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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8. 26. 11:12
■ 28世 정리당 이두연 행장(靜履堂 李斗然 行狀)
[생졸년] 1595년(선조 28)~1645년(인조 23) / 향년 50歲
[세 계] 임실 출신 국당공후 문정공파
사미헌 장복추 찬(四未軒 張福樞 撰)
증 숭록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예문관 대제학 행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성균관춘추관사 시호 문정 호 정리당 이공 행장[贈崇祿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藝文館大提學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成均館春秋館事諡文貞公靜履堂李公行狀]
공의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두연(斗然)이며 자는 건백(建伯)이고 호는 정리당(靜履堂)이며 본관은 계림(鷄林 경주(慶州)이다.
시조의 휘는 알평(謁平)으로 신라시대 개국좌명대신(開國佐命大臣)이 되었다.
좌복야(左僕射) 휘 핵(翮)과 문희공(文僖公) 휘 세기(世基)를 지나 문효공(文孝公) 휘 천(蒨)과 문경공(文敬公) 휘 정견(廷堅)에 이르러 양 대에 걸쳐 월성군(月城君)에 습봉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준(俊)은 이조 참의를 지냈고 휘 세남(世南)은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휘 이(苡)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휘 수담(壽聃)은 직장(直長)을 역임하였으며 휘 임(任)은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휘 숭문(崇文)은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휘 위(緯)는 예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서계(西溪)로 훌륭한 문학과 행실로 추중을 받았는데, 선조(宣祖) 기축(己丑)의 화에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과 함께 회령(會寧)으로 귀양을 갔으니, 곧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충헌(忠獻)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 28) 12월 12일에 흰 학을 꿈꾸고 임실현(任實縣) 구고리(九臯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겨우 3세에 정유재란을 만나 백련봉(白蓮峯) 아래 암석사이에 피난하였는데 학이 날개로 덮어주니, 서계가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2세에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㕀) 문하에서 배웠다.
23세에 정 한강(鄭 寒岡)에게 배워 마음의 본원을 함양하는 것으로 덕을 진척시키는 기틀로 삼고, 성리(性理)를 궁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학업을 닦는 근본으로 삼았는데, 정 선생이 매양 칭찬하였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여러 해 동안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에 있으면서 세 번이나 국빈(國賓)에 충원되었다. 광해군이 윤리를 손상시킨 일이 있은 이후로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2) 이괄(李适)의 변란이 있자, 임금께서 공주(公州)로 행차하셨다. 공이 동지들을 창도하여 병사와 군량미를 모아 전쟁터로 달려가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합세하여 난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어가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봄에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으로 추천되어 승진하였다. 이때 임금께서 바야흐로 경학(經學)에 뜻을 두고 현량(賢良)한 선비들을 탐방하였다. 정우복(鄭愚伏)과 정동계(鄭桐溪) 두 선생이 자주 공의 이학(理學)을 칭찬하니, 임금께서 즉시 강연에 참가하도록 명하였는데, 강연에서 물 흐르듯이 응대하자 임금께서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자리를 바짝 다가 앉아 경청하였다.
6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우레가 울리며 비가 내려 하늘이 경계함을 보이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빠른 우레가 울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바로 하늘이 경계함을 표현함이니, 하물며 이런 순곤(純坤)의 달〔10월〕에 발생함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옛 사람이 천변(天變)을 인애(仁愛)의 발로라고 생각한 것은 대개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여 위망(危亡)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전근되자 부모님의 봉양을 빌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축년(1625, 인조3) 임금의 부름에 나아가 곧바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나라의 기강을 세워 부지하는 뜻을 진술하였다. 6월에 사헌부가 관노(館奴=성균관 노비)를 형신(刑訊)하는 일로 또 상소하였는데, 전후로 올린 소차(疏箚)의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청나라 적들이 화의를 청하자 공이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포로병을 참수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고 명나라 조정에 알려 토벌을 청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말씀이 가을 서리같이 늠연하였다.
7월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고 9월에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직되었다. 12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임명되었고 가선대부 품계가 더해졌으며 동지성균관춘추관사(同知成均館春秋館事)를 겸하게 되었는데, 체직을 빌었지만 윤허되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에 청나라 기마병이 변경을 침략하자 임금의 수레가 강화도(江華島)로 행차하였다. 공이 수찬(修撰) 이상형(李尙馨), 좌랑(佐郞) 오섬(吳暹)과 함께 창의하여 공주(公州)에서 세자를 호종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또 학가(鶴駕 세자의 수레)를 호종하여 강화도의 행재소에 이르렀다.
병자년(1636, 인조 14) 청나라 기마병이 갑자기 도성으로 침략해오자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갔다. 왕의 교서(敎書)가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나오니, 공이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맹서하고 서계 공에게 우러러 품의하였다.
서계공이 말하기를 “충효는 바로 우리 집안의 일이니, 너는 늙은 아버지가 있음을 염려하지 마라. 또 전쟁을 하는데 용기가 없음은 효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명령을 받고서 삼가 두려워하면서 옥과(玉果) 이흥발(李興浡), 세마(洗馬) 조평(趙平),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 찰방(察訪) 유즙(柳楫)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며 군량미를 모으고 병사를 모집하였다.
창의군이 과천(果川)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이미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계(桐溪)와 함께 차자를 올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성수산(聖壽山) 가운데 별도로 삼가정(三佳亭)을 지은 뒤 스스로 대명(大明) 한 구역을 만들고 자취를 거두어 세상에 숨었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명나라가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충분(忠憤)을 이길 수 없어 앉을 때 북쪽으로 향하지 않았으며 연경(燕京)의 물건은 하나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을유년(1645, 인조 23) 10월 16일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서 관리를 보내어 부의를 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그 다음 해 2월에 임실현 서쪽 수산(壽山) 아래 군의곡(羣議谷)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영조 을미년(1775, 영조 51)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증직되었고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교지(敎旨)에 숭정(崇禎) 연호를 특별히 써서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보였으니, 대개 세상에 드문 특별한 대우였다.
아! 공의 업적을 뽑아보면 임금을 섬김에 충성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시기적절하게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렸다.
시렁 위의 맛있는 음식[수수(瀡滫)]과 상자의 옷가지는 반드시 몸소 조사하고 친히 검열하여 부모님의 입에 맞고 몸에 편하게 하기를 힘썼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여는 습(襲), 염(斂), 장례, 제례를 한 결 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삼년간 여묘 살이를 하면서 슬퍼하여 몸이 야위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도 그해가 다가도록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새벽에 일어나 사당을 배알하는 일을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만두지 않았다.
자질(子姪)들과 고을의 인재들을 가르치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천지가 이미 생긴 뒤로 도가 성인(聖人)에 있게 되었다. 성인은 이미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도는 남겨놓은 경서에 있으니,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이 경서를 버리고 어찌 하리요.”라고 하였다.
믿고 따르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져 모두가 가정(佳亭) 선생으로 추중하였다.
공의 하늘에 근본하는 효도와 적개심의 용맹 같은 것은 정성껏 후학을 인진(引進)하는 방법이니, 참으로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학문을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 도를 잘하는 [독신호학 수사선도(篤信好學守死善道)]’ 자가 아니겠는가.
부인은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군수를 지낸 윤휘(胤輝)의 따님이니, 묘소는 공과 같은 언덕에 있다.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지평(持平)을 지낸 영후(永厚), 양자로 나간 영하(永夏), 자식이 없는 영석(永奭)이며 딸은 이시화(李時華)와 진사를 지낸 김진룡(金震龍)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영신(永新)과 영무(永茂)이고 딸은 조기하(趙器夏)에게 시집을 갔다. 손자와 증손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9대손 종택(鍾澤)이 그의 사촌동생 종길(鍾吉)을 시키니, 그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4백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행장을 부탁하였다. 내가 늙고 피폐하여 고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서술하기를 위와 같이 하여 부지런한 정성에 색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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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기축(己丑)의 화 :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동인(東人)이 화를 당한 사건이다.
선조 22년(1589) 10월에 동인인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 이발(李潑), 이길(李洁), 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 정개청(鄭介淸), 김우옹(金宇顒), 이위(李緯) 등이
유배되었다.
02)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을 말한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 시호는 문정
(文貞)이다
03]백련봉(白蓮峯): 백련산(白蓮山)을 말한다. 높이 759m로 임실군 청웅면과 강진면의 경계에 있다.
04)이대유(李大㕀): 1540~160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인(景引), 호는 활재(活齋)로 1579년(선조1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05)반궁(泮宮): 원래 주대(周代) 제후의 학궁(學宮)을 말하는데, 그 제도는 동서의 문 남쪽으로 물이 둘러 있어 그 형상이 반벽(半璧)과 같
고 그 규모는 천자의 학궁인 벽옹(辟雍)의 반인 까닭으로 반궁이라 한다. 조선조의 성균관에 해당한다.
06)국빈(國賓): 두보(杜甫)의 〈봉증위좌승장이십이운(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에서 “내가 옛날 젊을 때 일찍부터 관국빈에 충당되었
네.[보석소년일(甫昔少年日, 조충관국빈(早充觀國賓)]”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감시(監試 반시(泮試))에 급제함을 말한다.
07)광해군이 …… 있은: 광해군이 형제인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것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일 등을 말한
다.
08)이괄(李适)의 변란: 1624년(인조2) 평안병사 이괄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이괄은 인조반정 당시 군사 지휘를 도맡아 큰 공을 세우고
도, 계획에 늦게 참여했다며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또 처음에는 한성 부윤에 임명되었으나 북방 여진족 방어를 위해 평안병사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쫓겨나자 불만이 더욱 쌓였다.
1624년 아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자 마침내 이를 참지 못해 반란을 일으켰다. 한양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곧 관군에 패해 도망
가던 중 부하 장수의 배신으로 죽고 말았다.
09)이수일(李守一): 1554~1632.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이다. 1583년(선조1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하여 길마재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
功臣) 2등에 책록 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0)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말한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유성룡의 제자로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등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우복집(愚伏集)》이 있다.
11)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을 말한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
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에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여 칼로 자결 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의 모리(某里)에 들어가 조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12)자리를 …… 경청하였다: 원문의 ‘前席’은 자리를 앞당긴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의기가 투합함을 뜻한다. 한(漢)나라 가의(賈誼)
가 좌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다가 일 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宣室)
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중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
겨 몸을 가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한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13)이상형(李尙馨): 1585~164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默齋)로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5년(인조3)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 화의를 건의하는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하였다.
경서에 정통하였고 음양ㆍ지리에도 밝았으며, 특히 역학에 뛰어났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 되었
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14)오섬(吳暹): 1585~? 본관은 군위(軍威), 자는 퇴이(退而)이다. 1624년(인조 2)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에
척후장(斥候將)으로서 전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강원도 감사(江原道監司)에 이르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전북 부안현(扶安縣)
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전북 변산반도(邊山半島) 선포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5)이흥발(李興浡): 1600~1673.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자는 유연(悠然), 호는 운암(雲岩)으로 1624년(인조2)에 생원시에 합격하
고 1628년(인조6)에 대과에 급제하여 옥과(玉果) 현감을 지냈다.
16)조평(趙平): 1569~1647.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형중(衡仲), 호는 운학(雲壑)으로 함안 출신이다. 정구(鄭逑)ㆍ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초모도유사(招募都有司)로서 노등(盧縢)ㆍ이두연(李斗然) 등과 함께 의병을 소집하고 군량
미를 모아 여산(礪山)의 의병소에 조달하였다. 도학과 문장이 당세에 뛰어났으며,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운학문집》이 있다. 17)양만용(梁曼容): 1598~1651.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長卿), 호는 거오(據梧)이다.
1633년(인조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어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사복시 정에 이러렀다18)유즙(柳楫) : 1585~1651.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여(用汝), 호는 백석(白石)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찰방을 지냈다. 19)성수산(聖壽山):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에 있는 높이 876m의 산이다
20)독실하게……잘하는[篤信好學守死善] : 《논어》 〈태백(泰伯)〉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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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崇祿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藝文館大提學,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成均館春秋館事。謚文貞公靜履堂李公行狀。(28世 靜履堂 斗然)
公姓李氏。諱斗然。建伯字。靜履其號也。系出鷄林。初祖諱謁平。爲羅朝開國佐命大臣。歷左僕射諱翮。文僖公諱世基。至文孝公諱蒨。文敬公諱廷堅。兩世襲封月城。入我朝。有諱俊。吏議。諱世南。兵判。諱苡。直長。諱壽聃。直長。諱任。贈吏議。諱崇文。主簿贈左贊成。諱緯。贈禮議。號西溪。以文行重。宣廟己丑禍。與東岡金先生。同竄會寧。卽公考也。妣淸州韓氏。禦侮將軍忠獻之女。萬曆乙未十二月十二日。夢白鶴。生公于任實縣九臯里弟。甫三歲。値島訌。避地白蓮峯下巖石間。鶴覆翼之。西溪甚神異之。年十二。遊李活齋大㕀門。二十三。從鄭寒岡學。以涵養本源。爲進德之基。以窮探性理。爲修業之根。鄭先生每加稱賞。丁巳。中司馬。累載居泮。三充國賓。自廢朝傷倫之後。謝歸田里。書籍自娛。天啓甲子。有适變。上幸公州。公倡同志。糾合兵粮。馳赴。與副元帥李守一。合勢討平。扈駕入京。是年春。薦陞成均館學錄。時上方留意經學。訪問賢良。鄭愚伏,鄭桐溪兩先生。亟稱公理學。上卽命參講。應對如流。上虛心前席。六月。除司憲府監察。十月。雷雨示警。公上箚言。迅雷甚雨。乃天戒之發也。况此純坤之月乎。古人以天變。爲仁愛之發者。盖欲令人君恐懼修省。不至危亡也。十二月。移拜司憲府持平。乞養還鄕。乙丑。承召旋拜成均館直講。疏陳扶綱立紀之意。六月。以憲府刑訊館奴事。又上疏。前後疏箚。言甚剴切。丙寅。還拜司憲府掌令。辭以親病。不就。是歲。虜賊請和。公憤慨曰當斬虜价。明大義。奏聞天朝。請討可也。其辭氣凜乎秋霜。七月。除司憲府執義。九月。拜工曹參議。轉移戶曹參議。十二月。拜司憲府大司憲。加嘉善階兼同知成均館春秋館事。乞遞不允。丁卯正月。虜騎犯邊。大駕幸江都。公與修撰李尙馨。佐郞吳暹。倡義扈從世子于公州。及媾成。又扈鶴駕。至江都行在所。丙子。胡騎猝迫都城。大駕移駐南漢。敎書自圍中出來。公爲國誓死。仰稟于西溪公。公曰。忠孝乃吾家事。汝勿以老父爲念。且戰陣無勇。非孝也。公承命惴惴。與李玉果興浡。趙洗馬平。梁翰林曼容。柳察訪楫。傳檄列邑。聚糧募兵。至果川。聞和議已成。與桐溪上箚。北望慟哭而歸。別搆三佳亭於聖壽山中。自作大明一區。斂迹遯世。甲申。聞帝京之陷。尤不勝忠憤。坐不北向。燕京貨物。一不近身。乙酉十月十六日。考終于寢。享年五十一。訃聞。上悼惜不已。遣官致祭賻。越明年二月。葬縣西壽山下羣議谷乙坐原。英廟乙未。贈崇祿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藝文館大提學。謚文貞。特書崇禎年號於敎旨。以示尊周大義。盖曠世異數也。於乎。最公事實。不惟事君盡忠。其事親也。怡愉竭誠。溫凊以時。庋閣瀡滫。篋笥衣物。必躬調親檢。務令適口便體。及丁憂。襲斂葬祭。一遵禮制。廬墓三載。哀毁如一日。服闋。終其歲。不與宴樂。晨起參廟。風雨不廢。敎子姪若鄕秀。嘗曰。天地已判。道在聖人。聖人旣遠。道在遺書。有志於道者。舍是書何以哉。信從者日益衆。咸推佳亭先生。如公根天之孝。敵愾之勇。惓惓引進之方。非眞篤信好學守死善道者歟。配善山金氏。郡守胤輝女。墓與公同原。生三男二女。男永厚持平。永夏出后。永奭無後。女李時華,金震龍進士。側室男永新,永茂。女趙器夏。孫曾不盡錄。公九世孫鍾澤。使其從父弟鍾吉。齎家狀。不遠四百里。請福樞以述善之文。余以老廢固辭不獲。謹據狀而序次之如右。以塞勤懇云。 <끝>
출전 : [四未軒文集卷之十一]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 1815년(순조 15)~1900년(고종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