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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강좌(성경의 힘) - 제42강 율법과 계명 1부
오늘은 지난 시간에 우리 ‘사명과 계명’을 다룰려고 했는데, ‘사명’이라는 이야기가 길어져서 ‘계명’이라는 이야기는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계명에 대한 이해, 기독교의 계명,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한번 살펴볼려고 하는데요.
구약성경 신명기 28장을 같이 보겠습니다. 신명기 28장 1절.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닌지 오래된 사람은 여러차례 들어본 말씀이죠.
그런데 그 뒤에 28장 2절 이하에 있는 복받는 이야기는 많이 듣고 또 거기에 관심이 있으면서, 그 앞에 바로 오늘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라는 말은 잘 안봅니다.
이게 아주 큰 문제죠.
그래서 우리가 계명을 잘 모르거나 안가르치거나 못가르치거나 행하지 못한다면, 여기 약속된 그 복이라는 것은 전혀 임할수 없는거죠.
우리가 지금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복받을수 있는 그런 비결도 계명도 가르치지 않고, 그냥 그저 단순히 예수 믿으면 ‘예수 믿으면’ 하는말도 정말 어떻게 믿는건지도 확실하지 않고 ‘교회 다니면’ 하는 이런 정도로 생각하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신앙과 삶이 거의 미신적인데로 흘러가도 기복적인데로 흘러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계명이라는 말씀을 좀더 심도있게 논의하고, 따라서 계명과 율법, 율법과 계명을 다시한번 정확하게 인식을 해야되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틀어서 계명이라는 단어를 찾아도 보고 어떤 계명, 어떤 율례, 어떤 율법이 오늘날 정말 폐해진 것인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인지 이런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거의 교회가 명확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말할 때 ‘계명’이라는 말은 “미츠와” 라고 하는데, ‘미츠와’ 굉장히 어려운 단어죠.
조금있다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 넘어와서는 “엔톨레”라고 하는, 헬라어로 엔톨레 이렇게 하는데,
우리말로 할때는 ‘계명’이라고 번역을 했고, 순수한 우리말로는 안되어서 한문글자로 계명(誡命) 이렇게 한 거예요.
영어로는 ‘Commandmemts’ 라면 ‘명령들’ 이렇게 되겠죠. 명령들.
그리고 일반명령을 우리가 계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계명이라고 할때는 보통 신적 권위가 있는,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할때, 이것을 계명이라 하지, 대통령이 무슨 말했다 할지라도 계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령’ 이정도죠.
계명이라 할때는 신적 권위가 있는,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일때만 그것을 계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미츠와’라는 말로 히브리어로 할때, 혹은 헬라어로 ‘엔톨레’라고 할때,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는 명령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절대적 명령..
그러면 우리가 사람의 명령도 중요하면 지켜야 되고, 대통령령으로 선포되어도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 된다면 하나님의 권위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런 계명이라면 우리가 먼저 정성들여서 살펴보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최대한 실천해야 되겠죠.
그렇게 할때, 복을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한편 우리가 우리 기독교가 조금 오해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것이기 때문에 계명이나 율법이나 행위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우리가 삶을 계명을 쫓아 살지 않고, 이 세상을 함부로 살고 너무 세속주의로 살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세상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전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사람들로 보지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큰 문제가 됩니다. 이따가 이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하고요.
일단 히브리어로는 ‘미츠와’라는 말이 많이 쓰여졌고 이것은 ‘차와’라고하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인데, ‘명하다’ ‘명령하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어떤분이 이것을 세밀하게 찾아서 명령을 챙겨보니까, 오경안에서 계명이나 명령이 몇 개되는가 살펴봤더니, “~하라”하는 적극적 명령이 248개, 그리고 “~하지말라” 하는 말이 365개, 이렇게해서 613조이다. 그렇게 해요.
제가 그 613조의 명령을 다 뽑아서 지난 몇일동안 고민하면서 체크를 해 봤어요.
오늘날 613조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절실히 필요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되겠다는 것과, 오늘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히브리인들에게만 그 시대 그 상황에서만 주어진 그런 말씀, 다시말해서 폐해진것과 폐하지 않는 것, 폐할수 없는 것을 분별해 봤더니,
지금도 그 613조 중에 지금도 우리가 지켜야 될 만한 것들이 약 230가지에서 250가지 정도.
그것은 제가 보는 견해니까 여러분은 조금 생각이 다를수 있겠죠. 그래서 시간나면 제가 뽑아서 다시 분류해서 오늘 우리하고는 직접 상관이 없고 히브리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든지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을 정리하고,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될만한 그런 법도 분류했으면 좋겠는데, 큰 작업이기도 하고 시간이 좀 걸릴겁니다.
그래서 지난번 강좌에 잠깐잠깐 언급한 것 같은데, 율법 혹은 계명중에 영원히 폐하지 않은 율법이 있고, 또 어떤 폐해진 지금 신약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폐해진 그런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님들로서는 어떤법이 폐해진 것이고, 어떤 것이 영원히 존속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설교나 강의를 들을때 또는 성경을 읽을때 상당히 혼란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적어도 그런 정도는 스스로 분별할수 있도록 정리가 될 것 같애요.
그리고 계명을 시행세칙으로 전부 조목조목 나누면 613가지가 되는데, 이것은 중복되는것도 많이 있습니다. 중복도 다 헤아려서 613가지라고 이렇게 헤아려서 기록했는데, 저는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기준도 아니고 보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법정신, 이런 것을 우리가 알면 조금 쉽게 이해할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율법이라는 것을 자꾸 우리가 해석을 너무 하는데,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도 그렇고 서기관들이 자꾸 과잉확대해석을 하고, 또 우리 신약시대 종교개혁 이후에도 주경학자들 신학자들이 자꾸 해석을 너무 많이 해서 단순한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어요.
성경을 보니까 모세도 어렵게 만든게 아니고 쉽게 하고 있고, 예수님도 성경책에 있는것보다 더 단순하게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 단순화해야 우리 삶에 실천할수 있어요. 자꾸 과잉확대해석을 하게 되면 실천을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해석 전체를 과잉해석하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요점, 핵심, 초점을 그 어떤 말과 글의 논지를 완전히 읽어내어서 누구든지 실천할수 있는 그런쪽으로 해석하는, 그런 해석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일 단순화하신 분인데, 하나님 말씀을 제일 단순화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있는 율법 전체를 두줄로 딱 줄입니다. 두줄로.
한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같이 하라.’
두줄로 예수님이 줄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해석 방법과 오늘 우리 신학자들이 하는 것은 많이 달라요.
강의를 들어가면서 점점 그런 것을 느끼실텐데,
예수님 말씀을 그 두줄을 더 줄이면 ‘사랑하라’예요.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느냐? 마느냐? 막 그것을 가지고 논하는데, 이런 ‘믿는다’는 말도 그것도 그렇게 석연치않은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해요. 안 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잘 모르죠.
그런데 헬라어라든지 히브리어로 봐서 그렇게 개운한 말이 아닙니다.
그 ‘믿음으로’ 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많이 쓰입니다. 구약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많이 안나오고 신약에 많이 나오는 말인데, ‘피스티스 피스티오’라는 말인데, 그것이 ‘믿는다’ 말도 되지만, ‘신실하다’ 하는말도 되고 ‘충성되다’도 같애요. 충성되다.
우리가 만약에 ‘피스티스 피스티오’ 라는 말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말과 ‘충성됨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말은 큰 차이가 나겠죠. 아직도 무슨 말인지 잘 안통하는 것 같애..
‘충성됨으로’ 같으면 거의 행동을 유발해야 돼요. 그렇죠? 그 마음과 행동이 동반될때 ‘충성됨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그냥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것처럼 해버리니까 윤리적인 삶이 거의 없을수 있어요.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하고 ‘오직 충성됨으로 구원받는다’ 해봐요. 아마 그랬으면 굉장히 충성할려고 노력했을텐데, 지금 오늘날 교회에서 충성하는게 잘 안보이는 것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마는 정도, 여기에 그치면 곤란하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한다’ 하는 의미도 있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해 놓으신 일과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그리고 미래에 약속한 것을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이런 믿음도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범하기 쉬운 우가 뭐냐하면, 구원받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어요.
구원받는것과 상관없으면 예사로 성경을 외면하는, 구원과 상관없는 구절과 어떤 부분은 습관적으로 외면하는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크게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명제는 역시 구원이죠.
그러나 ‘구원’이 다냐?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것은 완성이 아니고 출발이예요. 출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출발이예요.
그리고 그 뒤에 믿음으로 구원받았다할지라도 그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성화의 단계를 거쳐서 부활했을때, 그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 소망으로 약속으로 구원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확신한다고 하지만 그 확신을 누가 무엇으로 검측기계를 가지고 검증할수 있겠어요.
확신도 착각이 많으니까.. 구원의 확신한다고 하는데 착각도 있는거죠. 그것이 개인적인 주관적인 감정일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 계명을 쫓아서 살아가는 삶이 없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믿음 자체가 죽은 믿음일수 있기 때문에, 정말 그 사람의 삶이 계명을 쫓아서 경건을 연습하며 거룩한 모습 삶의 모습을 드러내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삶의 열매가 있느냐 이런것까지 살펴보고나서 말할 문제이기 때문에,
단지 그저 교회에 다닌다, 열심히 기도한다, 열심히 찬양한다, 아니면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적인 감정이 있다, 그런 것 가지고는 그렇게 안심할수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미츠와’라고하는 계명이라는 말은 181회 정도 사용되고요, 그리고 ‘차와’ ‘미’라는 말이 빠진 ‘차와’라는 말, 명령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계명이라고 할때는 우리가 보통 ‘미츠와’라고 하고, 그냥 명령이라고 할때는 ‘차와’라고 하는데,
‘차와’라고 하는 동사형으로 기록된 것이 ‘명하다’ ‘명하시다’ 할때는 485회. 그래서 181회 485회 보태면 666회예요.
명령, 구약성경에서 ‘명령하다’ ‘명령’ ‘계명’ 이렇게 한 단어가 다 뽑아서 히브리어로 된 것을 다 뽑아서 계산해보니까 666회나 명령하다 명하다 이렇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엔톨레’라는 말이 71회 정도 동사형으로 ‘명령하다’ 이렇게 ‘당부한다’ ‘지시한다’ 이런뜻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미츠와’라는 말을 헬라어로 ‘엔톨레’ 로 헬라어로 번역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신구약 통틀어서 ‘미츠와’ 혹은 ‘차와’ 혹은 ‘엔톨레’ 계명이라는 단어가 737회 정도. 이렇게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동안에 ‘계명’하면 우리가 기껏해서 ‘십계명’ 정도.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새계명을 주셨다’ 그런정도 외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까, 율법은 상관없다 이런식으로 구원파 비슷한 식으로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바울이 자기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면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학교다닐때 그런 것 있죠. 100미터 달리기라든지 릴레이라든지 이어달리기 할때, 빨리가기는 갔는데 누가 선 안으로 간거야. 그러면 앞에 도착해서도 상을 받지 못하는 거죠.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디모데후서 2장 5절 6절에 있는데, 아무리 우리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사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사명을 잘 감당한답시고 열심히 하는데도, 만약에 계명을 따라서 룰을 따라서 규칙을 따라서 사명을 행하지 않으면, 상이 없다는 거예요. 열심히 했는데 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명도 사명이지만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사명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 계명도 중요하다는 거죠. 계명.
만약에 어떻게 사느냐 계명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가 사명을 엉터리로 행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한국교회를 꽤 소란하게 하는 신천지 혹은 무료성경신학원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서 온갖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계명도 없이 이렇게 교회에 가서 아주 분열을 일으키는,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죠.
옳은 것이라도 법대로 해야되는데, 옳지도 않은 것을 하면서도 법도 무시하고 윤리도 없이 상식도 없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온갖 능력과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계명과 법도를 따라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상급도 칭찬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람이 천사의 말을 하고 온갖 인간의 방언을 다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고 계명을 따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울리는 소리와 꽹과리에 불과하고 소음에 불과하다’는 거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계명을 따라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고 계명을 따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거야.’
그래서 계명을 따라서 한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는데는 믿음만 필요하다고해서 기독교가 구원 한가지밖에 없는 그런 종교인것처럼 잘못 인식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윤리가 점점 희박해져서 최근에는 세계 도처에서 무신론자들, 이른바 하나님을 부정하는 그런 사람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영국 옥스퍼드에 진화 생물학자인 ‘리차드 도킨스’라는 사람이 ‘만들어진 신이다’. 신은 그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다고 이렇게 책을 써서, 이 책이 온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사서 보고 아 그래 맞다 하나님이 없구나 이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미국에 젊은 철학자 ‘샘 해리’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의 종말’, 혹은 ‘믿음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사람은 젊은 신진학자인데, 제가 그 책도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서 최근에 사서 읽어보고 있는 중인데, 한마디로 유치한 소리예요. 그런데 유치하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를 하면 참 좋아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그래서 그 사람은 이땅에서 불교를 빼고 모든 종교는 없어져야된다 이렇게 써놨어요. 불교는 그것은 종교가 아니니까 불교는 철학이고 점잖고 조용하니까 있어도 괜찮고, 나머지 절대적 신을 주장하는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 이런 투예요. 절대적 신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이 세상이 시끄럽다. 이런 얘기를 그 샘 해리라는 사람이 하고 있고,
그 다음에 역시 미국사람인데, ‘다니엘 데닛’이라는 사람이 ‘주문은 깨뜨려져야 한다’. ‘Breaking the spell' 이라면서 주문, 하여튼 성경이든지 뭐든지 사람들이 어떤 경전과 중얼중얼하는 주문들 이런 것은 다 파괴해야된다. '주문깨기'라고 하는 그런 책을 써서 이것도 아주 나왔다하면 다 밀리언셀러, 백만부 천만부나 팔리는거야. 하나님이 없다는 책이 나오면 날개돋힌 듯 팔려요.
영국의 저널리스트중에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신은 별로다' '신은 별로 위대하지 않다' 'God is not great' 라는 책을 썼어요. 이것도 지금 한국사람이 너무너무 좋아해서 무신론자들의 복음서처럼. 이렇게..
온 세상이 그저 하나님이 없다는 그런 글들이 나오니까, 그렇게 좋아하고 미친 듯이 책을 사서보고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그런 책을 쓴 사람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나, 우리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에 우리 삶으로써 우리 삶속에 우리와 동행하는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옛날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은 그 삶속에 하나님이 보여져서 그랄 왕이 찾아와서 ‘당신의 삶을 가만히 지켜봤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봤다’.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삶을 보고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라도 누구든지 이런일을 할수 없다’.
예수님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런 능력의 삶을 거룩한 삶을 보여줬는데, 오늘날 이런 무신론자들이 창궐한다는 것은 우리 그동안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 삶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왜 그렇겠어요?
그것은 첫째, 우리가 제가볼때, 첫째는 공부를 안 했어요. 공부를.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고 있고, 일반과학도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과학적인것도 세상사람에게 뒤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놀랍게도 내노라하는 과학자일수록 무신론이 더 떠들고 나와요.
과학공부 같은것도 제대로 시켰으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 과학자가 많이 나와서 믿는 과학자가 많아야 될 것 아녜요.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오늘날에 이상하게도 과학자들 중에 어설프게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거의 다 시원찮은 과학자들이 더 많이 나온다는 거예요.
최근들어 국제 무신론자협회라는 것이 있는데, 회원가입이 최근들어서 배로 늘어났다는 거예요.
아까 소개한 이런 책들이 난무하면서부터 기독교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고, 이런 무신론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무신론 학자들이 말도안되는 책을 도발적으로 발행하는데, 더 기가막히는 것은 이 하늘아래 수많은 신학교 교수님들 학자들 성경학자 목회자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책을 딱부러지게 반박하는 책을 한권도 못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가지 원인들이 많지만 그것은 그중에 하나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우리 삶에 함께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했다는게 큰 문제예요.
그래서 저는 다시, 그렇다고해서 제가 율법이나 계명을 강조한다고 해서 율법주의는 아닙니다. 저는 저보고 율법과 계명을 자꾸 강조하니까 무슨 율법주의가 나왔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가끔 있는데 저는 전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여러분 율법주의라는 말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율법주의 입니다.
저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정말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가 갚없이, 율법과 계명과 상관없이 우리가 구원받은것인데, 제가 드리는 말씀은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은 백성답게 거룩하게 사는 계명이 주어졌는데,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 이시간에 우리가 율법과 계명의 참된 의미도 좀 살펴보고, 그 목적도 그런 율법이 주어진 동기도 한번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볼때는 작금의 우리 신학교에서나 교수님들 이런분들이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 거의 함구하다시피 하고 있어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계명을 어떻게 가르치시고 배우고 실천할 것인가 이런것도 언급하는 분도 희귀한 일일 겁니다.
지금 우리 CTS나 CBS나 극동방송이나 여러 방송을 기독교 방송을 봐도 이 계명이라는 문제, 사명이라는 문제, 이런 것은 거의 잘 다루지 않고 있어요.
목회자들 세미나 같은데도 거의 교회 성장학, 리더쉽 훈련. 이런것밖에 없어요. 내용이..
정말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되겠고, 모든 세상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에 진리가 있는줄 알고 기독교인들의 삶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수 있도록 우리가 거룩하게 살자하는 그런쪽의 강의는 들어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근자에 와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주 어이없는 실수를 많이 하는데, 그런것도 조금 짚어보겠습니다.
성경안에 있는 계시라는 것은 그야말로 계시된 명령, 계명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가 들어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부인할수 없는 것이죠.
단, 신학자 성경학자 목회자 이런 사람들의 해석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겁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할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자가 무슨말 했다. 이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돼요
아무리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그 학자의 학설은 상대적인거예요. 절대적인게 아니고.
제가 하는 얘기도 그냥 분별없이 따라올게 아니고 생각을 해보자고요. 같이.
지금까지 기독교가 소홀이 하거나 등한시해왔던 율법에 대해서도 거의 명확한 진단도 없이, 명확한 개념도 없이 그냥 율법은 그저 구원과 상관이 없다. 이렇게 하면서 무관심속에 흘려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큰 문제라는 거죠. 제가 볼때는.
성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들 까지도 신학자들까지도 율법이 주어진 그 동기와 목적, 더 나아가서 율법의 기능과 유익에 대해서 거의 인식이 잘 안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그러니까 가장 기본적인 개념, 생명, 사명, 계명..
이런 주제에 대해서 너무 그동안에 소홀히 했어요.
자 이제 어떤 실수를 하느냐 하면,
첫째, 어떤분들이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 할때, 그것을 율법을 성취했다 이렇게 설교하거나 설파하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성취합니까?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 하는 것은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꾸준히 예언되어왔던 예언들이 성취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예요.
예언들이 성취된 것이지, 언약에 포함된 약속들이 성취된 것이지, 율법을 성취했다. 어떤 성도들이 예수님이 율법을 성취하셨으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말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했다는말도 말도 안되고, 율법을 성취했으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킬필요가 없다 하는것도 말도 안돼요.
그러니까 이런 말들이 예사로 입에 흐르는 것을 보는데, 큰 오류가 되겠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런말도 많이 듣죠? 안듣는 것 같애 보니까, 제게는 그런게 많이 들려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은 예수님 혼자 지킬려고 완성하신게 아닙니다.
그 말은 그렇게해서 완성된 율법은 모든 성도들이 그 율법을 지키라고 완성한 거예요.
여기서부터 목에 걸리죠? 율법을 지키라.
제가 또다시 위험이 뭐냐하면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구원받은 백성답게, 구원받은 백성을 성도라고 해요. 성도.
성도라는 거룩한 무리들인데, 거룩하게 사는 법칙으로 주어진 율법이라면 성실히 지켜야 돼요.
그렇게 성실히 지켰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거룩하게 비춰졌을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세상만민이 봤을텐데,
전혀 우리가, 율법은 유대인들도 못지켰고, 그저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저 예수님께서 성취하셨으니까 우리는 안 지킨다고.. 그러면 율법은 아무 쓸모없는 것 아녜요?
율법 무용론자 율법 폐기론자는 처음부터 이단이었습니다
기독교 종교개혁시대부터 율법 무용론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들이예요.
오늘날 실천적으로 실제적으로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율법 무용론자들처럼 살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더 생각해 봅시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직접 그 언약에 가담된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시내산 언약이라는 것은 유대인들과만 맺어진 거예요. 그것은 맞는 말이예요.
그런데 그것을 읽어보면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율법의 수준은 수준이 한단계 아래예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을 한단계 끌어올려서 적어도 우리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라면 이정도의 윤리적 수준에 도달해야된다 하고 한단계 끌어올려서 굉장히 수준을 높였어요.
그래서 ‘옛사람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면서 항상 한단계 높게 이렇게 쭈욱 말씀하신 다음에, 그렇기 때문에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만도 못해가지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게 예수님 하신 말씀이예요.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말씀 하신거예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게 뭐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말씀 다시말하면 산상보훈속에 담겨있는 고도의 윤리를 보면,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되는 겁니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에..
여러분 초대교회가 불과 몇 퍼센트밖에 되지않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뒤집어엎어서 기독교 나라를 만들었던 것은 그 산상보훈을 문자대로 실천했기 때문에 그런 파워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볼때 흔적을, 산상보훈적인 삶이라는 것은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어서 과연 행함이 없는 이 믿음이 능히 우리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 돼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수 없다는 거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설교도 가끔 듣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이제는 그 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구약시대에 기록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복있는 사람’을 말할 때,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뭐안하고 뭐안하고 안하는 것 말고, 뭘 하라느냐 하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한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묵상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큐티만하고 앉아있고 그러면 안되고, 묵상하고 그것을 깨닫고는 즐거워하면서 실천하는 사람 행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거예요. 그게 복있는 사람이예요.
율법을 보는 안목이 열린 분들에게는 율법이야말로 이땅에서 복을 받을수 있는, 나 자신을 복되다고 또 다른사람까지 복되게 하는 그런 법이 율법이예요.
우리가 지키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래서 우리가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힘쓸게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힘써야돼요. 거룩한 성화를 위해서는 전심전력을 해야되고, 우리의 진보를 위해서는 전심전력하여 너희 진보가 모든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거예요.
그냥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길길이 뛰면서 율법도 계명도 무관심해버리고, 사는 것은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고 아니면 세상사람보다 더 세속적으로 살고.. 그래가지고 그 믿음이 정말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그 믿음이..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사실 기독교가 아니고 기복교.. 복을 기도하는 기복교로 전락한 거예요. 어디를 가나 오나가나 복받는 이야기밖에 안해요.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많은 복들은, 레위기에 기록된 신명기에 기록된 혹은 민수기 창세기 출애굽기 오경에 기록된 여호와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지켜 행할 때,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신것이거든요.
그런것은 한치도 안 가르치고 복을 받겠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그런 설교하는 사람도 잘못된 거예요.
만약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결론을 똑같습니다. 일반 세상적인 생각이라 해도..
만약에 옛날에 초창기에 있던 교통법규라는 것은 아주 내용이 간단하고 미흡했어요.
그래서 최근에 와서 여러 가지 교통법규가 많이 보완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통법규가 완성되었다면 다 지킬 필요가 없습니까? 교통법규가 다 완성되었으니까 지킬 필요가 없다 그래봐요. 이사람은 아마 정신병원에 가든지 무슨 수가 나야죠..
교통법규가 완성되었으면 성실히 지켜야죠. 그래야 사고가 덜 나죠.
율법이 완성되었으면 우리가 성실히 그것을 지켜야 됩니다. 그것을 자꾸 구원에 결부하지 말고 구원받은 후에.
구원받은 후에 구원과 상관없이 거룩한 삶을 위해서 경건한 삶을 위해서 복스러운 삶을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현저하게 경건한 모습으로 세상사람들에게 비춰졌을 겁니다.
이문제를 이렇게 중요한 문제로 안 다루고, 그냥 복받는 얘기만 하는데, 복받게 가르치지를 않고 복받게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을 받는단 말입니까.
교통 사고를 내지않으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생명과 재산과 소중한 시간을 많이 유익하게 확보할수 있는거죠. 보존될수 있는거죠.
예수님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5장 17절. 거기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거예요. 불완전하다는 것은 윤리적 수준이 너무 낮았어요. 구약성경에 있는 윤리적 부분을 보면 수준이 낮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단계 더 끌어올려서 더 높은 수준까지 예수님께서 율법 중에서 윤리적인 면을 더 보강한 겁니다. 다른 것은 구약에 있는 것으로 충분해요. 그러니까 윤리적 측면에서 많이 보강되었습니다.
17절에는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또 19절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가르친다’는 것은 벌써 예수 믿은 사람이겠죠.
여러분 성경을 가르친다든지 율법을 가르친다든지 할때, 더러 빼먹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단 가르친다는 것은 예수 믿으니까 가르치는데, 천국 가기는 가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 받을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구원받은 후에 말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믿음으로 은총으로 구원받은 후에 이것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크다는 거예요. 가르치다가 빼먹기만 해도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 것이고, 행함이 있어야 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요한복음 10장 35절에 예수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 하셨다.
여러분 정말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정말 그래도 순종하고 즐거워하면서 억지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하기는 행하는데 억지로 하고 외식으로 행하니까 다 행했지만 상도 없고 칭찬도 없고 영광도 없었어요. 오히려 예수님께 독사의 새끼들 그런말 들었죠.
율법을 정말 정성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옳지 않은게 없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가끔 율법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오해가 있는데..
바울이 한 말 보세요. 로마서 3장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율법이라는 것은 그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루터같은 분이 그런 얘기를 한 거죠. 율법은 단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심히 죄인되게, 죄를 깨닫게 하는데만 역할이 있었다. 이렇게 루터가 주장 한겁니다.
물론 칼빈은 거기에 반대하는 거죠. 칼빈은 그렇지 않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기도 하지만 성화의 채찍으로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칼빈은 한 걸을 더 나아갔죠.
만약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보완하여 완성시킨 목적이 폐하기 위해서 완성시켰다면 말이 안되죠.
폐할바에 완성할 것도 없이 그냥 폐하면 되는거죠. 왜 율법을 예수님께서 완성을 했겠어요? 보완하고..
폐할 것 같으면 뭐할려고 더 보완해서 완성을 하느냐고?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전혀 심도있는 논의도 없이 그저 ‘오직 믿음으로..’ 여러분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예요. 그런데 거기다가 루터가 ‘오직’이라는 것을 붙인 거예요.
그리고 ‘오직 성경’이라 할때, 그것은 외경을 제외했다는 말이고 외경을 빼고, 아니면 교황의 무슨 전승 전통 이런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이라 하는 것이고, 오직 은총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예요. 구원에 관해서는 그래요.
구원에 관해서는 정말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총으로 받는 것이고 성령의 충만함 받으라. 그말은 맞지만, 우리 기독교는 구원이 다가 아니고, 구원은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선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성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세상을 복되게 하는데 있어서 율법과 계명과 법도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생각이냐?
종교개혁자들 시대부터 율법 무용론자들은 처음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고 말씀 드렸죠? 여기에서 우리가 좀더 성실하게 율법에 대해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어떤 오해에 휘말려서 착각하게 된 것은 바울이 쓴 어떤 구절들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 거예요.
바울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룰때,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어요.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예요.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된 것은 율법 생기기 전 430년 전이었어요.
율법이 없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나님에게 돌아올수 있습니다. 율법을 한치도 몰라도 율법이 뭔지 몰라도 하나님께 돌아올수 있어요.
거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수 없고, 저도 전혀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애요. 문제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간 후에 이야기인데,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지켜서 거룩하게 그리고 복되게 살라는 거예요. 구별되게, 거룩하게라는 말은 구별되게 그리고 복되게..
여러분 이 율법이 복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서 뒤로 넘어질 사람이 있을텐데, 우리는 그저 율법하고는 항상 원수인것처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율법을 잘 보면 율법속에 복받는 비결이 있어요. 율법이 복음이야.
그것은 나중에 설명을 해야만 납득이 될텐데, 아마 이 강의를 들으면서 많이 혼란스럽다 싶을텐데, 조금있으면 혼란이 풀어지고, 율법속에 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땅에서 복받는 비결은 거의 율법에 있어요.
영원히 복받는 비결은 대개 신약에 있습니다만 이땅에서 이생을 살동안에 복받는 비결은 거의 구약에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율법을 논하는 사람은 율법이 처음부터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이후의 문제라는 사실을 잘 인식을 못하고 있어요.
율법이라는 것이 구원 이전의 문제가 아니고 구원 이후에 거룩한 삶을 위한 법이라는 것, 복된 삶. 그러니까 삶을 얻고 복을 얻는 법이다. 그리고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이렇게 율법을 규정해요. 성경자체는 그렇게 규정하는데, 율법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내실 때, 너희가 율법을 다 지키면 내가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유월절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리고 양고기를 먹고 모세를 따라 믿음으로 그냥 나와요.
그냥 은총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 해서 다 된게 아니고 아무런 훈련이 안 되었어요. 다만 애굽에서 나왔을 뿐이지 전혀 성화도 안되었고 훈련도 안되었기 때문에, 애굽에서 믿음으로 은총으로 값없이 나온 사람들을 선민답게, 제사장 나라 백성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훈련을 위해서 레위기라는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시내산에 와서.
이를테면 비유컨대 구원받은 후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거룩한 삶의 훈련 교본으로 삶의 원칙으로 구별된 삶의 원칙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레위기가.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구원받는게 아니고 복을 받아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땅에서 복을 받고 싶은 사람들, 복스러운 삶을 살기 원하는 분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원하는 분들, 우리 삶이 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구약에 있는 율법 플러스 산상보훈,
그리고 바울서신 속에 대개 앞부분은 교리편이고 뒷부분은 윤리편 실천편인데, 그런 실천적인 것을 잘 살펴봐야되요. 한번 그런 부분만 전부 뽑아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것인가 하는 문제를 한번 따로 정리할 마음이 있습니다. (2부에 계속...)
[정리]
◎ 계명(誡命) : Commandments
[히] 미츠와(mitswah), [헬] 엔톨레(entole)
◎ 계명의 사전적 의미
- Commandments 권위 있는 자에 의해 말해진 권위의 말씀, 또는 명령.
따라서 이것은 의례 하나님에 대해서 씌어지고,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나 율법을 가리킨다.
- [명령을 준다, 지정한다, 위임한다]는 의미를 어원(語源)으로 가진 히브리어의 [미츠와-],
헬라어의 [엔톨레-]가 대표적인 용어이다.
- 구약에서는 모세 5경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율법 및 십계명을 일반적으로 가리키고,
신약에서는 예수에 의해 요약된 두 가지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마22:35-40,막 12:28-34,눅 10:25-28, 신 6:5, 레 19:18)는 것이 현저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계명은 [사랑하는 일]이다. (요 13:34,14:15,21).
◎ 신구약 전체에 ‘미츠와’ ‘차와’ ‘엔톨레’ 사용된 횟수 : 737회
- [미츠와]-구약에 181회 인용,
- [차와] (계명,명령,규례의 동사형) - 구약에 485회 인용
- [엔톨레] (헬라어 명사로 계명, 명령) - 신약에서 71회 인용
◎ 율법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오해
- 율법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희귀하여 많은 성도들은 갈등하고 있음
-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많은 신학자들은 율법과 계명에 대하여 함구 하고 있음
- 성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까지도 율법이 주어진 동기와 목적, 더 나아가 율법의 기능과 유익을 거의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
-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것은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꾸준하게 예언되어 왔던 그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 이는 율법과 관계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예언들이 성취된 것이요, 구약 즉 옛 언약에 내포된 약속들을 성취하셨다고 말해야 합니다.
2.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
-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 완성된 율법은 모든 성도들이 그 율법을 지키라고 완성하신 것입니다.
- 율법을 완성하셨다면 이제는 그 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 율법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지켜야 하는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후에 지키라고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 율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처음부터 구원 이전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구원 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원리로써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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