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도검의 분류 : 단병기
조
선시대는 활과 화약무기의 전성기였던 만큼 칼은 군의 무기체계상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하였다. 또한 일본도와 중국칼의 영향을
받으면서 조선 고유의 칼 조형이 많이 퇴색된 점도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칼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무예도보통지의 발행등을
통하여 체계적인 훈련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조선 고유의 환도는 나름대로의 조형과 특징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우
리나라의 전통 단병기(短兵器)중 날붙이 무기인 칼을 분류하는 기준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각 도검 소장자와
소장기관은 각자의 방식으로 칼에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조선시대 단병기의 분류 방법을 검토해본다.
가.
환도(環刀)

조선시대의 도검(刀劍)중에서 칼집, 코등이가 갖추어지고 허리에 차기 위한 고리가 칼집에 달린 외날 도검은 모두
환도로 분류하는 것이 옳겠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대환도(大環刀), 중환도(大環刀), 소환도(中環刀)등의 명칭이
나타나는데 주로 대환도와 소환도가 자주 등장하며 중환도는 두 번 정도 나타난다. 환도의 길이는 왜검에 비해 짧기 때문에 대환도,
중환도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며 따라서 환도는 대환도와 소환도로 나누고, 문종(文宗)조의 기병용 환도 칼날 길이인
50cm 를 기준으로, 날 길이가 그 이상인 환도는 대환도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소환도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조
선조의 외날 도검 중에 날의 길이가 짧은 칼들은 현재 호신도(護身刀)라고도 불리우고 있는데 이들은 장도(粧刀)와 환도의 사이에
위치하여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지만 무기로서의 위력을 어느 정도 갖춘 도검들이다. 형태적으로 볼 때 이들 호신도는
환도 혹은 장도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크기만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이들 소도(小刀) 크기의 호신도는 각각 그 형식에 따라서
소환도(小環刀)와 장도(粧刀)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만기요람 군정편2(軍政編二)에는
환도의 종류로서 도금장식(塗金粧飾), 은입사(銀入絲), 조철별환도(條鐵別環刀)등이 나타나는데, 도금장식과 은입사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들을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환도로 추정된다. 조철별환도(條鐵別環刀)의 경우 조철(條鐵)이란 방철, 파철과 함께 잘 가공된
정철의 일종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국왕이 특별히 하사하기 위해 별환도(別環刀)를 제작한 기록이 있고 오군영에
저장된 약 27,000여 자루에 달하는 전체 환도중 59자루만이 조철별환도(條鐵別環刀)인 것으로 보아서 이는 특별히 좋은 쇠를
사용하여 만든 고급 환도라고 추정된다.
나. 운검

조선시대 칼의 분류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중의 하나는 운검(雲劍)과 별운검(別雲劍)을 환도와 구별하여 별도의
칼로 분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조
선 초기부터 국왕의 주요 행사시나 일반적인 행차시에는 정 2 품 이상의 신하가 국왕의 곁에서 칼을 메고 호위하였는데 이러한
임시적인 직책을 운검(雲劍), 혹은 별운검(別雲劍), 운검차비(雲劍差備)라고 하였다. 운검과 별운검이라는 직책이 동일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한 경우도 있고 한편으로는
동일 인물의 직책을 논하면서 운검과 별운검이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조선 후기에는 운검과 별운검이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할 경우 큰 행사시(行事時)에는 어가에 앞서가는 운검(雲劍)이 두명이고 국왕
곁에서 호위하는 운검이 네명이다. 이 두 가지 운검의 성격은 조금 달랐던 듯한데, 앞쪽의 운검은 직위가 낮은
대호군(大護軍)이고, 운검(雲劍)을 차고[佩] 가는 것이 아니라 받들고[捧] 간다고 하였으므로 이들은 왕의 칼을 운반하는
자들이며 운검이라는 직책과는 관계가 없다. 국왕 주위에서 운검을 들고 호종하는 고관 4명이 바로 운검의 직책을 맡은 자들이다.
소규모 행사나 비공식적인 행차시에는 두 명의 운검이 왕의 앞이나 좌우에서 왕을 호위한다. 운검은 반드시 무반(武班)이 맡는 것은
아니며 한명회등 문반(文班) 출신도 자주 운검을 맡았고 조선 후기에는 정 2 품 이상이라는 조건도 그리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다.
한편, 운검과 별운검이 소지한 칼을 또한 운검(雲劍)이라고 하는데 운검이라는 이름이 칼의 종류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 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자주 나타나지만 별운검의 경우는 칼의 명칭으로 사용된 예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운검이나 별운검의 직책을 맡은 신하가 패용한 칼은 운검(雲劍)으로 분류해야 하며 현재 별운검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칼은 왕의
행차시 별운검의 역할을 수행할 때 휴대했던 작은 환도라는 의미로 이해될 뿐 별도의 칼의 종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
종실록 오례군례서례(五禮軍禮序禮)에 의하면 운검은 “그 칼집은 어피(魚皮)로써 싸고, 칠은 주홍색(朱紅色)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홍조수아(紅絛穗兒)로써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한다“하였다. 여기에는 칼의 길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서울 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정조세자책봉의례도 (正租世子冊封儀禮圖)>나 여타의 반차도등을 보면 국왕의 곁에 선
운검들은 일반 환도에 비하여 훨씬 긴 칼을 등이나 어깨에 메고 있다.
현재 운검이라고 전해지는 칼들은
백은 장식과 붉은 유소(流蘇)가 없고 그 길이도 일반 환도와 비슷한 정도이다. 따라서 지금 운검(雲劍)이라고 불리우는 칼들은
조선시대의 제도에 맞는 운검(雲劍)이 아니라 국왕의 곁에 시위(侍衛)할 때 찼던 고급스러운 환도(環刀)라고 생각된다. 칼의
종류로서 운검(雲劍)을 별도로 분류하자면, 운검(雲劍)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거나 혹은 국왕을 호위할 때 휴대한 칼이라는
이유만으로 운검(雲劍)으로 분류할 수는 없으며 위의 그림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길이가 최소한 120cm 이상이 되고 등끈을 메기에
알맞도록 칼집고리 사이의 간격이 넓으며 민간에서의 사용이 금지된 은장식이 사용된 칼만을 운검(雲劍)으로 분류하여야 할 것이다.
그 나머지의 운검이라고 일컬어지는 유물들은 설사 국왕 행차시 운검의 직책을 맡은 이에 의하여 휴대되었다고 하더라도 칼의 종류를
분류함에 있어서는 환도로 분류하여야 한다.
다. 지팡이검[杖刀]

지팡이검[杖刀]이란 서양의 스틱소드(stick sword)나 중국의 지팡이검과 마찬가지로
지팡이처럼 생긴 자루안에 폭이 좁은 칼날을 숨겨 소지하는 칼을 말한다. 여기에는 죽장도, 창포검, 횟대검 등이 포함된다.
칼
집과 칼자루를 대나무로 만든 죽장도(竹杖刀)는 좁은 대나무 자루 안에 칼날을 숨겨야 하므로 칼날의 폭이 매우 좁으며 주로 찌르는
용도에 적합하다.
창
포검(菖蒲劍)은 죽장도와 유사한 형태의 칼이지만 나무로 칼자루와 칼집을 만들며 좁고 곧게 뻗은 칼날이 마치 창포 잎 같다고 하여
창포검이라 한다. 창포검은 숙종 때 검계(劍契)의 무리들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만기요람에는 금위영(禁衛營)에 한자루의
창포검을 둔다고 기록되어 있다.(만기요람 군정편2)
횟대검은 가는 대나무나 나무 칼집 속에 칼날을 숨긴
호신용 칼로서 죽장도보다 짧아 숨겨 휴대하기에 적합하다. 평소에는 옷을 걸어 놓는 옷걸이(횟대)로 사용하다가 위기가 발생했을 때
뽑아 사용한다고 해서 횟대검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칼의 형태가 횟대를 닮았기 때문에 횟대검이라고 부른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지팡이검은 날의 폭이 좁고 뾰족하며 패용장치가 없는 직선형의 칼이라는 점, 그리고 민간인이 칼을
숨겨 소지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환도와 구분하여 분류할 만한 특징을 갖는다.
라.
인검(寅劍)

주조(鑄造)된 칼인 인검(寅劍)은 실전적인 의미에서는 칼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벽사용(僻邪用)의
부적(符籍)이다.
인
검(寅劍)은 삼인검(三寅劍)과 사인검(四寅劍)을 말하는데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든 것을
사인검이라고 하고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만든 것을 삼인검이라고 한다. 인검은 극양(極陽)의 성질을 지녀
음(陰)한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여 주로 왕실에서 제조되었는데 연산군 때는 사인검을 무려 200 자루나 만드느라
상인들을 심하게 토색한 기록이 있다. 민간에서도 인검을 만들거나 소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예로 조선왕조실록에 종친인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의 집에서 삼인검이 나온 기록이 있고 동양위(東陽尉)로부터 사인도를 선물 받고 그 기쁨을 표현한
상촌집(象村集)의 칠언고시(七言古詩) 사인도가(四寅刀歌)가 남아있다.
사인검은 단순히 정해진 날에 칼을
단조(鍛造)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달간 산역(山役)을 통해 무쇠를 만들고 이를 주물로 부어 칼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미신을 배격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은 사인검 제작 풍습을 좌도(左道)라고 비난하였다. 실제로도 인검은
도교(道敎)의 산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진검(三辰劒)에 대한 기록도 보이는데 그 의미는 삼인검과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인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사인검(四寅劍), 2003.10,孤竹>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한
편 칠성검(七星劍)이란 칼날의 표면에 북두칠성을 새긴 칼을 말하는데 그 의미는 인검과 거의 동일하며 다만 제작하는 날에 제한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칠성검도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 참사검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마.
장도(粧刀)

장도(粧刀)는 일명 패도(佩刀) 혹은 도자(刀子)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에 남자나 여자가 호신용이나 손칼로 지녔던 매우
짧은 칼이다. 장도의 기원은 신라왕의 금제허리띠드리개(金製腰佩金具)에 달린 금장도(金粧刀)로 소급되며 고려시대에도 귀족사회를
반영하듯, 손잡이가 매우 짧아 실용성은 없지만 금과 은으로 표면을 매우 아름답게 장식한 장도가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장도는
어디까지나 생활 도구로서의 도자(刀子)일 뿐 무기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