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창곡-
사람마다 즐겨 부르는 애창곡(일명 18번)이 몇 곡쯤은 있을 듯하다.
어차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 잘 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끼리
끼리, 아니 어떤 경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끼리도, 어울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이런저런 인연으로 모임이 있을 터이고, 때가 되
어 먹고 마시고 나면 그 다음 코스는 십중팔구 노래방이 아니던가. 세태가
그러니 구제불능의 음치가 아닌 담에야 애창곡을 미리 준비해 두기 마련이다.
나 또한 갑남을녀 중의 한 사람이니 나름대로 그 분위기에 맞을 듯한 노래,
애창곡을 몇 곡 상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바야흐로 꽃피고 새우는 화창한 봄날이다. 도시의 가로변에, 공원과 정원에
그리고 산과 들에도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시절이다.
그러나 화사하고 아름답던 모습도 잠시, 머지않아 만발하던 꽃은 어느덧 시들
어 떨어지고 찬란한 봄날은 가려니 나의 애창곡,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부르는
노래!
봄날은 간다/ 노래 백설희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
이 곡은 한국가요 100년사에 *100인의 시인들이 뽑은 ‘ 좋아하는 노랫말 1위
곡’이다. 그것도 다른 곡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1위이다. ‘봄날은 간다’
는 1953년 한국전쟁 직후에 여가수 백설희가 부른 노래이다. 손로원이 가사를
쓰고 박시춘이 작곡했다. 백설희(1927~2010)는 당대 최고의 디바(인기 여가
수)로서 남편은 배우 황해, 아들은 가수 전영록이며, 주요곡 ‘봄날은 간다’,
‘물새 우는 강언덕’, ‘하늘의 황금마차’, ‘샌프란시스코’ 등을 불렀다, 작사가
손로원은 일제 치하에서 한 줄의 가사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가 해방이 되
자 ‘귀국선’을 필두로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주요작으로 ‘물레방아 도는
내력’, ‘비 내리는 호남선’, ‘홍콩 아가씨’ 등이 있다. 작곡가 박시춘은 가요계
의 거목으로서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선야곡’
등 히트곡만 300여 곡이 넘는 명실 공히 한국 최고의 작곡가이다. 또한 이 곡은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 등 절정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남녀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2001년 허진호 감독(주연 이영애, 유지태)에 의하여 영화화까지
된 걸 보면 아직 봄날은 다 가지 않은 모양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음주가무(飮酒歌舞)-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춤 -를 좋
아했던 같다. 그런 조상의 빛난 얼을 이어받았음인지 오늘날에도 전국 곳곳에
노래방이 성업 중이지 아니하던가. 어린 시절에 나는 삼촌이나 형, 누나들이
부르던 유행가를 곧잘 따라 부르곤 하였다. 물론 그 시절이야 유성기는 고사하
고 라디오도 제대로 없던 때이니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그냥 귀동냥으로 배우
는 게 고작이었으나, 어떤 노래는 불과 두세 번만 듣고도 금방 배워서 부르곤
하였다. 신기한 건 아직도 그 노래들을 기억 -가사나 곡이 일부 부정확하거나
제목을 모르는 곡도 있음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자랐던 나
는 이름 없는 야산일망정 봄이면 산과 들에 진달래, 개나리가 피었을 테지만,
내 눈 속에는 들어오지 않았음인지 봄꽃들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들의 울음소리는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노랫말 1위곡 ‘봄날은 간다’, 한국 가요 사상 최고
의 황금 트리오-박시춘 작곡, 손로원 작사, 백설희 노래-가 빚어낸 걸작 ‘봄
날은 간다’를 나는 감히 ‘불후의 명곡’이라 부르고 싶다.
이 노래야말로 한국적인 정서와 애환, 특히 한국 여인의 정과 한을 가사는
물론 멜로디에도 가장 잘 표현한 걸작이라고 본다. ‘연분홍 치마, 새파란 풀잎,
봄바람 그리고 산제비와 성황당 길.....',어느 것 하나에 정감이 가지 아니
하랴! 허나 맹세도 기약도 헛되이 화려한 봄날은 속절없이 가더라 .....
가요계의 영원한 디바, 백설희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기도 한 이 곡은 그녀의
꾀꼬리 같은 미성에, 특유의 창법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른지도 어언 50여 년-창력(唱歷) 반세기-, 처음에야 의미도
뜻도 모르고 읊조렸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부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곤 한다. 가는 봄을 따라
세월도 함께 따라갈 테니 해가 갈수록 다시 오는 봄을 맞을 기약이 엷어짐이
서글퍼서일까.
이 화사한 봄날에,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오늘도 나는 ‘연분~홍 치~마가 ....
봄날~은 간~다’를 나지막이 불러본다.
(끝, 2010.5)
* 2005년, 계간 ‘시인세계’에서 한국 가요 100년(통칭)을 맞이하여 100인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 설문조사 결과.
*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에 백설희님은 지상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님은 불후의 명곡 ‘봄날은 간다’를 남겨놓고 이 봄에 우리 곁을
떠나갔으나, 가요계의 영원한 디바로 전설이 되어 남으리라 믿습니다.
첫댓글 애잔한 감정을 살짝 건들이는 애수의 노래인 줄 압니다만 그렇게 인기 높은 애창곡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