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잘하게 뿌려졌던 어둠 속의 불빛들이 하나 둘 지워지고 있다.
누군가의 흐느낌처럼 낮고 모호하게 건너오는 바람소리. 사라져간 시간의 저편에서 불현듯 찾아드는 추억처럼 가슴에 맺혀드는 빗발.
새벽이 오고 있다. 투명하고 서늘한 가을의 몸짓처럼 그렇게 새벽이 오고 있었다.
나는 15층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 무엇일까? 어둡게 사라져간 시간의 저편에서 새삼스럽게 나를 연결시키려 드는 것은...
빗발이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면서 가슴 밑 바닥을 축축하게 적셔왔다.
-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는 지금에 와서야 나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가?
담배연기가 해독할 수 없는 암호문의 뉘앙스처럼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 가 봐야 하는 걸까?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듯 내 안의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나 늘 분명하게 모든 것을 분별해내던 내 안의 사람은 오늘따라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빗발이 차츰 굵어지고 있었다.
부산시 해운대구 재송동의 장산 중턱에 자리잡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도시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젖고 있었다. 특히 베란다 왼쪽으로 자리잡은 해운대 신도시 쪽으로 뻗어내린 장산의 치맛자락과 그 너머로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드는 바다. 희고 부드러운 천같은 빗줄기가 그 푸른 산의 어깨 위에 천천히 걸쳐지고 있었다.
- 가 봐야 하는 걸까?
나는 내 안의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그렇게 물었다.
바람이 불고 신도시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푸른 너울이 일렁이며 지나갔다.
- 시간 낼 수 있으면 한 번쯤 가 보는 게 어때?
내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여 왔다.
- 가면 뭘 해. 내가 간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애? 또 찾아간들 무얼 보여줄 거지? 슬픈 표정? 어색한 웃음? 속으론 은밀하게 저 불행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쫑알거리면서 겉으론 애써 슬픈 척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건가? 냉정해야돼. 그는 이미 과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아.
내 안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목청을 높이며 말하는 것도 들렸다. 나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필터부분만 남은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껐다.
그의 소식을 느닷없이 알게 된 것은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하청공장에서 모레까지 선적되어야할 제품의 마무리 감독을 하고 있을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 영림무역 윤서현 대립니다.
- 안녕하세요. 절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대학 다닐때 에서 일하던 김숙희예요.
낯선 목소리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공장사무실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휴대폰 저편에서 다시 한 번 내가 다녔던 대학의 이름과 김숙희라는 이름과 라는 이름이 건너왔다.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이 가지는 얼굴을 기억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 아, 네. 근데 무슨 일로...
저쪽에서 거듭 자신을 소개하는데 끝내 모른달 수 없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때까지도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무슨 학과에 다니던 학생이었는지 하나도 기얻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다만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과 휴대폰을 통해 건너오는 말투가 꽤나 세련된 것이 흔히 세상일이라고 부르는 사회생활에 많이 젖었었겠구나하는 생각을 건져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생각나세요? 다행이네요. 전 또 기억을 못하시면 어쩌나하고...... 서현씨 소식은 더러 듣고 있었어요. 제 남편이 유림무역 아시죠? 거기 있거든요....실은 알려드릴게 있어서 전활했는데.... 어디서 무슨 말부터 꺼내얄지 모르겠네요? 저어.... 혹시 요즘도 우석씨 소식 듣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휴대폰 저편에서 느닷없이 우석이라는 이름이 건너오면서 나는 하마트면 짧은 신음을 쏟아낼 뻔했다.
한 우 석. 쉽게 저물지 않는 가을날의 노을처럼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 쓸쓸한 후광으로 살아있던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을 애써 잊으려 마음 아파하던 시간도 벌써 몇 해 저편의 일이었다.
그랬었구나. 가슴 속에서 투명한 유리컵이 맞부딪혀 울리는 날카로운 음향같은 것이 길게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리고 비로소 낯선 목소리의 실체가 뚜렷하게 생각나고 있었다.
그녀는 영문으로 발간되던 씨타임즌가 뭔가하는 교내 영어신문사의 기자였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탐스러운 생머리를 허리께까지 늘어뜨리고 다녔었던 것. 낡고 색이 바랜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어디든지 거침없이 활보하던 당찬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었던 것. 그리고 학생회관 뒷편 잔디밭 또는 과학관 근처 덩쿨나무 그늘아래서 당시 학생회 문화부장이었던 우석과 함께 있던 모습. 그러나 내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서둘러 사라지던 뒷모습 같은 것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도무지.... 무슨 일인데요?
- 저어......
휴대폰 저편의 목소리가 잠시 망설이는듯 끊어지면서 바람소리 같은 소음이 건너왔다.
나는 침묵을 지키며 무심하게 멀어졌다간 가까와지고 다시 멀어지는 그 소음을 들었다.
- 우석씨 이혼한 거 아시죠?
- 그랬던가요?
- 모르고 계셨군요. 그럼 지금 병원에 있는 건 아세요?
- 병원이라뇨?
- 역시 그도 모르고 계셨군요. 우석씨 요즘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 그래요? 어디가 아프길래.....
- 한 달쯤 됐는데.... 사고가 좀 있었어요.
- 사고라뇨?
- 교통사고 말예요. 몰고가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과 충돌했는가 봐요.
- 어쩌다 그런 일이......
아아. 나는 속으로 짧은 비명을 삼켰다.
이건 또 무슨 삼류드라마 같은 경우란 말인가?
한때 따뜻했던 사람의 근황이 몇해의 시간을 건너서 불현듯 전해오고 그것이 교통사고라니.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무심히 망각의 바다 위를 떠도는 동안 무엇인가가 그를 스쳐갔구나. 어둡고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그를 쓰러뜨리고 지나갔구나.
- 얼마나 다쳤나요?
- 꽤 심하게 다쳤던가 봐요. 몇 군데 뼈가 부러지고 하는...... 하지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부러졌던 뼈도 수술이 잘돼서 거의 아물어가고 있고 멍들었던 자국도 다 없어졌고. 그런데......
- 그런데라니 또 뭐죠?
- 신경을 좀 다친 모양이예요.
- 신경을요? 그래서요?
- 담당의사 얘기론 척추뼈가 탈골되면서 신경을 손상시켰다는 거예요. 다행히 수술은 잘?〈쨉? 손상된 신경이 회복될려면 시간이 꽤 걸릴거라고 했다더군요.
- 어림잡아 얼마나 걸릴거라고 그러던가요?
- 그건 장담할 수 없나봐요. 어쩌면 회복이 안될지도 모르는 모양이예요. 하반신 마비라는 거 있쟎아요. 그런 증상인 것 같아요. 수술 경과가 좋다니깐 좀더 두고 봐야죠.
나는 묵직한 둔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하반신 마비라니. 오오, 하나님. 투명한 유리컵이 떨어져 깨어지면서 흩어지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가슴 속에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다.
- 그런데 서현씨를 퍽 보구싶어하는 눈치였어요. 오늘도 병실에 들렀더니 서현씨 얘기를 꺼내지 않겠어요? 그래서 주제넘은 줄은 알지만 이렇게 전화드린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경우엔 환자 스스로의 의지력이 회복의 관건일 수 있지 않겠어요?
휴대폰 저편에서 소음을 깔고 건너오는 목소리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소리 같았던 소음이 자동차 클랙션소리 같은 소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 바쁘시더라도 한번쯤 들러봐 주세요. 우석씨가 무척 좋아할 거예요. 병원은 광안동에 있는 세강병원 아시죠? 병실은 오백 십구호실이구요.
나는 병원이름과 병실번호를 종이에 받아적듯 머리에 새겨넣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 너무도 무심히 살아왔구나. 너무도 무심하게 저 세월을 건너왔구나. 지나친 무심함은 또 하나의 배반일 수 있는 것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저 아득한 시간속에 자라있는 나의 무심함을. 나의 배반을. 몹슬사람 같으니라구.
2.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의 행,불행과는 무관하게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 습관처럼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면 일어나서 일터로 향하는 것.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획득하는 것. 더러는 유희와 쾌락을 ?i고 더러는 방종의 여울을 건너기도 하면서 작은 일에도 분개하고 억울해하기도 하는 것.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기뻐하며 영 못잊을성 싶었던 것들도 조금씩 잊어가는 것. 차선의 선택을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처럼 우기면서도 흘끔흘끔 곁눈질하기도 하는 것. 그런 것일가? 아님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가봐야 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을 못한채 세면장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어제와 다름없이 커피와 토스트와 계란후라이로 아침을 먹었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서 내일까지 선적시켜야할 제품의 출고일정이 빡빡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비로인해 선적에 차질없도록 오전 중에 마무리 시켜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난 뒤 양치질을 다시 하고 출근복으로 옷을 갈아 입었으며 입었던 옷들을 빨래통으로 쓰는 플라스틱 바께쓰에 쓸어담았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서울로 출장갔던 강대리가 푸석한 얼굴로 먼저 출근해 있었다. 사흘 기한의 출장일을 이틀만에 마치고 내려온 탓이었는지 그는 아직도 피곤이 덜 풀린 표정이었다.
- 갔던 일은 잘됐어?
- 덕분에, 윤대리 일은 어때? 선적기한이 내일이지?
- 아직 마무리가 안됐어.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마무리해야 할거 같애. 빗발이 굵어지는게 영 느낌이 안좋아.
- 그래도 잘되겠지 뭐. 한두번 하는 일인가? 그나저나 커피 한 잔 할래?
- 그래. 난 블랙으로.
그가 커피를 뽑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그가 없었던 이틀 동안의 일과 인계해야할 서류들을 정리하여 넘겼다.
그리고 내일까지 선적해야할 제품들을 오늘중으로 준비완료 시키러 하청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하청공장에서의 일이 오후 두 시쯤에 마무리 되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과장에게 일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보고를 했다.
- 알았네. 수고했어. 그만하면 내일 선적에 차질없을 게고. 윤대리도 한 며칠쯤 쉬어야지.
과장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손을 돌려 뒷목덜미를 자근자근 주무르며 그렇게 말했다.
- 주말쯤부터 한 사흘쯤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 아니야. 내일 선적건 외에 별다른 일이 없지? 그러니까 내일 선적이 완료되는 대로 퇴근해서 바로 휴가에 들어가. 그리고 한 사나흘 푹 쉬고 와. 혹시 특별한 일이 생기면 전화부터 해주고 말이야.
- 알겠습니다. 과장님. 그럼......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며 담배를 꺼냈다가 실내금연이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 우석씨가 프리지어 꽃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리고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물어오던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내가 병실에 들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 했었다. 그리고 우석에 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들까지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안개꽃을 좋아하는지 프리지어 꽃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 지고이네르바이젠이라니. 그것이 어떤 선율인지 바하의 것인지 베토벤의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와 자주 만났던 여섯 해 저편이나 지금이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한우석>이라는 이름과 저 우울했던 지방대학 캠퍼스에서의 한 시절을 공유했다는 것. 그 즈음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맛볼 수 있었던 시대적 혼돈과 갈등과 방황, 그리고 좌절감 같은 것들을 서로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몇몇 사람들은 나와 그를 통속적인 연인관계로 규정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가족관계 취미 성격의 특징 같은 것들을 나에게 확인하려 했었고 나에 대한 것은 그에게 확인하려 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시도를 함으로써 그와 나를 서로간에 잘 아는 사람으로 규정하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한 사람에 대하여 잘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외모가 어떻게 생겼고, 성격이 어떠하며, 가족관계 교우관계가 어떻고, 취미가 무엇이며, 즐겨듣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음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몇 번의 식사와 술과 차를 마시고 또 몇 차례의 섹스를 나누었다고 해서 잘 안다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들로 인해 고독한 실존의 들판을 걸어가는 독립된 두 개체를 하나의 관게로 규정지울 수가 있는 것일까?
오히려 그런 것들보다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흐름. 이를테면 맑은 가을날 오후의 반짝이는 강물처럼 흐르는 그 무엇이 교감되고 공유되어질 때 비로소 잘 아는 관계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과 응시만으로도 따뜻한 인식의 피톨들이 서로의 혈관을 넘나들고 더러는 가느디 가는 바람소리 한 올에도 떨리는 영혼의 문풍지소리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잘 아는 관계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는 또 나에게 어떤 관계로 규정될 수 있는 존재였을까?
3.
입학식이 끝나고 오월이 되면 교정은 연례행사처럼 몸살을 앓았다. 공고문과 대자보, 함성과 깃발이 출렁이던 그 황량한 시간 속에서 나는 어둠의 순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마에 띠를 두른 친구들이 단식을 하고, 삭발을 하며 목청을 높일 때 나는 숨죽여 일용할 양식과 등록금 준비를 했다.
적막한 강의실에서, 어스름이 깔려들던 체육관 옆 소나무 숲속 벤치에서, 늘 음울하고 답답했던 자취방에서, 기말고사를 대체한 리포트를 썼다. 학교가 잠드는 날엔 화장품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를 나갔었고 방학이라는 아주 긴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갈 즈음 나는 대구 근처의 입주과외교사 자리를 구해 떠났었다.
내가 그렇게 떠날 때 그는 그대로 몇몇 열성적인 운동권 친구들과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이라는 이름아래 위장취업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여름이 저물고 가을과 함께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교정의 나무들이 조금씩 푸르렀던 옷을 벗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홀연히 사라졌던 그가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여름의 이쪽과 저쪽의 그는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음모처럼 그에 대한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입이 가벼운 친구를 통해 내 귀에까지 흘러 들어온 그것은 그가 위장취업을 나갔다가 그쪽 회사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해 그만 동료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수군거림은 그로 하여금 예전의 풍부했던 열정을 조금씩 빼앗기고 끝내 파리한 풀잎처럼 시들게 하고 있었다.
시월이 소리 없이 찾아들어 가을축제가 시작될 무렵 나는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늘 뜨거운 열정과 맑은 빛으로 넘쳐나던 그 공간은 이미 어둡고 눅눅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나 학교 그만 둘까 싶어.
그의 목소리는 음울한 울림으로 끈적거렸다. 마치 아물어가던 상처가 갈라져 번져 나오는 핏물처럼.
- 뭐? 학굘 그만둬?
- 그래.
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왜 그래? 이제 얼마 남았다고 이러는 거야?
- 얼마 남고 안남고가 중요한 게 아냐.
- 그럼 뭐가 중요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속시원히 말해주면 안돼?
- 그냥. 그냥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힘들게 느껴져서 그래. 어디론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으면 좋겠다 싶어. 아니면 절이나 수도원 같은 곳으로 들어가든지.....
- 미쳤어?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감싸안고 앉은 그가 전화기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내가 손을 뻗으려하자 그의 날카로운 음성이 새파랗게 귓전을 울렸다.
- 받지마. 그냥 내버려 둬.
벨이 계속 울렸다. 이윽고 일어선 그가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 버렸다. 벨소리가 끊기면서 갑자기 정적이 왔다.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에게 내가 물었다.
-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속시원히 이유 좀 알면 안돼?
그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 모르겠어.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모르겠어.
-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그말이지? 난 말이야. 사람에겐 이것저것 생각지 말고 오로지 생존해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해도 항상 깊은 생각의 바탕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듯 말야. 그래서 때로는 생존이 모든 것들보다 더 우선되어야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살아야 해.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들처럼 말야.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 가볍게 토닥거렸다. 넓고 잘 발달된 넓은 어깨였지만 축 처진 메마른 느낌의 어깨였다.
- 미안해. 괜한 말을 꺼내서. 이렇게 모처럼 찾아와 주었는데......
- 그런 말 하지마. 밥 안먹었지? 어디 가서 밥이나 같이 먹자. 일어나 나가자. 어서.
나는 그를 재촉하면서도 어쩌면 내 자신이 그에게 한낱 스쳐가는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는 잠시 그와 함께 했던 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각종 서류는 차곡차곡 포개어 서랍 속에 넣고, CD와 플로피 디스?R은 별도로 챙겨 가방 속에 넣었다. 연필과 볼펜들을 연필꽂이 통에 꽂았으며 책상서랍을 잠궜다. 그리고 벗어두었던 윗도리를 걸치고 실내화를 책상 밑에 벗어두고 하이힐로 갈아 신었다.
- 과장님. 아무래도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야 될 것 같네요.
- 그래? 알았어. 먼저 나가보라구.
나는 가방을 메고 파란 줄무늬가 있는 우산을 들고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제자리에 있어야할 것들은 어김없이 다들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사무실의 사물들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잘들 있으라구. 잠시동안 이별하는 거야. 굿바이 씨 유 어게인.
4.
선적이 끝났다.
남은 업무는 어제 강대리에게 인계했으므로 이대로 곧장 휴가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과장에게 선적이 무사히 마무리 되었음을 보고하였고 강대리에게도 별도로 통보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회사 일은 완벽히 마무리가 된 것이었다.
휴대폰을 끄고 운전석에 몸을 파묻자 비로소 휴가라는 느낌이 다가왔다.
휴가 때마다 나는 고향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향하면서 돌아가는구나 하고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했었다.
그러나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나온 시간의 어디쯤에 비워놓은 자리. 다른 그 무엇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오직 비워놓은 그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있어 그리로 찾아드는 것이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저녁이면 둥지에 깃드는 새들처럼 아무런 어색함도 낯설어함도 없이 그저 따뜻하게 깃드는 것. 그런 것이 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돌아간다고 말했던 것은 참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리 멀지도 않은 고향집이었지만 고향집에 닿아도 나는 쓸쓸하고 우울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텅 비어 버린 듯한 고향집엔 낯선 쇠락의 시간들이 잡풀처럼 자라있었다. 어쩌다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버린 언니와 형부 내외가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느껴지는 썰렁함이 집안 곳곳에서 풍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쯤 집에 머물라치면 떠나있었던 동안 성큼 자란 조카들은 약간은 낯선 방문객을 대하듯 불편함을 드러내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둥지는 어디 있는 것일까. 인사도 없이 떠났다가 기별도 없이 돌아와도 아무런 어색함도 낯설어함도 없이 깃들 수 있는 나의 둥지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떠나고 나면 떠난만큼 잊혀지고마는 것일까? 싶었다.
나는 운전석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그가 입원한 병원에 들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백미러 속으로 빗속에 젖고있는 풍경들이 조금씩 빠르게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어쩌면 머물지 못하는 것은 모든 머무는 것들에게서 스스로 속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속도감만큼 이질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 가까워졌다간 멀어지고 아득히 멀어져 잊혀질 때가 되면 다시 가까워지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재 방식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우석이란 이름 역시 소실점을 이루며 사라져간 저편의 시간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편에서 이편으로 연결되는 내 삶속에 변함없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던 것이 아니라 잠시 가리워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문현 로타리를 지나 지하철 공사로 고르지 못한 길에 들어서면서 출렁이던 생각들이 황망한 몸짓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문현 고개를 지나 대연동 못골시장 앞에서 잠시 정체되었을 때 나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의 시침과 분침은 여섯 해라는 시간만큼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로 인해 도망치듯 떠났던 교정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고 졸업 이후로는 애써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던 그곳은 변함없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광안동일 것이다.
나는 잠시 그에게 들를 경우의 일들을 헤아려 보았다.
우울한 병실. 거꾸로 매달려 있을 링게르병. 길고 약간 마른듯한 그의 팔에 꽂혀있을 금속성 바늘. 하얀 시트. 정지된 듯한 시간들. 어색한 표정의 인사. 침묵. 조금씩 끄집어내어 주고받을 몇 조각의 추억들.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이 한때 따뜻했던 사람의 모습이라니 하는 안타까움. 그것을 숨기고 건네어질 몇 마디의 위로. 그리고 다시 들르겠다는 인사......
- 가면무도회 같군.
내 안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어차피 산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가면무도회인 걸 뭐.
나는 내 안의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꾸를 하며 천천히 경성대 앞을 지나 남천동으로, 남천동을 지나 광안동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강병원을 찾아내고는 주차장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시동을 끄고 안전밸트를 풀고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빗발이 뿌옇게 주차장 바닥을 쓸어가고 있었다. 병원 현관문 앞에서 우산을 접어 비닐봉투에 넣으면서 몇몇 낯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 본격적인 태풍영향권에 든 모양이지요?
- 또 한 바탕 물난리를 치겠지요.
- 호우경보까지 내렸다지요?
- 한 삼사백 밀리 정도의 비가 쏟아진다는데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원......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장마, 호우, 물난리, 수재민, 복구작업, 수재민을 도웁시다 어쩌구하는 방송..... 그런 것들의 뒤에 숨어있는 여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피고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 커다란 시간의 굴레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반복하고 있었다, 계절도 재난도 고통도 사랑도 모두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었다가 스러지고 이젠 완전히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피어나는 슬픔과 기쁨. 그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