다. 그래요. 구한다고 하지마는 무슨 시장에 가서 무슨 쌀을 구해오고 무슨 반찬거리를 구해오듯이 그렇게 구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뭘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보리심을 발하는 문제나 불도를 구하는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 예요. 그러니까
佛道無求而求라
불도무구이구
구함이 없이 구하고 , 구하되 또한 구함이 없다. 시장에 가서 무슨 물건을 구해오듯이 그렇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妙用無行而行이라
묘용무항이항
묘용! 미묘한 작용이지요.
그것도 행함이 없이 또한 행하고. 그 다음에
眞智無作而作이라
진지무작이작
참다운 지혜도 무작이작이야.
지음이 없이 짓는다. 이것이 중도적인 모든 행위입니다. 그런 것은 나두고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살펴보죠.
興悲悟其同體라
흥비오기동체
자비를 일으키되 동체를 깨닫는다.
동체라고 하는 말은 나하고 한 몸이다 그 말입니다. 남이라고 생각을 해야 자비가 일어나지 나하고 한 몸이라고 하면은 자비가 일어납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 예요. 자비를 일으키되 나하고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이것도 자비를 일으키되 일으킴 없이 일으키는 그런 묘용이라고 나 할까요? 그 다음에
行慈深入無緣이라
행자심입무연
이것도 앞에 비(悲)는 그렇고 자(慈)는 나누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비와 자를 엄격하게 구분 하는 수가 있죠. 자를 행하되 깊이 무연(無緣)에까지 들어 간다. 對一在無緣慈悲(대일재무연자비) 그런 말을 합니다. 인연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손길이 미치는 그런 자비(慈悲)! 그 다음
無所捨而行檀이라
무소사이행단
이것은 보시를 하는 것을 버릴 사(捨)자를 써요. 버리는 바 없이 ??바라밀을 행한다. 보시를 행한다 이거죠. 꼭 줘야만 보시가 아니라 주되 주는 바 없이 주는 마음으로 주는 그런 보시행위! 그게 행 단입니다
無所持而具戒라
무소지이구계
이것도 계율을 가지는 바 없이 가지되 가지는 바 없이 계율을 구족 한다. 나는 계를 지킨다 하고, 나는 뭐 잘 한다. 나는 보시한다 하고 그렇게 생색을 내어 가면서 하는 그것도 물론 보시지마는, 그것은 이미 이변에 떨어진 거예요. 있다고 하는데 떨어지고. 또 하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하느냐?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그런 마음자세! 예를 들어서 버리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가지는 바 없이 계율을 구족 한다.
그러면 아예 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하느냐? 그런 식으로 가면은 그것도 또 공(空)에 떨어져요. 공에 떨어지면 무상(無相))에 떨어지게 때문에. 공(空)에 집착하고 무상(無相)에 집착하고 무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 또한 중도가 못 돼요.
생색을 내고 하는 것은 유(有)에 떨어지기 때문에 아까 그랬지요. 항상 이변에 있어 가지고 유(有)에 있으면 무(無)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으면 유(有)에 집착해서 항상 이변에 있어 가지고 중도를 모른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이야기가 바로 가장 중도적인 그런 견해(見解)! 가장 올바른 어떤 소견으로서 불교를 수행하는 그런 견해들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修進了無所起라
수진료무소기
정진을 닦되 마침내 일어나는 바가 없음을 요달 하고
習忍達無所傷 하고
습인달무소상
인욕을 닦되, 인욕을 익히되,
상하는 바가 없음을 통달하고,
般若悟境無生 하고
반야오경무생
반야는 경계가 생함이 없는 것을 깨닫고,
禪定知心無住라
선정지심무주
선정은 마음에 주함이 없음을 알고,
鑒無身而具相 하고
감무신이구상
무신이 발! 몸이 없는 것을 비추고, 본래 몸이 없는 것을 비춰보지만 그러면서 또 32상 팔십 종호를 갖추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뭐 형상을 가지고 부처라고 보지 말라. 입만 땠다 하면 그러지 않습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 이니까 현상가지 고 부처라고 보지 말라 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형상이 없는 거예요. 몸이 없는 것이 부처라. 그렇다고 부처님이 또 전혀 몸이 없느냐? 누구보다도 더 잘난. 누구보다도 치장을 많이 하고 누구보다도 옷을 잘입고 누구보다도 보석을 몸에 많이 걸친 이가 관세음보살 이죠. "감무신이 구상이죠." 참 이것이 기가 막히는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이 불교 공부를 어설프게 잘못해 놓으면 그냥, 화장도 안 하고 옷을 추리하게 그냥 아무렇게나 그렇게 돌아다니는 신도님들을 흔히 보거든요. 또 수좌들도 보면은 그냥 막 머리도 잘 안 깎고 그냥 옷도 아무렇게나 해 입고 그렇게 하는데, 그것도 또 일종의 병입니다. 그것도 또 어떤 집착에 떨어진 거예요.
그런데 감무신이구상 할 줄 알아야 돼요. 몸이 없는 줄을 알아야 돼. 몸이 없는 줄을 거울 鑑(감), 비춰본다 이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몸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형상을 제일 잘 타고 난 것이 또 부처예요.
이 세상에 부처님 보다도 더 잘난 사람이 없어요. 32상 팔십 종호를 갖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처님 뿐이라고요. 그래서 몸이라고 무상한데 “부처님 당신 뭐 하려고 32상 팔십 종호를 갖추었소! 우리나 주지.” 그것이 아니라고요.
몸이 없는 줄을 상을 또 잘 갖추는 것, 그러니까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몸이니. 뭐 외형이니. 외모니 하는 것이 허망하다고 알면서도 또 갖출 때는 누구보다도 더 잘 갖추어야 되는 것, 그것이 불교적인 소견이라고요.
관세음보살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관세음보살은 얼마나 아름답게 꾸몄고. 얼마나 이 세상에 비싼 보물을 몸에 휘감았습니까? 그 어디 구슬이 보통 다이아몬드 하고 같은 줄 알아요? 그것은 저 천연석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예요. 하나만 하더라도 이 지구를 사고도 남는 그런 다이아몬드를 몸에 그냥 수 백 개를 걸쳤어요.
그리고 그 옷도 얼마나 좋은 옷이고, 얼굴은 좀 잘났습니까? 그러나 그 모양에 또 집착하지 않는 게 또 관세음보살이라. 그래서 "감무신이 구상이라." 우리가 이런 도리를 알아야 돼요. 뭐 절에 다니면서 뭘 그렇게 빼 입고 다니고. 그렇게 치장을 하고 다니냐고. 절에 갈수록 무상한 줄을 아는 사람이 치장을 더 잘해야 돼요.
그렇다고 어디 집착할 것은 아니죠. 집착 안 하면서도 뽐 낼 줄 아는 그런 자세! 이것이 좋은 거예요. 우리 불자들은 그것이 잘돼야 돼요. 그래서 감무신이 구상이라. 그것이 중도적인 견해고 불교적인 소견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주 참 좋은 내용이죠. 그 다음에
證無說而談詮이라
증무설이담전
불교는 본래 말 할 것이 없어요. 부처님이 49년간 설해놓고도 “한 마디도 한적이 없다.” 그랬으니 그런 도리를 알아요. 무설(無說)! 설할 것이 없음을 증(證)! 깨닫는다 이거죠. 깨달아 놓고도 “담전이라.”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 가르침을 말한다 이말 입니다.
부처님처럼 또 말 많은 양반이 어디 또 있으며 불교 같이 또 말 많은 동네가 또 어디 있고. 불교 경전같이 많은 경전이 많은 종교에 또 있느냐 이거예요. 제일 많거든요. 그러면서도 또 불교는 하면서도 한적이 없다. 그리고
言語道斷하고 心行處滅이라
언어도단 심행처멸
입만 뗐다 하면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말은 쓸데없는 거죠. 그렇게 해 가지고 묵언을 아주 중요시 여기고. 문수보살 하고 유마 거사하고도 가장 수준 높은 대화! 문수는 아주 기가 막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유마 거사는 입을 딱 다물고 한마디도 말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천하에 언변이라고 찬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證無說而談詮이라
증무설이담전
무설이(無說而)! 말할 게 없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하는 것, 담전(談詮)!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데서 불교는 말이 많다. 그렇게 알면서도 또 말할 게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말할 것이 없는 도리를 알면서도 또 말을 많이 해야 돼요. 그래서 설명을 많이 해야 돼.
괜히 뭐 귀찮고 자비심이 없어 놓으니까, "뭐 말할 게 어디 있어. 입다물고 사는 것이 제일 낫지." 그런 것이 이제 아라한 들! 주로 소승들이 그러는 것이고 되든 안 되든 자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자꾸 이야기 해주고 설명해주고 설득시키고 그런다고 말에 집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建立水月道場이라
건립수월도량
이것도 보면은 건립한다. 무엇을? 수월도량을 건립한다 이거예요. "절이 쌔고 쌨는 것이 절인데 뭐 하려고 자꾸 세워! 절 그까짓 것 무슨 소용이 있어." "무슨 소용이 있어." 라고 하는 소용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또 건립할 줄 알아야 돼요.
수월(水月)이라고 하는 말은 물에 비친 달이라는 뜻이거든요. 물에 비친 달이 어디 없나요? 그림자처럼 있는 거예요. 그림자처럼 있는 도량이지마는, 어차피 그림자처럼 헛것인 도량이지마는, 또 그런 대로 또 거기에 그것은 그런 도리를 알고 건립을 할 줄도 아는 것, 다 무상하다 라고 일변으로 나온 것은 중도 정견이 아닙니다. 불교에는 바른 소견이 아니 예요.
이것은 불교에 대한 수행을 이야기를 하지마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전부 다 해당이 됩니다. 건립 수행도량! 참 좋은 말이죠. 수월과 같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그런 도량을 건립하고
莊嚴性空世界야
장엄성공세계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장엄 해. 이 세계가 사실은 헛 거예요. 왜냐? 본질이 공한 것이니까. 성공(性空)! 본질이 텅 빈 것이니까 세계는 허망하다고요. 결국은 성주괴공(成駐壞空)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 예요.
그런 허망한 세계고 본질이 텅 빈 공한 세계지마는, 또 장엄을 잘해서 잘 꾸며야 된다고요. 아주 큰 행사 같은 것을 할 때, 그것이 기껏 해야 몇 시간 보려고 하는 행사거든요. 그러면서도 돈을 수 천만원씩 수 억씩 들어서 행사장을 꾸미지 않습니까?
‘금방 걷어 치울 것을 왜 저렇게 잘하나?’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일도 못해요. 금방 걷어 치울 때 치우더라도, 꾸밀 때는 잘 꾸밀 줄 아는 그 자세가 바람직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잘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금방 잘 때 지울 화장이지만은, 자기 전에는 열심히 그리는 거예요. 두 시간 세 시간 그리고는 다 되었다 싶으면 들어가서 지우는 거예요. 다 되었다 싶으면 들어가서 지우고 잠자리에 들더라도 해야 된다고요. 그래서 그것이 제대로 산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불교는요.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불교적인 삶은 그렇게 살 줄 알아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이고, 두 시간 세 시간 공부해서 화장 했는데” 하고 그 화장이 아까워서 그냥 잠자리에 드는 것은 그것은 잘못이고 그것은 화장에 집착하는 사람이죠. 아 오늘 화장 특별히 잘되었다고 그대로 안 지우고 누워 자면은 그 꼬락서니가 어떻겠어요? 그 이부자리 하고 또 얼굴이 어떻게 되겠어요. 엉망이 돼고 그러면 거기에 또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 돼버려요.
그러면 “아이고, 결국은 저녁이면 지울 건대 뭘, 꾸밀 것이 뭐 있나.” 그리고 세수도 겨우 하는 그런 자세는 또 허무감에 떨어지고 무(無)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집착이고 아주 잘못된 소견이라고요. 그러니까 불교는 그런 소견이 아닙니다.
불교를 잘못 우리가 수행해 가지고 그냥 사는데 대한 어떤 희망 감이라 할까? 또는 용기라 할까? 그런 어떤 생기라 할까? 그런 것이 불교가 잘못되고 뒤떨어지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사실은 보면은 없지가 않아요. 그래 보십시오.
莊嚴性空世界
장엄성공세계
성품이 공한 세계를 장엄한 다 그랬어요. 이 장엄이라고 하는 것도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얼마나 장엄을 불교에서 사실은 야단스럽게 합니까? 그것이 허망한 줄 몰라서 장엄 하는 것이 아니 예요. 금방 지우면 지워지는 줄 몰라서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지워질 때 지우고 금방해서 다시 지우더라도 화장은 화장대로 또 가치가 있다 이거죠. 장엄은 장엄 대로 가치가 있어요. 참 불교의 중도적인 그런 소견이 바로 들면은 정말 삶을 아주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羅列幻化供具
나열환화공구
나열한다. 쭉 배열해 놓는다 이거죠. 무엇을? 환화와 같은 공양구를, 환화가 무엇입니까? 거짓이고 허깨비고 환상이고 조작한 것입니다. 초도 꼽고 향도 꼽고 꽃도 올리고 밥도 올리고 과일도 올리고, 온갖 것 좋다는 것 다 이렇게 올리는 거예요.
그렇지마는 그것이 영원무변하고 말이지, 영원불변 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올리는 것은 아니죠. 환화와 같은 공양구인 줄 알면서도 나열하는 거예요. 금방 올렸다가 절 한번 하고는 그냥 내려 오잖아요. 내려올 줄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또 올릴 때는 올리는 거예요. 금방 내려오지마는 또 올릴 때는 올리는 그런 자세! 그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또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등상불 앞에 그것을 올리면 무엇해” 하고 그냥 무지막지 하게 막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고요. 그런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금방 내려서 먹을지언정 올려놓고 절할 때는 또 절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고, 올렸다고 해서 또 가만히 두고 부처님 자실 때까지 몇 날 며칠을 두고 기다린다는 그것도 꼴이 뭐예요? 그것도 아니 예요. 그러니까 어디에도 치우치면은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조 스님도 마침
常在二邊 不知中道라
상재이변 불지중도
이 망심을 가지고 우리 중생들은 유(有)에 있으면 무(無)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으면 유(有)에 집착해서 항상 이변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하는 그런 고집이 있기 때문에 중도를 모른다라고 이 말씀이 있어서, 중도적인 어떤 삶! 또는 중도적인 불교 수행! 이것을 가장 잘 대표하는 시가 되서 소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供養影響如來야
공양영향여래
공양 올린다 그러죠. 그리고
影響如來(영향여래)라
여래에게 올리는데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을 올린다 이거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공양이 아니고 완전히 뭐 돌로 만들고 흙으로 빚어 만들고 말이지 별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글씨로 부처 佛자 한자 이렇게 써놓고. 그래서 부처라고 하는 것이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그야말로 영향 여래죠.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여래입니다. 그림자가 뭐 있습니까? 햇빛이 나야 있는 것이 그림자고 그늘 속으로 들어 가버리면은 없어지는 게 그림자고 그림자는 또 실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럴수록 그림자이죠. 여래라는 것이 그런 존재이지마는 그러나 거기서 또 정성을 다해서 살아있는 여래처럼 공양을 또 올리는 그 자세!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불자라고 하는 것이고, 소견이 제대로 먹힌 그런 사람이 예요.
“그런 여래가 어디 있어, 부처가 다 공한 게 부처인데”하고 공양을 안 올린다. 그것도 큰 병 든 거예요. 그것은 허무의 병! 무에 집착한 병!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 다음에
懺悔罪性本空이야
참회죄성본공
참회를 열심히 한다 이거죠. 절을 백팔 배가 아니라 삼천 배. 삼만 배. 삼십만 배도 해야 되는데,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한 줄 알고 참회 한다. 죄의 성품이 본래 공 한데 뭘 참회 할 것이 있느냐? 그렇게 하면 그것도 또 병에 떨어져요. 무(無)에 떨어진 것이고,
죄가 그러면 있으니까 그것은 꼭 해야 돼. 이것도 유(有)에 떨어지는 병이라는 거죠. 그것도 또 병이죠. 죄가 꼭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병이고 없다고 만 생각해서 참회를 무시하는 것도 병입니다. 죄의 성품이 본래 공한 줄 알고 참회를 하는 그런 참회야말로 是則名爲眞懺悔(시즉명위진참회)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심약멸시죄역망
죄는 자성이 없어. 우리 한 마음이 조작한 거죠.
그런데
心若滅是罪亦亡이라.
심약멸시죄역망
그런데 그 한마음이 조작한 그 마음이 없어지면은 죄도 또한 따라서 없어져. 그래서 죄도 마음도 다 같이 사라져 없는 그 도리를 아는 것,
是則名爲眞懺悔
시즉명위진참회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회다.
이것은 여기서는
罪性懺悔本空
죄성참회본공
그래서 천수경이요, 참 깊은 도리를 그런데 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도 죄성본공(罪性本空)을 알고 참회하는 거죠. 있다고 참회 해도 잘못이고, 그냥 없다고 그래서 참회를 안 해도 잘못이고, 없는 줄을 알고도 참회하는 것, 참회 하고도 또 없는 것을 아는 그런 자세! 전부 그런 식입니다.
그게 중도정견이 고. 바른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바른 소견! 어떻게 보면은 참 쉽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은 굉장히 어렵기도 합니다. 꼭 이것을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기면은 “아, 정말 바르게 사는 삶이 올바른 소견을 가지고 사는 게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바로 이제 정립을 할 수가 있습니다.
勸請法身常住라
권청법신상주
이것이 보현행원품의 이야기에도 많이 나오고 그러지요.법신이 상주하기를 권청 한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오래 계십시오, 부처님은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이야. 법신상주(法身常住)라고요.
그런 줄을 뻔히 알면서도 오래 계시라고 권하는 거죠. 권하고 요청한다. 청하고 권하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라 이거죠. 언제 부처님이 간적이 있어요? 여래무거(如來無去)이기 때문에 가고 오고 가 없다 이거죠. 그런 줄 알고 공청 한다. 그 다음에
廻了無所得이라
회요무소득
마침내 얻을 바 없음에 회향 한다. 어디 다 내가 회향 해 가지고 무엇을 얻는다. 그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隨喜福等眞如라
수희복등진여
우리가 다른 사람의 좋은 것들을 따라서 기뻐한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따라 기뻐한다. 그런데 얼마만치 따라서 기뻐하느냐? 복이 진여(眞如)와 꼭 같다. 복이 진여와 같이 평등하다 라고 하는 도리에 따라서 기뻐한다 이거죠. 그러니까 저 사람이 착한 일을 요만치 했으니까, “아, 고만치 내가 좋아해 준다.”이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 우주에 가득찬 진여처럼 많다. 그런 법을 따라서 기뻐 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讚歎彼我虛玄이라
찬탄피아허현
피아도 나도, 저 사람도 나도 텅 비었다.
텅 빈 것을 찬탄한다. 저 사람도 공하고 나도 공 한데 칭찬 할 사람이 누구고, 칭찬 받을 자는 누구냐? 해 가지고서 잘하는 것도 칭찬 안 하고. 못 하는 것도 그대로 봐버리면은 그것은 또 무(無)에 떨어지는 병이다. 무에 집착할 병이다 이렇게 됩니다. 저 사람도 공하고 나도 공하지마는 그래도 좋은데 만 칭찬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찬탄피아허현,
發願能所平等이라
발원능소평등
능과 소가 평등하기를 발원 한다.
모든 사람들이 능과 소는 주관과 객관,
너와 내가 평등하기를 발원 한다.
그 다음에
禮拜影現法會
례배영현법회
영현법회!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법회에 예배 한다.
지금 이 법회를 예를 들어서 부처님의 법회다. 뭐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지마는, 당장 우리가 자주 만나는 그런 법회도 좋아요. 이런 법회도 사실은 이것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의 힘이 있는 동안만 이런 것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 그 법회를 구성하고 있거든요.
첫댓글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만약에 진심이라면은 유와 무에 있으되,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의 입장에 처한다... 無影樹님! 감사드립니다... _()()()_
又妄心은 在有着有 하고 在無着無하야 常在二邊하야 不知中道 하나니 ...無影樹님 감사드립니다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無影樹님 감사드립니다...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만약 진심이라면 유와무에 있으되 유와무에 떨어지지않고 항상 중도에 처한다.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無影樹님! 고맙습니다. 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常處中道라...고맙습니다.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상처중도)라. .감사합니다.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스님!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대원성님 수정했습니다...감사드립니다... ... _()()()_
又妄心은 在有着有 하고 在無着無하야 常在二邊하야 不知中道 하나니.._()()()_
유와 무에 있으되 유와 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의 입장에 처한다... 항상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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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중도적인 삶........감사 합니다._()()()_
음과양이 서로 공존하는 중도의세계....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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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有着有하고 在無着無해서 常在二邊 ←미혹한 중생. 착한 것은 착한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그대로, 사실 대로 봐주는 이것이 중도입니다.’ _()_()_()_
'取捨之心이 成巧僞라:아주교묘 한 거짓을 이룬다. ' _()_()_()_
‘捨妄心取眞理하면 認賊將爲子:도둑을 오인해서 장차 아들을 삼는 그런 것을 만든다 이 말입니다.’ _()_()_()_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中道正見. 불교 공부에서 뭘 하자고 하느냐? 바로 보자고 하는데 있습니다.’ _()_()_()_
'菩提無發而發. 鑒無身而具相. 범소유상 개시허망 이니까 현상가지고 부처라고 보지 말라 그렇게 합니다.' _()_()_()_
'괜히 뭐 귀찮고 자비심이 없어 놓으니까, "뭐 말할 게 어디 있어. 입다물고 사는 것이 제일 낫지." 그런 것이 아라한 들! 주로 소승들이 그러는 것이고 되든 안 되든 자꾸 이야기를 해야 돼요. 자꾸 이야기 해주고 설명해주고 설득시키고' 마음에 심히 찔리는 부분입니다. _()()()_
‘莊嚴性空世界: 지워질 때 지우고 금방해서 다시 지우더라도 화장은 화장대로 또 가치가 있다 이거죠. 장엄은 장엄대로 가치가 있어요. 불교의 중도적인 그런 소견이 바로 들면 정말 삶을 아주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_()()()_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 ←罪性懺悔本空. 있다고 참회해도 잘못이고, 그냥 없다고 참회를 안 해도 잘못이고, 없는 줄을 알고도 참회하는 것, 참회 하고도 또 없는 것을 아는 것이 중도정견. 불교적인 바른 소견!’ _()()()_
_()()()_
無影樹님 고맙습니다 ..._()()()_
_()()()_
감사합니다..._()_()_()_
..무설이(無說而)! 말할 게 없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하는 것, 담전(談詮)! 가르침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데서 불교는 말이 많다. 그렇게 알면서도 또 말할 게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말할 것이 없는 도리를 알면서도 또 말을 많이 해야 돼요. 그래서 설명을 많이 해야 돼. .()()()
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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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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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心直說 - 無比스님 眞心直說 法門 錄取 第37講 (眞心無知)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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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是眞心인댄 居有無而不落有無하야 常處中道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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