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장영신이 되자.’ 남편이 타계한 뒤 온갖 어려움을 떨치고 오늘의 애경그룹을 일군 장영신 명예회장처럼 아내에서 경영인의 길로 180도 변신하는 여성기업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말이 쉽지, 경영에 전혀 손대지 않다가 한 기업의 운명을 손아귀에 쥔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은 당사자에겐 지극히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정은 회장이 경영권에 대한 도전을 물리치고 새 현대그룹을 일궈가듯 이들은 저마다 또다른 길에 과감히 도전하고 있다.
대신증권 이어룡 회장은 한가위 직전 별세한 남편 양회문 회장의 뒤를 이어 전격적으로 새 선장이 됐다. 이회장은 양회장의 유언으로 경영을 맡게 됐다. 아들들(장남 홍석 23, 차남 홍준 21)이 너무 어린 데다 최근 증권가에서 M&A설이 도는 등 경영권이 흔들릴 것에 대비해 양전회장이 가장 잘 알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이회장을 발탁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회장의 경영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회장은 남편의 사후에 대비, 지난 3년동안 집중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은 ‘준비된 경영인’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다 대신증권이 김대송 사장을 중심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한 데다 시아버지이자 창업자인 양재봉 명예회장이 살아 있어 이회장의 입지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단단하다는 게 대신측의 말이다.
그동안 주부로 바깥 활동을 별로 하지 않은 이회장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소탈하고 강단이 있으면서도 계수에 밝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회장은 특히 취임사에서 단호하게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대신증권의 전통과 명예를 지키고 한단계 더 발전시킬 것”이라고 밝히는 등 양회장 사후 증폭된 M&A설에 쐐기를 박기도 했다.
울트라건설(옛 유원건설) 박경자 회장은 여성경영인으로는 보기 드문 거친 건설업계에서 ‘어머니의 강인함과 섬세함’으로 새 기업문화를 가꾸고 있다. 지난 5월에 타계한 남편 강석환 전 회장에 이어 6월24일 회장에 취임한 그는 사회활동가로 일하면서 쌓은 활동력으로 회사를 지휘하고 있다. ‘건설전문 경영인’인 강전회장은 그동안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일을 벌였다. 하지만 박회장은 적극적으로 공사 수주에 나서되 반드시 회의 등을 통해 수익성을 따지는 등 철저히 내실을 추구한다는 게 다르다.
박회장은 회사에서도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회사를 이끌어나가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여자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최근 열린 직원 모임에서는 손수 마련한 깻잎 등 밑반찬을 나눠주고, 여름에 직원들의 보약을 챙기는 섬세함으로 강전회장 사후 흔들린 회사 분위기를 다잡았다.
하지만 업무 처리는 사회복지법인 ‘한국 여성의 집’ 관장, 대학강사 등을 지내면서 닦은 경험을 바탕으로 매섭기 짝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에서는 궁금한 것은 끝까지 캐묻고 제대로 답변을 못하면 호되게 나무라는 등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최고경영자로서 비교적 짧은 시간임에도 거센 풍랑을 헤쳐나오면서 노련미를 갖춘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지금도 취임 초기처럼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상대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고 있다. 또 계열사들의 주요한 현안도 전문경영인들에게 믿고 맡긴다.
하지만 자신의 결정이 필요할 때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들어 내리되 한번 결정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회장은 평소에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면서 “추진력은 엔간한 남자 경영인보다 힘차 여성이자 최고경영자로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대단하다”고 전했다.
경영권 분쟁때 대다수 임직원들이 불안하고 힘들어 하는데도 현회장은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풀리고, 순리를 따르면 이긴다”고 격려하면서 위기를 돌파했다.
현회장은 자신이 직원들에게 현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불어넣는 구심점으로 자리잡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난 8월 그룹의 비전 선포식 장소를 서울 전경련 회관으로 선택하고, 5년동안 중단된 신입사원 수련회를 금강산에서 연 것도 현회장의 뜻이었다.
임원들은 시내 호텔, 코엑스 등을 건의했지만 현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내실이 있으면서도 임직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전경련 회관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 전성기에 10년이 넘도록 전경련 회장을 지내고 대북사업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 정주영 창업주의 뜻을 기리고 이어받자는 취지였다.
현회장은 평소 말이 적고 조용하다. 하지만 금강산 수련회에서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멋드러지게 부르고 신입사원들과 어울려 춤을 춰 임직원들을 열광시켰다. 수련회에 현대그룹이 창업주 시절 해수욕장에서 빼놓지 않은 씨름을 넣기도 했다.
어느새 그룹 회장으로서 자신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업계의 평이다. 여기에는 최근 해운업의 호황을 바탕으로 주력기업인 현대상선이 뛰어난 경영실적을 올린 것도 한몫하고 있다.
대한전선의 양귀애 고문(57)은 지난 3월 남편인 설원량 전 회장이 별세한 뒤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오너로서 큰일을 챙기고 있다.
양고문은 재무 출신의 임종욱 사장을 중심으로 한 전문경영인 체제를 뒷받침하면서 1주일에 2~3일씩 출근해 주요 경영상황을 보고받는 등 오너를 대표해 조정자 역을 맡고 있다. 사내에서는 양고문의 ‘뜻하지 않은 외출’을 현재 국내 및 해외의 대학에 재학중인 아들들을 대신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양고문은 그동안 사회 활동을 하거나 경영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여동생으로, 설전회장의 아내로서 보고 닦은 경영자로서의 경험과 능력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