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我라면 輪廻하지 않을 것[斷見]
힌두교적 윤회 ‘무아와 윤회의 충돌’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451)
생각보다 윤회에 대한 거부가 상당한 것 같다.
처음에는 일부의 주장이나 사견이라고 취급하고 말았지만
이른바 유명한 스님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윤회란 힌두교의 사상을 방편적으로 설명하는
어떤 방식이지 윤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요점인 것 같다.
그 중심에는 無我이므로 輪廻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 하는 주장이다.
이것이 ‘무아와 윤회의 충돌’이라고 한다.
그 논거가 되는 것이
<“무아와 모순되지 않은 것은 연기입니까, 윤회입니까?”라고.
무아와 연기는 결코 불일치되지 않는다.>
즉 연기란 무아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緣起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輪廻
[gambhīro cāyaṃ, ānanda,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etassa, ānanda, dhamm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ayaṃ pajā tantākulakajātā kulagaṇṭhikajātā muñjapabbajabhūt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緣起(paṭiccasamuppādo)'라는 이 法(etassa dhammassa)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輪廻(saṃsāra)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연기란 윤회를 말하며 또한 연기를 알지 못하면 윤회한다는 말씀이다.
또한 이러함(연기=苦集: 無明 혹은 渴愛)을 해결하면 윤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有我.'라고 여기면 윤회하고
'無我.'라고 여기면 윤회하지 않고 해탈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0 + 0 = 1.
0 - 0 = 0.
이상한 수식인 것은 인정한다.
여기서 '+'란 무명/갈애를 말하고 '-'란 貪喜愛가 없음을 말한다.
'i'란 개체(윤회한 중생)를 말하고 '0'이란 空(혹은 탐진치 없음)을 말한다.
各自(自我)가 各自라고 여기는 한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各自는 윤회한다.
그러나 그 各自(自我)가 各自라고 여기지 않는 한 윤회하지 않는다.
여기서 (무명) 갈애에 의해서 取될 어떠한 대상이든지 이것에 의해서 各自가 된다.
어떠한 대상(法)이든 유아(나 등)라고 알고 보면 각자의 윤회가 생겨나고
어떠한 대상(法)이든 또한 그 法을 알고 보는 '놈'마저도 무아라고 알고 보면
그 各自의 윤회는 소멸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그 어떠한 대상(法)이란 蘊 · 處 · 界 혹은 心 · 意 · 識(般若) 등을 말한다.
‘Paññā c'eva sati ca, [iccāyasmā ajito,]
Nāmarūpañ ca mārisa; Etaṃ me puṭṭho pabrūhi,
katth' etaṃ uparujjhatī’’ti.
(아지따 존자가 여쭈었다.)
반야와 사띠,
그리고 정신 · 물질현상, 스승이시여, 이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말씀해주소서.
그것은 언제 그칩니까?
‘‘Yam etaṃ pañhaṃ apucchi [maṃ pucchi (ka.), passa su. ni. 1043],
ajita taṃ vadāmi te;
Yattha nāmañ ca rūpañ ca, asesaṃ uparujjhati;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 etaṃ uparujjhatī’’ti.
그대가 물은 질문,
아지따여, 그것에 대해 나는 말하니
의식이 소멸함으로써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이 남김없이 그칠 때
그때 그것이 그친다.
“etadaggaṃ, bhikkhave, bāhirakānaṃ diṭṭhigatānaṃ yadidaṃ
‘no cassaṃ, no ca me siyā,
na bhavissāmi, na me bhavissatī’ti.
비구들이여, 외도들의 견해들 가운데는
'[만일 과거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고,
[만일 미래에] 내가 없다면 내게 [장애도]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것이 최고다.
yā kho pana sā, bhikkhave, ucchedadiṭṭhi saṅkhāro so.
그러나 이러한 단멸한다는 견해[斷見]는 하나의 심리현상일 뿐이다.
* assaṃ(Opt. 1인칭 단수) - bhavissāmi
내가 없다면 - 내가 되지 않을 것(有, Fut.1인칭 단수)
無我라면 輪廻하지 않을 것이다.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evaṃ adhimuccamāno bhikkhu chindeyy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ī’’ti.
* assa - bhavissati 있기 때문에(Opt.3단)-될(有/to become) 것.
me siyā - me bhavissati 나에게/의 있기 때문에-나/의 될 것 [不還者]
to be; to exist. (as + a + ti)
Present | s. | pl. |
3rd | atthi | santi |
2nd | asi, si | attha |
1st | asmi, smi, amhi, mhi | asma, asmā, amha, smase |
Optative | s. | pl. |
3rd | siyā, assa, assu | siyuṃ, siyaṃsu, assuṃ |
2nd | siyā, assa, assasi, assu | assatha |
1st | siyaṃ, siyā, assaṃ | assāma |
becomes; to be; exists. (bhu + a)
Future | s. | pl. |
3rd | bhavissati | bhavissanti |
2nd | bhavissasi | bhavissatha |
1st | bhavissāmi | bhavissā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