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암(李廷馣)
[생졸년] 1541년(중종 36)∼1600년(선조 33) 9월 10일./향년60歲
[문과]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합격연령 : 21歲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5위/합격연령 18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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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 서울 출신.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이조참판 정형(廷馨)의 형이다.
조선시대의 문인인 이정암 선생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1558년 사마시에 합격에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예문관 검렬을 지냈으며 1567년 성균관전적, 공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이후 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춘추관의 직책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연안부사가 되었는데 이 때 연안부민들을 잘 다스려 부민들로부터 존경심을 받았으며, 그 뒤 장단부사, 양주목사, 1591년 병조참의, 이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이조참의가 되었을 무렵에는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가자 뒤늦게 호종되었으나 이미 채직되었고 아우인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연안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가 되었다.
▲사류재사우의 정문과 기공비가 보인다.
▲충목공사류재 이선생 기공비
이정암 선생은 외직을 거쳤을 무렵에 탐관오리가 많았던 당시 지방관과는 다르게 폐단을 근절하고 백성들을 위무하는데 수완을 발휘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얻었습니다. 그가 연안성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할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가하였으며 도망칠 것을 주장하던 부하장수와는 다르게 그는 끝까지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고 말해 백성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또한 조정의 대신이었을 때는 유능한 관리였고 싸움터에서는 지략이 뛰어난 장수여서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정암 선생의 저서 사류재집 / ⓒ이재훈
본 문집의 저본은 후손 여주(汝柱)가 수집, 편차한 정고본(定稿本)을 여주의 아들 성룡(聖龍)이 1736년에 간행한 초간본으로, 7권, 부록5권, 보유(補遺) 합5책(384판)의 목판본(木板本)이다.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圖書番號 : 奎5285)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2.3×17.3(㎝)이다.
▲이정암선생의 저서 서정일록 영인본(필자 소장본) / ⓒ이재훈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 벽제초등학교 입구에는 이정암선생을 기리는 사당인 사류재사우가 있다.
이 사우는 이정암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정면 2칸 측면 1.5칸의 목조건축물이며 지붕을 단청으로 삼은 전통적인 기왓집양식을 지니고 있다. 경내에는 기공비와 홍살문이 있으며 옆에는 이정암 선생의 정려각이 있다.
한편 이정암 선생의 묘가 2008년 북한 개풍군에서 발견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웠던 연안성과 연성대첩비, 수안산성이 황해도지역이라 고양시에 있는 사류재사우와 이정암선생 정려각은 이정암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강화도 제적봉 평화전망대에 있는 연성대첩비.
이 비석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진품은 황해도 연안군에 있으며 북한의 주요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출처 두산백과)
▲충남 보령의 화암서원- 대원군 때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다시 세워진 서원으로 1922년 이정암선생을 배향하였다고 한다.
ⓒ보령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