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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 육십령-삿갓재대피소 >
참여자 : 송재혁(芝山), 오진탁(星巖), 이장원(高山), 정재민(巨谷), 김세봉
구간 : 육십령휴게소(경남 함양군 서상면)-할미봉-서봉(장수 덕유산)-남덕유산-월성재-삿갓재 대피소
산행 시간 : 약 9시간 5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 거리 : 11.88km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맑음
저녁 6시 동부터미널 앞. 일군의 무장 세력이 모여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평소보다 1명이 늘었다. 그들이 짊어진 배낭 속에는 각자만이 알 내용물들을 채운 채 그들은 정확히 일정 지점에 모여들었고 이내 그들의 짐을 한 차량에 모두 구겨 넣는다. 강원 넘버를 한 차량이 자그마한 소음만을 남긴 채 한강을 넘어선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행인들은 각자의 일에 분주한 채 황량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차량 조회 결과 차주인은 춘천 석사동의 성암 오박사로 드러났다. 이내 나머지 인원들의 인적사항도 모두 알려지게 되는데 아마 길을 안내하는 것은 상해 지산 송공이 분명하다. 거곡 정공이 일찍이 맷돌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면 지평 김공이라는 자는 뭔가 그냥 따라나선 듯한 폼이 역연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분명 백두 뭔가를 한다는 바로 그 일당일 시 분명한 데 한 명이 더 있다. 한참만에야 겨우 조회된 그 사나이는 고산 이공이라 하는데 이번에 특별히 동참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허기를 느꼈음인지 오창에선가 잠시 내려 휴게소를 들렀다. 그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금 길을 나선다. 기사도 바꾸어가며 가는 그들의 앞에는 어느 새 어둠이 내리깔렸고 방향도 일정치 않은 지 모처로 전화를 거는가 하면 가던 길을 돌아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이 여럿인지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로 길을 메우니 크게 지루한 줄 모른다. 마침내 무주군 무풍면 민박집에 내려서니 8시 50분이다. 한우촌이라는 붉은 네온사인이 확연한 불빛 아래 주인이 반가이 맞는다. 그들은 방에 짐을 적당히 부리고 역시 씻는 둥 마는 둥 대충 닦은 다음 준비해 간 간식을 미리 먹어둠으로써 얼마간 짐을 줄인다. 아침에 분주할 것을 대비하여 배낭의 짐을 미리 꾸리는 것도 잊지를 않았다. 역시 내일을 위해 평소보다 다소 이른 시간인 11시쯤 자리에 눕는다.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분명 내일이면 산으로 올라 그들의 목적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맑음
5시쯤 모두 기상하였다. 민박집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은 주인아저씨 차에 싣고 두 대의 차가 새벽을 가르며 신풍령에 도착하였다. 신풍령은 일명 빼재, 또는 수령(秀嶺)이라 부르는 곳으로 우리가 산행 마지막 날 내려설 곳이다. 그곳에 성암의 차를 두고 우리는 이제 주인아저씨 봉고에 몸을 맡긴 채 지난 산행의 종착지인 육십령을 향해 달렸다.
약 1시간여를 달려 7시 45분쯤 육십령휴게소에 내려선 우리는 무슨 의식을 행하듯 들머리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거의 예외 없이 민박집 아저씨는 임시 사진사다. 지난번에 내려선 곳을 거꾸로 올라서 대간 길과 합류하여 잠시 후 다시 장수 지역 육십령 휴게소로 내려선다. 지난번에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는데 육십령(六十嶺)이라는 용어 자체가 심상치 않은 내력을 담고 있었다.
백두대간 산행을 하기 전에는 그 이름조차 낯설었던 육십령은 그 이름 자체가 희한한 것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스토리로 다가온다. 산골이 깊다보니 자연 도적의 소굴로 제법 악명을 떨친 이름이 우선 거론된다. 지금은 26번 국도라는 현대화된 명칭 하에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을 잇는 고갯마루가 되었지만 옛적에도 통행 길이었던 만큼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바로 그 도적들의 훌륭한 먹잇감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이곳을 통과하려면 장정 60명이 모여야 비로소 안심하고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바로 육십령이는 것이다.
다른 유래로는 역시 깊은 산골이고 보니 고개도 많아서 고개가 구불구불 이리 굽고 저리 굽어 모퉁이가 무려 60개나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외에 다른 설로는 장수 감영에서 육십령까지 60리 이고 안의 감영(현재의 함양군 서상면)에서도 또한 이곳 까지 60리 거리였기 때문에 육십령이라 했다는 것이다. 다만 감영(監營)은 관찰사가 머무는 곳이니 장수나 안의는 군현 단위에 지나지 않아 감영이 있을 곳이 못 되니 아마 현아(縣衙)를 잘못 감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육십령에 대한 여러 설이 난무하니 어느 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었고 그렇다고 구태여 그것을 밝혀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런 재미있는 유래들이 옛적부터 이곳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관문으로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통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스토리 구조는 우리네 정서의 질을 한층 풍부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백두대간을 보다 더 맛깔스럽게 해주고 있다는 데 그저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해준다. 이제 그 많다던 도둑도 한낱 전설로 묻혀버리고 전라도와 경상도 양 지역을 왕래하기가 훨씬 수월해짐으로써 양측의 소통도 그만큼 더 쉬어질 것이라는 긍정적 기대감을 가져본다.
육십령을 뒤로 하고 덕유산으로 가는 길은 계단이 먼저 펼쳐진다. 나는 맨 꽁무니에 붙어 일행을 부지런히 따라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간 오르니 상고대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거곡은 상고대가 마치 바다의 산호 같다고 하기도 하고 사슴뿔로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러한 것들과 꽤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상고대가 산호라면 우리는 바다 속을 유유히 유영하며 그러한 장관을 만끽하는 셈이다. 높은 산과 한랭한 날씨가 연출하는 상고대는 사철 푸르다는 소나무마저 허옇게 화장한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그러고 보니 솔잎은 늘 푸르다는 고정 관념이 무너지면서 흰 솔로 환생하였는데 그 모습 또한 청솔 이상으로 제법 운치 있게 다가온다. 상고대는 역시 겨울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육십령에서 1.5km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머무르며 아이젠을 찼다. 그냥 가기에는 곳곳에 위험 요소가 산재해 있는 까닭이다. 보이는 얼음은 그나마 식별이 가능하니 나름대로 조심할 수 있다지만 때로 낙엽 속에 감추어진 얼음이 종종 우리를 당황케 한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할 바엔 차라리 안전장치를 하고 마음 놓고 걷는 편이 백번 나을 것이었다. 친구 중에는 이미 순간적으로 미끈한 발밑의 경고를 온몸으로 받기도 한 터였다.
9시 25분쯤 우리는 할미봉(해발 1,026m)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어느 할머니가 돌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성을 쌓았다 하여 할미성이 있었다고 하고, 할미봉이라는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어찌 할머니 혼자서 그런 돌 성을 쌓을 수 있었겠으며 또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그저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만 현재 ‘할미봉’이라는 이름이 붉은 립스틱 색깔로 돌비석 위에 깊게 새겨져 있는 것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할미봉을 지나친 뒤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대포바위 안내판을 마주하였다. 설명서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晉州城)을 함락시킨 왜군(倭軍)들이 전주성(全州城)을 치기 위해 함양을 거쳐 육십령을 넘어왔다고 한다. 고갯마루에서 할미봉 중턱을 바라보니 엄청나게 큰 대포가 서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란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오던 길을 되돌아 운봉을 거쳐 남원 방향으로 선회해 장계지역이 화(禍)를 면했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그 생김새가 대포처럼 되어 있어 그렇게 대포바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임진왜란 때 그나마 운반이 가능한 바다라면 또 몰라도 높은 산 중에 그렇게 큰 포를 옮겨 놓고 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왜적들의 정보력이 약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설명에도 있지만 실지로는 남성을 상징하는 남근석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아이를 낳으려는 여인들의 기원 장소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내리막길에 잠시 정체현상이 빚어졌다. 계단으로 내려가다 줄을 잡고 내려가는 곳이 적설과 어우러져 힘겹게 하는 데다 여성분들을 포함한 많은 인원들이 같이 내려가다 보니 자연 지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안전이 최선이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나씩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줄을 잡곤 하였다. 이럴 때는 손에 든 스틱이 다소 장애가 되기도 하여 한쪽으로 몰아 쥐기도 한다.
10시 45분쯤 우리는 덕유 삼거리에 다다랐다. 그곳은 경남 교육청 소유의 덕유 교육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연접해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들기 전 또 한 곳에서 줄을 잡고 내려가는 곳과 만나 일시 정체된 적이 있다. 점심 먹을 만한 자리를 알아본다며 앞서 간 고산이 무전을 쳤지만(무전기는 거곡이 준비해 옴) 내리막 비탈길에서 중간에 끼어 줄을 잡고 있던 상황이라 답답해 할 고산의 심정을 알면서도 받아주지를 못했다. 이렇듯 남자에게는 때로 말 못할 비밀이 있는 법이다.
12시가 5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통행하는 산길을 약간 피해 자리를 잡고 앉아 점심 식사를 하였다. 약 1시간 정도를 점심시간으로 활용했는데 사실 우리는 약 1시간 전에 동결건조비빔밥에 미리 물을 붓는 준비를 해야 했다. 언젠가부터 등장한 이 비상식량을 우리는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다. 끓는 물이면 약 5분, 찬물의 경우 약 40분이면 먹기 좋을 만큼 밥이 되어 주기 때문에 산행을 하는 데 있어 아주 편리하다고 할 수 있다.
1시 50분에 우리는 서봉에 올라섰다. 서봉은 해발 1,492m로 장수 덕유산이라고도 한다. 사진을 찍을 때 나는 일부러 스틱 하나를 석비의 글씨 옆에 가져다 댔다. 서봉은 잠시나마 세봉이 되어주었다. 높은 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내려다보는 감동은 등산을 많이 하건 적게 하건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해준다. 북동쪽으로 바라 뵈는 덕유산 주능선의 모습부터 이곳저곳을 유감없이 둘러보다 보면 잠시나마 마치 호연지기가 저절로 생기는 듯한 감상에 빠져든다.
이제 우리는 서봉을 버려두고 남덕유산을 향한다. 백두대간은 남덕유산에서 약간 비껴 있다. 그러나 불과 1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왕복한다고 해야 불과 200m다. 고산은 어느 새 앞서 남덕유산 쪽으로 가버렸다. 거곡과 성암은 조금 쉬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배낭을 지키고 있을 테니 벗어놓고 가란다. 지산과 부지런히 고산의 뒤를 밟았다. 남덕유산 정상(해발 1,507m)에 이르니(2시 45분) 옷깃을 여밀 정도로 찬바람이 일시에 몸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남덕유의 정상은 인파로 북적대었고 오래 있으려고 해야 오래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세차게 바람이 불어대어 우리는 서둘러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자리를 떴다.
대간 길은 여전히 좌전라 우경상의 경계선상에서 계속되지만 이제 함양은 거창에 그 영역을 넘겨주게 된다. 대간 길은 그렇게 계주하듯 바통을 주고받으며 계속 될 것이다. 남덕유산에서 약 40여 분 거리에서 우리는 고개를 또 하나 만나게 된다. 월성재라고 하는 데 이 길은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와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토옥동 마을을 이어 주는 고개라고 한다. 일요일인데다 덕유산이 명산이다 보니 산객이 많아 때로 정체를 빚기도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경상도 황점통제소 쪽으로 하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이제 우리는 비교적 여유 있는 우리만의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월성재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는 사이 황점 쪽으로 내려가는 일행들을 바라보면서 불현듯 그들의 패션이 각양각색이라는 데 내심 놀랐다. 특히 여성분들의 기기묘묘한 차림들이 눈에 띄었는데 산에서일망정 그분들의 차림은 역시 남성들과 유다른 점이 있었다. 남성들이라 해서 모두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 패션 감각은 도저히 여성들을 따라갈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월성재 주변 곳곳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는데 누구나 미간을 찌푸렸지만 특히 고산은 일부러 경종을 울리듯 한 소리 한다. 옛날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공중질서를 지키는 데 인색한 사람들이 꽤나 있음에 조금은 마음이 울적하다.
이제 오늘의 산행도 막바지에 접어든 것 같다. 우리 일행 외에 겨우 몇 명 정도가 눈에 띌 정도로 산객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삿갓재 대피소에서 하루 밤 유숙할 사람들이 아니면 거의 내려가기 때문인 듯싶었다. 삿갓봉 옆을 지나 우리는 대피소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뎠다. 삿갓재는 삿갓봉에서 비롯된 이름임을 인식하는 선상에서 우리는 삿갓봉을 살짝 싸고돌며 비껴갔다. 가끔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이정표가 나타나면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 짐작해보는 것은 산을 다니면서 저절로 익혀진 또 하나의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아침나절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상고대가 다시 나타나 눈길을 빼앗는다.
5시 5분 우리는 마침내 삿갓재 대피소에 내려섰다. 거곡이 음료수 하나씩을 돌린다. 우리는 늦을세라 서둘러 대피소의 자리부터 잡은 다음 저녁 준비를 하게 되었다. 거곡과 지산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보며 고개에서 60m 아래에 있는 샘을 찾아 물을 길러 갔다. 길의 상황을 몰라서 아이젠을 차고 갔지만 샘가까지 계단이 되어 있어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산장에서는 9시면 소등을 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것이 하나의 철칙처럼 되어 있어 우리도 이른 잠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규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비교적 긴 내일 일정을 소화해내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밥 해먹고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물이 귀하다 보니 제대로 씻기가 어려워 성암이 건네준 물휴지로 발을 닦기도 하고 양치는 마침 내가 가지고 다니던 죽염을 이용하여 입에 넣고 우물우물하는 식으로 약식으로 해결하였다.
내일은 새벽 4시에 기상하기로 하고 잠은 내가 깨우기로 했다. 음력으로 하면 내가 닭띠이니 아침이라도 알려야 하지 않을 것인가. 산장의 밤은 그렇게 곯아떨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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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두대간 종주는 다되가는것 같은데.아직 더 남았나??..앉아서도 다녀온 기분이네....수고하였네..
다가 뭔가? 이제 1/3정도 된 것 같은 데... 아직도 지나온 길 보다 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일세...
언제나 변함없이 꿋꿋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친구의 저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때그때 느끼는 기쁨이 여기까지도 전해지는 것 같다. 계속 화이팅!!!
이렇게 열심히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 그 덕분에 힘을 내어 하게 되는 것 같다.
덕유산에 집입하였으니 진도가 많이 나갔네..苦盡甘來라 했던가..사진기록도 많이 남기세.
2번 덕유산에 간 셈인데 그 때마다 눈이 많아 그야말로 덕스럽고 넉넉한 산을 느끼곤 하지. 고맙네.
9시간여를 산행했다니...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과 산에 대한 열정에 그져 감탄할 뿐이네.
뜻한바 이룸이루길 마음으로 기원 함세나.
늘 안산 하시게나.
안회장도 그 정도는 쉽게 할 터인데 무슨 말씀. 안전한 산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