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에서 나흘(3-2)
(2022년 3월 31일∼4월 3일)
瓦也 정유순
3-2. 울릉군 서면 태하리(2022년 4월 2일)
삼선암을 바라보며 막 상상의 날개를 펼 때 버스가 도착하여 다음 행선지인 서면 태하리로 이동한다. 울릉도 서북쪽에 위치한 태하리는 원래 황토가 많아 조선조 때는 이곳의 황토를 나라에 바쳤고,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울릉도에 순찰을 보내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이곳 주변에 황토를 파낸 흔적이 있어 <큰황토구미>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하(臺霞)라 하다가 태하(台霞)로 바뀌었다고 한다.
<태하리 지도>
태하에서 처음 만나는 게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00년 이상의 <곰솔군락지>다. 곰솔은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해송(海松)으로, 나무가 검다고 하여 흑송(黑松)으로도 부른다. 잎이 보통 소나무 보다 억세고, 마치 곰 털처럼 까칠하다 하여 곰솔이라고 한다. 곰솔은 바닷바람에 견디는 힘이 대단히 강해서, 해안과 도서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곰솔과 일반 소나무는 서로 분포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분서현상(分棲現象)이 있다.
<곰솔보호지>
도로 건너에는 <울릉수토역사전시관>이 보이는데 들리지는 못했다. 울릉도의 수토정책(搜討政策)은 조선 후기 울릉도에 거주를 금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주기적으로 순찰하도록 한 정책으로, 주된 목적은 일본에게 울릉도 등의 섬이 우리의 땅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울릉도와 독도 등이 국내법 적용대상 지역이 분명하고, 출어와 벌목을 위해 들어온 일본인들은 국경선을 넘어선 국제법상의 처벌 대상이 되었다.
<울릉도수토역사전시관>
조금 이른 시간에 태하마을의 중국식 식당인 울릉반점에서 자장면으로 중식을 하는데 맛이 괜찮다. 나올 때 보니까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식당을 나와 해안을 따라 <태하향목모노레일> 승차장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길 옆의 섬벚나무는 수줍은 새악씨 마냥 살짝 꽃망울 터트린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의 숲이 우거진 길을 거닐며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깃든 연리지(連理枝)는 지금도 한이 서린 사랑을 나눈다.
<태하향목모노레일 승차장>
이 연리지는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의 사랑으로 1417년(태종 17) 울릉도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이행한 안무사 김인후는 꿈에 나타난 해신(海神)의 명령대로 섬에 동남동녀를 남겨두고 떠난다. 이후 섬을 다시 찾은 그는 서로 부둥켜안고 백골이 된 동남동녀의 모습을 발견한 자리에 연리지가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태하마을에 성하신당(聖霞神堂)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일이면 풍어와 해상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연리지>
<태하 성하신당>
태하등대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향목전망대다. 전망대 아래로는 해안 절벽을 이루는 대풍감이다. 대풍감(待風坎)은 해식(海蝕)작용으로 땅 안으로 깊숙이 파인 곳으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선 후기까지 전라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이는 고기잡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낡은 배를 타고 와서 이곳에서 새 배를 만들어 매어 놓았다가 본토 쪽으로 세찬 바람을 기다렸다가 강풍의 힘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대풍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 가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대풍감>
<대풍감 좌안>
<대풍감 우안>
대풍감을 비롯하여 울릉도에는 본래 많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남벌(濫伐)로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이곳 대풍감과 울릉군 서면의 통구미 등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절벽 근처에서 자라고 있다. 특히 대풍감 향나무는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키가 크지 않으나 오랜 세월 동안 다른 지역과 격리된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귀중한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제49호)로 지정되었다.
<향목전망대>
태하등대 앞마당에는 오징어를 형상화한 공원이 있다. 울릉도 오징어는 인근 연안에서 당일 잡은 오징어를 바로 손질하여 말리기 때문에 신선도가 뛰어나다. 그리고 동해의 청정한 해풍과 성인봉에서 타고 내려오는 산바람으로 오징어를 건조시키기 때문에 빛깔이 일품이다. 특히 태하는 울릉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일조량이 풍부하여 오징어 건조의 최적의 장소여서 태하오징어가 울릉도에서 최상품으로 취급된다.
<태하등대>
<오징어조형물>
대풍감 좌측인 향목전망대에서 등대를 지나 대풍감의 우측을 보고 돌아서면 모 방송국의 인간극장에 출연한 <김두경 가옥>이 나온다. 항목령(해발약300m)가까이 산 정상 언덕 위에서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김두경어른 댁이다. 주변에 밭을 일궈 나물을 재배하는 것 같다. 혹시나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고, 대신 주변에 나물을 삶아 말리는 멍석이 보인다. 밭 가운데 서있는 감나무 한 그루가 우리 고향 같은 정감을 준다.
<김두경가옥>
모노레일승차장으로 걸어 내려와 해식황토동굴(황토구미) 입구에 서있는 사람 전용 인도교를 4층 높이 까지 올라가 다리를 건너 침식해안(浸蝕海岸)이 발달된 해변으로 건너간다. <대황토구미>는 거센 파도가 바위와 끊임없이 부딪쳐 굴을 만들어 그 속에 품고 있던 붉은 흙을 드러내어 놓았고, 황토가 많아서 <대황토구미>로 불러온 이곳은 그리움의 두께 마냥 겹겹이 쌓인 붉은 흙에 지난 뜨거웠던 시간과 짠 내 나는 해풍이 몸을 섞고 있다.
<태하 황토구미>
<태하해변보행교>
이곳의 지질은‘거친 표면을 가진 암석’의 조면암(粗面岩)과 ‘큰 돌덩어리가 뭉친 암석’인 집괴암(集塊岩)으로 이루어졌다. 바위를 따라가는 해안길 코너에 있는 매바위는 조면암이 바닷바람과 파도에 의해 지속적인 침식과 풍화작용을 받아 형성되었다. 집괴암은 용암이 분출하면 용암층의 하부에는 지표면에 있던 암석들과 섞이면서 집괴암이 형성된다. 그래서 상부에는 순수한 용암이 굳어서 화산암이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용암과 집괴암이 반복하여 쌓인 층을 ‘용암-집괴암 교호층(交互層)’이라 한다.
<매바위>
울릉군 서면의 태하지역은 구한말에 울릉도 개척의 시발점이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불법 벌목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옛 땅인 대마도에 이어 울릉도도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1417년(태종 17)부터 실시해오던 공도정책(空島政策)을 1882년(고종 19)에 폐지하면서 개척이 본격화 된다. 이때 검찰사로 임명된 이규원은 102명의 수행원과 함께 태하리 소황토구미(학포)마을에 도착하여 울릉도를 조사한 보고서를 토대로 1883년 16가구 54명이 처음 들어오게 되었고, 2년 뒤에는 개척인구가 2,000명을 넘어섰다.
<태하마을과 태하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수탈이 계속되자 고종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울릉도와 죽도, 독도 등 부속도서를 모두 통합하여 모두를 통합된 하나의 독립된 행정구역인 군(郡)으로 격상하였고,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강원도 27번째 지방관제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고종의 <칙령 제41호>는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 8월 민간단체 독도수호대가 <독도의 날>을 제정하였다.
<태하침식해안>
서풍에 본토의 봄바람을 실어 이곳으로 보내오는데, 이 바람은 어제 오늘이 아니라 울릉도의 역사가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바람이다. 태양은 서쪽으로 향했지만 그 쪽을 향해 길게 눈을 뻗으면 우리가 이곳에 오기 위해 배를 탔던 강릉항이 아니던가. 파도가 넘실대며 물비늘이 반짝일 때마다 대한민국의 고동소리가 파도와 함께 들려오는 것 같다. 침식(浸蝕)으로 움푹 페인 바다 가장자리에는 본토의 봄소식이 켜켜이 쌓여 바위를 이루고 그 위에 역사를 써내려 간다.
<태하 해안 단애>
뒷동산 산책하듯 침식해안을 둘러보고 태하항으로 돌아와 심해에서 채취한 홍해삼으로 입맛을 돋운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 나오는데 울릉군 서면 태하출장소와 태하보건지소 등 행정기관도 보이고 십자가를 높인 교회와 삼도사라는 사찰도 보인다. 마을에 노랗게 핀 유채꽃 자체가 울릉도의 봄이고 석양에 걸려 출렁거리는 바다가 만들어내는 낙조의 향연이 환상적인 <태하낙조(台霞落照)>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태하낙조는 울릉팔경의 하나다.
<태하 해안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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