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중(표준)으로 삼을 수 없는 '표준 국어 대 사전'
우리 말글살이(언어 생활)를 잘못 이끌어 가는 여러 가지 문제점 가운데서 첫 손가락 꼽히
는 것이 바로 '국어 사전'이라는 것은 두루 아는 일이다. 그 동안 제대로 만든 우리말 사전
이 없었기 때문에 말과 글을 어떻게 써야 바른 지 몰라서 오랫동안 갈팡질팡해 왔다. 그래
서 대중삼을 만한 올바른 사전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국립 국어 연구원'에서 새로 펴낸 '표준 국어 대 사전(표준 사전)'은 이런 우리의
바람과는 거꾸로 해방 뒤 곧바로 시작한 '우리말 도로 찾기'부터 '한글만 쓰기', '국어 순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오십 년 넘게 많은 분들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해 온 '고치거나 버려야
할 말'을 바로잡기는커녕 버젓이 '대중말(표준말)' 자리에 올려놓았고, 풀이말과 보기 말(예
문)은 온통 일본말과 서양말을 바로 뒤친 말투(직역 투)로 어지럽게 써 놓아서 보는 사람들
을 더욱 헷갈리게 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한다.
2. 잘못 붙인 사전 이름
'국어 사전'이라면 속내를 보나마나 '나라말'이 아닌 '국어'를 바탕으로 만든 사전일 수밖에
없다. '국어 사전'이란 이름은 '우리말 사전'이 아니라 '한자말 사전'이라는 것을 미리 밝힌
것이다. '국어'가 '우리말'이란 생각 바탕에서 만든 사전이 우리말을 제대로 담은 사전으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국어 사전'이 아니라 '우리말 사전'이다.
'국어'는 왜놈 종살이 때 '왜말'을 가리키던 이름이고 '조선 왜말'이라는 것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자말인 '국어'가 아니라 '나라말'이라 해야 옳다. 따라서 사전 이름은 '우리말 사
전'이나 '한국말 사전'이라 해야 한다. '국어 사전'이란 이름표를 달고서는 누가 언제 만들어
도 '표준 국어 대 사전(표준 사전)'이 태어나면서 안고 있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다.
3. 엉터리 대중말(표준말)과 어이없는 본보기 말(예문)
한국말이란 한국 사람이 오늘날, 나날살이(일상생활)에서 두루 쓰는 '겨레말(배달말)'을 바
탕으로 삼고 여기에 다른 나라에서 들어와 우리말로 뿌리내린 들온말(외래어)을 아울러 일
컫는다. 따라서 '나라말 사전'은 이와 같은 나라말의 뜻매김에 따라 '표준말의 잣대'에 맞는
대중말(표준말)을 올림말로 삼아야 한다. 또 그 쓰임새를 바르게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말
글살이(언어 생활)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길잡이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
'표준 사전'은 엉터리 말을 올림말로 실어 어느 것이 대중말(표준말)인지 알 수 없게 만들
어 놓았고, 요즘 쓰지 않는 중국 고전과 우리 고전에 나오는 옛 중국 한자말, 조선 왜말(일
본 한자말), 한문 글자를 짜깁기해서 만든 온갖 말 같지 않은 말을 뒤섞어 놓았고, 서양말도
아직 들온말(외래어)로 뿌리내리지 못한 여러 나라 말을 함께 올려놓았다. 거기에다 쓰임새
가 바르지 못한 본보기 말(예문)로 우리말을 비뚤게 쓰도록 만들어 놓았다.
4. 우리말이 아닌 한자말 사전
오십만 낱말이 실렸다는 '표준 사전'에 한자말과 겨레말이 얼마만큼씩 실렸는지 세어 보지
않았지만 어떤 이는 올림말 가운데 한자말이 열에 일고여덟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겨레말
(배달말)보다 한자말이 많다. 겨레말과 들온말(외래어)이 서로 어울려 있는 것이 나라말이지
만 어디까지나 겨레말이 바탕이 되고 들온말은 모자란 데를 메우고 깁는 데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표준 사전'은 앞서 나온 여러 '국어 사전'과 마찬가지로 한자말이 주인이고 겨레말
은 조치개(부수적인 것)로 덧붙어 있다. 이런 사전을 보고 배운 사람들은 한자말도 우리말이
고 한문 글자도 우리 글자라는 생각에 얽매일 수밖에 없고 끝내 뜻을 나타내는 말은 모두
한자말로 쓰고 겨레말은 토씨로 쓰는 말글살이(언어 생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5. 들온말(외래어)과 버릴 말로 갈라내야 할 한자말
한자말 가운데는 들온말로 자리잡은 것도 많다. 이런 한자말은 두말할 것 없이 겨레말과
마찬가지로 우리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한자말이 다 우리말은 아니다. '고구마, 구두,
가마니, 냄비'가 일본말에서 들어왔지만 일본말을 우리말이라 하지 않고, '야호, 인두, 말, 토
끼, 미숫가루'가 몽골말에서 들어왔다고 몽골말을 우리말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한자말은 '중국 옛말'이거나 '중국 사투리'이고 '일본 한자말'이다. 겨레말보다 더 많이 대중
말(표준말)로 올려놓은 이런 한자말은 모조리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따져서 쓸모가
있는 말만 들온말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릴 말로 갈라내야 한다. 이 일이야말로 우리말
을 바르게 하고 '국어 사전'을 '한국말 사전'으로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다.
우리나라 '한문 고전'이나 '중국 고전'에서 뽑아 실은 한자말은 우리말이 아니므로 마땅히
우리말 자리에서 몰아 내야 하고 '사전'에 실어서도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문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평생에 한번 구경하기
도 어려운 '옛 한자말'은 '고대 한자어 사전'을 따로 만들어 거기에 실어야 옳다.
다음은, 뜻이 같은 여러 가지 한자말을 쓸 말과 버릴 말로 갈라내야 한다. '편지'를 나타내
는 한자말이 '서간, 서한, 간찰' 따위 백 아흔 여덟 가지나 실려 있고, 아버지를 나타내는 말
도 '부친, 가친, 엄친' 따위 예순 세 가지가 실려 있다. 이밖에도 '금잠초, 지정, 포공초, 포공
영'처럼 뜻이 똑 같은 한자말이 보통 서너 가지씩 실려 있다. 이런 여러 낱말 가운데서 꼭
쓸모가 있는 말만 들온말(외래어)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모조리 쓸어 내야 한다.
뜻이 같은 한자말에는 오랫동안 우리가 써 온 한자말과 왜놈 종살이 때 들어온 조선 왜말
(일본 한자말)이 있는데 '처지', '호상'은 우리가 써 온 한자말이고 '입장', '상호'는 조선 왜말
이다. 국어 사전에는 함께 실린 '소제(청소), '지진(지동), 출세(입신양명), 배우(광대), 면직
(파직), 형제(동기), 화장(단장), 외출(출입), 기중(상중), 역할(직분) 따위가 그 보기다. 두 가
지를 다 들온말(외래어)로 받아들일 까닭이 없다.
뜻이 같은 겨레말과 한자말도 손질해야 한다. '해와 태양', '바다와 해양', '젖먹이와 유아',
'아버지와 부친', '어머니와 모친', '아내와 처', '사람과 인간', '한가위와 추석', '수릿날과 단
오', '도둑과 도적', '입구와 어귀' 따위 낱말들을 둘 다 '겹대중말(복수 표준어)'로 삼느냐, 한
가지만 '대중말(표준말)'로 삼느냐 하는 것도 '나라말 사전'에서 판가름해야 할 일이다.
뜻이 같은 겨레말이 있다면 굳이 한자말을 쓸 까닭이 없다. 한자말은 우리가 만든 것이든,
중국 옛말이든, 조선 왜말이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씻어 내야 한다. '호상'이니 '상호'니 할
것 없이 '서로'라 하고, '세탁'을 버리고 '빨래'라 해야 한다. 한자말을 갈음할 겨레말이 없을
때는 겨레말로 새말(신조어)을 만들든지 뜻이 비슷한 겨레말의 뜻을 넓혀서 뜻매김하여 써
야 하고 그것이 어려울 때만 들온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라말 사전에서 할 일이다.
이밖에도 한자말에서 들어와 우리말로 자리잡으면서 소리가 바뀐 말이 있는데 이런 말은
우리말이므로 굳이 말밑을 밝혀 올림말로 싣는 것은 잘못이다. 한자말인 '고초, 관혁, 백채,
침채, 침장, 성황당'을 '고추, 과녁, 배추, 김치, 김장, 서낭당'의 원말이라고 한 것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다. 이런 말은 '말밑 사전(어원 사전)'에나 실어야 할 낱말이다.
한문 글자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한 낱말 구실을 하면서 놓인 자리에 따라 글월을 이룬다.
'박수'는 본디 '손뼉을 친다'는 한 글월(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한문 글월을 우리는 하나의
이름씨로 쓰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박수치다, 축구차다' 따
위가 그 보기다. 우리나라 말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한문 '글월'을 글월이 아닌 '한자
말'로 치고 여기에 '∼하다'를 붙여 대중(표준)으로 삼는다. '박수하다, 축구하다'가 맞는 말이
다. 그런데 '표준 사전'에선 '박수치다' 따위를 표준말로 써서 우리 말본을 깨뜨렸다. 더욱이
'피로 회복', '안전 사고', '신토불이' 따위 얼토당토않은 엉터리 말과 조선 왜말을 대중말로
올린 것은 우리말을 죽일 작정하고 한 일이거나 아니면 '표준 사전'을 쓰레기통으로 생각하
고 마구 쓸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일본에서 한문 글자로 서양말을 소리나는 대로 쓴 한자말도 서양말과 함께 대중말
로 올려놓았다. 나라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겁도 없이 사전을 만들겠다고 나선 데
서 일어난 일이다. '구라파, 아세아, 영국(잉글랜드), 미국(아메리카 합중국), 독일(도이칠란
트), 서반아(스페인), 비율빈(필리핀), 인도(인디아)' 따위 나라 이름과 '낭만(로망), 초자(글라
스)', '불(달러)' 따위 소리를 따거나 꼴을 본 떠 만든 한자말은 마땅히 본디 나라말 소리대
로 한글로 써야 바르다. 일본과 중국 사람은 '歐羅巴(구라파)'를 '요로빠'와 '어우로바'라 하는
데 이는 일본과 중국에서 제 나라 한문 글자 소리대로 '유럽'이라고 읽은 말이다.
6. 서양말은 들온말(외래어) 아닌 남의 말(외국어)
들온말(외래어)은 알다시피 일본말, 중국말, 서양말 따위 남의 나라말(외국어)이 우리말 속
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는 서양말을 덮어놓고 들온말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말을 갈래 지어 들온말로 명토박은(지정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오
늘날 쓰는 어떤 서양말이건 들온말일 수 없다. 아직은 남의 나라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표준 사전'에서는 아무렇게나 쓰고 있는 서양말을 그 나름대로 들온말 잣대를 만
들어 막을 것은 막고 버릴 것은 버리고 꼭 쓸모가 있는 말은 우리말로 바꾸거나 새말을 만
들고 그렇게 할 수 없는 말은 본디 소리대로 다듬어서 들온말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어쩌다 한두 사람이 어느 글 한 귀퉁이에 한두 번 쓴 서양말까지 찾아내어 올림말로 실어
놓았고 뜻이 같은 여러 서양 나라말도 두세 개씩 함께 올려놓았다.
7. 남의 말(외국어)을 바로 뒤친(직역한) 보기 말
'사전'은 낱말의 뜻을 풀이하고 쓰임새가 옳고 그른 지, 비뚤고 바른 지 판가름하는 잣대
다. 올림말은 말할 것도 없고 뜻풀이나 보기 말 또한 말본에 맞고 우리말다운 글월로 본보
기를 보여야 한다. 그런데 '표준 사전'에는 말본에 맞지 않은 올림말도 많고, 남의 말(외국
어)을 바로 뒤친 말투(직역 투)로 풀이한 것도 적지 않다. 쓰임새의 보기 또한 알맞지 않은
것이 수두룩해서 '사전' 구실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말을 잘못 쓰는 빌미를 주고 있다.
이수열 님은 '표준 국어 대 사전에 부치는 제언'에서 남의 말을 바로 뒤친 말투의 보기로
'가지다', '∼지다', '∼되다', '∼화하다' 따위와 매김꼴 토씨 '의'를 보기로 들고 잘못을 밝혔
고 제움직씨와 남움직씨를 갈래 짓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시키다'는 '남에게 무엇을 하게 한다'는 뜻인데 나날살이(일상 생활)에서 '스스
로 무엇을 한다'고 할 때도 쓰고, '하다'를 붙여 움직씨로 만들 수 없는 말에도 '∼시키다'를
붙여 쓰는 일이 잦지만 옳고 그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표준 사전'에선 마땅히 이 말의
쓰임새를 바로잡아 보여야 하는데 '교육시키다' 같은 엉터리 말을 비롯하여 '등록시키다, 오
염시키다' 따위를 늘어놓는 데서 그치고 올바른 쓰임새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풀이
하는 말 곳곳에 잘못 쓰는 '∼시키다'를 본보기 말로 실어서 우리말을 병들게 하고 있다.
8. 뜻과 쓰임새가 다른 말을 하나로 묶은 억지와 잘못된 말을 표준말로 올리기
이제까지,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갈래 지어 바르게 써 오던
말을 뜻이 같은 한뜻말(동의어)로 묶어서 쓰임새를 헷갈리게 한 것도 적지 않다. '귀고리'는
치레로 귓불에 다는 고리이고, '귀걸이'는 '귀걸이 안경'과 '귀가 시리지 않게 거는 물건'인데
이 두 낱말을 같은 것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드날리다와 들날리다', '메아리지다와 메아리치다', '주인공과 장본인' 같은 말도 소리가 비
슷하거나 뜻이 비슷하지만 쓰임새가 아주 다른 말인데 같은 뜻으로 쓰도록 하거나 멀쩡한
말을 바르지 못한 말이라고 해 놓았다. 게다가 '탄신일, 벌서다, 박수치다, 부상입다' 따위 오
랫동안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애써 오던 말도 바른 말인 '탄신, 벌쓰다, 박수하다, 부상하다'
와 함께 쓸 수 있다고 해서 대중말(표준말)을 흐려 놓았다.
9. 마무리
국립 국어 연구원에서 펴낸 '표준 국어 대 사전'은 우리말 속에 섞어 쓸 수 없는 한자말,
조선 왜말, 서양말 따위 남의 말과 아무렇게나 짜깁기해 만든 엉터리 말과 반드시 바로잡아
야 할 잘못 쓰는 말을 모아 대중말(표준말)이라는 이름으로 올려놓은 쓰레기통이고, 우리말
속에 일본 말투, 서양 말투를 돌림병처럼 퍼뜨리는 애물단지다. 이 사전으로 말미암아 우리
말이 더 더러워지고 더 병들기 전에 하루바삐 거두어서 불살라 버려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