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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log.aladdin.co.kr/booktopia/1092098
◆ 코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말한다.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TP, 313)
코드의 변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잉여가치 같은 새로운 차원(평면)의 구성이 일어난다.(TP, 314)
◆ 환경
물질적 자연의 부분 중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반복, 즉 절대적 코드화는 없기 때문에 환경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변한다.
모든 환경은 진동한다. 구성요소의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구성되는 시공간의 블록인 것이다. 예컨대 살아있는 것은 물질(materials)로 구성된 외적 환경, 구성요소 및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내적 환경, 막이나 경계로 이루어진 중간환경, 에너지원이나 행위-인식으로 이루어진 병합환경을 갖는다. 모든 환경은 코드화되어있는데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나 각 코드는 항상 코드변환(transcoding, transduction)의 상태에 있다.(TP, 313)
환경은 혼돈(chaos)에 열려있다.
환경은 혼돈에 열려있다. 혼돈은 소진과 침입의 위협을 가한다. 율동(리듬)은 혼돈에 대한 환경의 대답이다. 혼돈과 율동이 공유하는 것은 ‘사이’이다. 두 환경의 사이, 율동-혼돈 혹은, 캐오스모스이다. (TP, 313)
환경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갖추어진 물질(formed substance)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형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코드이다.
형태와 물질(substance), 코드들, 환경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TP, 502)
* 주의: matter 와 substance의 차이
둘 다 ‘물질’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substance란 형태가 부여된 matter이다. “Substances are nothing other than formed matters."(TP, 41) 예를 들면, 잉크병에 들은 잉크는 아직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기에 (병의 형태는 별도이다) matter에 해당하지만 흰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굳어진 잉크--문자--는 substance이다.
◆ 층(strata)
코드들(환경들)이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층(strata)을 이룬다. 그런데 층을 구성하는 접합은 항상 이중접합(이중협격)이다. 접합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이다. 형식과 물질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에 내용과 표현은 실질적으로 구분된다. 내용의 접합과 표현의 접합에서 내용과 표현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물질을 갖는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상응관계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 구분이 존재하고, 상호 전제가 존재하고, 동형성(isomorphy)만이 있을 뿐이다.
- 층이 아니라 지칭이다. 어떤 물질적 환경들이 이중분절(절합, 접합)들이 하나의 지층을 형성한다. <천 개의 고원> 제 3장 도덕의 지질학에서 표현된 내용/표현의 지층들을 이중분절의 관점에서 설명한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로 옮겨진 SUBSTANCE는 그냥 실체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다.
◆ 코드화(coding), 위로부터의 코드화(overcoding), 탈코드화(decoding)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코드화란 반복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며, 탈코드화란 그 패턴의 소멸을 뜻한다. 위로부터의 코드화란 접합된 여러 코드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대표적 경우이다. 뒤에서 살펴볼 리조움(뿌리줄기)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은 위로부터의 코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 '위로부터의 코드화'는 초코드화로 탈코드화는 그대로 써도 무방할 듯싶다. 초코드화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의 초월적 코드(기표)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시된 전제군주의 신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코드화를 통해 여러 코드들은 하나의 초월적 기표, 즉 수목형 모델로 환원되고 통합된다. 단 리좀(구근식물-뿌리줄기)는 그런 초코드화를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 자체로 된다.
◆ 영토, 영토화
환경구성요소들이 방향성(직선의 모양을 상상할 것--강사)을 잃고 차원성(평면의 모양을 상상할 것)을 띨 때,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표현적이 될 때 바로 영토가 존재한다. 율동이 표현성을 가질 때 영토가 존재한다. 영토를 정의하는 것은 표현물들(matters of expression)(성질들)의 출현이다. 새나 물고기에 있어서 색의 예를 들어보자. 색은 내부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된 막 상태이다. 그러나 색은 일정한 유형의 행동(성적 흥분, 공격성, 도망)에 묶인 한에서는 기능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색은 영토적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영토화하는 표징--즉 서명signature--인 시간적 항상성과 공간적 넓이를 획득할 때 표현적이 된다. 문제는 색이 영토에서 예전의 기능을 다시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분명하다. 그러나 기능의 이러한 재조직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가 표현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임을 함축한다.(TP, 315)
영토는 실상 환경과 율동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율동을 “영토화하는” 행동이다. 영토는 환경과 율동의 영토화의 산물이다.
◆ 아쌍블라주(assemblage)
<영토와 아쌍블라주>
아쌍블라주는 환경으로부터 영토를 추출해냄으로써 시작한다. 모든 아쌍블라주는 기본적으로 영토적이다. 영토가 아쌍블라주를 만든다. 아쌍블라주는 영토적인 한에서 여전히 층에 속한다. 즉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는 면에서 층에 속한다.
- 영어로 아쌍블라주로 옮기는 불어의 Angencement은 배치로 옮기는 것이 좋다. <천 개의 고원> 제 10장 얼굴성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배치의 4가성이라고 지칭한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첫 번째 분할>
아쌍블라주가 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표현이 기호체계, 즉 기호의 체제(a regime of signs)가 되고 내용이 실제 행위의 체제(pragmatic system), 즉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 겪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semiotic system / pragmatic system)이 모든 아쌍블라주의 첫 번째 분할이다. 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 각 경우마다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비물질적 변환’>
진술 혹은 표현들(쉽게 말하자면 말해진 것--강사)이 몸들(물체들) 혹은 내용들(pragmata--강사)에 속성들로 “귀속되는”(attributed) 비물질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서는 나중에 들뢰즈>가따리의 언어이론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임--강사). 층에서는 표현들이 기호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들도 실제 행위(pragmata)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표현하고 실제의 일로 귀속되는 비물질적 변환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쌍블라주는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유효한 정도만큼 층에 속한다. 우리는 기호의 체제들과 실제 행위의 체제들을 그 나름의 층으로, 앞에서 언급한 광의의 의미의 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좁은 의미의 층과는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다. (TP, 504)
<층을 넘어선 아쌍블라주--두 번째 분할>
영토성(내용과 표현 포함)의 측면과 함께 영토를 가로지르고 가만있게 하지 않는,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이 선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선들은 영토적 아쌍블라주를 다른 아쌍블라주로 열어 놓는다.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에 직접 작용하여 그것을 태곳적부터 있었거나 장차 올 땅(land)으로 열어 놓는다(예를 들어, 독일 가곡에서 혹은 낭만주의 예술 일반에서 영토와 땅의 게임). 또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를 그것들이 발동시키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기계로 열어 놓는다.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은 환경의 일정한 탈코드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해서 확대된다. 코드가 탈코드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듯이 영토는 탈영토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요약>
아쌍블라주는 4가(價)적이다. 1) 내용과 표현 2) 영토와 탈영토화.
◆ 탈영토화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작동이다.
1) 탈영토화는 탈주선을 가로막는 보상적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질 수 있다. 이럴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재영토화로 쓰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대표”(stand for)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대상, 어떤 책, 어떤 기구나 체제를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구는 영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실상 탈영토화를 수행하며, 다만 이는 즉시 재산, 노동, 화폐에의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진다.
2) 탈영토화가 긍정적(적극적)이 될 경우. 바꾸어 말하면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누르고 재영토화는 이차적 역할만 하는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긍정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리는 탈주선은 구획되어 있고 연속적인 “절차들”로 나뉘며 블랙홀들로 가라앉고 심지어는 일반화된 블랙홀(큰 재난)로 끝나기 때문이다. 수동적 겪음(passion) 및 의식과 연관된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기호체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긍정적이다.
3) 절대적 탈영토화 : 절대적 탈영토화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절대적”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먼저 탈영토화, 영토, 재영토화, 그리고 대지 사이의 관계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영토 자체는 영토를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 영토적 아쌍블라주 자체가 다른 유형의 아쌍블라주들로 열려 있거나 그것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이다. 둘째, 탈영토화는 다시 상관되는 재영토화와 분리할 수 없다. 탈영토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항상 다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개의 형태들에 참여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특한 속도와 운동을 수렴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 요소”와 “탈영토화하는 요소”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제, 본원적 작용(original operation)으로서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탈영토화 자체에 내재하는 이 차별적 관계들을, 탈주선에 내재하는 이 다수성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땅은 탈영토화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이는 “the natal"의 신비에서 이미 보여질 수 있는데, 여기서 열렬하고 탈중심적이며 강렬한 초점은 영토의 바깥에 있으며, 탈영토화의 운동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빙하적인 것(the glacial)은 오히려 최고의 <탈영토화>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우주>에 속하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통해 우주의 힘을 따오는 물질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대지가 그 자체로 탈영토화의 엄밀한 상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자라고--단순한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땅과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로.
이것이 “절대적인”의 의미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나 무차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어진 (상대적인) 양들을 초과하는 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상대적인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운동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수적인(multiple) 것으로 간주된 “하나의” 몸(body)을 그것이 소용돌이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매끄러운 공간과 연관시킬 때 절대적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일자>로 간주된 몸을 그 몸이 움직이는 결이 진 공간, 비록 가상적일지언정 직선들을 가지고 측정하는 결이 진 공간과 연관시킬 때 상대적이다. 탈영토화는 두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탈주선을 방해하는 일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하거나 탈주선들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구획작업을 하는 이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할 때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다(그러나 이미 효과적이다). 탈영토화는 첫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 바꾸어 말하면 탈주선들을 연결시키고 추상적인 활력선(an abstract vital line)의 차원(power)으로 끌어올리거나 공존지속성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릴 때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는 그것이 초월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상대적 혹은 부정적 탈영토화도 작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대지를 위로부터 코드화하고 탈주선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결합시키는 대신에) 봉합하여 정지시키고 파괴하는 총체화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인 탈영토화에서도 한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환점에서 탈주선들은 방해받고 구획될 뿐만 아니라 파괴 혹은 죽음의 선들로 바뀐다. 여기에 걸린 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 속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다. 대지가 사방에서 에워싼 매장(埋葬) 및 자살 조직의 대상으로서 띠가 둘러지고 둘러싸이고 위로부터 코드화되고 봉합되느냐 아니면 대지가 공고화되고(consolidated) <우주>와 연결되며 생성들로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서 우주 속으로 넣어지느냐이다(니체의 표현: 대지가 빛이 되어라...). (TP, 508-510)
◆ 리조움
층뿐만 아니라 아쌍블라주들도 선들의 복합이다. 선의 첫 번째 상태 혹은 첫째 종류의 선을 밝혀 보자면 이렇다. 선은 점에 종속된다.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된다. 선은 형상적이든 아니든 윤곽을 구성한다.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은 결이 진 공간이다. 그것이 구성하는 셀 수 있는 다수성은 항상 우월하고 보충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일자(一者)에 종속된다. 이러한 유형의 선들은 몰적이며 구획된, 원형의, 이원적, 수상(樹狀)의 체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종류는 퍽 다른 분자적인 것으로서 “리조움” 유형의 선이다. 사선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부수거나 뒤튼다. 사선은 이제 윤곽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지점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을 그려내는데, 이 평면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차원들 말고는 다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구성하는 다수성은 일자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공존지속성(consistency)을 띤다. 이는 계급의 다수성들이 아니라 대중 혹은 무리의 다수성들이다. 규범적이고 법적인 다수성들이 아니라 변칙적이고 유목적인 다수성들이다. 생성의 다수성들이며, 변환의 다수성들이지, 셀 수 있는 원소들도 아니고 질서지워진 관계들도 아니다. 엄정 집합(exact aggregate)이 아니라 퍼지(fuzzy) 집합이다. (...)
그러나 일자와 다수적인 것(the multiple) 사이의 대립을 다수성들의 유형들간의 구분으로 대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유형간의 구분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으로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수성들은 나무모양이고 다른 것들은 아니라는 식이라기보다는 다수성들의 수상화가 존재한다느 것이 초점이다. 이것이, 리조움을 따라 흩어져 있는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할 때나, 그 줄기들이 (특히 얼굴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듯이)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결지어서 비교가능하고 분할가능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획들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중” 운동 혹은 분자적 흐름이 그것을 구획하고 정류(整流)하는 축적과 정지의 지점들에서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조움의 줄기들은 항상 나무에 작별을 고하며 대중과 흐름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고 나무를 뿌리뽑는 연관들을 창안하면서 항상 달아난다. 이것이 바로 공간을 매끄럽게 하기이며, 이는 다시 결이 진 공간에 재작용한다.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영토들이 이 심층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동요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의 나무들은 피는 눈과 리조움들에 의하여 뒤흔들린다. 그리하여 리조움의 선들은 그것을 구획하고 심지어는 결짓는 나무의 선들과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탈주 및 파열의 선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개의 선들로 구성되는데 각 선은 그 위험을 지닌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에게 동질적 공간의 결들을 부과하는 구획된 선들뿐만 아니라 이미 이 미시적 블랙홀들을 나르는 분자적 선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항상 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죽음의 선으로 전환될 위험, 순전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전환될 위험을 감수하는 탈주의 선들도 그렇다. (TP, 505-506)
◆ 기계, 전쟁기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기계론자(mechanists)들의 견해로서 이들은 단순히 부분들의 조립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활력론자들(vitalists)의 견해로서 이는 기계를 생물체에 동화시키거나, 생물체를 기계에 동화시킨다. 이 두 관점이 공히 가지고있는 문제점은 대상을 통일성(unity, 혹은 일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 가따리가 재구축한 기계 개념은 기술공학적 기계(,the technical machine, 상식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다수성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며, 통일성이 구현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영토적 아쌍블라주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탈영토화의 운동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나의 기계가 풀려나졌다고 말한다”(TP, 333)라고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기계 개념은 그 독특한 언표(enunciation)의 힘에 착목한 것이다. 언표란 예의 비물질적 변형을 일으키는 표현(말함인 동시에 행함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용--“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참조.
전쟁기계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양자의 발산이 목적인 기계를 말한다. 즉 변이와 생성이 목적인 기계이다. 전쟁은 변이가 아니라 변이의 실패이다. 전쟁기계가 변화시키는 힘을 잃었을 때 남는 유일한 목적이 전쟁이다. 이럴 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거나 그 자체를 국가기구로 구축한다. 파괴만을 하는 것으로
전쟁기계는 법과는 아주 다른 법(nomos)이다. 국가형태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며, 자기자신에 동일하게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서 전쟁기계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술적 창안뿐만 아니라 산업혁신에서, 종교적 창조뿐만 아니라 상업적 유통에서, 이러한 흐름들과 조류들은 이차적으로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도록 허용한다. (TP, 360)
◆ 블랙홀
이는 탈영토화가 폐쇄되는 경우이다.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계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를 발한다. 들뢰즈 가따리는 혁신적 과정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블랙홀로 떨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금제(inhibition)들이 서로 봉합되어 반향하면 공존지속성으로 열려져 나가는 대신에 아쌍블라주의 폐쇄가 일어난다. 마치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처럼. 들뢰즈 가따리는 기계란 항상 아쌍블라주를, 영토를 열고 닫는 독특한 열쇠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