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구/ 김개미
하도 오랫동안
함께 자고 이야기하고
비비고 껴안고 지내서
나는 멍구가
진짜로 살아 있는 개 같다
그런데 멍구는 인형이라서
아프지 않고
집을 나가지 않고
말썽을 부리지 않고
죽지 않는다
누군가가 살아있지 않으니까 그런 거야
하고 말하면
몹시 속상할 것 같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몰라도
나에게 멍구는 살아 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가슴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 가슴의 생각을 존중한다
『미지의 아이』 문학동네, 2021 (32~33쪽)
공터가 없어진다/ 김개미
난 어제까지
이 땅 주인이 우리인 줄 알았어
매일 와서 놀아도
아무도 우릴 쫓아내지 않았잖아
집에서 혼나면
여기 와서 몰래 울었어
막대기로 땅바닥을 찔렀어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여기다 묻어 주었잖아
그때 고양이 장례식을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야
머지않아 뚝딱 집이 생기겠지
이 땅의 진짜 주인이 와서 살겠지
그럼 우린 얼쩡거리지 못할 거야
이제 어디 가서
장난으로 싸우고
장난으로 울고
장난으로 죽고 그러냐
포클레인 좀 봐
진짜 힘 좋다
이틀 정도면 충분할 거야
우리 본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미지의 아이』 문학동네, 2021 (34~35쪽)
꿀 떨어지는 소리/ 임복순
공원에서 우진이랑 노는데
왜앵
왜애앵
벌 한 마리가 나만 쫓아왔다.
왜애
왜애애
나만 쫓아오냐고 소릴 질렀더니
우진이가 그랬다.
네가
꿀 떨어지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왜앵
왜애앵
우진이 목소리가 나만 쫓아왔다.
『미지의 아이』 문학동네, 2021 (78~79쪽)
소곤소곤 집 그리기/ 송선미
지금 내가 만약에 집을 그린다면
그리는 만큼 소곤대는 집일 거야
지우개는 필요 없어
아주 조그맣게 소곤대는 집이니까
새를 그리면 하늘이 생기는 집
나무를 그리면 언덕이 생기는 집
담을 그리면 마당이 생기는 집
벽을 그리면 방이 생기는 집
손잡이를 맘대로 달 수 있는 집
방문을 조금만 열어 볼게
난 지금 네가 궁금한 연필이니까
네 방문이 잠겨 있다면
그 방 옆에 내 방을 그려 둘게
지금 네가 만약에 집을 그린다면
그리는 만큼 소곤대는 집일 거야
지우개는 필요 없어
아주 조그많게 속삭이는 집이니까
『미지의 아이』 문학동네, 2021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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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아이』 김개미 송선미 임복순 임수현 정유경 시, 히히 그림 / 문학동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