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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630.4M)을 가다.
글 쓴 이 棹 一 高 枓 永
12월24일, 묘시(卯時)에 일어나니...
천상(天上)의 별들은 찬란히 빛나고 동지(冬至,12월22일)를 전후로 한 날씨가 어찌나 포근한지... 마치 해동(解冬)한 봄 날씨 같으다.
서둘러 차에 오르니 처음 오신분들이 이외로 많으셔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는다. 송년(送年) 산행인데 참가인원이 많이도 부진(不振)하다.(28명) 년말에 잔치와 모임이 많아서 인가?
시원하게 뚫린 화원 톨게이트를 지나 '중부내륙고속국도'로 내 달으니... 다가오는 산천(山川)의 모습들은 정겨웁다 못해 가슴이 다 저려온다.
포근하다고는 하나 계절의 무상(無常)함은 어쩔 수 없어 발가벗은 나목(裸木)들의 모습이 을씨년 스럽기 까지 하구나!
현풍 휴게소에 들러 조반(朝飯)을 드시고는 저만큼 고향산천을 바라본다. 동남쪽으로는 비슬지맥(琵瑟支脈)의 연봉(連峰)들이 서남방향으로 이어져 달리고, 북서쪽방향으로는 낙동강(洛東江)이 휘감아 흐르니...
아~ 아~ 이고장 인걸들의 요람(搖籃)이요! 풍요(豊饒)의 산물(産物)이로다! 차천 방향에 이르러 차창밖을 내다보니... 저만큼 동녘산아래(도의리)는 필자의 어린시절 소먹이고 꼴베며 뛰놀던 동산과 들녘이 아스라이 떠 오르는데...
산업화의 물결로 변화된 고향산천의 모습이 예스럽지 못하구려...! 이~랴~ 껼~껼~, 어~띠~ 껼~껼~ 밭가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함지에 점심담아 이고 논길 가시던 어머니의 아련한 모습도... 고추밭갈이에 소고삐잡고 앞서 이끌던 나의 모습들이며... 내 발등을 밟아 울고있는 내 모습에 미안해 어쩔줄 몰라하던 우리집 암소는 다 어디로 가셨는고... ?
아~ 아~ 흐르는 세월이 밉구나~! 향수어린 옛추억을 꿈에서나마 다시 볼 수 있을런지...? 만가지의 상념(想念)들이 끝없이 떠 오르는데... 오늘따라 분별망상(分別妄想)이 끝이 없어라!
창녕부근에 이르니 동쪽으로 화왕산(火旺山)이 불꽃처럼 타 오르며 영취산(靈鷲山)으로 이어져 달리니, 거대한 독수리(영취산의모습)가 우주를 향해 막 비상(飛翔) 하려는 구나!
칠서를 지나 칠원분기점에서 석전터널을 지나 양미재터널에 이르니 달려도 달려도 굴(窟)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토목기술이 1,2위를 다툰다더니...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외다.
진영읍을 지나 동김해 IC에서 내려 신어산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9시35분이다. 화인 아파트 담벽을 따라 10여 분을 진행하니 산기슭에는 보호철책으로 둘러쳐져 있어 접근이 쉽지않다.
한곳에 등산로가 열려 있는데 철계단이 놓여있어 경사가 무척이나 가파르다. 우천시(雨天時)에는 수로(水路)요, 그위로 철계단이 놓여있어 수량(水量)이 많을때는 물위를 걷는 재미가 특별할 것 같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30여 분을 오르니, 동김해 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뵌다. 서쪽방향의 분산 주위로는 분산성(사적제66호)이 보이고, 385M 고지 부근에는 김해 천문대가 삿갓모양으로 봉긋 봉긋 뚜껑만 보이는 구나!
그 아래 산기슭에는 인제대학교의 캠퍼스가 길게 늘어져 자리하고, 신어산기슭 방향에는 하키경기장 및 실내체육관, 그옆으로 가야골프장, 영원고등학교 등 등 도심 전체가 기하학적이고 정형화된 콘크리트 벽속에 같혀있어 보기만 하여도 답답하다.
문화의 발달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닌 것이라! 이곳에 살고있는 주민들이나, 멀리 대구에서 도심을 탈출해 신어산을 오르는 우리 남산님들의 마음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자연이 그리워... 그리워... 남산산악회가 창설된지 11년이요, 이 미련한 중생이 책임을 맡은지도 어언 8년 이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 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동안 우리님들에게 누(累)가 되지는 않았는지...?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자기를 점검하고, 되돌아보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병술년 한해의 일들과 오만가지의 군상(群像)들을 다 털어버리고 가리라! 일체방하착(一切放下着) 하리다!
오르는 등산로는 김해시민들의 휴식처라 거의 산책로에 가깝고, 주위에는 떡갈나무, 소나무, 철쭉, 삼엽소나무, 진달래, 싸리나무 등 등 주로 이름모를 잡목숲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어 깊은 산중에서 느끼는 유현(幽玄)함은 느끼지 못하겠다.
내걸음이 좀 빠른편인가? 후미에서 오른다는것이 어느새 중간지점에 오르고, 오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다시 후미에서 오르니... 고희(古稀)를 넘기신 노장 정명돌 회원님이 힘들게 오르신다.
초창기(1996년)에 총무를 맡으실때만 하시드라도 기운이 펄 펄 하시드니... 세월을 이기는 장사(壯士)는 없는가 보다. 그 앞으로 천가희님이 오르고, 조금 더 오르니 조여사님, 구슬님, 홍총무님이 차례로 오르신다.
10여 분을 더 오르니 오늘의 인기스타 꽁지머리님(수도하시는분)이 몇 몇 회원님들과 담소(談笑)를 하신다. 착 달라 붙은 까만색의 타이츠(Tights)를 입은 몸매는 날씬하다 못해 흡사 무도회의 중년부인을 방불케 하며, 긴머리를 늘어 뜨리고 있어 뒷모습은 영락없는 여자다.
음성도 약간은 색기(色氣)가 있어 보이니 말이다. 보다 보다 처음보는 일이며, 주위에서는 신(神)내림이 있는분이라 하신다. 한참을 웃고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가져온 과일들도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한후 425M 고지에 이르니...
저만큼 신어산(630.4M) 정상 아래에 천진암(天眞菴)과 그 우측으로 영구암(靈龜菴)이 벼랑끝에 매달려 보이고, 산자락 중간에는 은하사(銀河寺)와 동림사(東林寺)가 고즈넉이 진좌하고 계신다.
멀리서 봐도 은하사는 천년의 고찰(古刹)임을 첫눈에 알아 보겠고, 동림사는 같은시기의 고찰이라고는 하나 근년에 새로 불사가 있었슴을 알겠도다. 대자연의 품속에 고즈넉이 안겨 진좌하신 모습이 평화롭고 고요해서, 바로 이웃하고 있는 동김해시가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문바위(605M고지)로 오르니, 능선 주위로는 여러곳에서 차도로 보이는 길이 닦여있어 김해시민들의 해맞이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슴을 느끼겠다.
대문바위에 먼저오른 최대장에게 기념촬영을 해드리고, 뒤이어 황재덕회원님, 홍총무님, 김광남님 등 여러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린다. 얼마를 더 나아가 정상에 이르니 여러군데서 온 등산객들로 붐빈다.
저마다 기념촬영에 열중이라, 한참을 기다린후에 남산님들의 단체기념촬영을 마치고 희망하시는 분들에게는 개인촬영도 해드리니... 기쁨과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정상표석 옆에는 주위의 돌들을 주워모아 놓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돌무더기 위로 수로왕비(허황옥)께서 인도에서 오실 때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의 모형과 많이 닮아 있는 돌탑이 한기 서 있다.
날씨는 따사롭고 포근하여 4월의 봄날씨 같고, 바람도 없어 고요하기 이를데 없어라! 잠시 짬을내어 사방을 조망(眺望)하니... 시계(視界)는 그리 멀지 못하여 멀리 조망할 수는 없으나 지근(至近)한 거리는 볼 수 있도다.
이곳 신어산(神魚山,630.4M)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에서 동쪽방향으로 삼신산, 옥산(614M)을 거쳐 태봉산(190M), 무량산(581M), 여항산(770M), 마산의 무학산(761M)을 지나 김해의 용지봉(743M), 진해의 불모산(802M), 보배산(479M)에서 남해바다로 그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낙남정맥(洛南正脈)이라 하며...
다시 용지봉(743M) 부근에서 동쪽 방향으로 황새봉(393M), 경운산(379M)을 거쳐 이곳 신어산(630.4M)을 지나 무척산(703M)에서 낙동강에 그맥을 떨구고 있어 이름하여 무척지맥(無隻支脈)이라 하니...
신어산은 무척지맥의 한 중간기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어산은 김해시의 진산(鎭山)이요, 이고장 인걸들의 산실이 되고 있으며, 동북방향으로 장강(長江)인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고 있어 하류에 기름진 김해평야가 형성되니 풍요의 산물이 되고 있습니다.
6가야(고령가야, 성산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중의 금관가야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수로왕(首露王)께서 AD42년에 건국하여 532년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약 500여 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이어진 역사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장유화상(허황옥 오빠)이 지었다는 은하사(銀河寺), 인도 아유타왕국에서 허황옥이 처음 바닷가에 도착 했다는 망산도(望山島), 장유면의 장유암(長遊菴), 거등왕(居登王)께서 지었다는 무척산의 모은암(母恩菴), 거등왕께서 신선(神仙)들을 불러모아 바둑을 두었다는 초선대(招仙臺), 금관가야의 왕궁터 였다는 봉황대(鳳凰臺), 수로왕의 탄생설화가 얽힌 구지봉(龜旨峰) 등 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서남으로 광활한 김해평야는 끝없이 펼쳐져서 서쪽으로는 진영읍과 창원에 닿아 있고,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니... 오늘 여기서 보나니, 국토가 좁다는 말이 빈말이 외다.
김해평야에도 산업화 물결은 예외가 없어... 많은 곳에 공장과 건물들이 즐비하여,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틔어 있는 광야(廣野)에 장애물이요, 옛 명성(名聲)의 흠(欠)이로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니 나만 홀로 남았구나! 아쉬운 마음으로 정상을 뒤로하고, 억새풀이 우거진 헬기장 부근에서 삼삼 오오 모여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드시니...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볕이 밥맛을 더해 주십니다.
야외 행사는 뭐니뭐니 해도 날씨 부조(扶助)가 제일 큰 부조라! 병술년 한해를 보내는 송년(送年) 산행인데... 날씨까지 좋으시니 감사하고 또 감사 할 뿐입니다. 30여 분을 더 걸어 605M 고지에 이르니 출렁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전시용(展示用) 다리다.
신어산은 김해시와 연(連)하여 있고, 평야지대라 산이 많지 않으니 자연훼손이 대단히 심한편이다. 대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좋은법인데... 너무 많은 개발을 해서 경관이 훼손되고, 산기운도 많이 상(傷)해 있슴을 느낌니다.
585M 고지의 암봉(岩峰)을 지나 은하사로 내려가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모두모여 A,B코스 구분없이 하산키로 결정하다.
하산길은 비교적 경사가 심하여 조심조심 진행 할것을 당부드리며, 30여 분을 나려가니 천진암(天眞菴)이 벼랑끝에 진좌(鎭坐)하고 있다.
정상을 중심으로 한 좌우의 암봉(岩峰)들이 찬란히 빛나고,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우람하게 감싸 주시니... 천하의 길지(吉地)요! 전망(展望)은 탁틔여 있어 멀리 낙동강 하구는 물론이요, 남해바다 까지 이어져서 속이 다 시원하다.
가히 대장부의 기상을 갈고 닦을만한 도량(道場)이 아닌가? 훗날 인연이 닿는다면 한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다 일어난다.
천지(天地)는 주인이 없어 얻는자가 주인이요
우주는 공(空)하고 공하여 깨닫는자의 것이로다.
아~ 아~ 그대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길없는 길을 찾아 천진불(天眞佛)을 만나리라!
삼배(三拜)의 예(禮)를 드리고 물러나 은하사(銀河寺)로 내려간다. 얼마를 더 걸어 은하사 경내로 들어서니 범종루(梵鐘樓)가 웅장한 모습으로 첫눈에 와 닿는다. 단청을 하여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백년의 아람드리 거목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2층 누각으로 다포개 팔작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참으로 장엄하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다시 돌계단을 오르니, 정면에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제238호)이 정면3칸에 측면2칸의 다포(多包)계 단층 맞배지붕 형식이다. 조선후기의 건물로 고색(古色)어린 멋도 있고 중후한 느낌을 준다.
뜰아래 중정(中庭)에는 5층석탑이 비례감 있게 상승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좌우로 설선당(說禪堂)과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하고, 화운루(華雲樓)에는 서림사(西林寺)라는 편액(扁額)이 걸려있어 창건 초기에는 서쪽(인도)에서 온 불교가 번성(繁盛)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서림사로 했다는 설(說)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 전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남방불교의 전래(傳來)는 AD48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왕국에서 올 때 장유화상(長遊和尙:허황옥 오빠)이 함께 들어와 은하사를 창건 하였다는 설(說)과 비교하면 무려 324년이나 앞서고 있슴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 발굴된 화천(貨泉:조선시대 상평통보와 비슷함)이라는 화폐는 서기 14년에 중국에서 발행된 것이라고 하며, 이때 이미 중국과의 문물교류가 이고장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니... 남방불교의 전래는 더욱 설득력을 얻고있다 할 것이다.
법당 후편에는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이 도량을 수호하고 있으며, 그밖의 여러채의 요사(寮舍)가 진좌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장유화상의 창건시기로 비견하면 1900여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역사와 전통을 이어 온 사찰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전법도량(傳法道場)으로서의 역할을해 온 셈이다.
이로서 그 사세(寺勢)를 가늠할 수 있겠으며, 지세(地勢)도 좋아서 주산(신어산)의 암봉(岩峰)들이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에 반사되어 진주처럼 찬란히 빛나도다! 주위의 산들은 병풍처럼 싸여 있고, 청룡(靑龍) 백호(白虎)도 웅장하게 감싸 안으니 천하의 길지(吉地)로다. 다만, 안산(案山)이 멀고 탁 틔여 있어 지근(至近)한 거리에 비보숲(裨補林)을 조성 하였도다. 주변의 풍광도 수려(秀麗)하고 아늑해서 편안하고 즐거우며, 산능선을 걸을 때 보다 올려다 보는 경치가 더 좋구나!
오후 일정에 수로왕릉과 김해민속박물관을 답사할 계획이 있어 더는 머무르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산문(山門)을 나선다.
산문 밖에는 두개의 커다란 연못을 파서 못가운데 약사여래불로 보이는 불상이 한기 서 있다. 손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계신다. 그 뒤로 신어산(神魚山)의 상징인 물고기 형상의 큰 바위가 고임돌에 얹혀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구나!
신어산의 형상이 거대한 물고기가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하드니... 과연 옛 선인들의 지혜가 참으로 밝슴니다 그려!
김해 민속박물관에 도착하니 14시10분이다. 입장료도 무료여서 모든회원님들이 일렬로 들어서니...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온 기분이 다 든다.
멍석을 말아 달아놓은 것으로부터 사랑방, 안방의 모습, 부엌, 뒷간, 고방, 농기구류, 탈곡기, 물퍼는 기구류, 풀무간, 장독대, 작살 등 등 선조님들의 삶의 도구들을 다 진열해 놓아 1970년대 이전의 모습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달리 안내요원도 필요없이 회원님들중에 고희(古稀)를 넘기신 노장님들의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가 간다. 7,8년 전에 봉화 청량산에 산행후 안동 민속박물관을 답사한 기억이 나서 비교되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출생의 장면과 사후(死後)의 세계를 잘 묘사 해 놓았었는데... 이 곳에는 다만 그 부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늘날 첨단문화속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까맣게 모르고 있던것 을 선조님들의 민속품을 통해서, 재래식 삶의 도구들이 기초가 되어 오늘날 이토록 발전된 문화의 산물로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드리며... 수로왕릉으로 발길을 옮김니다.
수로왕릉(首露王陵:사적제73호)의 정문을 들어서니 전면에 거대한 홍살문(紅箭門)이 보이고, 더 나아가 납릉정문(納陵正門)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린 삼문(三門)이 능(陵) 출입을 막고 있다.
그 옆으로 숭선전(崇善殿), 안향각(安香閣), 전사청(典祠廳)이 차례로 보이고, 납릉정문이라는 편액 옆에는 물고기 두 마리(雙魚文)가 새겨진 목판(木板)이 좌우로 두개가 걸려 있다.
안내판에는 AD42년 3월3일에 김해 북쪽 구지봉(龜旨峰)에서 서기가 있어 부족장 아홉이 가서 보니, 금궤속에 6개의 큰 알이 있었는데... 며칠뒤 알에서 깨어나온 동자(童子)들중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아 왕으로 삼고, 금(金)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 가장 수출(首出)한 인물이라 수로(首露)라 하였다.
서기42년 금관가야의 왕에 즉위한 수로는 여러 가야를 통솔하여 초기 가야연맹체를 이끌었다. 이로부터 7년후 하늘의 계시에 의해 48년 인도 아유타왕국(阿踰陁王國)에서 건너온 16살의 허황옥 신부를 망산도(望山島)에서 맞아 왕비로 삼아... 모두 아들 열과 딸 둘을 낳았으며, 각 각 157, 158세 까지 살았다고 적고있다.
제사는 2대 거등왕이 즉위한 199년부터 구형왕(仇衡王) 말기까지(532년) 계속되다가 신라에 병합된후 잠시 빠지기도 하였다가, 조선 선조 13년(1580)에 수로왕의 후손인 허엽(영남관찰사)에 의해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그후 인조 25년(1647)에 왕명으로 묘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에는 나라에서 숭선전(崇善殿)을 중수 하였다고 적혀있다.
쌍어문(雙魚文)에 대한 비밀은 어디에도 명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왕조의 옛 도읍으로, 기원전 5세기경에 그나라 왕자였던 ‘라마’ 를 태양의 화신으로 숭배해온 곳이다. 왕릉의 중수기념비에는 태양문이 새겨져 있고, 또 그곳에서는 물고기를 상징(象徵)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새가야사(加耶史:이중재 저)에서는 현재 김수로왕의 비석에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BC, 2578년)가 시조로 새겨져 있다.
소호금천씨는 황제헌원(黃帝軒轅, BC, 2679년)의 아들이다. 고로 가야국은 한국이 아니고 중국대륙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황제는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창의(昌意, BC, 2578년)와 소호금천씨는 형제이며, 창의의 아들이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이고, 그의 아들이 곤(鯀)이다. 곤의 아들이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되는 것이다.
당시 요(堯)임금때 대홍수로 말미암아 치산치수(治山治水)를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곤(鯀)이며, 결국 그는 치산치수에 실패하여 우산(羽山)에서 극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소호금천씨는 상징이 독수리요, 곤(鯀)은 상징이 물고기(神魚)이니... 쌍어문의 비밀에서 김수로왕의 직계조상은 곤(鯀)이라는 것이다.
참형을 당한 곤을 시조로 하지않고 신라시조인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한 것은 신라와 같은 뿌리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책자에는 수로왕의 아버지는 왕망(王莽)이라 하였으나, 이중재 선생은 신라4대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6~78)이라 하신다. (이상. 새가야사 참조)
안내책자를 구입하면서 관계자에게 여쭈어 봐도 이중재 선생의 주장이 맞다고 하신다. 기원전 3512년경 복희씨(伏羲氏)의 출현으로 국가 건국은 더욱 본격화 되었으며, 복희씨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사람으로 강을타고 동으로 이주해온 하백(河伯)의 부족이다.
그후 신농씨(神農氏 BC 3071년), 후예로 황제헌원씨(BC 2679년)가 출현하고, 황제아들 25명중에 소호금천씨(BC 2578년)와 창의씨(BC 2570년경)가 태어나서... 창의씨에서 김수로왕으로 이어지니...
가야사는 중국대륙에서 있었다는것이 이중재 선생의 주장이며,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시대는 물론이요, 고려까지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역사는 일제(日帝)에 의해서 왜곡 축소되었으니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 미련한 후학(後學)도 선생의 주장에 공감하며, 우리역사의 깊은 의미를 새겨 봅니다.
수만평의 대지위에 조성된 김수로왕릉 공원은 김해시민의 휴식처요, 민족의 산 교육장이기도 합니다. 천자만손(千子萬孫)의 길지(吉地)에 모셔진 수로왕의 후손들은 참으로 복받은 자손들입니다.
잘 정돈된 정원을 따라 후원으로 돌아드니, 수백년의 거목들이 즐비하여 역사와 전통을 느낍니다. 동지섣달의 날씨가 포근하다 못해 더위를 다 느끼니... 곳 곳에 동백꽃이 만발하고, 철쭉과 진달래, 개나리가 피어 반기니 기쁘고도 좋아서 되려 두렵기까지 합니다.
동녘 분산(墳山)의 만장봉(萬丈峰:정상)은
이천년(二千年)의 역사속에 찬란히 빛나고
김해(金海)에 묻힌 가야사(伽倻史)는...
수로왕릉(首露王陵)에서 꽃피는 구나!
아~아~ 억겁(億劫)의 윤회(輪回)속에
동방(東方)의 횃불 되소서... ... ...!
단기 4339년(서기2006년) 12월 24일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630.4M)을 가다.
첫댓글 한권의 역사책을 읽는것 같습니다... 산행후기로 책을 한번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꽁지머리 아저씨 돌아오는 차안에서 춤을 얼마나 예쁘게 추시던지 우리 모두 배꼽 빠지는줄 알았습니다.쫄바지에,쫄배꼽티...회장님도 요~렇게 한번 해보시면.....ㅋㅋㅋ ^*^
샨행에 참여하지않고 안방에서 산어산정상과 김해시가지까지 모두 감상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
구슬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지금 자료를 준비중에 있습니다. 꽁지머리님의 흉내도 한번 연습해 보겠슴니다. 구슬님이 노래하고 춤도 추신다면... 그때~요~
예림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어서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하는데... 힘내십시요!!! 고맙습니다.
고향사진은 다른 답사때 사진을 올렸사오니 이점 양지하옵기를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