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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진돗개 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Gs야초(김해)
옛날에 한 이발사가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님의 머리를 깎고 그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누가 믿어 주지도 않을 것 같은 말, 또 잘못 말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그 말을 하려고 대나무 숲에 대고 혼자 외쳤다.
그 말은 메아리가 되어 여러 사람이 알게 됐고, 진실이 알려진 것에 대노할 줄 알았던 임금님은 의외로 마음의 문을 열고 모자를 벗었다. 임금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서 본인은 열등감에서 벗어났고, 이발사도 목숨을 건졌으며 임금님의 당나귀 귀를 본 백성들도 모두 즐거워했다는 동화가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위에 나온 이발사가 되려고 한다. 이발사가 죽고 사는 것은 임금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발사는 임금님의 인격과 지혜와 자비를 믿을 뿐이다.
남의 나라 개도 한 눈에 구분할 수 있는데 제 나라의 천연기념물이면서 수십 년이나 기른 개의 품종을 외형을 보고서 개인이나 협회 간에 순종과 잡종, 좋은 개와 덜 좋은 개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오죽하면 수십 년을 진돗개를 연구하신 분이 진돗개는 '자연'이라고 했을까?
외국의 개들은 똑같은 두상과 체형을 가지고 있어 누가 보아도 한 품종의 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 진돗개만은 다양한 두상과 체형을 가지고 있어, 그 천태만상의 개들이 모두 같은 재래종 진돗개라는 것을 배우고 우수한 개를 알아내는 감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애견과 함께 하는 생활은 그 개의 품종이 어느 것이 되었던지 주인에게 즐거움을 준다. 우리나라 토종개인 진돗개는 그 애견가들에게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진돗개는 매력이 있는 개다. 한국의 토종개이면서 갖고 있는 우수한 품성과 성능이 그렇고, 알면 알수록 궁금한 점이 많다는 것이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깊이 빠지게 하는 매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 궁금증을 풀어가는 글을 하나 쓰고 싶었다. 이 글이 읽는 분들에게 진돗개는 난해한 개가 아니고 쉬운 개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면 나는 가장 보람있는 일을 한 것이고, 진돗개의 원형을 찾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만족하겠다.
진돗개의 원형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진돗개가 외국 개들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개가 아니고 고대부터 내려오는 자연 그대로의 품종이기에 그 원형의 모습을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근거에 의해 유추해 놓지 않으면 '순종'이라는 말의 사용에 스스로 겸손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진돗개가 언제 어디서 온 개인 것을 모르면 '순종'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고 본다. 세계적인 개들의 대부분이 어느 계통의 개에서 갈래를 이룬 개라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천연기념물인 진돗개가 언제 어느 계통에서 나온 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민족처럼 가문의 족보를 기록해서 대대로 물려주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가 유일하다.
유럽에는 왕족이나 귀족 가문에는 족보가 있어도 일반 가정에는 족보 같은 것이 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개품종의 족보는 갖고 있다. 우리는 명색이 천연기념물이라는 지극히 사랑하는 진돗개에게 족보를 못 만들어 주었다. 진돗개의 생김새를 보나 성품을 보나 이 개의 종자가 평범한 가문이나 잡스럽게 여러 가문의 온갖 혈통이 혼혈된 개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퇴화되지 않은 어느 고대견의 혈통에서 나온 뼈대있는 개일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진돗개의 우수한 조상을 찾는 여행을 떠나서 사랑하는 진돗개의 자랑스러운 족보를 만들어 주자. 사람도 명문 혈족의 가문에는 훌륭한 족보가 있다. 개에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명견의 품종은 반드시 우수한 계통의 조상견을 가지고 있다. 진돗개가 근본을 모르는 개인 상태로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것은 진돗개를 사랑한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경우도 관상 보는 법으로는 민족의 원형을 찾을 수 없다. 민족의 원형을 찾는 일은 학자들이 여러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기 때문에 진실에 근접할 수 있고 많은 분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진돗개의 원형을 찾는 일이나 미래의 이상적인 진돗개도 모두 진도 원산지에 있었던 모습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주기 바란다.
나는 등산을 좋아 한다. 그것도 독도를 하며 오지 산행하기를 좋아 한다. 우리나라는 지형이 복잡해서 독도하며 산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독도 실력의 등급이 많이 나타난다. 내가 독도를 가르쳐 준 분들이 몇 년이 지나서 더 높은 수준의 독도법을 물어 올 때 이런 답을 했다.
"어느 지역의 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곳에서 평생을 살며 그 산을 오르내린 그 곳의 할아버지이다. 아무리 독도를 잘 해도 그 할아버지만큼 그 산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는 그 지역 외에 가보지 못한 산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
그때는 독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훨씬 산을 잘 오른다.
그러나 독도를 하는 사람도 지도가 없으면 장님과 다름없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산을 오를 때 항상 눈앞에 지도를 들여다보며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배낭 속에 넣어 놓고 걷다가 휴식시간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면 이미 어디서 오류를 범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좌표 확인이 불가능한 곳에 있게 된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정해진 루트에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복잡한 선과 숫자로 표시된 등고선 지도를 입체형 지형도로 모습을 바꾸어서 머리 속에 기억시키는 것이다. 가고 있는 산을 포함한 주변의 산들을 모두 기억시켜야 한다.
좌표가 없는 독도는 없으며 좌표는 반드시 주변에 있는 산에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그 산만 다닌 할아버지는 주변의 산을 몰라도 되지만 독도산행을 하는 사람은 주변의 모든 산을 반드시 알아야만 오류 없는 산행을 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했던 분들에게 기술적인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가르쳐 주었었다.
그러나 등산로가 없는 곳에서 독도 산행이라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가끔씩 나오는 실수로 인해서 질문을 했던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 분들은 이 질문을 할 때도 이미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정맥 산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정맥답사산행'은 참으로 난이도가 높은 산행이다. 높은 수준의 독도 실력이 아니면 정맥답사산행에서는 산행 들머리도 못 찾는다.
독도법(오리엔티어링)은 정해진 곳을 가는데 정해진 루트를 따라 찾아가는 능력을 말한다.
독도를 할 줄 알면 산행이 즐겁다. 오지의 산에서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능선을 걸으며 정해 놓은 루트를 따라 산행을 하고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하는 즐거움은 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무 표시도 없는 자연 상태의 산에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에도 길이 있고 바다에도 길이 있듯이 말이다.
독도법을 모르고도 수십 년간 아무 불편 없이 등산을 하고 있는 등산인도 얼마든지 있다.
아는 산만 가면 되고 길 있는 산만 가면 된다. 그렇지만 독도법을 모르면 낯선 산에서는 소경과 다름없다. 산에 길조차 없다면 그 답답함이란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길을 걸어야 한다면 경험에 의한 감각으로 갈수 밖에 없고 성공할 확률은 결코 높지 않다.
진돗개 애견가가 된지 어언 20년이 됐다. 이 마당에서 20살은 어린 아이의 연조다.
그러나 무언가를 아는 데 이십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주변의 다른 분야를 봐도 그렇다. 앞으로 평생을 더 길러야 할 진돗개. 기르면서 궁금했던 점을 모두 알고 싶었다. 그리고 알고 기르니 더 즐겁다.
나는 진돗개를 사랑하되 모든 유형을 사랑한다.
겹개는 겹개대로 좋고, 홑개는 홑개대로 좋다.
겹개와 홑개의 특징이 잘 갖춰진 개는 남의 개라도 참 보기 좋다.
우리 모두 부모가 여러 자식을 사랑하듯이 진돗개의 여러 유형을 고루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것이 각각의 품종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종자는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 사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도 후대에 그 종자가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하게 하기 위해서 영구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무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자원이 멸실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진돗개를 기르면서 느낀 것은 진돗개를 기르는 데에도 독도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앞서 조금 낯선 등산용어가 나와서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언급하겠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산맥의 용어는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1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한 후 내놓은 논문에 의해 나누어진 산맥 이름이다. 현재의 산맥은 일반 상식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배치를 기본선으로 해서 땅 속의 맥 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을 건너고 개울을 건넌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 나온 라는 문헌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전국의 산줄기를 조그만 실개천 하나도 건너지 않고 산줄기가 가다가 끊어지지 않고 살아나간 맥을 따라 백두산에서 발원해 지리산까지 뻗어나간 백두대간과 여기서 갈래를 이룬 하나의 정간, 열세개의 정맥으로 규정했다. 그 복잡한 산줄기를 성능 좋은 나침판이나 지도, 고도계도 없이 일일이 다 가보고 확인하여 산줄기가 가다가 끊겼는지, 연결됐는지를 알아냈다는 데에 조상들에게 존경을 금할 수가 없다.
그분들이 가르쳐 준 산줄기를 찾아가는 산행이 독도법에 능숙한 사람이 정밀한 지도와 우수한 나침판과 고도계를 사용해도 애로를 느끼는데 말이다. 지금도 에 기록된 산줄기를 등고선 지도에 옮겨서 루트를 그리고 능선을 따라 답사산행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정맥 산줄기를 따라가는 산행은 기존 등산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산들이 산행 좌표에 활용되는 등산 방식이다.
뒤로는 갈짓자처럼 꿈틀대는 걸어 온 능선이 있고, 앞에는 수십 개의 산들이 중첩되어 펼쳐져 있지만 그 속에서 맥을 찾아 나가야 하는데 모두 그 산이 그 산 같다. 높낮이도 비슷하고 방향의 각도도 별 차이가 없다. 이럴 때의 심정이 지금 우리나라 진돗개 애견가들의 심정이다. 내가 왜 장황한 등산과 독도법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실 것이다.
진도개로 이름 붙여진 수십 수백의 산봉우리의 거대한 군락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다.
이 봉우리에 올라보면 저 봉우리가 높아 뵈고, 이봉 저봉 올라봐도 고도계가 없으니 어떤 봉이 제일 높은 봉인지 알 길이 없다. 눈짐작으로 가늠하자니 왠지 불안하다. 이 큰 산줄기가 어느 방향 어느 산에서 흘러 왔는지 모르니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경험자의 감각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감각이란 인도자도 따라오는 이에게 신뢰할 만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못되는 것이다.
이산 저산 다 올라가보고 알자니 평생 걸려도 못할 것 같다. 이럴 때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좌표와 나침판과 지도 한 장 있으면 정말 쉬울 것이다. 알아서 제 갈 길을 가되 자신있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알고 나면 쉬운 것이다. 알고 나면 몰랐을 때가 되돌아보아 질 것이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진돗개이다. 기르는 사람들은 길러서 좋고, 안 기르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좋다. 그러나 진돗개를 기르다 보면 현실적으로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유로는 진돗개의 형태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몇 년 사이에 진돗개의 모든 분위기를 알아내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난해한 면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진돗개를 기르는 과정을 단계별로 분류했을 때
그 첫 단계는, 처음 진돗개를 기르기 때문에 주변에 계신 분들이 순종, 잡종 이야기를 하고 좋은 개, 덜 좋은 개 이야기를 할 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의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진돗개 전문 서적도 구해 읽고, 전람회도 열심히 관람해 보고, 진돗개를 잘 아는 분의 설명도 들어서 순종 진돗개와 잡종 진돗개가 어떤 모습인지 개념 정립은 되었는데 막상 중간급의 진돗개를 보면 마음속으로 난감해 질 때가 있는 그런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진돗개의 모든 것에 통달해서 순종과 잡종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은 물론, 10대 위에 세퍼트견이나 기주견의 혈통이 한 번 혼혈된 것을 구분한다는 정도이며, 순종의 기준을 단 한가지로 정의를 내려놓은 단계이다.
그 기준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잡견의 혈통이 들어갔다거나 퇴화 되었다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진돗개에 관한한 무소부지, 또는 관상의 대가로 자부하는 단계이다.
진돗개에 관한한 모르는 것도 없고 궁금한 것도 없이 완전 통달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 글을 더 이상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그 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넷째 단계는, 진돗개의 모든 과정을 거쳐 알 만큼 알았는데도 알수록 궁금한 것이 많고 도저히 해답이 안 나오는 것 때문에 주변에서는 진돗개에 관한한 대가로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아직도 연구를 계속하는 단계이다.
그 분들은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에 나오는 서예가 '고죽 선생'처럼 평생의 작품에 불을 지르는 심정으로 이 글을 통해 추구하시는 진돗개의 모습을 상상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이 다시 새로운 화두가 되고 훌륭하신 분들이 더욱 연구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명쾌한 학문적 이론으로 전국에 난무한 진돗개 관상학을 흡수하고 교통 정리해 주시기 바란다. 사람에 있어서도 관상은 들어 온지 천년이 넘도록 민족의 기원을 못 밝혔어도 학문은 몇십 년 만에 한국인의 얼굴에 나타나는 원형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 기원의 계통을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진돗개는 그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축은 사람이 데리고 이동하며 기른 짐승이다.
그 나라의 가축의 기원이 고대에 있다면 그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가축의 혈통을 알아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이다. 한반도에 구석기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머리뼈 화석이 출토되어 형태학적 특징을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약 4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로 북한 지역에 용곡 동굴, 역포 동굴, 만달 동굴 등의 지역과 남한 지역에 상시 바위 그늘, 홍수 동굴 유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구석기인들의 화석은 현대 한국인들의 머리 형태와 비교해 볼 때 머리 앞 뒤 길이가 길며, 머리의 높이와 좌우 폭을 비교한 높이 지수에서 "긴 머리형"에 속해서 현대 한국인의 "짧은 머리형"과 많은 차이가 있다. 머리 생김새는 한 민족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형태적 요소의 하나이다. 이는 우리 몸에서 주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몸통, 팔, 다리와는 달리 머리는 환경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머리의 생김새를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생체 관찰과 머리뼈 관찰로 나눌 수 있으며, 다시 계측적인 방법과 비계측적인 방법으로 구분한다.
계측적인 방법은 생체나 머리뼈의 여러 계측점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관련지수를 산출한 후 형태를 구분하는 방법이고, 비 계측적인 방법은 생체의 경우 머리털의 색깔, 모습, 눈끝의 방향, 쌍꺼풀의 유무, 코의 모양, 귀의 모양, 입술의 튀어 나온 정도 등, 계측으로는 알 수 없는 형태학적 특징을 알아보는 것이다.
체질 인류학적 측면에서 현대 한국인을 보면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살던 조상이 '단일 민족'으로 형성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지면상 자료 제시는 못함.)
한국 사람의 머리 생김새에 대한 체질 인류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1).머리의 앞 뒤 길이가 좌우 너비와 비교하여 볼 때 짧다
(짧은 머리형)
(2).머리의 높이를 머리의 앞 뒤와 비교하여 볼 때 높다.
(높은 머리형)
(3). 이 밖의 특징으로 얼굴의 경우 갸름한 형에 가까운 '중간 얼굴형'이고 코 길이와 코 너비를 비교하여 볼 때 '중간 코형'에 속한다.
위와 같은 특징은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살던 조상이 아무런 외부의 영향 없이 단일 민족으로 형성된 형태학적 특징이라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의 뿌리를 알아보기 위해서 인류의 기원과 고대 인류의 이동을 연구한 주변 국가의 연구 결과를 알아보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은 곧선사람의 형태로 100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구대륙으로 이동했으며, 그 중 일부가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서 자바원인으로 살게 된다. 피테칸트로푸스라고 불리는 자바원인은 아시아인과 몽골인의 근간이 된다.
자바원인은 약 60만 년 전에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하여서 중국대륙 북부에 이르게 된다.
이 가운데 일부가 북경원인이 되며, 다른 갈래는 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여 후에 슬기사람이 된다. 중국대륙 북부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약 2만 년 전에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북몽골 인종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매우 추운 환경에서 납작한 얼굴과 눈꺼풀 코주름을 갖게 된다.
이들은 긴 얼굴형, 엷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얇은 입술, 좁은 이마가 특징인데, 이들 북몽골인종은 기후가 따뜻해진 기원 전 오천년 전쯤인 신석기시대부터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해서 동북아시아에 이주하게 되었고,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백년 경에는 대거 남하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라는 국가를 이루고 기존 한반도 중남부에서 열대작물인 벼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고인돌을 만들고 살던 사람들과 많은 유전자 교환을 이루게 된다.
기원 전 이만 년 전에 시베리아로 이주했던 북몽골인들과 달리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던 남몽골인의 특징은 사각형 얼굴에 진한 눈썹, 쌍꺼풀진 큰 눈, 콧망울이 넓은 짧은 코, 두꺼운 입술, 넓은 이마 등이 특징인데, 이들은 신석기 시대에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이동하거나 중국의 화남지방에서 해류를 타고 한반도 남부지방에 바로 도착하였다.
이들은 또 한반도를 경유하거나 직접 일본에까지 이동하였다.
그것은 북몽골인들이 대거 남하하기 훨씬 오랜 전 일이었다.
일본에도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조몬시대라는 독특한 문화를 만든 민족이 살고 있었으나 청동기시대에 한반도로 대거 남하한 북몽골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원주민을 북으로 밀어 내고 야요이사람들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교통이 발달하기 전인 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각 지방에 따라 특징적인 얼굴이 존재했으나 최근 교통의 발달과 산업화에 따른 주민들의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각 도의 사람들 간에 결혼으로 인해서 각 지방의 특징있는 얼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특히 서울과 같이 전국의 주민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에서는 얼굴의 유전자 교환이 더욱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인의 얼굴에 나타나는 북몽골인과 남몽골인의 특징을 쉽게 비교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텔레비젼에 비친 북한 주민들의 얼굴을 보면 평면적으로 납작한 북몽골계통이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남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남몽골인의 유전인자인 넓은 이마, 짙은 눈썹, 쌍꺼풀진 큰 눈, 넓은 콧망울, 두꺼운 입술 등이 상당히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송 매체에는 과거 지배계급의 얼굴이었던 북몽골 계통의 얼굴보다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몽골 계통의 얼굴이 선호되고 있으며,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도 혼인의 배우자감을 선택할 때 남몽골 계통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선호됨에 따라 이들이 상류층에 진출하거나 많은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앞으로 한국인의 얼굴은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이 변하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예측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인의 얼굴에는 지리적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두 지역에서 이동해 온 서로 다른 두 계통의 인종이 오래 전에 유전자 교환을 이루었다는 특징이 부인할 수 없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유전자 교환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 남북통일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한국인의 얼굴에 나타나는 남몽골인의 형태학적 특징은 각 가문의 족보에도 나와 있지 않고, 관상가들이 말했던 적도 없으며, 본인이 시인하던 안하던 간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밝혀졌다.
지구상에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일 민족이란 없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류의 조상이 태어난 이래 각 지역 간에 수많은 민족이 이동하며 유전자 교환을 하였고, 한반도처럼 대륙에 붙어 있고 기후나 지형이 살기 좋은 곳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겠다. 여러분의 얼굴에는 북몽골인과 남몽골인의 특징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 우리의 얼굴이란 사실이다.
과거에는 위와 같은 것을 모르고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했을 때와 지금 위와 같는 상식을 가지고 다시 남의 얼굴을 보면, 저 사람은 북방형으로 잘 생긴 것이고 이 사람은 전형적 남방형이구나 하는 안목이 생기니 얼굴 보는데 너그러워 질수가 있게 된다.
관상학은 원래 중국에서 발달한 것으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됐다. 중국의 관상학은 중국인을 기준으로 삼고 있고 여러 곳 중에서도 이마를 가장 중시한다.
한국에서는 턱의 부분을 중시한다고 한다. 귀상은 해맑은 얼굴상을 말하고 위상은 장군상을 말한다. 얼굴의 상은 그 사람의 성격도 말해주는 것이므로 얼굴이 운명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은 관상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관상은 민족의 기원과 그 다양한 뿌리를 알아낼 수 없다.
학문이 연구해 낸 민족의 내재되어 나타나는 여러 유전인자를 관상에서 수용하면 더욱 그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다. 과거 지배계급의 얼굴이었던 북방형의 얼굴 위주로 되어 있는 관상기준을 남방형에 그대로 적용하면 안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젊은 층에서부터 선호하는 얼굴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육십이 넘은 남자 분들은 계란형의 자그마한 눈을 가진 여자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젊은 사람들은 서구형의 여자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서구형 미인의 얼굴이 유럽인과의 혼혈에서 나온 미인이 아니고 남방계적 용모가 많이 가미된 얼굴을 말하는 것이다.
얼굴의 정서가 취향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 민족의 얼굴이 변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진돗개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민족 정서가 추구하는 쪽으로 맡겨 버리면 진돗개의 취향을 강제 할 수 없는 이상 다양한 형태에서 선택되어지는 개는 시대의 조류를 탈 것이다. 그래서 원형 찾기는 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평소 한 십년 편안하게 기를 만한 개면 좋은개라고 생각해 왔고, 그 자견 중에 한 마리를 받아 다시 한 십년 길러서 이십년이 지나가면 진돗개와 더불어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주제 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신석기 시대는 돌을 연마한 마제 석기를 사용한 인류 문명의 발전단계 중의 한 시대이며 농경과 가축 사육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진도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신석기 시대의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서아시아에서는 농경과 가축 사육의 역사가 일만 오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아시아가 청동기 시대에 들어 선 것은 육천년 전의 일이다.
중국에는 육,칠천 년 전에 곡물, 가축, 토기, 마제 석기가 공존하였고 삼천 오백년 전에 청동기 시대를 맞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마제 석기의 출현을 신석기 시대의 지표로 삼고 있으나 농경의 정확한 시작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고, 청동기 시대의 연대가 중국보다 앞 선 오천 오백년 전으로 밝혀졌다. 아메리카에서는 신. 구석기시대 라는 명칭을 사용치 않고 석기. 고기. 형성기 등의 고유 명칭을 사용해 시대를 분류한다. 마제 석기는 육, 칠천년 전의 고기에 출현했고, 토기와 농경문화는 오, 육천년 전인 형성기에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팔천년 전에서 삼천년 전까지를 말하고,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종족들의 뿌리를 찾는 일은 그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하지만 신석기시대 주민들이 한반도에 거주한 이후 주변 지역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주해 온 다른 문화를 갖는 종족들과 부단한 접촉과 혼혈을 이루어 오늘날 한국의 문화와 한민족을 형성한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과 문화를 알아봄으로써 각 지방의 종족이 어느 곳에서 온 사람들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신석기시대 종족의 연구는 북방기원설과 자체형성설의 두가지로 진행되어 왔다. 북방기원설은 시베리아기원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효시는 우리나라 고고학이 일본인에 의해 연구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토기 가운데 적갈색 토기의 표면에 빗살무늬가 들어 있는 뾰족밑토기가 시베리아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토기와 유사하다고 하여 그 토기의 기원을 시베리아에 두게 되었다.
그밖에 무덤에 피납된 시신의 안치방향과 언어에 보이는 극히 단편적인 유사성, 두 지역에 함께 보이는 곰 숭배사상 등이 보조 자료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수천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두 지역에서 토기의 기형이 비슷하고 또 겉면의 시문수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무늬가 들어있는 토기가 발견되는 점을 이유로 양 지역의 민족의 뿌리가 같다고 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더군다나 좁은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에는 토기의 기형과 문양의 차이점으로 인해 4~5개의 문화 영역이 존재한다. 서로 이웃해 있는 중서부지방과 동북지방의 토기상이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이들 종족의 영역을 주변지역과 문화연계상으로 나누는데 중국 동북지방, 발해연안, 청천강 이북에 위치하는 신암리형문화. 연해주 남부지방, 송화강과 아무르강유역, 한반도의 동북지방에 위치한 서포항형문화. 청천강 이남의 서부지방과 한강유역에 위치하는 암사동형문화.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지방, 대마도, 서부큐슈지방에 위치하는 동삼동형문화를 담당하였던 종족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신석기시대의 한반도에는 문화의 이질성에 바탕을 둔 지방차를 보여주는 여러 갈래의 인종이 지역을 달리해서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한국이 현재 한반도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신석기시대 주민 모두를 동일 종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한편 북방계설의 주체가 되는 신석기시대 주민들을 고아시아족이라고 하는데 이는 에스키모족이나 에벤키족과 같은 민족으로서 현 한민족이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민족으로 구분되는 것을 보아 고아시아족이나 고시베리아족이라는 실재했는지 조차 확인이 안된 종족이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주민이라는 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비판되어 왔다.
시베리아 기원설은 주로 외국인 학자들에 의해서 반론이 있게 되고 1980년대 들어 와서 시베리아지방의 신석기 연대보다 더 올라가는 오산리유적이 발굴되면서 이 학설은 더욱 퇴조하였다. 시베리아 기원설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종족 이후에 주민이 2단계에 걸쳐 교체되었다는 설도 함께 주장되고 있다.
다음은 신석기시대 주민의 자체형성설로서 주로 북한 학계에서 주장되어 왔다. 자체 형성설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지방, 만주, 연해주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온 순수한 혈통의 민족이라는 주장이다. 이 설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인종의 발생지의 하나이며 인류문화의 발원지에 속한다는 주장이 되는데, 이와 같은 자체 형성설은 1970년대 이후 북한 학계에서 주장되어 온 이래 꾸준히 보완되어 왔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신석기시대 주민의 주변지역으로부터의 유입설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나 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 주체사상의 전면적인 보급에 따라 한민족의 단혈성론은 북한학계의 전체적인 학설이 되어 있다. 단혈성론은 구석기시대 유적의 발굴에 따라 검은모루 유적이 편년되는 50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인골화석과 고인골의 현 조선인들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혈청학 및 형질적 특성에 근거하여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이다.
이 학설은 북한의 폐쇄된 사회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국수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으로 학문적 토론의 대상조차 될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 비판의 이유 중 첫째는, 북한 학계의 수준으로 볼 때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 중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후기로 편년되는 유적들과 거기에서 검출된 고인골뿐이고 둘째, 형질적 특징의 대부분이 문화적 또는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동질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민족이 타인종들과 달리 고유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고인골에서 보이는 특징이 현대 한국인에게서도 보이는 것은 역시 당연하며 이것을 근거로 50만년동안 한국인이 단혈적 계승관계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셋째, 모든 인종 집단은 각 집단이 지닌 유전자 급원 내에서 상이한 양식으로 전개된 진화요인의 작용에 의해서 형질적 특징이 나타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형질적 공통점은 갖는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집단도 단혈적 집단이 아님을 말한다.
이와 같이 양 설은 그 주장의 근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점을 갖게 된다.
토기에 초점을 둔 시베리아 기원설은 각 문화의 지방차와 문화의 담당자들에 대한 갈래를 규명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웃한 일본에서도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근 100년 전부터 고인골을 대상으로 한 형질인류학적차원에서 국내외 학자들의 손에 의해서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며 최근에는 Gm유전자, HLA유전자 등 과학적인 유전자분석까지 동원했으나 명쾌한 답변은 못 얻고 단지 일본민족은 동질적 인간집단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를 인용해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1. Gm 유전자
Gm유전자는 병원균이나 바이러스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세균과 신체 안에서 생긴 노폐물, 또는 암세포 등의 유해한 물질로부터 몸을 지키는 혈청 중에 있는 항체의 하나로 면역글로블린으로 불리는 유전자이다. 혈청 중에는 다섯 종류의 항체가 있는데 이중에 Gm유전자는 일억 년의 기간에도 거의 변화가 간취 될 수 없는 유전자이기에 이를 분석방법으로 사용한다.
Gm유전자 중에서 흑인종과 백인종에는 없고 몽골계인종의 표식유전자가 ab3st, afb1b3 라는 두종류가 있는데 ab 3st인자가 가장 높은 북방계 몽골인은 바이칼호에, afb1b3가 가장 높은 남방계 몽골인은 중국의 남부 운남, 광남, 광서지역에 거주한다.
ab3st인자의 빈도는 Buryat(0.307~0.272), Yakut(0.267), 일본인(0.2609), Alaska Eskimo(0.254), Ainu(0.252), 한국인(0.231) 순으로 나타난다. 위의 ab3st인자의 비율은 바이칼호 주변의 Buryat에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시베리아 - 일본 - 한국 - 북중국의 순으로 나타나서 시베리아 주민의 이동이 일차로 일본에까지 미친 후 중간 지역인 한국과 북중국에서 일본보다 주민의 이동에 따른 혼혈이 훨씬 많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사에서 몽골계 민족은 시베리아, 티베트, 서몽골, 한국, 일본, 북미의 인종을 포함하는 북방계와 내몽골,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의 남방계로 구분한다.
한반도에는 일차로 북방계 주민이 내려온 후에 중국 동북지방과 남부지방 주민과의 혼혈이 부단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HLA유전자
HLA는 Human Leukocyte Antigen System Locus A의 약자이다. 일반적으로 혈액형이라고 부르는 항원계는 모두 적혈구형인데 HLA항원은 최초로 백혈구에서 검출됐다.
HLA에는 A. B. DR로 구분되는 유전자가 있으며 A에는 35, B에는 60, DR에는 34 종류의 형이 존재한다.
일본인의 경우에는 HLA의 유전자 분석에서 네 가지의 인종이동 루트가 확인되는데 그중 세루트가 한민족과의 관계라고 한다.
그 첫째 루트는 만주와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으로 들어간 루트이고,
두 번째 루트는 한반도 동북지방과 동해안을 경유해 들어간 루트이고,
세 번째 루트는 중국의 양자강 하류에서 한반도의 남쪽을 경유해서 일본에 들어간 루트이다.
네번째 루트는 중국의 화남에서 대만과 오키나와를 경유해 일본으로 바로 들어가는 루트이다. (여기에서 세 번째 루트를 특히 주의 깊게 기억해 주기 바란다.)
HLA유전자의 연구로 보아서 한민족은 북방계의 강한 흐름 가운데에서도 남방계의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DNA분석
DNA는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물질로 세포핵 안의 염색체 상에 있다.
이 조사에서 일본의 조몬시대 여인의 유골에서 동남아시아인과 공통의 기원을 가질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일본의 경우도 고대에 북방계 주민이 일차로 이동해 온 후 조몬시대의 종족은 남방계로 교체되었다가 한반도를 통해 대거 남하해 온 기마민족이 기원 전후에 열도에 유입된 후 야요이인을 이루어 오늘날 일본인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북방계설에도 주민 2단계 교체설이 있는데 그 검증의 보조자료로 고인골의 DNA분석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4. 식생대
우리 민족의 원형은 유목민족이 아니고 농경민족이다. 우리의 신석기시대 이후 어느 시대에도 유목으로 경제생활을 한 적이 없다. 만약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어느 종족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그 종족 일부의 역사일 뿐 적어도 한반도에 유입된 민족이 이 주변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한 적은 없다. 신석기시대에는 어로와 수렵으로 살았고 최소한 3000년 전부터 완전 정착농경생활을 한 것이다.
고대에는 현대와 달리 주민의 접촉만으로 농작물이 이동한 것이 아니고 주민과 농작물이 함께 이동했다고 보기 때문에 재배하는 농작물의 연구는 주민의 이동루트를 알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수천년 전부터 인도의 서북부.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에는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라시아 잡곡문화가 있었고, 인도의 동북부, 동남아시아 북부, 중국의 운남지역에는 벼 중심문화가 있었다. 황하 중류지역에는 조, 기장의 집약적 관개농경문화가 형성, 발달되어 왔다.
동남아시아의 수도재배문화는 중국의 화남에서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에 들어가거나 대만과 오키나와를 거쳐 바로 일본에 들어갔고, 중앙아시아의 잡곡문화는 중국의 화북지방과 만주와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에 들어간 루트와 시베리아와 연해주와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에 들어간 루트가 있다.
이와같은 점으로 볼 때 한반도에 기존 살고 있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신석기시대 이후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계통이 다른 여러 갈래의 종족이 선진문화를 가지고 들어올 때 동화되었고, 현대 한국인은 시베리아의 어느 한 지역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출발한 종족들이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서 형성된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5. 한국의 농경문화
한국의 농경문화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 민무늬 토기는 토기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토기로서 무문토기라고 하고 빗살무늬토기는 즐문토기라 한다.
무문토기는 그 섬세함에 있어서 앞선시대의 즐문토기보다 뒤져있고 무문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완전한 정착 농경문화를 가지고 한반도의 도래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로와 수렵을 하며 즐문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과는 그 종족이 전혀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사용하였던 요리용기, 식기, 저장용기, 제기, 운반용기등 일상의 모든 용기의 원형을 무문토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문인들이 한반도 주민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즐문인들은 서해안과 남해안의 간만차가 완만한 해안가에서 어로생활을 한 결과 패총을 많이 남기고 있다.
내륙의 담수어로 집단의 경우는 사냥과 채집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강원도 양양의 경우는 해양어로의 비중도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즐문인들의 경제생활이 주로 어로였기 때문에 즐문토기는 밑이 뾰족한 모습을 하고 있고 발견되는 지대도 해안가나 강가인 것이다. 무문토기인들은 정착농경생활을 했기 때문에 수십 또는 백여 기 이상의 취락 형태롤 갖고 있었다. 무문인들의 농경생산물은 곡물로서 경기도 김포의 가현리, 일산, 여주의 흔암리, 충남 부여의 송국리 등에서 오래된 탄화미가 발견되었다.
무문 농경문화의 경제생활 방식, 취락입지, 토기전통, 묘제등은 두 문화의 담당자들이 서로 다른 종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삼천년 이상 한국의 전통적인 정착문화의 원형을 만들어준 무문농경문화를 한국민족의 보편적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두 문화에 속하는 방사성 탄소연대를 비교해보면 즐문유적은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1500년 사이에, 무문유적은 기원전 1500년경에 시작해서 기원전후까지 이어진다. 지금부터 3500년 전에 시작된 무문농경문화는 수백 년의 교체기를 걸쳐 3000년 전을 고비로 한반도에는 새로운 무문농경문화가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약 천년동안 한반도의 전역에 고인돌이 수 만기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는 6만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중 3만기 정도가 한반도에 있고 호남에만 1만 2천기 정도가 있으며 그 형태로 볼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수도재배문화의 전래 경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 남북 이원설이 있다.
화북에서 육로를 통해 한반도로 전래된 루트와 화남에서 바로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 루트의 두 가지를 든다. 화북의 루트는 쌀이 반월형석도와 검은색 토기와 함께 들어왔고 반월형석도는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무문토기와 함께 발견된다는 것이다.
화남의 루트는 유구석부(자귀 또는 깍귀라고 하는 자루달린 끌)와 재도문화가 함께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유구석부는 중국 화남의 해안지방이 발생지로서 우리나라의 농촌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용하는 농기구의 하나이다. 장승을 만든다거나 나무를 깎을 때 사용하는 자귀가 그것이다. 한반도의 벼농사문화는 이와 같이 두 루트로 들어왔다는 남북이원설이다.
두 번째는 남방 전래설이 있다.
98년 가을에 KBS에서 역사스페셜로 방영한 고인돌 프로그램에 있는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고인돌과 난생신화의 문화 분포에서 이들 문화의 원류를 동남아시아에서 찾고 이 문화는 수도재배문화와 동원이며 재도문화 담당자들이 흑조해류를 따라 그 문화를 한반도에 이식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선돌은 중국의 중앙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석관묘나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거의 겹친다. 고인돌은 중국 본토의 중원지방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과 시베리아를 제외한 거의 아시아 전역에서 선돌과 석관묘가 분포되어 있고 이 거석문화와 무문토기,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수도재배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대신화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는데 고조선의 천자탄강신화와 곰 신화의 복합신화가 있고 남쪽에는 난생신화가 있다. 난생신화는 동남아시아에서 왔으며 그것은 수도재배문화와 함께 왔다는 것이다. 곰 신화는 단군조선신화 이외에는 현재 찾아볼 수가 없게 됐으나 시베리아 타이거지대에 거주하는 에벤키같은 북방퉁구스족 사이에는 곰이 아직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곰을 대신한 동물이 있으니 바로 산신령으로 등장한 호랑이이다. 오늘날 한국민속과 전통문화에서 곰의 존재는 사라졌고, 전국에 걸친 마을의 제사에는 산신령으로 호랑이가 등장하고 무속에 등장하는 산신도에도, 사찰의 산신각에도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이 호랑이신화의 근원지는 티벳이다.
티벳의 파(PA)문화는 호랑이 숭배를 전형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는데, 중국남부의 변방족들에게 크게 세 갈래로 영향을 준다. 하나는 타이문화, 둘은 야호문화, 셋은 리아오문화이다.
이들 파문화와 영향관계에 있는 문화는 후에 하북과 산둥반도 쪽에서 퉁구스문화와 만나서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이르러 한국의 기층문화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다음 셋째로 북방 기원설이 있다.
한국의 고대 벼농사는 화중 이북지역을 출발해서 한국에 육로나 해로로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조사한 보고서에는 위와 같은 루트를 다섯가지로 나누어 놓았다.
(1) 화북에서 한반도를 남하하여 일본에 이르는 길
(2) 화북에서 육로를 거치지 않고 발해만과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 북서해안에 도달하여 남하하는 길
(3) 화북과 산둥반도를 출발하여 해로로 한반도 서남해안에 도착하여 일본에 이르는 길
(4) 양쯔강 하류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흑조해류를 타고 한반도의 남부와 북큐슈에 거의 동시에 도착하는 길
(5) 화남에서 대만과 일본에 남서제도를 거쳐 큐슈남부에 도착하는 길
*흑조해류: 남중국 쪽에서 일년 내내 동북상하는 해류
위의 다섯가지 이동루트는 한일 양국의 학계에서 공동으로 조사한 보고서에서 인용한 것인데 (4)번의 경로가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짓고 있다.
((4)번의 이동루트가 한반도 남쪽해안에 남방문화가 바로 도착하는 루트인 것에 유념해 주시기 바란다)
재도문화의 담당자들은 반월형석도, 유구석부(자귀), 홍도(붉은색 토기), 고인돌, 선돌, 난생신화들을 동반하고 있고 남방계에 속하는 문화요소들은 답가형원무(강강술래형), 추석천신, 내방자관행 (가면극, 지신밟기), 농경신의 내왕개념, 춘추의 제천대회, 용사신앙 등이 있다.
곡식을 사용하는 양조법, 식혜 등의 식문화도 남방계에 속하는 문화라고 하니 우리문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기층문화에 영향을 준 문화를 살펴보면 동북아시아 계통의 어로. 수렵의 문화와 화북계(북방계)의 화전경작. 잡곡재배문화와 화중계(남방계)의 수도재배문화와 내륙아시아계(스키타이계)의 유목문화라고 본다. 여러분은 위의 네 가지 문화 중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친 문화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문화의 원형이 무문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만든 정착농경문화라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한민족 전체의 문화라고 볼수는 없고 청동기 시대에 지배자적 정복국가로서 한반도에 남하해서 국가를 이루고 지배체제를 형성한 '내륙아시아계, 알타이계, 스키타이계, 유목문화' 의 영향을 받아서 농경문화와 정복문화의 조화가 오늘날의 한국문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마민족일본정복설'을 낳게 한 에버할트의 '흉노계 문화'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기마민족이 정복해 오기 전의 민족에게 정통성을 두려고 하여 정복민족을 도래인이라고 하는 반면 우리는 정복민족에게 정통성을 주어 한반도 중남부에도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대표적 농작물로 열대작물인 벼가 있다. 동, 서양의 문화를 쌀문화권과 밀문화권으로 나누는 방법도 있는데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쌀에 모든 것을 의존해 살아온 민족이다. 쌀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수천 년 전부터 재배되어 왔고, 이 지역의 거주하는 사람들은 식량을 주로 쌀에 의존하여 왔다. 따라서 쌀이 그 발생지로부터 이동해 가는 지역에는 사람이 갔고, 문화가 갔고, 가축이 갔다.
쌀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한 연구는 앞으로 고고학, 민속학, 종교, 환경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에서 연구가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사람의 이동, 가축의 이동, 곤충의 이동이 쌀의 이동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개는 당연히 가축에 속하며 사람과 함께 이동하는 동물이다. 진돗개의 유래를 알고자 하는데 민족의 기원과 농작물의 기원, 다른 가축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에 대해서 읽는 분들 중에 지루한 감이 있을지 모르나 나중에 나오는 본론 부분의 이해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벼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 보면,
벼속에는 약 20여개의 종이 있는데 재배되고 있는 것은 아시아가 원산지인 오리자 사티바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오리자 글라베르리마이다. 이 중 대부분의 벼농사 재배지대에서 재배되고 있는 것은 오리자 사티바이다.
벼농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인도 기원설, 동남 아시아 기원설(야생벼의 종자가 아직도 자라고 있음.), 운남-아삼 기원설,남중국 기원설 등이 있고, 육천 오백년 전에서 일만 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이들 여러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세계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김포의 가현리에서 발굴된 고대의 볍씨가 탄소 특정 연대로 최소 사천년 전으로 밝혀졌으며, 여주의 흔암리 볍씨는 약 삼천년 전, 평양의 대동강가는 삼천년 전, 충남 부여는 약 이천 육백년 전, 김해는 일천 구백년 전으로 추정되어 볍씨의 탄소 측정연대로는 한강이나 ,대동강 유역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의 남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연대를 내려서 잡고 전파 루트도 고대에 벼농사 짓기에 가장 알맞은 지역인 한반도 남부에 상륙해서 위로 북상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중국의 황하 중류에서는 오천년 전에, 산동 반도에서는 사천년 전에 벼농사를 시작했음이 밝혀졌다.
벼농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열대작물로 대표되는 벼를 가지고 온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한반도에 데리고 온 가축을 알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최소한 3천년이상 우리 민족의 주식이 되어 온 쌀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서 주변 국가들의 낱말을 비교해 보고 여러분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한국 인도 중국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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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비아 수이또
쌀 살(또는 할) 미 사간보타
밥 받 환 보씅보타
벼와 쌀과 밥이라는 우리민족의 생명에 관한 가장 중요한단어가 어느 곳에서 왔는가를 아는 것은 선사시대에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들과 민족문화의 원형을 만든 사람들이 어떤 분들인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쌀농사에 관한 다음의 낱말도 비교해 보자.
한국 운남성 및 동남아일부지역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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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산 미
논 나 수이텐
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관련된 중요한 단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심증이 갈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쌀은 자포니카형태의 끈기있는 것으로서 푸실푸실한 일반적인 남방미인 인디카 형태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 자포니카 쌀의 원산지는 미얀마의 동북부와 운남성 일대라고 하며 인도네시아의 자바섬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자포니카 타입의 쌀을 먹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쌀농사에 관한 단어와 자포니카 타입의 쌀을 먹는 지역을 우리 민족과 비교해보면 쌀농사의 이동루트에 대해 상당한 심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초기 농경에 이어 개, 염소, 양, 소, 돼지, 순으로 가축을 길렀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와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는 고대동물의 뼈로써 개와 돼지의 뼈가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개뼈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몽골같은 목축지대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뼈가 많이 발굴되는 것과는 전혀 판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특히 돼지의 경우는 1990년 '조선일보 학술조사단'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단 한 마리도 기르는 것을 보지 못 해서 초원지대에서 사육하기에 적합치 않은 짐승이라서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는 개, 돼지, 소, 말의 순서로 길렀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북쪽지방의 집자리와 문화층에서 약 사천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소뼈가 발굴되었다고 하고 그 뒤의 것으로 보이는 말뼈도 발굴되었으나 그 시기의 닭뼈는 아직 발굴되지 않아 언제부터 길렀는지 아직 단정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 다음으로 오래 전부터 길렀다고 하는 돼지가 고대는 물론 현재도 몽골에 거의 없다는 이야기는 돼지의 원산지가 북쪽 초원지대는 아니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멧돼지와 가축돼지는 해부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고 송곳니의 크기 차이와 머리뼈의 크기 차이인데, 멧돼지를 길들여 가축돼지가 된 것으로 본다.
세계적으로 수십 종의 멧돼지가 있으며 유라시아의 멧돼지는 대형이며 동남 아시아의 멧돼지는 아주 소형이다. 한국의 멧돼지는 대륙형으로서 동남아시아의 멧돼지와는 비교가 안 되게 큰 편이다. 우리나라의 토종돼지는 검고 작은 체구이고 발육이 느린고로 경제적 이득이 없어서 유럽에서 개량된 대형 돼지에 밀려서 지금은 사육하는 농가가 많지 않다.
선사시대의 돼지뼈가 출토되어 돼지사육이 농경 정착생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읍루조' 에 이르기를,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부여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좋아 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고 하였다.
읍루는 문헌기록에 따르면 남쪽으로는 장백산맥 일대와 송화강 주변,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의 바다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부족이다. 한국의 고대국가인 부여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과 같은 초원지대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는 이유와 중동지역과 같은 사막지대에서 돼지를 사육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전자는 돼지의 먹이가 부족해서이고, 후자는 종교적 이유가 원인이지만 후자의 경우도 돼지 사육에 필요한 물과 다양하고 많은 양의 먹이 부족이 돼지 사육에 큰 장애가 되었고, 그래서 종교적 금기로 묶어 버림으로써 돼지고기 단백질 섭취를 둘러 싼 주민간의 분쟁을 없애 버렸다는 추리도 가능할 만큼 돼지 사육은 농경 정착사회라야 하고 물과 먹이가 풍부한 곳이라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먹이가 부족한 곳에서는 제주도의 일명 '통시'에서 기르는 똥돼지가 태어나게 된다. 제주도의 똥돼지와 같은 사육 방법은 전북 남원의 외진 마을에 남아 있고, 오끼나와에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런 독특한 사육 방법이 남방 해양문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중국 후한시대 출토품에 변소 밑에 돼지를 기르는 모습이 있는 것을 보아서 고대에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와 같은 사육 방법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지금도 동남아시아 국가나 필리핀 같은 오지 농촌에서 방사하는 돼지가 농가 주변에서 먹이를 주워 먹으며 개와 함께 자연스럽게 노는 것을 볼 수 있다. 돼지 사육이 언제 어느 곳에서 시작됐는지 문헌이나 유물의 자료가 나온 것이 없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대륙 멧돼지의 크기보다는 작다는 점, 체형이 남방 민족이 기르는 돼지와 비슷하다는 점, 같은 선사시대에 몽골에는 양의 뼈가 발굴되고 우리나라는 돼지의 뼈가 발굴되는 것을 보아 시베리아보다는 중국을 통해 들어 온 남방형 가축의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한우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 한우는 생김새와 색깔의 친근감으로 인해서 종종 토종 진돗개를 평할 때 비유되는 짐승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 된 뼈의 발굴 연대는 사천년 전으로써 최소한 그 시기부터 사육된 것으로 보여진다. 소는 인류가 고대부터 가장 가치있게 유용한 짐승으로서 그 기원과 분포도가 자세히 알려져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 분포되어 있는 소의 종류를 분류하면 여섯 종이다.
(1)유럽의 소 (2)동아시아의 소 (3)남아시아의 소
(4)온열대지대의 소 (5)건조 고랭지의 소 (6)야생소
두골학적으로 분류하면,
(1)유원우(등이 편평한 소): 홀스타인종. 에어셔종. 쇼트혼종.
(2)장액우(이마가 긴 소): 브라운 스위스종. 영국 재래종 등
(3)대액우(이마가 큰 소): 심멘탈종. 스위스 재래종 등
(4)단두우(머리가 짧은 소): 프랜치 캐나디안종 외 4종
용도별로 분류하면,
(1)유용종 (2)육용종 (3)겸용종 (4)역용종 등이 있다.
기타의 분류는,
(1)원산지의 지형의 따른 분류
(2)뿔의 형태의 따른 분류 (3)개량의 정도에 의한 분류이다.
소의 조상을 원우라고 하는데 발생지는 남부 아시아이며 인도.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등지에서 일찍 가축화 되었다. 사육 시기는 일만 년에서 팔천년으로 추측하며, 가축화된 소들이 유럽으로 이동한 시기는 신석기시대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가축우들은 유원우(등이 편평한소)에서 시작되었고, 아시아의 견봉우(어깨 부분이 위로 솟아 오른 소)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동서로 갈라져 서쪽으로는 바빌로니아. 이집트. 유럽 등지로 이동하여 유원우 계통과 교잡해서 유럽 가축우의 많은 품종을 성립시키고, 동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이동하여 중국 남부. 대만. 중국 본토 등지로 이동하였다.
가축화된 소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사방으로 이동하였고,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몽고우이며, 우리나라의 한우는 견봉우 계통의 중국우와 중앙 아시아 계통의 몽고우가 만주에서 교잡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아시아지방에는 견봉우 계통이 많고 북부 아시아지방에는 유원우 계통이 많다.
한우는 체격과 색깔이 중국 남부에서 오래 전부터 사육하는 '황소'(Yellow Cattle)와 비슷하여 구분해서 '한국 황소'(Korean Yellow Cattle)라는 학명으로 부른다.
우리의 토종 돼지처럼 한우는 체격이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한우의 대표적 모색은 황갈색이며 호반모. 흑갈색. 흑색도 있고, 황갈색에도 진한 적갈색이 있는가 하면 누런색이 강한 황갈색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인공수정에 의해 교배가 이루어져 거의 황갈색 계통으로 색이 단일화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한우를 보거나 사육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과거에는 어깨가 솟아 오른 견봉우 계통의 소들이 있어서 생긴 모습대로 등의 양쪽에 거름통이나 나뭇단을 얹어서 산길을 오르내리기에 편리한 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외 짐수레를 잘 끄는 소가 있는가 하면, 논. 밭을 잘 가는 소도 있고, 체격이 크고 우람해서 일을 못하는 육용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요즘은 크고 잘 생긴 육용소로 단일화 되어서 과거에 보던 어깨가 솟아올라 등짐을 잘 지던 견봉우는 보기 어렵게 되었다. 견봉우의 혈통이 나온다는 것과 체격이 작다는 것은 한우의 기원을 알고자 할 때 일반인들도 쉽게 볼 수 있는 자료였는데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한우를 살펴보면서 주목할 것은 중국을 통해 들어 왔다는 것과 한우와 흡사한 체형과 색깔의 소가 중국 남부에 '황소' (Yellow Cattle)라는 이름으로 먼저 서식하고 있다는 점이고, 한반도에 유입된 시기가 벼농사의 전래시기와 비슷한 사천년 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우는 우리땅 내에서도 각 지방의 토질. 농업구조. 사양관리 및 기후 등에 따라 체격의 차이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보통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크다. 한반도와 같은 좁은 지역에서 남북의 차이가 소의 체형 크기를 다르게 하는 것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 한우와 일본우의 관계를 살펴보면,
일본우가 어디서 도래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시아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시 되고 있다. 일본우의 품종은 여섯 종이 있는데 일본의 고유종인 두 품종을 제외하고는 한우가 기초가 되어 여러 계통의 일본우가 성립 된 것이다. 그 종류를 살펴보면,
(1) 갈모 일본우종
(2) 흑모 일본우종
(3) 일본 단각종
(4) 무각 일본종의 네 종이다.
한우는 여러 색깔과 체형의 소가 모두 도태되어 단일화된 반면 (일부에서는 '칡소' 라고 하는 호반모의 소를 기르는 곳도 있고, 싸움소로서 검은색이 많이 섞인 소를 기르는 곳도 있지만), 일본우는 색깔과 특징별로 분류하고 번식하여 네 종 이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발굴된 선사시대의 개뼈는 지역에 관계없이 한가지라고 한다.
일본개는 진돗개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는 분들에게 머리 쓸 문제를 하나 드리면 일본에서 발굴된 개뼈의 화석은 7~8천 년 전의 것이라고 하며 중소형견이고 현재의 동남아형의 속하는 머리뼈를 하고 있다.
진돗개가 몽골견의 후손이라고 하는 분들은 이 문제를 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만약 전문가로 자처 하신다면 더욱 그러할 일이다. 진돗개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암시해 주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개의 품종은 진돗개 닮은 것만 여섯 종이 넘는다.어느 쪽이 가축 사육에 있어서 더 과학적이며 문화적인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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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러 개의 유전인자를 뭉뚱그려 하나로 만들려고 하는데 일본은 특징과 용도별로 분리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순종이라는 하나의 품종과 유전인자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 많은 것이나,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획일화시켜 놓는다. 그것은 아마 민족성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간략하게 '닭'에 대해서 알아보자.
닭과 비슷한 형태의 조류는 이백사십 여 종에 이르고 열대지방에서 아북극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에 걸쳐 있으나, 우리가 기르는 닭은 약 사천년 전에 '적색야계'에서 길들여졌고, 원산지는 인도와 동남아이며 전래경로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 온 것으로 되어 있다.(동남아에는 아직도 야생닭이 살고 있음.)
신라의 건국 설화에 나오는 계림 이야기를 보면 닭은 기원전에 이미 사육된 것으로 보여진다. 닭싸움은 소싸움과 함께 남방에서 온 문화이며, 닭싸움의 경우 고대에 인도. 중국.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으나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최근이라는 말도 있다. 그외 한반도에 유입된 남방문화로는 농한기 때나 운동회 때에 즐겨하는 놀이로서 '줄다리기'가 있다. 그리고 시골에서 짐을 져 나르던 지게와 'ㄱ'자 낫과 끝이 뾰족하게 안으로 꺾어진 호미와 도리깨 등이 동남아와 인접한 운남성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운남성을 제외한 중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우리와 다른 농기구를 사용한다고 한다.
그외 남방문화의 대표적 상징으로 고인돌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인돌은 굄돌이 받치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일종의 무덤방이거나 제단인데 우리나라의 것은 거의가 무덤고인돌이다. 분포지역은 한국. 만주. 일본 등과 유럽. 영국제도. 북아프리카에 분포한다. 중국에는 산둥반도와 랴오닝지역의 남부 저장성 부근에서 가끔 보이며 일본은 큐우슈우 지역에서 있을 뿐인데, 한국은 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만기가 존재하고 전국에 걸쳐 퍼져 있으며 특징적으로는 강가를 따라 낮은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결과 이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따뜻한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며 머리뼈로 살펴 본 얼굴의 특징은 북몽골인 계통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열대작물인 벼를 경작했고, 부를 축적하여 족장뿐만 아니라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고인돌 무덤을 축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장 많은 곳은 대동강 주변 평야지대. 남. 북한강 유역. 춘천. 제천의 강가. 전북 고창을 비롯한 전남북 일대의 평야지대. 강릉 주변 등이다.
1998.8.28.에 고인돌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고인돌 세계문화유산지정추진위원회가 (위원장 유인학 한양대 교수) 마련한 이 날 행사에는 장 피엘 모앙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연구소장과 김병모 한양대 교수가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고대 한반도와 인도의 고대문화교류사를 연구해 온 김병모 교수는 "세계 문화 속의 한국 고인돌의 성격"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두지역간 교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충북 충주댐 수몰지구의 한 고인돌(서기전 오세기 후반)에서 머리 모양이나 키 등이 유럽인과 비슷한 사람뼈가 나왔다.' 며 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북몽골인들이 대거 남하하기 전에 그들과 전혀 다른 문화인 고인돌이 한반도 해안가 곡창지대와 강가 저지대를 따라 축조되었다는 점에 유념해 주기 바란다.
기원 전 약 천년동안 한반도에는 따뜻한 곳에서 정착농경문화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벼농사를 짓고 고인돌을 만들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년동안 그들이 만든 고인돌이 전 세계 고인돌의 반이나 된다는 특이점도 주목할 일이다.
진돗개를 설명하기 위해서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렇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인류의 문화 발생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에 속한다. 동.서양의 문화 이동 루트인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이 한반도의 경주이다. 사람의 몸에 달린 맹장처럼 대륙의 맹장처럼 붙어 있어서 모든 문화와 종교가 이곳에서 한 번 멈추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과 가축과 농작물도 마찬가지이다. 그 발생지로부터 시작된 이동이 거의 끝나는 지점이 한반도인데, 하물며 그런 한반도의 서남쪽 작은 섬인 진도에 태고적부터 자생하는 개종자가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진돗개의 기원을 밝히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한국인의 기원을 밝히는데 역사도 동원하고 고고학도 참고하고, 예술과학, 인류학, 정보통신학, 민족학 등이 함께 연구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학문의 연구 결과가 없을 때는 단군과 웅녀의 후손인 단일민족이라는 설만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북몽골인들이 대거 남하하여 국가를 건국한 기원 전 백년 전후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는 무문토기를 사용하고 벼농사를 지으며, 장례식에 고인돌을 축조한 사람들이 먼저 살았고, 이들과 북몽골인들이 서로 유전자를 교환하여 오늘날 한국인의 유전자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에 나오는 민족의 이름으로는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중국에 걸쳐 큰 나라를 이루었던 고조선의 민족 이름을 '조선족' 이라 하고,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강인한 민족의 이름은 '예. 맥족'이라 한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예.맥족'이다. 그리고 신라와 가야는 다른 계통의 북방기마민족으로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이들 북방기마민족이 한반도 중남부에 들어 왔을 때 살고 있던 주민들을 '한족', 또는 '삼한족'이라 한다. 한반도나 대한민국이나 한민족이라는 이름은 한반도의 원주민이 삼한의 백성이라고 보는 것에서 유래했다.
진돗개의 기원과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는 데에도 위와 같은 방법으로 그 뿌리와 계통을 찾아 내려가는 방법을 사용하여 보자. 함께 이치를 따지며 생각해 가는 가운데 혹시 오류가 발생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계통을 잘못 짚어가는 것이 보이면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여러분의 이치에 맞는 지적을 받는다는 것은 이글을 쓰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뜻이기도 하여 기쁘게 생각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돗개의 관상만 보던 수준에서 한 단계 올라가고, 다른 모든 분들이 더 많은 자료를 구하여 중론을 모으면 진돗개의 원형과 미래의 가장 이상적인 진돗개의 모습도 정립이 될 것이다.
첫댓글 긴글읽느라 숨이다 막히네요,대단하세요.발췌가 아니고
다 쓰신거에요,?
제가 쓴거 아녀요^^;; ㅋㅋ 퍼온거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