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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1)
고
그런 연유로 해(亥)를 따라, 철마다, 절(節)마다, 찾아가는 그곳이 나의 변하는 속도만큼이나 달라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반색(斑色)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편리함 속에 살았던 내가 때론 그 편리함에 질려 이제껏 불편함을 감내하고 살았던 그곳을 찾아 그 불편함에 잠시 기대코자 편리함이 별것 아니라는 듯 새것을 쫒지 말라하고 옛것을 고집하라 은근히 바랬었다. 그곳은 언제나 번듯하고 높다란 건물보다는 비새며 벌레들 우글거리던 초가집 지붕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 하였고, 까맣게 칠된 신작로의 매끄러운 길 보다 무성한 잡초에 소(牛) 뜯기며 먼지 풀풀 날리는 좁다랗고 구부러진 돌담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하였다. 나 그 속에 살던 어느 때에 이런 볼품없던 것들에 대하여 정감있다 여겼던가!
분주하고 번잡(煩雜)한 세상에서의 부대낌을 인위적 요소에 의해 세련(洗練)되게 배열된 공원이나 쉼터 가득한 도시에서 모조리 풀어내지 못하였다. 찻집의 풍경이 어찌 뒷동산의 풍경과 비교될까!
시내를 거쳐 물살 빠른 장군 섬의 여울목을 가로질러 연초의 카탈로그 표지 모델이 된 돌산대교의 개통(開通), 사방이 섬이었던 내 살던 곳에 연륙교(連陸橋)가 놓이던 날이었다.
그 얹어진 다리위로 점령하듯 따라 들어온 새로운 세계의 것들, 또한 그 도시와 가까이 지냄으로 빼앗긴 우리네 것들, 우린 자기 집 앞 마당인양 빠르게 동네 한가운데를 휘 젖고 내지르는 자동차를 먼저 손님으로 맞았다.
아낌없이 내어준 촌부들의 전토를 깔판삼아 마을을 가로질러 쭉 뻗은 커다란 대로가 뚫리고, 집채만 한 커다란 버스가 거친 엔진소리와 더운 공기를 풀어놓았다.
처음 맡아본 경유 타는 냄새의 향긋함과 배속의 기생충을 죽인다는 허망한 말에 속은 애들의 촐랑거림을 먼발치에서 보았던 그 때의 소년들이 자라 어른이 된 후의 회한에 찬 한숨, 시내 나들이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반딧불의 연회를 잃었다. 자신이 밝힐 수 있는 빛보다 더 밝은 빛이 오면 사라진다는 반딧불은 손전등 비추며 내달렸던 어둡던 골목길에 번듯하게 가로등이 들어서고 내몰리듯 쫓겨 산골짜기 숨어들었으나 사람 눈 부시도록 샅샅이 뒤져대는 헤드라이트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시대의 흐름 앞에 내던져진 순진한 사람들의 얼굴빛은 탄성(彈聲)이나 환호가 아닌 가늠하지 못할 우울함으로 가득했던 날, 그 신작로가 내리깔고 앉은 전답에 대한 농사꾼의 씁쓸함, 밤새 뒤척였던 동네 개구쟁이들의 가슴에도 휑하니 다가온 아득한 두려움들....
그것은 눈 한번 내리지 않는 겨울동안 내내 뛰어놀 논바닥 놀이터를 삼켜버렸다는 서글픔이요, 분노요, 시샘이었으리라.
그렇게 고향은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옛적의 투박한 멋스러움을 벗어 내어주고 점차 삶의 언저리를 파고드는 삭막한 새 것으로 덧입고 있었다.
이제는 자세히 그것도 물어서 확인해야 할 형편이 되어버린 산지(山地)를 둘러본다는 것의 감회(感懷) 가 이토록 가슴 저리게 할까!
여기는 무엇이 있었던 자리며, 저곳은 누가 살던 집이며, 무엇을 하고 놀았던 자리며, 파묻혀 버리고, 뒤집혀 버린 눈앞의 광경들을 신기한 듯, 아쉬운 듯, 둘러보는 불청객으로 찾아와 버린 고향에 대한 많은 질문들, 이 물음에 대답해줄 이 없는 어르신들의 떠나감 또한 못내 섭섭함으로 다가온다.
역시 그곳에 살지 않은 사람의 편견과 욕심(慾心)은 그곳 사람들의 힘겨움을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의 초롱불, 기름보일러가 없던 시절의 솔가지와 장작불 지핌의 눈물겨움, 버스가 다니지 않았던 산골 오지의 산악등반 같은 시내 나들이, 수세식 화장실의 편리함을 몰랐던 때의 숨 막히는 암모니아 냄새와 들 끊던 구더기와 파리들의 윙윙거림을 도시의 생활에 길들여진 지금의 나는 얼마나 참아 낼 수 있었을까!
누군가에게 뒤쳐질까 앞 다투어 버리고 바꾸며 부수고 다시 짓고 하는 고향의 변신을 나서 죽도록 살지 않는 나로서는 반대하거나 투덜거릴 입장은 아닌 셈이다.
미련이 남아서인가! 아니면 이대로 묻혀 버릴 옛 고향의 모습을 다시 담아두고 싶어서인가! 조금만 더디게 조금만 느리게 되었으면 하는 속내를 모르는 듯, 고향은 좋은 듯 자꾸만 새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들어옴과 기억했던 사람들의 떠나감을 오가며 들을 때마다 나도 이젠 세월을 따라 가는가 보다 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제일 남쪽, 그것도 한려수도의 섬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도(突山島, 돌산: 돌이 많은 산) 유명세를 탄 것은 요 근래의 일이다.
자기 살던 곳이 매스컴을 탄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 지역의 특산물 때문이다.
돌산을 대표하는 특산물 갓 김치, 해풍을 맞아 자란 갓 김치는 여느 지역의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독특한 맛을 지녀, 지금은 홈 쇼핑의 판매 품목에도 오를 만큼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 바다를 끼고 있다는 것과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는 것의 자연적 풍족함을 그리 섭섭지 않을 만큼의 보상으로 되돌려 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내가 살았던 곳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향일암(向日岩) 이라는 바위 위에 들어앉은 절 때문이다. 정년 초하루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소망처요, 소원처며, 망년의 기억들을 묻기에 더 없이 좋은 해돋이 장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얼마 전 침투한 북한 잠수정이 발견 피격되었던 곳이며, 솔가지 늘어진 방죽포 해수욕장과 수려한 경치의 해안도로 등은, 한번쯤 방문하고픈 관심을 유발시키기에 많은 여건들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시대의 흐름 줄 그네타기에 약삭빠르게 올라탄 것은 외지 사람들의 몫이다.
순진한 고향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생각할 비상한 머리들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인해 사실 제대로 된 돈 벌이와 실력행사는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하게 된다. 아무리 타이르고 경제니 장사니 하는 용어를 풀어헤쳐도 시세보다 몇 천 원하는 속임수 거래에 선뜻 전답을 넘기곤 하는 것이 토박이 고향사람들의 정서다.
어리석음이라 생각지 않았던 촌(寸) 사람들의 순진무구함의 행보에 어리석다라고 결론 지워버린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도시 사람의 서투르고 섣부른 행복의 잣대를 통해 가늠하고 저울질하던 우리의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해했다.
조금 남아 있던 기억을 더듬어 손에 넣어 잡으려 고향의 산천과 어린 시절의 일들을 더듬으려 한다.
누나가 오던 날(2)
누
‘집안 형편과 동생들을 위해 네가 서울로 가야겠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아홉 살이었던 탓에 서울로 간다는 그 상황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뒤돌아 앉아 옷소매를 훔치시는 어머니와 차마 맨 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말이었던지 애원과 강요를 섞으면서도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심각성을 알듯하였다.
평소 아버지의 행동으로 보건데 지금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에게 꺼리는 말씀을 하실 땐 아버진 종종 술의 힘을 빌리곤 하신다. 딱히 술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자리에서의 한마디면 무엇이든 곧 따라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듣는 누나보다 말하는 아버지가 더 머뭇거리며 절절 매는 것을 보면 이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버지는 누나를 매우 아끼셨다. 야무지고 어머니를 닮아 예쁘기도 하였지만 여섯 형제 중 큰 아들을 일찍 땅에 묻은 후로, 맏이 된 누나를 누구보다 의지하고 계셨다. 그럴 것이 바다와 산, 밭을 끼고 있던 지리적 특성으로 삶은 매우 고달팠다. 일이 많은 것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은 농촌 살림에서의 자녀들은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곧 천덕꾸러기 취급을 동시에 받았다. 그 속에서의 누나는 자기역할 이상의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팍팍한 살림살이의 고달픔과 큰 아들을 잃은 슬픔을 술로 달래시는 아버지는 자연 주(酒)정이 심해만 갔다. 걸핏하면 마당귀퉁이에 뒹구는 밥그릇과 찌그러진 냄비 등을 보는 것이 예사였고 어머니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탓에 어머니에 대한 폭행과 폭언은 가히 행패에 가까웠다. 그런 연유로 어머니의 잦은 가출 또한 일상적인 일이 될 무렵, 누나의 존재는 아버지의 한풀이의 대상이자 위로거리였고 남은 형제들의 방패막이였다. 누나가 서울로 떠난 후 오랫동안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던 아버지에게서 누나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누나가 서울로 가려한다는 것이다.
누나는 유독 여러 형제들 중 날 귀여워했다. 심성이 깊고 정이 많았던 누나에게 위로 형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부리기 어려웠고 아래로 여동생 둘은 힘이 되지 못한 탓에 내게 기댄듯하였다. 그날따라 유난스레 아버지의 폭행이 도를 넘고 견디다 못한 어머니의 가출이 몇 주를 훌쩍 넘겼음에도 돌아오실 기미가 보이자 않자, 말 그대로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아버지나 우리 모두 어머니의 필요에 대한 무언의 공감을 확인한 후, 누나는 어머니를 찾을 요량으로 집 나설 차비를 하였다. 어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을 오셨다. 그래도 그 동네에선 논과 밭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었던 터라 어린 시절 흰 쌀밥을 먹었다 하셨고, 키가 크셨고 더구나 얼굴이 고우셨기에 아버지 같은 분을 만나신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다. 어린 생각에 어머니는 당연 친정에 계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어디서 났는지 모를 사탕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고 누난 길을 재촉했다.
시골 바닷가 길은 대부분 바다근처를 끼고 돌아 평지가 없어 가파르며 험하고 위험했다. 어머니의 친정은 우리 동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길이 뚫리기 전 어린 걸음으론 두세 시간 거리였고 더구나 때가 겨울인 까닭에 찬 북서풍이 부는 계절에 해가지는 어스름한 산길을 넘는 일은 장정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도착한 어머니의 친정,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행위를 소문으로 들었던 외할머니는 누나와 나를 매정하게 대하셨고, 남매는 쫓겨나듯 내몰렸다. 그 후로 누나는 외할머니 집으로의 이 행보를 잊지 못했고 두고두고 가슴에 담아두었다 했다. 그 길을 가고 오는 동안 누난 한 번도 내손을 놓지 않았고 난 한없이 그것이 좋았다. 누나의 정(精)을 마음껏 받았고 느꼈던 때였으며 이런 누나가 든든해지기까지 하였다. 이 경험은 자라 누나에 대한 동경심으로 연상에 대한 흠모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난 그렇게 어렸을 적 받지 못했던 어머니의 정을 누나에게서 채워가려 했던 것이다.
누나가 서울로 떠나던 날에는 난 학교에 가고 없었다. 아니 동생들이 없는 틈을 탔으리라. 무척이나 서럽게 오랫동안 울었다. 또한 아버지를 증오했고 소심한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간 누나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70년대의 서울, 산업화에 근대화를 부르짖던 시대상에 걸맞게 지방에서의 갓 상경한 풋내기들이 뒷줄 없이 일할 곳은 뻔했다. 먼저 간 고향 선후배의 주선으로 소개받은 곳이란 장안동, 왕십리, 구의동, 가리봉동, 영등포 근처에 널려있는 연립 반지하의 소규모 봉제공장들로 빨려 들어갔다. 섬유산업이 수출의 중심이 된 상황에서 옷 만드는 일은 엄청난 수요를 요구했고 값싸고 젊디젊은 인력을 한없이 서울로 몰려들게 하였다. 그런 탓에 근로조건은 열악했고 일에 혹사당한 것에 비해 임금은 턱없이 낮았으며 고용주의 대우는 비참했다. 누나는 그런 속에서 이십여 년을 일했다. 먹고 잘 곳이 없는 낯선 땅 서울에서의 생활, 돈벌이를 위해 상경했다는 중압감에 월급의 일부를 떼어 집으로 송금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후에 누나의 집에 갔을 때 살림품목 중 비중 있던 재봉틀 하나 없음에 대한 시선에 누난 옷을 만들거나 꿰매거나 하지 않는다고 했다. 떨어지고 헤어지면 버린다했다. 누나에게 재봉틀과 바늘, 실은 그렇게 지겨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기다리던 날은 명절이다. 누나를 볼 수 있는 날인 까닭이다. 절절한 사연들을 담고 떠났던 사람들의 귀향, 달력이 짙은 연필 칠이 붉은 색 날짜들에 가까워져 가고 어머니의 손이 분주하면 누나가 내려온다는 징조였다. 당시 교통상황으로 서울에서 우리 동네까지는 적어도 열 시간 이상을 소요했다. 길이 막혀서가 아닌 교통편이 모자란 탓이었다. 전라도행은 타 노선에 비해 열악했고 이용객은 많았다. 회사 버스를 통한 고향방문은 대기업의 홍보용에 불과했고, 기차표 한 장을 얻기 위해 날밤을 새워 기다려야 했다. 좌석 표는 촌놈들이 손에 쥘 물건이 아니었고 입석표라도 건지면 그나마 행운을 잡은 것이었다.
통일호 야간열차, 그 열차를 탄다는 것은 곧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선택이자 고된 귀향길의 암시다. 돈과 시간을 조금이나마 절약할 심산으로 집어탄 통일호 열차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차창은 접어두고라도 십 여분 사이로 정차하는 모든 역, 틈 없이 빽빽한 사람들의 들어참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그것뿐이랴. 일의 노동에 대한 지침과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감내하고 토해내듯 내린 새벽녘의 여수역은 각 섬으로 찾아들어갈 사람들의 또 다른 출발지였다.
다시 여객선을 타기위해선 어디서건 날 새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호남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정치적 화해의 모양새를 띠고 놓인 전두환 정부의 선물이었던 돌산대교 덕에 조금은 비싼 값에 택시를 이용한다면 새벽의 고단함과 찬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부모면전에 내놓아야 할 입장이라면 택시는 호사였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 도착한 집에는 좋은 냄새가 가득했고 누나가 돌아온 집은 오랜만에 행복함이 담을 넘었다. 누나는 집에 있는 동안 방에만 있었다. 아니 먹고 잠만 잤다. 뻔질나게 문틈을 엿보고 방 고리를 만지작거리던 나를 호되게 나무라던 어머니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평시보다 더 활활 타오르게 했다. 죽은 듯 잠만 자는 어린 누나의 모습에 어머닌 아궁이를 떠나지 않았고 말없이 서럽게 흐느끼셨다. 방구들이 익어 장판이 누렇다 못해 까맣게 타들어가는 방에서 누나는 그저 잠만 잤다. 그렇게 어머니와 딸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없이 주고받았던 셈이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난데없이 함께 온 매형 될 사람의 등장은 누나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세고 거친 손, 검게 그을린 얼굴은 그의 하는 일이 힘겨운 일임을 짐작케 했고, 처음 인사 온 사람의 옷차림이 점퍼인 것을 보면 형편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반대를 하지 못하셨다. 집안 그 누구도 누나의 선택을 말릴 수 없었다. 혹사시킨 누나에게 모두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형은 사람은 좋았지만 그 장점을 활용할만한 배움이 부족했고 술버릇이 아버지보다 더 고약했다. 한 달 중 육지에서의 생활이 이삼일정도로 바다위에서 지내야 하는 고기잡이배를 탔다.
항상 현금을 손에 쥔 탓에 술집을 들락거렸고 그 계집들의 속삭임에 가진 것을 탕진했다. 설상가상으로 선원으로 일하던 배를 상당한 액수의 대출을 받아 인수, 그 형제들과의 동업으로 시작한 배에서 중국선원의 실족사(死)와 함께 어획량 감소로 인한 대대적인 어선 감축의 정부방침이 내려졌다. 사업할 재목이 되지 못했고 때를 읽지 못하였다. 무리하게 시작한 사업으로 큰 빚을 지고 자괴감을 술로 달래던 매형이 췌장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 여름의 장마철이었다. 장대비를 뚫고 인천으로 향하던 중 허망하게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빚만 남기고 화장터에서 희뿌연 연기로 하늘로 오르던 매형을 지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마흔 중반에 혼자된 누나는 열세 살 이후 떠났던 고향을 그때처럼 찾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아마도 누나의 고향 방문일 것이다. 부모든 형제든 그 누구도 누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한다. 또한 누나의 선택과 삶에 대해 힐난하거나 질책하지 못한다. 누나는 자기 인생을 열세 살에 포기했고 희생했다. 난 아직도 열세 살 전의 누나의 모습에 갇혀있다. 지금의 누나가 아닌 험한 산길 의지할 것 없어 내 손을 굳게 잡아 놓지 않았던 따스했던 그때의 누나이기를 바란다. 그런 까닭에 현재의 누나를 그의 삶을 부러 외면했다. 누나가 우릴 찾고 고향을 찾는다면 아마도 열세 살 전의 마음으로 되돌아갔을 터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그리움으로 바뀌고 동생들에 대한 섭섭함이 사랑으로 바뀌는 때 말이다. 그때가 누나가 오는 날이다.
난 아직 그런 누나를 기다림에도 누나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도 그 누나를 기다린다.
보리타작(3)
따
사실 봄을 실감케 하는 것은 개나리나 벚꽃이 아니었다. 살에는 찬 기세에 눌려 다들 하얗게 질릴 때에도 가장 먼저 우리 곁에서 언제나 그 푸름을 꺾이지 않고 선사했던 동무였다.
보리의 춤사위는 겨우살이 전 제 몸 지키고자 푸른 잎사귀 누렇게 만들어 모두 이별하고 깡마른 본색 드러냄을 뻔뻔함으로 실속 차리려는 군상들 속에서 손 시린 눈 온몸으로 맞으며 파묻히기 일쑤였고, 삽 들어가지 않는 얼은 땅 튼튼히 뿌리 내려 줄기 키워내어 주려 나자빠지고 힘겨운 인생들이 품을 꿈의 상징이자 환호성의 몸짓이었다. 그 푸름은 너무 길었던 겨울 같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한해의 희망곡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명패처럼 붙어 다니던 보리는 흰 쌀에 밀리기 전 한때의 배고픔을 책임졌고 아버지의 지게 짊어짐의 근력과 그 아들의 근성을 키웠다. 도시 상춘객들의 봄은 화사한 꽃잎에 취하는 것으로 출발하지만 농부들의 봄은 보리의 웃자람에 짚신 밟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꽃을 보고 즐기려는 자와 열매를 기다리며 일해야 할 자들의 기지개켬의 가늠이 곧 보리인 것이다. 나들이 할 때와 일할 때의 설렘과 고단함의 기준점이 된다.
겨우내 양식과 간식거리의 선을 넘나들던 고구마 뒤주가 바닥의 흙더미 먼지만을 남기게 될 즈음 보리의 익어가는 모습은 자식들 배 곪게 될 것을 염려하는 부모들의 시름을 양분으로 먹고 자랐다. 이 시절 설익은 보리 구워 입가에 그을음 묻혀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밭은 논보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심을 것과 거둘 것이 많은 대신 일이 고된 것을 감수해야했다. 양식을 위한 영농(營農)이 시장에 내기 위한 소득과 연관된 영농에 초점을 두면서 보리농사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과거 양식으로 삼기위한 목적의 영농은 이모작의 대상을 주로 보리와 고구마로 삼았다. 쌀과 감자에 비해 후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뒤지지만 관리하기가 쉬웠고 무엇보다 병충해가 적다는 매력을 가졌다.
포아풀과에 속하는 보리는 기원전 4000년경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곡물로 대접받게 되었고, 그것을 중국이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사람을 위한 식용과 약용(藥用)의 대상이 이름 없는 들풀의 한 종류였던 셈이다.
대게 보리는 두 종류를 파종한다. 우리나라는 겉보리(일명 맥주보리)와 쌀보리가 재배되고 있으며 평지보다 산지가 많은 전남지역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다.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에서는 맥주의 원재료였던 맥주보리가, 불교(佛敎)문화권에 놓였던 아시아 국가들은 곡물 재배법이 발달했고 양식을 위해 쌀보리를 선호했다. 쌀이 주식이 되고 삶의 형편이 나아지면서 맥주의 수요가 늘자 현재는 맥(脈 )보리가 대부분 생산된다.
숟가락에 담아 사람의 입으로 푸짐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 중 가을이 아닌 초여름에 수확하는 보리농사는 덤인 것처럼 보인다. 파종과 성장, 결실의 과정이 쉬워 보인 탓이다. 보리농사는 별 손이 가지 않으면서도 가을되기 전 쌀 떨어진 곡간에 쌀인 양 임시로 채울 수 있어 자랑거리였고, 논농사를 위한 머슴과 주린 자식들 배를 행복하게 했다.
초여름 볕에 익어 푸른 잎이 자취를 감추고 부드럽던 수염이 거칠다 못해 부러지기 시작할 즈음 장독대 옆 숫돌위에 아버지의 낫 가는 소리가 사나흘 계속되면 소년의 좋았던 시절도 끝이 보인다. 보리를 베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보리 베기, 따가운 햇살 아래 비탈진 밭의 사각거리는 보릿대의 꼿꼿함을 눌러 한 움큼씩 손에 쥐어 낫을 대면 서투른 놀림에 손가락을 베기 일쑤였다. 보리 베기는 여러 가지로 일이 더디다. 더워지는 날씨에 경사지고 넓은 밭을 낫으로 베기란 여간내기가 아니다. 곧 닥칠 논농사와 장마철 전에 고구마를 심어야했기에 마음이 급한 것 또한 한몫 거들었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까투리 알을 얻을 수 있었고 아버지 손에 들려진 감칠맛 나는 아이스께끼와 알사탕의 유혹이 없었더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군것질 거리에 인색했던 아버지의 지게 끝에 걸려 달랑거리는 비닐봉지를 환호성으로 맞이하는 때이기도 하다.
농번기(農繁期)
촌에선 두발로 걷고 두 팔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일을 해야 했다. 중고등학생들의 대민 봉사지원으로 한 번도 농사일을 해보지 않은 풋내기들의 서투른 손길도 고마움으로 받았다. 오후의 볕에 졸음과 공부에 질력이 난 그들에겐 낫을 종이로 둘둘 말아 책가방에 구겨 넣고 교실이 아닌 들판으로 나간다는 것이 좋았고, 새침한 여학생들의 호들갑과 재잘거림, 그 시선들에 대한 우쭐거림으로 낫질에 힘을 더하기도 했다. 한 번도 낫질을 해보지 않았던 맘에 둔 여학생의 손에 날 생채기를 염려해 호기를 부리기도 하였다.
보리 베기는 땅 따먹기와 유사하다. 밭 전체를 한 번에 베려 낫질을 하면 힘이 든다. 한 사람씩 어느 정도의 구역을 분할해 할당량을 정한 다음 길을 뚫듯 양쪽에서 만나는 방식으로 베어야 그나마 지루하지 않는다. 벤 것을 가지런히 놓아야하고 알맞은 부피의 크기로 단을 묶어 지게질을 할 수 있게 일정한 장소에 다시 옮겨야 보리 베기는 끝이 난다. 물론 한 낱알에 대한 소중한 경외감에서 비롯된 이삭줍기는 비료부대를 손에 쥐고 뒤따르는 어머니의 몫이다.
보리를 베는 것 못지않게 보리타작 역시 고역이다. 워낙 비탈진 곳을 개간해 밭을 조성한터라 무거운 기계를 곳곳마다 옮길 수 없었고, 또한 동네 하나뿐인 방앗간의 기계를 떼어내 사용하는 바람에 마을을 크게 삼등분으로 나눠 큰 마당을 하나씩 만들어야 했다.
눈앞의 바다에 속살을 드러내어 살고 있는 길바닥은 말 그대로 온통 자갈밭이다. 달음박질하는 꼬마들의 고무신을 잡아먹고 팽이질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마을 어귀에 마당이 생기는 것이다. 보리 한 톨을 잃지 않기 위해 진흙을 퍼 담아 울퉁불퉁한 자갈들의 숨을 죽여 매끄러운 마당이 만들어지면 초여름의 장마 비에 씻기고 늦여름을 쫒아 닥치는 이름난 태풍에 뒤집히기 전까진 동네 꼬마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다.
기계 놓을 자리를 중심으로 보릿단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 보릿단의 규모와 배열, 타작의 순서는 곧 그 집안의 형편과 맞물려 마을 내에서의 영향력과 위치를 가늠하는 수치가 되기도 했다.
보리타작을 위해서는 잘 짜인 조를 이루어야한다. 우선 기계와 탈곡기가 분리된 탓에 탈곡기 안에 보릿대를 밀어 넣어 탈곡할 남자 한사람, 그 옆에서 보릿단을 풀어 헤쳐야 할 손놀림 좋은 아주머니, 탈곡기를 거쳐 바람과 함께 수염과 보릿대가 분리되어 나오는 직전에서 갈퀴질을 해야 할 사람, 이 일은 타작 중 가장 큰 고역을 치르는 사람 중의 하나인 까닭에 대부분 아버지가 담당하였다. 또한 탈곡된 보리를 부대에 담아 옮겨야 할 사람, 갈퀴질로 가지런해진 보릿대를 짊어지고 차곡차곡 쌓아 소나 돼지의 여물내지는 잠자리에 넣기 위해 탑을 쌓아야 할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필요했다. 탑 쌓기는 항상 형과 내 몫이 되었다. 탑이 높아질수록 힘겨움이 비례하는 일이었다.
타작은 기계와 탈곡기 사이의 벨트를 연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상당한 기술을 요한다. 기계와 탈곡기 사이의 거리는 벨트의 장력을 위해 적당하게 위치한다. 이는 벨트의 장력에 의해 탈곡기의 회전수를 조절하는데 회전수가 많거나 적거나하면 보리의 낱알이 으깨어지거나 완전하게 탈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일직선상의 위치확인은 타작도중 벨트가 벗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했고, 기계를 겁내지 않은 대범한 동작으로 벨트를 재빠르게 연결해야 하는 일은 탈곡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그의 경력과 솜씨를 짐작케 한다.
육중한 기계가 매연과 함께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울어대고 탈곡기와 연결된 8자 모양의 길고 커다란 벨트가 매끈거리는 모양새로 오던 길을 되돌아 재빠르게 달아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타작은 진행되고 기계가 품어내는 매연과 더불어 그 소리로 인한 묘한 긴장감, 그리고 소출에 대한 기대감과 즐거움이 함께 교차한다.
일단 기계가 켜지면 한 집의 보리타작을 끝내기까진 쉴 틈이 없다. 보리타작에서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역시 탈곡하는 사람이다. 보통 기계와 함께 옮겨 다니며 탈곡을 담당하지만 그 차림새가 소년의 눈을 황홀케 한다. 평소에도 동네에서 모양깨나 내는 멋 부리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선글라스와 흰 와이셔츠에 숙련되고 날렵한 동작으로 탈곡기에 보리 단을 풀어 밀어 넣는 것을 보면 한없이 멋져 보였다. 그가 얼마큼 빠른 움직임을 보이느냐에 따라 타작의 시간과 탈곡의 양이 결정되기에 그의 눈치와 비위를 맞추는 것은 당연했다.
목덜미와 옷깃 사이에 보리 수염이 박혀 살갗이 가려워 몹시 긁어댈 즈음 기계 소리가 잦아든다. 초여름의 날씨 속에 장시간 탈곡으로 인해 잘게 부서진 보리수염과 먼지가 뒤범벅 된 얼굴은 흡사 탄광에서 갓 나온 광부들을 연상케 했다. 사람이 먹고 살기위한 양식을 얻기란 이렇게 힘이 드는 가보다.
탈곡된 보리는 건조의 과정을 거쳐 도정을 해야 한다. 보리의 거친 표면을 깎아 부드럽게 해야만 밥을 지을 수 있게 된다. 하얗게 온몸이 벗겨져 도정된 보리를 쌀밥 먹어보지 못한 이들에겐 보리쌀이라 불렸다. 보리쌀만으로 먹음직한 밥을 짓는다면 그는 상당히 솜씨가 좋은 편에 속한다. 쌀밥 같은 구수한 밥 짓는 향내도 기름진 풍모도 갖추지 않았지만 처마 밑 대바구니에 항상 그득히 담겨 걸려있던 보리밥은 방과 후 마루 끝 걸터앉아 된장에 풋고추 한사발이면 푸짐했다.
소년은 자신을 어른으로 키웠던 보리를 입에 넣지 않는다. 그 집의 형편을 연상시키는 보리의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보리로 인해 떠오르는 겹겹이 쌓인 수고의 추억 때문이다. 영양식으로 먹는 보리밥이 아닌 주식이 된 보리밥은 맛이 없다.
이제 보리밭을 보는 것은 지역의 관광 상품이 되었고 쌈밥집의 효자품목중 하나다. 한때의 나들이객들의 추억이 된 청 보리 외에는 그 이후의 보리는 기억되는 것이 없다. 그 보리의 익어감도 낫질도 탈곡의 풍경도 생각하는 이 없지만 바람결에 물결치듯 흐느적대는 보리수염의 파도물결은 여전히 그 자체가 장관이다.
밀이 아니면 또 어떠한가!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을 재연해 보는 것도 좋겠다.
소(4)
소
가축(家畜)이라 함은 사람이 저마다의 용도로 부리기 쉽도록 길들여진 짐승에게 붙는 운명의 굴레를 뜻한다. 원하지 않았던 생애로의 멍에를 짐 지운 것이다. 들을 자유롭게 노닐던 야성(野性)의 짐승을 잡아 가축으로서 갖추어야 할 성질을 지니도록 순화시킨 대표적 동물이 말(馬)과 소(牛)와 개(犬)다. 이는 인간들을 위한 전쟁 내지는 일과 고기, 혹은 소유의 지킴을 위한 역사와 함께 해왔다.
여러 짐승 중 소만큼 비참한 생애를 마감하는 동물은 드물다. 대부분 짐승이건 사물이건 그 존재는 효용가치에 의해 평가되고 관리되기 마련인데, 유독 소는 사람의 손에 의해 가장 철저하게 사육되었다. 여느 가축보다 유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사람이 가장 아끼는 대상으로서의 사랑을 받는 듯 보이지만 소라는 이름을 가진 것만으로 출생과 도축에 이르기까지 소의 생애가 오히려 인간의 울타리 안에 제한되고 말았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또한 인간의 고기에 대한 욕망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서 그 생애가 존재해야만 하는 슬픈 짐승이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요리와 재료가 소에게서 나온다. 그러기에 소는 인간과 신의 다툼과 제사와 제물의 대상이기도 하다.
오로지 사람이 말뚝 박은 울타리(축사)안에서만 나고 자라며 죽어야할 소(牛), 사람이 기르는 가축으로서 현재 정의된 소의 이미지는 본래 소의 것이 아니다. 인간역사의 오랜 바람들이 덧씌워져 꾸며진 이미지일 뿐이다.
코를 뚫어 고삐와 워낭을 달기전의 송아지의 날뜀은 본성을 그대로 간직한 제어할 수 없는 들짐승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송아지일 무렵 두발로 딛고 뛰어보았던 순간이 유일한 뜀박질로 기억할 것이며, 후엔 뛰지도 달음질도 아닌 정해진 보폭과 걸음걸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소라는 이름에 드리워진 운명의 굴레만큼 끌어야하고 해내야 할 일들이 그 앞에 놓여있다.
저도 굴복해야 할 대상과 상황을 구별한다.
일을 부리는 손과 먹이를 제공하는 손을 정확히 구분해낸다. 그래서 일을 부리는 사람이 먹이를 제공하는 일은 필연적이어야 한다. 일만 부리고 먹이를 제공하지 않는 손이면 순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짐승인 소를 가축인 짐승으로 길들이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굶주림과 채찍이다. 사람이 짐승으로 취급되는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맞아본 경험과 주린 과거를 떠올려 복종의 형태와 대상을 가린다. 이때부터가 일소가 되는 출발점이다.
소는 일소와 고기를 제공하는 육우로 나눈다.
한우라 함은 순수하게 육(肉고기)을 얻기 위해 개량된 소다. 과거 농사가 상업보다 우선시 되던 때의 소는 일소가 주류였다. 농사꾼에게 있어 소는 고기보다 일이 우선했다. 농사에 기계가 접목되기 전 촌(村)에서 소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짐승에서 가축의 의미로 발전된 소는 키우거나 기르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간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과 함께 살다 죽어가는 대상으로 인지되는 동물 중엔 소가 유일했다. 비바람 피해 거처할 마굿간을 내어주고 손수 끊여 여물을 마련하는 손길은 자식 이상의 정성을 다한다.
어렸을 적부터 소가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 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맘껏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농부로서의 뿌듯함 외에도 집안 목돈의 출처이기도 했기에 그만큼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 소를 배불리는 것은 내 배고픔보다 먼저였다.
송아지가 일소의 역할을 해내기전까진 키워야 했다. 소에겐 최고의 순간인 셈이다. 젖의 부드러움을 찾아 연신 어미의 사타구니를 쳐 올리던 새끼를 나무라지 않던 어미 소가 흠칫 놀라 세차게 뒷발길을 해대면 송아지에게 이빨이 생겼다는 징표다. 이제 어미의 젖을 떼고 풀을 뜯겨야 하는 것이다.
풀을 뜯기 전 이미 어미에게서 배운 먹어야 할 풀과 독이 되는 풀은 스스로 구별해 낸다. 소는 뜯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에서 맛을 음미하게 된다. 그래서 맛보다 풀내음을 기억하고 풀을 뜯지만 처음 입에 풀을 먹일 때에 주의할게 있었다. 귀엽고 가여운 마음에 곡식 내는 풀을 먹여서는 아니 된다. 먹이가 되는 풀은 대부분 거칠고 그 맛이 쓴 것이 보통이다. 곡식을 내는 풀은 부드럽고 그 맛이 달다. 논두렁이나 밭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풀을 뜯게 하는 것은 잡초를 제거하는 수고를 덜기 위함이지만 소에겐 대단한 유혹거리다. 어려서 곡식 내는 풀 맛을 보게 하면 키우기가 힘들어진다. 거친 풀은 이와 소화시키는 기관을 튼튼하게 할 뿐 아니라 야생에서의 다양한 풀은 그 자체가 약이 되기 때문이다. 소의 혓바닥이 거칠고 딱딱한 이유다.
산과 들이 많았지만 집마다 소를 키웠기에 근방엔 소를 먹일 풀이 남아나지 않았다. 학교가기 전 산에 올라 소의 고삐를 풀어 방목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되었다. 고삐를 푸는 것은 나뭇가지에 걸려 불상사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소의 야성을 일깨우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를 건강하게 하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일정한 곳에 모든 동네의 소를 풀어놓으면 신기하게도 다시 찾으러 갈 때에도 옹기종기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습성 때문에 멀리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가임기를 맞은 소의 번거로운 수태를 자연스레 유도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얼마동안의 서열싸움을 거친 후 저들 나름대로의 우두머리가 정해질 터였다. 방목된 소를 찾으러 갈 때에는 꼴 한 망태기를 덤으로 베어야했다. 지루한 풀베기에 낫 던져 꽂히는 내기를 하여 풀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소몰이 당번을 정하기도 하였다. 솔방울 던지기, 고구마서리, 숨바꼭질 등, 산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많았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를 산에다 풀어놓고 학교를 다녀온 후, 방과 후 온 산을 다 뒤져도 우리소만 눈에 띄지 않은 날이 있었다. 소를 잃었다는 것의 두려움 때문에 자정이 넘도록 골목길을 울면서 배회할 때 뚜걱거리는 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 멀고 험한 산길을 돌아 집을 찾아온 것이다.
소를 영물(영특하고 신비스런 동물)이라 했던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동물들은 자신이 자주 오가는 길에 뿌려진 배설물을 맡아 길을 찾는다고 했다. 돌멩이만큼이나 흔했던 소똥 중에서 자신의 것을 냄새 맡아 돌아온 소를 맞이하면서 나를 살려준 소와 우린 친구가 되었다.
어른과 어린 아이의 발자국 소리까지 구별할 줄 아는 소의 영특함과 밭가는 일의 노련함에 한번 식구로 맞이한 소는 여간해선 장에 내지 않았다. 부득불 소를 장에 낸 다는 것은 함께한 소의 노쇠함 때문에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거나 큰 아들의 대학 등록금이 주된 이유가 되었다. 나 또한 내손으로 키워낸 소에게서 받은 송아지를 형의 등록금에 보탰다.
장성해 집을 떠나기까지 다섯 마리 정도의 소를 집에 들였다. 그중 온 식구를 가슴 아프게 한 소가 한 마리 있었다. 일도 잘할 뿐만 아니라 성질 또한 온순했다. 오랫동안 집안 식구처럼 대했던 소였기에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특별한 정성을 다했다.
논보단 밭일이 많았던 탓에 쟁기질은 소에게 힘겨운 일이었다. 쟁기질은 농사꾼의 폼을 말한다. 농사꾼으로서의 폼이 난다는 것은 지게를 졌을 때와 쟁기질에서 표가 난다.
어설픈 쟁기질엔 소까지 가볍게 보기 마련이다. 호통과 함께 채찍을 휘둘러도 요지부동일 때가 많았다.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흙속에 돌이 박혀 있는 탓에 쟁기 날의 깊이를 적절하게 조절해주어야 걸리지 않고 밭을 갈게 마련인데 서투른 쟁기질에 번번이 돌에 걸려 어깨에 드리워진 멍에 맨 자리에 핏줄이 서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면 멍하니 서거나 냅다 달음질을 하여 고랑을 망쳐 놓기 일쑤였다.
이러한 서투른 솜씨를 아는 양 스스로 적절한 걸음걸이와 자칫 돌부리에 걸려 움찔하는 순간에도 묵묵히 가던 길을 가주었던 소가 있었다. 너무 정성을 쏟았던 탓일까 마는 그 소를 주검으로 맞게 되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던 소가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고 드러누울 때 죽은 소를 끌어안고 자식의 죽음보다 더 서럽게 통곡하셨던 어머니를 보았다. 부검 아닌 부검을 통해 소의 위를 절개했을 때 소스라치게 자신들을 탓했다.
지나친 정성에 소가 먹어야 할 외의 것들이 가득했다. 보통 보리나 쌀을 도정하면 그 껍질에서 나온 부드러운 가루가 생긴다. 미숫가루 같은 미세한 분말 가루 같은 것들은 소에게 영양식과도 같지만 물에 타서 먹이지 않고 여물에 섞여 먹인 것이 반복되어 체하고 만 것이다. 가축 잘 간수하기로 소문나신 아버지의 실수였다. 자기 양식이 아닌 것으로는 튼튼하게 키울 수 없는 이치를 배운 것이다.
소는 비단 농사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산이 짙어질 무렵 무성한 넝쿨과 뱀이 무서울 땐 소를 앞세운다. 소가 지나간 자리엔 항상 길이 나게 마련이고 풀을 뜯은 모양새로 잃은 길을 찾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소는 단순히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사육의 대상이 아니다. 한집의 재산을 불려주는 부의 상징이요,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며, 적적한 노인네의 말년 길동무이기도하다. 순진무구한 커다란 눈망울과 우직한 소를 만나게 되는 복은 주인이 그 소와 생사고락을 얼마나 했느냐의 기간으로 말할 수 있다.
주인이 소를 어떻게 대하고 살았느냐를 그 소 자신이 그러한 모양새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집의 소는 주인의 성품(性品)과 성질, 근면내지는 성실함을 그대로 담아내는 또 다른 그림자인 셈이다. 소와 주인이 하나인 것이다. 이는 소를 짐승에서 가축으로 또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TO. 윤미 潤美(5)
왕
70-80년대 장안동, 왕십리, 구의동, 가리봉동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마력에 이끌려 상경한 스무 살 남짓한 얼굴에 앳됨이 채가시지 않은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자리를 튼 곳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토요일 오후가 되면 고향의 추억을 더듬어 찾아드는 둥지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왕십리였다.
일찍 고향 떠나 내세울 것 없는 이마다 변두리를 찾아들기 마련이다. 큰 대로변을 따라 형성된 중심가 뒤로 좁다랗게 굽이친 골목이 가지를 치고 있었고, 그 가지 끝마다 허름한 벽과 지붕을 가진 집들이 걸려 있었다. 궁색한 살림의 탈출구로 하나 둘 시작한 장바구니 장사에서 이제는 제법 규모가 커져버린 재래시장이 있었다. 어느 곳이나 번화가(繁華街)의 뒷골목 차지는 이방인들의 몫이다.
언덕을 기어올라 자리한 몇 평되지 않는 단층짜리 주택들은 이곳에 급히 자리 잡은 사람들의 형편과 뒷얘기들을 말해주는 듯하였다. 손에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은 높은 곳을 오른다. 빼곡히 들어찬 벌 통속 밀 납으로 지어진 집들 마냥 그 한 귀퉁이들은 단칸방들을 끼고 있었다. 방 한 귀퉁이를 비키니 옷 장 으로 채우고, 마루 밑 연탄불 피워 그 온기삼아 타향살이의 설움들을 삼키고 있는 청춘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먼저 상경한 이들의 실속 없는 멋 부림에 속거나, 몇 푼어치의 월급을 미끼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통해 배움의 희망을 지레 포기한 애송이들을 서울 후미진 곳들로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변두리마다 특정지역의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전풍 호텔HOTEL, 2층 커피숍, 그곳은 전라도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특히나 같은 동네 사람들이 사람의 정을 찾아 모여 자기네들만의 고충과 속내들을 털어내는 곳이었다. 역마다 자리 잡은 다방은 어떻게든 자신들을 서울 사람으로 보이고픈 생각에 조금이나마 촌티를 감추려는 허영심으로 일부러 피하였다. 커피 값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여도 고급스런 분위기와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음악에 최신 가요를 들으며 추억을 회상하기엔 그만한 곳이 없었다.
가로수 은행나무 잎이 연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는 초가을 토요일 오후, 전화벨이 소리를 지른다. 워낙 활달하고 붙임성 좋았던 성격으로 항상 만나는 여자들이 여럿이었던 철희에게 걸려오는 전화일 것이라 여기며 바삐 정리하던 기계를 기름걸레로 연신 닦아대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서울생활에 뛰어들었던 철희가 독산동 수족관에 있던 나를 찾아 연락해 온 것은 정확히 6개월 전이었다. 서울에 지인이 없던 탓에 실업계를 졸업한 나는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이곳에서 1년 남짓 일하고 있던 터였다.
수족관의 일은 비교적 단순했다. 금붕어와 열대어를 판매하고 관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고 병원이나 다방을 돌며 일주일에 한 번씩 어항 청소 하는 일을 했다. 내성적인 성격에다 외모나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의 특성상 시골에서 갓 상경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사장은 무척이나 철희를 경계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여자를 사귀거나 혹은 친구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뿐더러, 외출역시 잘 하지 않았던 내게 갑자기 친구가 나타난 것이었다.
세상물정 몰랐던 나를 꾀이는 것으로 여겼던 사장의 염려는 그대로 적중되고 말았다. 철희를 만나면서 내가 그동안 단 한 번도 휴일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월급에 있어서도 그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2만원이라는 월급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서울에서 혈혈단신이었던 내게 숙식을 제공했고, 무엇보다 그 돈 역시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난 사장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내 현실에 회의를 품고 그 수족관을 나왔고, 친구를 따라 회기동 철로 옆 하천변이 있는 프레스공장으로 이직하고 말았다.
의정부까지 1호선 지하구간이던 청량리역을 지나면 두더지 굴 같은 터널을 끝으로 환한 햇살을 받는 지상구간의 시작이 회기역이다. 경희대, 외국어대를 비롯한 대학들 덕분에 항상 젊은이들이 넘쳤고 활기찼다. 봄이면 선로 주변을 노란빛으로 물들이던 개나리가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반전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철희는 본래 고향 교회의 유력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지만 신앙과는 상관이 없었던 듯하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술과 담배에 찌들었고, 유독 여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언제나 그 사귐이 오래가지를 못하였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과 생활 형태를 가졌기에 둘은 참으로 잘 어울려 다녔다. 그는 내 순진함에 끌렸고 난 그의 자유분방함에 호기심이 일었다. 특히나 갓 스무 살을 넘긴 내게 직장생활과 세상살이뿐 아니라 여자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진 그가 부럽기만 하였다.
그는 나를 불쌍한 듯 여기며 작심하여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 하였다. 술과 함께 월급 탕진하는 법과 여자를 알게 했다. 물 만난 고기 마냥 가불한 월급으로 마이클 잭슨의‘빌리진’과 ‘도쿄타운’에 고막이 찢어질듯 한 고고장과 디스코텍, DJ가 있는 음악다방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다녔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버린 여의도 광장에서의 자전거 타기와 롤러스케이트는 서울 생활의 답답함을 풀어내는 출구였다. 우린 고향(故鄕) 떠난 고향 친구라는 끈으로 형제이상의 정을 나눴다. 일을 마치고 해질녘이 되면 지금은 동부간선도로에게 자기 살을 반쯤이나 내어준 중랑천 변을 자주 찾았다. 중랑천(川) 좌우로 갈대와 숲이 있었고, 뚝 방을 따라 그 사이로 난 산책길엔 개나리와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주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했다. 가끔 서러움과 외로움이 가득해지면 시골 풍경 같은 그곳을 한동안 거닐었다.
그와 함께 두해 동안의 질펀한 생활이후 군대를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났고, 제대 후엔 신학교에 진학을 했던 터라 이후로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고, 그는 여전히 그 같은 생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함을 소문으로 들었다. 아내를 암으로 잃었고, 생을 포기한 큰 상심 끝에 급성폐렴으로 광주기독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를 만난 건 2006년 봄의 길목에서였다. 그렇게 3일을 마른기침에 피를 쏟는 고통 속에서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잠시의 추억 때문이었던지 그는 내게 마지막 연락을 취했고 그 가는 길의 배웅을 내게 부탁하였었다. 친구들에 의해 화장된 유해를 평소 자주 찾던 오동도 동백나무 갯바위 근처 푸른 감도는 바다에 그를 풀어 주었다 하였다.
내 스무 살 청춘의 한 부분을 즐거움과 행복으로 채워 주었던 그에게 나를 더 내어주지 못함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다.
전화를 받아든 철희가 당황하고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내게 무어라 손짓까지 해대며 외쳐댔다.
윤미(潤美)의 전화였다. 한동안 말문이 막힌 듯 서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이미 모든 비밀을 서로 공유하던 우린 그녀가 내 첫사랑이었고, 10년 가까이 그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에게 선뜻 마음을 주지 못했던 이유 역시 윤미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동창생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린 한동안 우정과 사랑,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고민하였고 다투었다. 시골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친구에서 진전되지 않는 관계의 답답함에 눌려 있었고 급작스레 직장을 옮기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소원해졌다. 또한 그녀의 요구로 이별의 아픔을 씻어내고 있던 중이었다. 딱히 사귀는 여자 친구도 없었고, 철희의 들러리 노릇도 지겨울 때쯤 그녀의 등장은 몹시 흥분되는 일중 하나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어든 수화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수줍은 듯 들렸다. 그녀 역시 긴장한 듯 떨리고 있었고, 오랜만이라는 상투적 대화 속에 그녀가 친구와 우정의 경계선을 힘겹게 넘었음을 암시하였다. 부리나케 움직여 갖은 멋을 낸 후 약속하여 만난 곳이 왕십리(往十里) 전풍 호텔HOTEL 앞이었다.
택시를 타고 청계천 하류, 들(논)이 넓어 조선시대 왕(王)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농민들의 생활을 체험코자 이곳에 이르러 논둑을 밟으며 모내기를 하였다는 답십리(踏十里)를 지나 왕십리가 눈에 들어올 즈음, 차가 멈추기도 전에 손잡이를 열어 젖혔다. 호텔 앞 건너편엔 한미은행이 있었고, 철희와 난 맞은편 꽃집 신호등 앞에서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가는 차량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는 틀림없는 윤미였다.
약간은 작은 키에 단정하게 빗어 내린 까만 단발머리를 하였고, 쌍꺼풀이 없는 눈에 시골에선 보기 드물게 검정색 뿔테 안경을 낀 윤미는 항상 양 볼이 불그레하였다. 밉지 않은 얼굴에 통통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당시 ‘J 에게’ 를 불러 연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이선희를 닮았다. ‘종이학’을 불렀던 전영록의 가사처럼 천 마리 학을 접어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 했고, 조용필의 ‘단발머리’라는 노래가 거리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였다.
‘J에게’ 란 노래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머리말에 써 보내는 서정시였고, ‘종이학’은 변하지 않을 고귀한 천년의 사랑을 ‘단발머리’는 순수하고 청순한 사랑의 대상을 상징하였다. 단발머리였던 소녀에게 편지와 함께한 천 마리 학(鶴), 이 같은 방식들은 연인들 사이에 정석으로 통했던 사랑 고백의 교과서였다. 돈 주고 살 테잎이 없어 이문세의 ‘별이 흐르는 밤에’를 듣고 이들의 노래들을 녹음하여 선물하곤 하였다. 그녀가 나의 눈에 박힐 땐 열 살 무렵이었고, 가슴 한가득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스무 살이 다 되어서였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부스럼투성이 까까머리 악동이었던 그때의 난 키가 작았다. 항상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았고, 짝꿍은 성희와 윤미를 번갈아 맞았다. 관심을 끌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 하는 방식이 괴롭힘이었다. 고무줄을 끊었고 치마를 들쳤다. 몰래 신발을 감추는 것은 예사였고 필통의 연필을 죄다 부러뜨려 못 쓰게도 하였다. 대부분 청결과 절약을 핑계로 사내아이들은 까까머리 머리가 일반이었다. 단정하게 빗은 양 갈래 생머리에 머리핀을 단 윤미의 모습은 항상 머리카락 없이 지내는 내겐 너무 예뻐 보였다. 그녀는 학교 담장을 따라 줄지어 고목이 된 플라타나스 나무그늘 밑에 시멘트로 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기를 좋아하였다.
윤미의 집은 우리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우연하게도 그녀의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동갑이었다. 동네에선 우리 또래의 동창생들이 제일 많았고, 여자와 남자의 비율 또한 엇비슷하였다. 유독 예쁜 여자애들이 많은 탓에 항상 선배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같은 동창생끼리 좋아하는 것이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대감이 좋았던 우리는 서로 좋아하거나 사귀는 동창생들에 대해 존중해주었다. 선배들로부터 그 사이를 지키려 했었고, 묵시적 언약으로 서로 간에 삼각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윤미는 공식 커플이 되었다.
윤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우상시하던 가수 이선희를 닮은 것 외에도 그녀는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성숙했고 무엇보다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볼 양 옆으로 수줍게 웃을 때마다 들어가는 보조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그녀는 항상 네다섯 장 정도씩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썼으며 내용도 품위가 있었고 글씨 또한 반듯하였다. 전화와 이메일이 흔치 않던 시절 편지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편지의 형식과 내용은 곧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비교되었기에 시와 유명한 인사들의 말들이 인용되었고 밤새워 쓰고 지우고 찢는 진통 끝에 탄생한 편지들은 한 편의 소설이요, 문학전집과 같은 웃지 못 할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둘의 사이가 깊어지지 못한 데에는 그녀 어머니의 훈계가 컸다. 같은 동네, 같은 동창생들끼리는 불가하다는 거였다. 서로의 집안에 대해 너무 속속들이 안다는 것이 빌미였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랑 아닌 우정을 고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우정이 아닌 애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졸업을 하고 실습을 나갈 때였다. 일 년 늦게 졸업한 그녀가 아무도 남지 않은 고향에서 말벗 없이 지내게 된 것이 단초가 되었다. 그런 탓에 나와의 편지 왕래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 편지의 내용과 감정의 농도(濃度) 역시 점점 짙어져가기 시작했다.
서로의 모습과 솔직한 감정(感情), 애틋함을 담기에 편지만한 것이 없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아무리 많은 분량의 장편 소설과도 같은 사랑 고백도 목소리 한 번의 고백이 그리울 때가 있다. 편지의 고백도 목소리의 고백이 없으면 허사가 된다.
편지로 인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극에 달하면 어지간한 집 외에는 전화기가 없던 탓에 편지로 날짜와 시간을 정하였다. 다행히 그녀의 집 가까이에 있었던 삼촌 집이 전화기를 놓았기에 편지에 약속된 날짜와 시간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위로를 삼았고,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확인하였었다.
일 년을 하루 같이 꼬박 기다려 명절을 맞으면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동네마다 찾아드는 자식들을 반기는 흥겨움이 넘치고 양곡 창고를 빌려 노래자랑 콩쿠르를 열거나 선후배 축구
대회를 개최했다. 건전지 잔뜩 넣은 카세트를 틀어 방 넓고 간섭이 덜한 친구 집을 빌려 밤마다 축제를 벌인다. 공부시키지 못해 고생길로 내보낸 어린 자식들에 대한 부모들의 미안한 심정을 무기삼아 오랜만에 자신들을 풀어 놓는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중시하던 그 때에 광란의 파티에서 단둘이 그녀를 만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서울에서 배웠고 보았던 설익은 동작의 춤들을 뽐내며 술에 약한 자기 주제도 잊은 듯 한껏 위세를 부려 마셔댄다. 주량이 약했던 난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하면 누군가에게 기대어 누워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항상 철희와의 주량 싸움에서 밀린 나만의 항복 선언인 셈이었다. 그녀를 곁에 두고 핑계 삼아 기대었다. 용기 없어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고 입맞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의 가슴에 핑계거리를 찾은 듯 무턱대고 머리를 기댄다. 싫지 않은 듯 핀잔을 주며 살며시 내어주었던 무릎이 어머니 품보다 편안해지는 것에 자신이 장성한 것을 알게 된다.
낮엔 선배들의 놀이에 시중을 들어야 했고, 밤이면 동창생들과의 우정을 곱씹자며 잡혀 애꿎은 날들이 지나고 말한 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한 시간들을 탓했다.
우린 주로 밤에 만났다. 바닷가에서 보는 추석의 보름달은 유난히 밝다. 선착장마다 즐비하게 떠 있는 흔한 배를 풀어 바다 한 가운데를 향해 노 젓는 유흥은 감미롭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 녘 돌담을 방석삼아 온통 마늘을 심어 광야 같아 보이는 밭들을 무대 삼아 나눴던 꿈결 같은 날이 그립다.
고향에 그녀를 두고 떠나던 날 어항과 금붕어를 선물했다. 날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후에 편지에 실어 털어놓은 그녀의 고백이 감동적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좋은 물을 얻기 위해 개천의 상류로 올라가 물을 길어다 물갈이를 하였고, 어항 물이 차가우면 잠자리 이불 속에 두었다 하였다. 그녀는 자기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였다.
우정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던 그녀의 마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음에 담아 글로 표현했던 많은 날들보다 그녀를 만나 사랑을 맛본 시간은 너무나 적었다.
그녀가 취업을 준비하며 내가 직장을 옮길 때까지 계속되던 편지가 끊기게 되었다. 내일을 고민하면서 다소 주춤했던 사이가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무기로 다시 뜨거워지게 된 것이다.
전풍 호텔 앞에서 만난 그녀는 서울에 갓 상경한 촌뜨기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낯선 환경과 익숙지 않은 일터의 분위기 때문인지 수척했고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울한 빛이 감돌던 얼굴로 날 반기던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짐작케 하는 눈물이었다. 난 그녀를 다소곳 안았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곁에 섰던 철희의 다독거림에 팔을 풀었다. 가슴 아득히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뭉클함이 기분을 달뜨게 하였다. 며칠이 흐른 후 내 일생 처음이었던 감미로운 키스를 그녀와 하게 된다.
무료하던 서울 생활이 내 일생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우리들은 서울에 적응하는 방식과 방법을 몰랐다. 정착(定着)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날 동경의 대상으로 품었던 서울 생활은 정착의 목적이 아닌 이유로 모든 것들을 허비하기만 하였다. 만나는 횟수와 시간이 많아 질수 록 장래를 위해 손에 쥐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첫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불변의 법칙처럼, 공식이 된 수순을 따라 우린 나의 군 입대를 앞두고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눈 덮인 대관령 고개를 넘어, 한때 나라의 수도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도피처로 삼기위해 설계되었던 춘천을 찾았다. 88올림픽이 유치되고 한 해를 남긴 이유로 섬마을에서 차출된 병력은 그 지역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제는 내가 그녀의 고향 찾기를 기다리는 묘한 신세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각기 다른 생활에 길들여지면서 그 사랑은 옅어지기 시작했다. 현실에 먼저 민감한 여자의 특성상 날 향한 그녀의 시선은 회의적으로 변해만 갔다. 운명 같았던 사랑이 사그라졌다. 그녀의 나에 대한 관심은 보장된 미래에 있었다. 소년의 사랑이 남자의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기대하였다. 여자에게 있어서의 우선순위는 사랑보다 먼저가 되어야 할 요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신(神)께 헌신을 약속한 내게 그녀의 존재는 미약해졌다.
첫 사랑, 친구에서 연인으로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몸부림 쳤던 그 많았던 날들에 비하면 결말이 너무 허망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세월에 나를 맡겨도 지워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그녀가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결혼을 위한 절제되고 세련된 방식을 선택한 사랑은 매력적이지 않다.
순수하였고 아름다운 사랑은 첫 사랑에게만 붙일 수 있는 위대한 칭호다.
난 같은 고향이었어도 십 수 년 동안 그녀를 이제껏 한 번도 만나거나 찾지 않았다. 마음을 주었고 마음에 담았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 땡그랑 쇠 종 울려 쉬는 시간이면 나무 그늘에 앉아 그 앞에서 까불대던 날 보며 살포시 미소 짓던 윤미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왕십리 전풍 호텔 앞에 서 있던 그녀와 겹친다. 사랑할 시기에 주어진 그 시간들에 좀 더 신중하지 못했고 열중하지 않았던 날 탓한다.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마음이 빈약해짐과 사랑할 날들이 우리에게 그리 넉넉하지 않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산다.
보고 싶다 윤미야......
제비(소연자小燕子) or 개구리낚시(6)
밭
초여름 채 마르지 않은 보릿대를 태우는 푸른 연기가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고 꼼꼼히 주워 담지 못한 보리 이삭이 알맞게 구워지는 때를 노려 손안에 넣고 잽싸게 비빈다. 까맣게 그을려진 보리를 손에 올려놓고 입김으로 껍질들을 불어낸 후, 크고 굵은 보리알을 한입에 털어 넣는다.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알이 터지며 구수하게 퍼지는 맛이 일품이다.
때를 알고 알맞게 내리는 비를 가두어 자운영과 함께 땅을 갈아엎는다. 또 하나의 추억이 파묻히고 잘게 부수어진다.
잘 먹이고 살찌운 소와 뻘겋게 녹이 난 쟁기 날을 줄로 갈아 논으로 들어선다. 그동안 소(牛)나 농부도 발에 물을 묻히지 않은 터라 무릎까지 차오르는 기운이 아직 서늘하다. 다져진 땅을 상대로 오랜만에 힘을 쓰기에 버거워하는 소의 등에 한 차례 채찍이 더해진다. 여태 빈둥거렸던 표를 너무 심하게 내비친 탓이다. 몸에 익은 농부의 쟁기질과 한동안 질러보지 못한 “이랴" 하는 쩌렁쩌렁한 호령을 따라 쟁기를 끌던 소가 엉기적거리며 지나갈 때마다 예리한 쟁기 날에 살을 벤 것처럼 흙덩이들이 나뒹군다.
소의 등줄기에 흥건히 베어나는 땀과 철퍼덕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일의 힘겨움을 보여준다. 뒤따르는 자가 앞서 힘만 쓰는 자를 제 맘대로 부리는 풍경(風景)이 노을을 따라 들녘 가득 펼쳐진다.
논농사에 기대어 사는, 논을 터전 삼아 생(生)을 이어가는, 어느 누가 한 차례도 기별하지 않았음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들이 올해도 반갑다.
날개에 검은 망토를 재단해 입고 흰 줄무늬 넥타이를 가슴부터 꼬리까지 늘어뜨린 연미복을 입고 나타난 하늘의 멋쟁이 신사, 땅위에 펭귄이 있다면 하늘엔 이 녀석이 있다. 그 녀석은 여러모로 잘나긴 하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몸집에 재빠른 움직임과 적절하게 조합한 옷매무새하며, 오뉴월의 햇살에 번쩍거리는 매끈한 등 곡선은 가히 예술이다. 한 가닥 전깃줄에 가지런히 앉아 특이한 재잘거림을 듣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시골에 사는 자의 특혜요 넉넉함이었다.
제비, 중국에서는 이 새를 소연자(小燕子)라 하였다. 우리말의 제비가 중국어로 '옌즈' 라 발음하여 앞에 '샤오'란 말을 붙여 '작다'는 뜻을 가졌다. 즉 한자어 燕 제비 연(편안할 연)으로 '작고 편안한 새'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주 작지만 행복하고 평안을 가져다주는 길조로 여겼던 것이다. 또한 강남은 중국의 양쯔 강(揚子江) 이남 지역을 뜻하였다.
우리나라 우체국이 제비를 심볼 마크로 삼아 그 이미지를 벤치마킹하여 신속, 정확, 친절을 표어로 삼은 것 또한 제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기 위해선 사람이나 짐승 또한 집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집을 짓기 위해선 흙이 필요했다. 그것도 초벌로 갈아엎은 흙은 점도가 약하여 집의 재료로 적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농부의 논갈이는 제비에게 반가운 일이다. 쟁기질 후에 써레질을 통해 부드러워진 좋은 진흙을 기다려 지푸라기와 함께 섞어 튼튼한 집을 짓는다. 젖은 흙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질 것을 알듯 집짓기는 세심한 솜씨로 일주일을 넘긴다.
많은 철새들 중 사람이 해(害)를 끼치지 않는 대상은 제비가 유일하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굳이 사람 곁에 둥지를 튼다. 모든 짐승은 최상위 포식자인 사람 곁에 머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사람이 잡아먹지 못할, 먹을거리가 없는 모양새도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기둥이 떠받히는 안쪽 처마 밑은 더할 나위 없는 명당자리다. 사람이 사는 가장 위험한 곳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제비 스스로들이 바꾸어 버렸다. 그 집의 주인이 자애심(慈愛心)을 유지한다면 이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터이다.
지붕의 바깥쪽 처마 끝은 바삐 가는 나그네의 쉬어갈 곳을 위해 내었던 주인의 후덕함이었다. 집 떠나온 이가 생소한 타지에서 느끼는 세상사는 사람의 온정(溫情)이다.
갑작스레 당한 소낙비를 피하거나 내어쫒긴 난봉꾼의 새벽 찬 이슬을 가려주는 곳이었고, 한 많은 가련한 여인네의 울음을 받아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비 올 것을 대비하지 않고 우산 없이 학교에 갔던 꼬마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달음박질을 준비하던 곳이 처마 밑이다.
집안 대들보의 처마 밑은 제비에게, 집밖 대문의 처마는 우체부에게 내어 주었다. 둘 다 길한 소식을 가져다주는 대상이기에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제비를 맞이한 주인은 대들보 받히는 처마를 집터 삼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위해 마루 끝을 오물로 더럽혀도 불결해하거나 내어쫒지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의 밤낮 없는 성화에도 빗자루 질을 하지 않는다. 사실 제 새끼 키우려고 제 집처럼 드나들며 사람에게 잔뜩 피해만 입히는 동물은 제비가 유일하다. 뿌리내린 벼가 땅 맛을 알아 연녹색이 짙어질 무렵, 뿌려대는 살충제에 놀라 솟구치는 나방을 먹이 삼아주는 일 외엔 그다지 고마울 것이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여름 논을 갈아엎는 이맘때가 되면 제비를 기다린다. 제비가 터를 잡은 집은 주인의 인간됨을 보고 날아든다 하였고, 복이 깃들어 형통케 될 징조로 여겨 보이지 않은 은근한 자랑거리로 삼았다. 제비가 미움을 타지 않은 것은 복(福)을 가져다주는 씨를 물고 왔던 흥부전(興夫傳) 덕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겨우내 손님 들지 않아 한적하였던 집, 반갑게 찾아든 제비에게 철새임에도 선뜻 처마를 내어주었던 것은 먼 길 찾아온 손님을 정겹게 맞아주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예전 농약에 의존하지 않은 농사에 있어 제비와 같은 짐승에 기댄 부분이 상당하였다. 한 여름 잦은 비와 뙤약볕에 병충해가 극성일 무렵 쉴 새 없이 날아들며 해충을 잡아 주었던 제비는 고마운 존재였다. 참새는 얄밉게도 벼의 알곡만을 먹지만 제비는 벼의 알곡이 여물기전 제 새끼를 키우고 떠난다. 자식들 다 자라 집 찾아들지 않는 적막한 시골, 수수한 재료로 집지어 오랜만에 사람 사는 듯 재잘거리는 녀석들이 손주들 마냥 고마웠다.
불편해 집을 고치고, 날짐승 불결하다며 꼭꼭 틀어막은 대문이며 창문들, 자기 거처를 조금이나마 넓히려 처마를 모두 없애 버린 집들은 제비를 더 이상 반겨주지 않는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농약에 농사를 맡기면서부터 그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만 살아가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좋은 집들을 가졌으되 그 집 주인의 후덕함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회귀성이 강한 제비가 다시 먼 길을 날아 그 옛집을 찾았을 때에는 집이 바뀐 것보다 그 집 주인의 마음이 바뀐 것에 더욱 놀라게 되리라....
자신이 물어다 준 박 씨로 부자 된 흥부의 집엔 더 이상 제비집은 필요 없게 되었다. 옛 적의 소박하고 정 많던 흥부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그 흥부 또한 제비에게 기댈만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개구리
개
아마도 뱀이나 메기, 가물치, 장어 같은 양서류나 파충류들의 생김새가 혐오스럽고 징그러울 뿐 아니라 몸이 미끈거리고 끈적끈적한 체액을 분비하며 체색(體色)의 배열도 아름답지 못하고 그 모양새 또한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만나면 기겁을 하고 마는 우리가 자연과 생존에 필요한 그들의 독특한 기능과 형태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보리가 베어지고 물 댄 논마다 오뉴월 햇살에 알맞게 데워진 미지근한 물이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물장구치며 놀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더불어 어느 샌가 나타난 튼실한 뒷다리를 가진 개구리들을 볼 수 있다. 모내기를 하기 전의 물댄 논은 산란을 위해 모여든 개구리들의 부킹을 위한 몸만들기가 한창이다. 모를 심기 전 갈아엎지 않은 논,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며칠간의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껏 휘젓고 옮겨 다니며 저마다의 짝을 찾기에 열심이다.
모기들의 성화에 이제껏 닫아 잠을 청했던 방문을 열어 바깥 공기의 시원함에 더위를 맡기려 할 즈음 한차례 소나기가 퍼붓는다. 불어난 물, 그리고 다시 더워지는 밤, 모기장 치며 열어두었던 방문을 기다린 듯 울음주머니 한껏 부풀려 짝을 갈구하는 수컷 개구리의 울부짖음이 초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여름은 사랑의 계절이다. 그 문턱에 잠을 설친다.
밤새 더위와 개구리들의 질펀한 축제에 시달려 앙갚음 하려는 듯 때를 맞춰 동네 꼬마들의 첨벙거리며 휘두르는 고무신이 연방 하늘로 솟구치다 땅으로 꽂힌다. 흡사 딱지치기를 하는 것과 같은 광경이 논바닥 곳곳에 난무한다. 고무신을 팽개칠 때마다 물보라가 튀고 배를 뒤집어 누운 개구리들이 즐비하다. 잔인한 듯 보이지만 저들이 고안해낸 개구리를 잡는 방식이다.
산채로 개구리를 잡아야 하지만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막대기나 돌은 개구리가 즉사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기 때문에 별 대접을 받지 못한다. 고무신은 적당한 무게와 알맞은 두께로 인해 잠시 개구리를 기절시켜 온전한 상태로 잡을 수 있었다.
개구리를 잡아할 이유는 충분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살았던 사람이면 개구리의 용도를 쉽게 짐작할 것이다. 살이 올라 통통한 개구리 뒷다리는 닭고기 맛을 낸다. 육지에서야 단순히 쇠약한 아이들의 영양보충을 위해서이지만 바닷가에서는 미끼의 용도 때문이다.
바닷물고기를 잡는데 종종 육지의 생물들이 미끼로 쓰인다. 우럭을 잡을 때 쓰이는 미꾸라지가 대표적이다. 개구리의 뒷다리는 문어를 잡기에 아주 유용하다. 무엇 때문인지 문어는 개구리에 잘 덤벼든다. 아버지의 문어 잡이를 위해 동네 꼬마들의 개구리 사냥이 시작되는 때가 겹친 것이 개구리에게는 불운(不運)이다.
꼬마들이 휘두르는 고무신에 맞아 널브러진 개구리를 철사에 입을 꿰거나 요소와 복합비료부대에 담아 아버지 앞에 내어 놓으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쏠쏠하다.
논갈이가 한창인 들녘에 제비들이 분주히 오간다. 저마다 입에 흙을 한가득 물고서 각자 자기 집 짓기에 열을 올리면 반쯤 물이 채워져 갈아엎어진 흙더미 은밀한 곳마다 개구리가 웅크려 틀어 앉았다. 한바탕 벌어진 꼬마들의 개구리 몰이와 추수가 끝난 보리농사의 끝 언저리에 벌어진 어른들의 뒷다리 바비큐 파티에 용케 살아남은 놈들이다.
마땅한 놀이가 없는 시골에선 모든 것이 희생양이다. 개구리 또한 예외가 아니다. 큼직한 놈을 잡아 명주실로 뒷다리에 묶어 위협하여 얻은 뜀박질이 내기의 밑천이 된다. 즉 가장 멀리 뛰는 놈을 가진 녀석이 그날의 대장이다. 또한 뛰다 지쳐 흐느적거리는 개구리의 항문에 보릿대로 대롱을 만들어 꽂아 힘껏 불면 배가 부풀어 오르며 기운을 차리기도 하였다.
지금에야 잔인하여 동물학대 죄가 되겠으나 길가의 돌멩이보다 흔했던 개구리를 보았던 시절에 살았던 것이 복이었나 싶다.
농부의 성화에 이끌린 소의 내품는 씩씩거림과 갓 태어난 송아지의 날뛰는 발굽에 행여 치일 새라 논 둑 풀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파놓은 둠벙이 있는 곳마다 보기 드문 큰 녀석들이 있었다. 둠벙은 사람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개구리들의 마지막 피난처이다. 겁 없던 꼬마들도 이곳은 무서워하였다. 웬만한 어른 키를 훌쩍 넘긴 물의 깊이와 함께 물귀신이 나온다거나 괴물이 산다고들 하여 접근하기를 꺼려하였다. 하지만 가두어 저장하는 저수지와 달리 샘솟는 둠벙 물의 영향으로 논에서 부화한 올챙이들보다 그 성장이 더뎠다. 물이 차가운 탓이다.
벼가 어느 정도 자랄 즈음 물벼룩을 잡아먹고 배가 부른 올챙이가 개구리의 본 모습을 찾으려 뒷다리를 먼저 내민다. 벼를 위해 논에서 물을 빼는 관계로 뚱뚱해진 몸을 꼬리만으로는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다. 뒷다리는 몸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 앞다리보다 먼저 생겼다.
앞다리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 논에서 나와 둑을 올라야 한다. 짙어지고 굵어진 벼를 위해 농부의 발길이 잦을 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름 하는 농약 살포와 더불어 천적의 등장 때문이다. 물이 말라버린 논의 다 자란 벼가 겹겹이 막아선 장애물들 사이로 민첩하게 드나드는 뱀이나 들쥐 같은 재빠른 적을 뜀박질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온 들녘 가득 부는 바람에 사각거리는 벼 잎들의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면 꼬마들이 바닷물에 뛰어든다. 옥수수가 수염을 늘어뜨려 영글어가고 호박 줄기가 돌담을 타고 기세 좋게 뻗어간다. 새까맣게 그을려 등껍질이 벗겨지고 누런 이빨마저 하얗게 보이는 얼굴을 가진 악동들이 여름철 자맥질에 질려 놀이를 찾던 중 그 생각이 개구리에게까지 미친다.
호박은 한 줄기 안에 수꽃과 암꽃을 가졌다. 호박을 아래에 달고서 함께 피는 것이 암꽃이고 호박이 없는 것은 수꽃이다. 수꽃은 암꽃보다 빨리 많이 그리고 길게 핀다. 벌들을 유혹해 암꽃의 수분을 돕기 위해서이다. 반면 암꽃은 호박잎들 사이로 숨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략 7:3의 비율로 수꽃이 많지만 벌이나 나비에 의해 수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호박을 달고 피는 암꽃의 운명도 끝이 난다. 즉 수분이 이루어진 암꽃만이 꽃이 지고 호박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호박의 꽃은 뿌리부분에서 수꽃이 먼저 나와 피고 가지 끝엔 대개 호박을 단 암꽃이 나온다. 열매를 맺기 위해 많은 수꽃을 피워 벌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호박의 수꽃은 볼품이 없지만 암꽃은 화려하다.
짙은 노란색 암꽃 안에 있는 붉은 암술이 개구리 낚시의 좋은 미끼가 된다. 아무렇게나 꺽은 순이 대(竹)에 줄을 묶어 그 끝에 호박꽃의 암술을 달아 벼 사이로 밀어 넣어 고패 질을 해대면 덥석 하고 개구리가 물고 늘어진다.
입이 크고 먹성이 좋은 개구리는 한번 물었던 미끼를 잘 놓지 않는다. 흔히 여치나 메뚜기를 쓰기도 하지만 더운 여름날 풀밭을 뒤지는 것이 고역인지라 돌담을 휘어 감고 숲을 이루는 틈새로 피어나온 꽃 봉우리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미끼는 루어낚시의 원조였던 셈이다. 암꽃이 호박을 맺는다는 이치를 가족들의 반찬거리를 통해 생활로 터득하신 어머니의 보호와 감시 속에 수꽃의 수술은 미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놀이로 알아채버린 우리들과의 사이엔 언제나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여름이 호박넝쿨의 잎사귀를 토란잎만큼이나 크게 키워 장마철 형제 많아 저마다의 손에 우산 들려주지 못해 오가며 갑작스레 만난 소나기를 흠뻑 맞을 뻔했던 형(兄)과 오라비를 가려주는 요긴한 도구이기도 하였고, 반딧불 잡아 호박꽃 안에 가두어 옛적 선비들의 고락을 흉내 내는 즐거움 또한 안겨주었다.
한 뼘의 땅을 놀릴 새라 고구마 밭 가장자리를 따라 뿌리듯 심었던 호박은 밭둑을 따라 풀 뜯는 소의 배설물과 휴가철 할머니 집을 찾았던 손자들의 오줌을 자양분 삼아 자랐다.
호박과 개구리,
논에서 나고 자라 벼의 일생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며 논에서는 더 이상 먹이를 찾지 못해 밭이나 산을 찾아 나서는 길에서 두려움의 대상들로부터 처음으로 제 몸을 숨겼던 곳이 호박 넝쿨이었다. 그 길목에 던져진 꼬마 악동들의 붉은 호박꽃의 암술은 차마 떨치기 어려운 맛나게 보이는 먹을거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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