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사회현상으로서의 과학과
과학기술복합동맹으로서의 황우석(김종영)」 비판
이덕하
2006-05-29
「복합사회현상으로서의 과학과
과학기술복합동맹으로서의 황우석」, 『역사비평 74호 - 2006년 봄호』
김종영 - 서강대학교 강사, 사회학
과학은
진리의 영역인가.. 1
윤리 문제 – 기독교 근본주의.. 4
전망과 대안.. 5
과학은 진리의 영역인가
김종영은 과학의 특별한 위치에 뭔가
시비를 걸고 싶어한다.
과학에 관한
가장 확고하면서도 깨지기 힘든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과학은 진리의 영역이고 과학자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82쪽)
그러면서도 그는 과학의 보편타당성을 인정하기는 한다.
과학적 행위의
최종결과물인 과학적 사실은 특정한 맥락에 상관없이 보편타당성을 지닌다.(82쪽)
김종영에 따르면 과학의 결과는 보편타당하지만
과학의 과정에는 온갖 인간의 약점이 개입할 수 있다.
과학기술학은
지난 30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과학현상이 진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물질적, 권력적 요소들이 결합된 영역임을 밝혔다.(82쪽)
즉 그들은 ‘진리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성공의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83쪽)
일단 “과학기술학[이] 지난 30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밝혀낸 것이 너무 뻔한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실험을 하려면
돈 필요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권력, 자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과학이 일상 생활이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과학자도 인간이고 인간은 가끔 사기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이런 뻔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설 때 김종영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
“과학은 진리의 영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은 과학을 미화한단다.
또한 이 말은
과학적 실행의 ‘과정’을 보지 않고 그 ‘결과’만을 봄으로써, 과학을 진리를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장소로 미화한다.(82쪽)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좋은 말이다. ‘과정’에는 위에서 언급한 돈 등이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김종영이 지적하듯이 ‘과정’에는
‘자율적 정화 시스템’도 관련되어 있다.
과학은 흔히
자율적 정화 시스템(self-correcting system 또는 self-policing system)이라고 불리운다. 실험의
과정은 과학자의 정직한 실행에 의존하고, 동료들은 그 결과를 신뢰하고 평가한다.(93쪽)
하지만 과학의 자율적 정화 시스템은 “과학자의 정직한 실행”에
의존하지 않는다. “동료들은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학의 핵심이다.
신도림역에 가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있는 신도를 가끔 볼 수 있다. 종교의 본질을 아주 잘 드러낸 말이다. 종교는 의심을 금지한다. 반면 과학에서 의심 빼면 시체다. 의심이란 곧 ‘신뢰하지-않음’이다.
과학이 특별한 이유는 극도의 불신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신도 똑 같은 실험을 해 본 후에야 믿는다. 과학에서는 ‘반복성’이
요구된다. 과학자들은 인간은 사기를 칠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과학이 특별한 이유는 이런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의 결과에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몇 번 실험 조작을 했다는 이유로 황우석이
매장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종교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 경전이나 종교 지도자가 헛소리를 했다는 것이 아무리 많이 밝혀져도 종교는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그냥 “믿어라”를 외칠 뿐이다.
“실험의 과정은 과학자의 정직한 실행에 의존하고, 동료들은
그 결과를 신뢰하고 평가한다”고 믿는 지극히 순진한 사람의 생각을 비판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김종영의 다른 글을 읽어보지 않은
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학과 사회를 분리하려는 사고, 목적중심의 사고, 환원주의적
사고, 과학현상의 다차원성을 모르는 사고가 참으로 위험하다는 것이다.(85쪽)
“환원주의”하면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에 대한 좌파의 비판이 떠오른다. 좌파는 사회생물학자가 “과학과
사회를 분리하려는 사고”에 사로잡혔으며 사회생물학이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이에 대해서는 「어느 극좌파가 본 사회생물학」을 보시오.)
또한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자들(라깡, 들뢰즈, 푸꼬, 알뛰세)의 과학 비판이 떠오른다.
그들은 과학이 완전하지 못함을 역설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완전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현대 철학(보통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린다)의 과학 비판은 몽매주의(비합리주의)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또한 그들의 과학 비판은 창조론자의 진화론 비판과 닮았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에 헛점이 많다”는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물론
헛점 많다. 문제는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의 헛점에는 민감하지만 창조론에 있는 엄청나게 더 커다란 헛점에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성경 구절 하나 들려 주고 싶다.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누가 복음 6장 42절, 공동번역)
과학을 비판하는 현대 철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에 의존한다. 진화론-창조론의 관계는 과학-프로이트의 관계와 비슷하다. 프로이트는 창조론 만큼이나 비과학적이다.(이에 대해서는 「어느 극좌파가 본 프로이트」를 보시오.)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회생물학의 관찰과 실험이 완벽하지 않다고 시비를 걸지만 원시공산주의론 같은 이론들에는 그런 엄밀성을 전혀 들이대지 않는다.
윤리 문제 – 기독교 근본주의
과학은 사회발전, 경제성장, 국인에 기여하는 도구라기보다는 환경, 건강, 인권, 삶의 질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성이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IRB[연구윤리심의위원회]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96쪽)
연구윤리심의위원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김종영이 위의 인용문에서
지적한 측면이다. 이윤에 눈 먼 대기업의 입김에 놀아나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위해 무기 산업에 봉사하는 과학자들에게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진보주의자들의
노력이 연구윤리심의위원회의 탄생에 기여를 했다. 또 하나의 측면은 기독교 근본주의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들이 줄기세포연구의 윤리적, 사회적
문제들을 계속 조명해서 보다 깊은 사회적 논쟁을 이끈 반면, 2004년 초부터 한국 언론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줄기세포연구를 조명했다.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줄기세포의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쟁은 한국언론에서 심도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98쪽)
노무현의 행보는 2005년 사이언스 논문 발표 직후에
있었던 부시의 걱정스러운 발언과 대조를 이루었다. 부시는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인간의 생명과 윤리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라고 해석했다. 노무현의 발언과 행보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로 점철된
줄기세포연구의 심각한 고민이 결여된 단세포적인 국가주의적 시각의 발로였다. 이는 종교적, 철학적 가치에 기반한 부시의 발언보다 더 위험하고 무지스러운 것이었다.(103쪽)
김종영은 생명과학
연구에 무비판적인 노무현보다 기독교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부시가
낫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도토리 키재기”라는 속담을 만들었다. 김종영이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너무 관대하다. 그는 부시의 종교적 헛소리를 “종교적, 철학적 가치에 기반한”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다. 철학이라고? 하긴, 종교 철학도 철학은 철학이니까.
“선진국에서 일어났던 줄기세포의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 대한 논쟁은 한국언론에서 심도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도 두 가지 모두를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건전한 시민 사회의 비판이 한국에서는 유럽과 미국보다 부족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미국보다 덜 설치기 때문에 종교적 시비(물론 시비 거는 사람들은 “종교적,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라고 하겠지만)가 덜하다.
종교 지도자들은 논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단지 인구의 상당 부분이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무지와 오만과 아집으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이 국가의 정책
결정에 개입할 자격이 있다면(미국에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점술을 믿기 때문에 점쟁이들도 국회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김종영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과학계에서는
권위주의적 실험실 문화, 연구원의 연구여건, 성과주의적 연구체계가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있다. 정부는 절차적 정당성과 시민의 요구를 무시한 위로부터의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경제계와 산업계는 과학기술의 과정과 성과를 경제주의적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언론은 감성적 민족주의의 위험성과 과학기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무지를 반성하고
있다.(110쪽)
과학계가 바뀌었다고? 여전히 교수들은 대학원생을 종 부리듯 한다. 정부가 바뀌었다고? 노무현은
여전히 시민의 요구를 무시한다. 경제계와 산업계가 바뀌었다고? 그들에게
여전히 이윤은 신이다. 언론이 바뀌었다고? 여전히 민주노동당과 <프레시안>은 건전한 비판을 하고 조중동은 민족주의적 선동을
멈추지 않는다.
김종영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구절들도
내용이 없다.
이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그들이 공론을 주도할 때에만 건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다.(101쪽)
실험의 성공을
위해 연구원들을 착취하는 문화가 계속되고 연구결과에 대한 동료 과학자들의 자율적 비판이 결여될 때, 과학부정행위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93쪽)
한마디로 “착하게 살자”는 설교 이상이 아니다. 대학원생들과 연구원이 교수의 종이 되는 이유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냥 교수더러
“그렇게 싸가지 없게 살면 못쓴다”는 식으로 설교만 한다. 교수-대학원생 관계의 이상적인 상(“착하게 살자”가
아니라 구조적인 상)을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선진국의 교수들도 그러는지, 만약 선진국에서는 종속 관계가 덜하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정도는 소개해 주었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김종영의 분석은 조중동이나
노무현 보다는 낫다. 우파가
설칠 때 진보주의자가 과학의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김종영의 글에서 “조중동보다는 낫다”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글은 뻔한 사실과 잘못된 주장(적어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주장)의 혼합 이상이 아니다.
내가 이 그의 글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1976년에
살충제와 제초제에 대한 수백 가지의 독성실험에서 IBT(Industrial
Bio-Test Laboratories)라는 회사는 데이터를 조작했다(94쪽)”는 등의 몇 가지 모르던 사실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