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랑을 받은 땅고 가수인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은 Dom Pedro호를 타고 1893년 3월 9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항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두 살이었고 원래 이름은 Charles Romuald Gardes였다. 1890년 12월 11일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 Berthe Gardes와 유부남 사업가 Paul Lasserre 사이의 사생아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해서 가르델의 어머니는 셋방을 얻어 다림질 일을 시작했다. 가르델은 곧 ‘El Francesito’라는 뽀르떼뇨식 예명을 얻게 되고, 이 학교 저 학교 옮겨다니며 10대 시절에는 마분지 제작, 시계공 조수, 인쇄공 등 여러 일용직을 거친다.
가르델은 극장에 매료되어 틈날 때마다 공연을 보러 갔고, 그중에서도 항상 인기 있었던 오페라를 주로 보러 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박수부대(claque: 실제로 이런 게 있었다고 함. 공연단이나 극장 측에 고용되어 공연 중에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띄우는 일을 했다고)로 채용이 되었고 간혹 자잘한 역할로 무대에도 섰던 듯하다. 오페라 가수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노래하는 데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후에 “카루소나 티타 루포 모창으로 동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가십처럼 전해지는 얘기로는, 가르델이 자신의 모창을 하는 것을 티타 루포가 얼핏 듣고서는 분장실에서 나와 저 가수 이름이 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고 한다.
가르델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가지는 떠돌아다니며 기타 반주에 맞춰 즉흥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 민요 가수인 빠샤도르payador였다. 빠샤도르 가수 친구가 여러 명 있었던 가르델은 그들처럼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영향으로 끄레올 민요 레퍼토리에 능숙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비교적 수수한 동네들에서 가르델은 떠오르는 신인 민요 가수로 알려져 ‘El Morocho’(대략, 까무잡잡한 피부 정도의 뜻)라는 애정 담긴 닉네임을 얻게 됐다. 1911년경 가르델은 호세 라사노José Razzano를 만나 한동안 3-4인조 팀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2년 후 둘이서 가르델-라사노 듀오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 듀오가 두각을 드러낸 첫 사건은 1913년 12월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밤 라사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길거리에서 우연히 부유한 한량 Francisco Taurel과 마주쳤고, 심야 파티에 와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라사노는 가르델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고, 아마도 생활이 쪼들려서 전당포에 잡힌 탓에 기타가 없었던 가르델은 친구 기타를 빌려서 가져갔다. 파티는 Confiteria Peru라는 멋들어진 까페에서 시작되었고, 상원의원과 경찰서장 등도 참석했다. 술을 몇 잔 걸친 후 Madame Jeanne’s라는 윤락업소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자정 이후에는 새로 떠오른 핫플레이스 아르메논빌Armenonville 캬바레로 다 같이 자리를 옮겼다. 파리 불로뉴 공원에 위치한 유명한 캬바레의 이름을 딴 이 2층 건물은, 1층에 댄스홀과 테이블, 작은 무대가 있고 2층에는 객실들이 있었다. 가르델과 라사노는 2층의 방 하나를 잡고 엄선된 청중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렀다. 샴페인이 흘러넘쳤고, 잠시 후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복도에 모여들었다. 이날 반응이 워낙 뜨거워서 캬바레 주인이 라사노를 불러 70페소에 계약을 제안했고, 돌아가서 얘기하자 가르델이 물었다. “한 달에 70페소야 아니면 2주에 70페소야?” 라사노가 다시 내려갔다가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룻밤에 70페소래!” 그러자 가르델이 외쳤다. “그 돈이면 설거지도 해드려야지!”
가르델-라사노 듀오. 1914년
다음해 듀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여러 극장들은 물론 코르도바와 로사리오에서도 공연을 했고, 1915년에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와 브라질에서도 공연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온 후 가르델은 한 달 동안 활동을 쉬어야 했는데, 어떤 댄스홀에서 싸움에 말려들었다가 총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맞은 총알은 그가 죽을 때까지 왼쪽 폐에 박혀있었다. 아무튼 얼마간의 회복기 이후 듀오는 다시 공연을 재개했다.
1921년에 가르델-라사노 듀오가 부른, 조선 땅게로스들의 애정곡 <La tupungatina>
가르델의 첫 포크 음반 녹음은 1912-1913년이었지만, 그와 땅고의 운명에 결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은 1917년이었다. 그해에 가르델-라사노 듀오는 Odeon의 자회사인 Nacional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고, 또 같은 해에 가르델이 Pascual Contrusi가 가사를 쓰고 Samuel Castriota가 작곡한 땅고 곡 <Lita>를 <Mi Noche Triste(나의 슬픈 밤)>라는 제목으로 바꿔 부르고 녹음을 했던 것이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가르델은 성공가도를 내달렸다. 1924년 여름 가르델-라사노 듀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저택 Huetel estancia에 웨일스 공과 인도 카르푸탈라 마하라자(토후국 왕)를 모신 자리에서 노래를 했는데, 이때 웨일스 공은 이들의 노래에 열정적으로 우쿨렐레 반주를 했다고 한다. 이 공연이 끝나고 몇 주 후, 가르델은 성대에 문제가 생긴 라사노와 결별하고 기타 반주에 땅고 노래를 하는 솔로 가수로 독립한다. 그가 남긴 음반 대다수(900여곡 정도)가 이렇게 기타 반주에 솔로로 노래한 포맷이다.
가르델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 공연을 했다. 1929년 파리 사교계 최대 행사로 꼽히는 결핵 아동을 위한 자선행사 ‘Bal des Petits Lits Blancs’(직역하면, 작고 하얀 침대들의 무도회 정도)에 참여했고, 1931년에는 니스에서 찰리 채플린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7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모두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작품이었고 3편은 프랑스, 4편은 미국에서 찍었다. 1932년 이후로 그의 노래 가사나 영화 대사를 맡아 쓴 사람이 재능 있는 작사가 알프레도 르 뻬라Alfredo le Pera였고, 가르델과 르 뻬라는 함께 땅고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노래를 여러 곡 만들어냈다. 1935년 4월에는 카리브해 지역 순회공연을 시작하여 푸에르토리코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그러다 6월 24일 칼리로 향할 예정이던 그가 탄 비행기가 메델린 비행장에서 다른 비행기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가르델과 르 뻬라 둘 다 사망한다. 가르델의 시신은 1936년 2월에야 배편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오고, 그의 장례식 날에는 거리에 수만의 군중이 운집하여 영구차 행렬을 따랐다.
동영상을 보면 나오듯 사실 가사 내용은 경마에서 돈을 건 말이 '머리 하나 차이로' 늦게 들어와 돈을 날렸다는 내용
부에노스아이레스 플로리다가 1936년.
가르델의 운구 행렬을 따르는 군중들
가르델의 무덤 곁에는 ‘미소짓는 동상’으로 알려진 그의 동상이 서 있고, 날마다 그의 팬들과 순례자들이 그 주위에 몰려든다. 성모 마리아 동상 앞에 항상 촛불이 켜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상의 손가락 사이에는 거의 언제나 불이 붙여진 담배가 끼워져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까를로스 가르델에 대한 숭배에는 유사 종교적인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1985년 그의 사망 50주기인 1985년과 탄생 100주기인 1990년에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대규모 기념행사가 이루어졌고,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정과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에는 그의 사진이 성인들의 그림과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일이 많다.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에게 가르델은 영원 불멸의 영웅인 것이다. 가르델이 남긴 음반들을 들으며 사람들이 하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cada dia canta mejor(매일매일 노래 솜씨가 더 좋아진다).”라고.
가르델 무덤 곁의 '미소짓는 동상'
주위의 동판들은 전세계의 땅고 클럽에서 보내온 것들이라고.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땅고 가수들이 그랬듯 가르델도 악단의 반주 없이 기타 반주만으로 노래를 불렀고, 남자 가수 중 가르델의 라이벌이었다고 할 만한 Ignacio Corsini나 Agustín Magaldi도 그렇게 했다. 이와 달리, 1924년에 프란시스꼬 까나로에 의해 발탁된 로베르또 디아스Roberto Díaz나 오스발도 프레세도 악단에서 노래한 로베르또 레이Roberto Ray처럼 악단의 일원으로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estribillista’(후렴 담당자) 또는 ‘chansonnier’(노래 부르는 이)라고 불렸고, 상대적으로 부차적 역할로 여겨지며 후렴 부분만 노래를 부르는 식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는 악단에 가수를 포함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193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가수가 땅고 악단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20년대의 후렴 담당자estribillista와 40년대의 악단 보컬cantor de orquesta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인물이 프란시스꼬 피오렌띠노Francisco Fiorentino로, 그는 아니발 뜨로일로Aníbal Troilo 악단에 1937년에 합류하여 1944년까지 함께했다. 그 역시 처음에는 Juan Carlos Cobián 악단의 후렴 가수였지만, 뜨로일로의 밴드에서 후렴만이 아닌 곡 전체를 부르게 된 것이다. 뜨로일로와 피오렌띠노의 파트너십은 악단과 가수의 결합에 있어 하나의 전범이 되었다.
이들 콤비의 노래 중 조선 밀롱게로들의 최애곡 <Te aconsejo que mi olvides>
Te aconsejo que mi olvides - Anibal Troilo con Francisco Fiorentino
뜨로일로의 곡들 중 밀롱가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 중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나를 포함해서 많은 밀롱게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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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가사를 해석했던 예전 포스트
1940년대에는 가수가 악단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땅게로스들은 악단 리더와 가수의 조합을 보고 좋아하는 악단을 선택했다. 이 무렵에는 사람들이 가수의 노래가 있는 땅고 음악에 춤을 추었다. 비록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하면 추던 춤을 멈추고 노래를 듣는 일도 종종 있긴 했지만. 어떤 가수들은 춤추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템포나 포즈를 적절히 안배하기도 했다. 1947년에 뜨로일로 악단에 합류한 에드문드 리베로Edmund Rivero는 땅고계에서 성공한 보기 드문 베이스 음역대 가수다. 이전에는 기타리스트로 다른 가수들의 반주를 맡았던 리베로의 낮은 목소리는, 당시 테너 음역대에 익숙했던 청중들이 처음 듣기에는 좀 생소하고 마뜩잖았다. 가르델처럼 리베로도 자신이 부를 노래에 대한 취향이 확실했다. 리베로는 다른 작사가들보다 엔리께 산또스 디세뽈로Enrique Santos Discépolo가 쓴 가사를 선호했고, 룬파르도가 많이 가미된 노래에 특화되어 있었다. 1940년대에 주목할 만한 다른 가수-악단 조합으로는 로베르또 샤넬Roberto Chanel-오스발도 뿌글리에세Osvaldo Pugliese, 알베르또 마리노Alberto Marino-아니발 뜨로일로, 플로레알 루이스Floreal Ruiz-아니발 뜨로일로, 알베르또 까스띠쇼Alberto Castillo-리까르도 딴뚜리Ricardo Tanturi 등이 있다. 로베르또 루피노Roberto Rufino는 1938년 까를로스 디 사를리Carlos di Sarli 악단과 노래를 시작해서 1947년에는 프란씨니-뽄띠에Francini-Pontier 악단에 합류했다. 루피노는 특히 곡의 드라마를 전달하는 데 뛰어나서 많은 후배 가수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루피노 다음 세대인 로베르또 고셰네체Roberto Goyeneche는 40년이 넘는 활동 기간 동안 100곡이 넘는 음반을 녹음하여 <La ultima curda>, <Garúa>, <María>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그의 팬들은 금발에 피부가 흰 그를 ‘El Polaco(폴란드인)’라고 불렀다. 그는 리베로와 피오렌티노의 뒤를 이어 1956년부터 1964년까지 뜨로일로 악단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