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03. 17(수)
■ 영양 천 씨(潁陽千氏)
영양 천 씨(潁陽千氏)의 시조(始祖) 천 암(千巖)은 중국 서 촉(西蜀)의 천고 봉 만인 암(千古峰萬仁巖)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姓)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영양 천 씨 매 헌공 가승 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의 기록에 의하면 시조 천 암(千巖)은 1368년(명나라 홍무 원년) 도총장(都總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며 영양(潁陽)에 살았으므로 본관(本貫)을 영양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중시조(中始祖) 천만리(千萬里)가 1555년(명나라 가정 34)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경과에서 12세의 어린나이로 급제하여 황제를 뵙고 후한 상을 받았으며, 1571년(명나라 융경 5) 무과(武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고 총절사(摠節使)가 되어 북방의 몽고5부병(蒙古五部兵)을 섬멸시킨 공으로 내 위 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되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의 무고를 받아 8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뒤에 풀려나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 겸 총독오군 수(總督五軍帥 : 궁전 경비 및 전군총사령관)에 승진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만 리 는 황제의 명(命)을 받아 총 수사(總輸使)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 장(總督將)으로서 두 아들 상(祥)과 희(禧)를 데리고 철기군(鐵騎軍 : 용맹한 기병) 2만을 인솔하여 조선(朝鮮)에 건너와 평양(平壤)·곽산(郭山 : 함경북도)· 동래(東萊) 등지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蔚山) 등지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전란이 평정되자 명나라 장병들은 귀국했으나 만 리 는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 땅에 남아 우리나라 천씨(千氏)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그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했으며 30결(結)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下賜)하고, 맏아들 상(祥)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차남 희(禧)는 평구도 찰방(平邱道察訪)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 후 숙종(肅宗) 때 왜란 평정의 은혜(恩惠)를 잊지 못하여 명(明)나라 황제를 추모하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도 함께 향사(享祀)하도록 했으며 순종(純宗) 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 장(忠壯)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던 경주(耕疇 : 좌윤 상의 아들)와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태주(泰疇) 형제가 유명했으며, 찰방(察訪) 희(禧)의 아들 거주와 자주는 영월군수(寧越郡守)와 이원 현감(利原縣監)을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 외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낸 장주(長疇)와 광주부윤(廣州府尹) 찬명(贊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순명(順銘), 군자감정(軍資監正) 인명(仁銘), 칠 원 현감(漆院縣監) 경필(慶弼), 형조참의(刑曹參議) 우열(宇烈) 등이 뛰어났으며,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던 해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록 예조참판(禮曹參判) 용서(龍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인운(仁雲) 등과 함께 가통을 이었다.
순조(純祖) 때 와서는 이름난 시인(詩人)으로 서민문단(庶民文壇)의 모제를 이루었던 수경(壽慶)이 한양(漢陽) 옥류천(玉流泉) 근처의 송석(松石) 틈에 초당(草堂)을 짓고 스스로 송석도인(松石道人)이라 하며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열어 팔도(八道)의 시객(詩客)들과 함께 시(詩)를 읊으며 일생을 살았다.
당시 시인(詩人)으로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명망을 떨쳤던 수경(壽慶)은 뛰어난 시문(詩文) 외에도 기인(奇人)다운 면으로 이름났다.
수경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이름을 일송(一松)· 이석(二石)· 삼족(三足)· 사과(四過)· 오하(五何)로 지었다. 일 송(一松)과 이석(二石)은 자신의 아호(雅號)인 송석원(松石園)에서 따고, 셋째 아들 삼족(三足)은 아들이 셋이니 그만하면 족(足)하다는 뜻이고, 넷째 사과(四過)는 아들이 넷이면 너무 과(過)하다는 뜻이며, 오하(五何)는 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그밖에 위영(緯永)과 후근(厚根)·하영(夏永) 등이 학자(學者)로 이름을 떨쳤으며, 세헌(世憲)은 고종(高宗) 때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역임한 후 도미하여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고 상해임정(上海臨政)에 참여했으며, 세광(世光)은 해방 후에 성결 서울 신학교를 창설하여 이사(理事)가 되고 십자군 전도대장으로 전도 사업에 공헌하여 영양 천 씨를 더욱 빛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