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학동(雲鶴洞) 라씨(羅氏) 가문 이야기
여기서 잠시 운학동 라씨들 계보(系譜)을 간략하게 밝히는 것이 그 가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관향은 나주며 금양군(錦陽君) 석(碩)의 자손으로 금양군파인데 김제에 세거하며 삼대에 팔효(三代八孝)가 배출되었기로 <김제라씨(金堤羅氏)>라고도 한다. 운학동의 라씨들은 그 여덟 효자의 첫 어른 교리공(校理公) 안세(安世)의 셋째 아들 적순부위공(迪順副尉公) 응정(應井)의 자손들이다.
응정의 손자 신도(伸道)는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절충장군(折衝將軍)이고 그 아들 형(珩)도 정략장군(定略將軍)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란과 병자호란에 각기 전공을 세웠다. 정략장군 형의 8세손 성섭(性燮) 때에 김제로부터 고부 영원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 손자 운계공(雲溪公) 도진(燾珍 :자는 士一)에 이르러 치산치부(治産致富)하여 일약 호남의 대지주 만석꾼 거부가 되었으며 8남 7녀를 두어 손자만도 31명에 이르면서 현달한 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내 장인은 운계공의 제5남으로 학촌공(鶴村公) 팔균(八均)이다.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미술공부를 하였는데 부잣집 아들들이 흔히 그랬듯이 금서(琴書)나 골동품 등을 즐기고 애완하면서 화첩(花妾)을 두고 살다가 6·25 때 반동지주라 하여 정읍 소성면의 좌익들에 의해 공평의 화첩집에서 학살되었다. 그림을 잘 그려 좋은 작품들을 남겼으나 대부분 산실되고 불과 10여 점만이 남아 자녀질들의 집에 전해지고 있는데 1920년대에 유화로 그린 풍만한 여인의 나체화 한점은 내가 소장하고 있다. 장모는 탐진안씨(眈津安氏) 안요숙(安堯淑)인데 정읍 입암(笠岩) 부촌마을의 거부(巨富)로 한말의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인 구헌공(龜軒公) 안동술(安東述)의 큰 딸이다. 운학동으로 시집을 와서 보니 당신 본곁의 부에 미치지 못 하드라고 뒷날 술회하였다.
이 집안의 혼맥(婚脈)을 살펴보면 나를 제외하고는 그 대부분이 이른바 호남의 양반이요 부자라는 집안들과 인맥(姻脈)을 맺고 있었다. 처 백부 운강공(雲岡公) 홍균(鴻均)이 당시 최고의 어른이요 혼주였는데 문필이 출중하였으며 정읍 북면 수금(水金)의 진사 배겸제(裵謙齊)의 사위다. 둘째는 택균(澤均)인데 이때 이미 작고하였으며 고창 사천의 부자 신희범(愼熹範)의 사위요, 셋째 용균(容均)은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이요, 정계의 거물로 담양 차댕이 부자 유병식(柳秉湜)의 사위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는 동서간이다. 넷째 명균(明均)은 동경유학을 한 분으로 한국마사회회장을 역임한 분인데 초취는 김제 금구 한말의 열사 참판(參判) 장태수(張泰秀)의 집안이요, 재취는 한국 개화기 무렵의 초기 여의사의 한 분으로 우리나라 초기 의료계에 공헌을 많이 한 김용희(金龍熙) 여사다. 여섯째 재균(宰均)은 일본에 유학중 신간회(新幹會)에 가담, 활동하다 옥고를 치른 분인데, 좌경적인 인물로 고창 고수면 와촌(瓦村) 광산김문(光山金門)의 부자 김기팔(金箕八) 공이 장인이다. 그 외에 성균(聖均)과 대균(大均)이 있는데 성균은 한약방을 하면서도 공예에 재주가 특출하여 석물조각의 작품을 수 백점 남겼다.
내 큰처남 종관(鍾琯)은 일본에 유학을 했으며 초등학교 교장을 한 분으로 6·25 한국전쟁 때 정읍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9·28의 집단 학살 당시 구사일생으로 화염 속에서 살아나 그로 인하여 심신이 좀 부실하였다. 이후 자유당정권 하에서는 야당의 젊은 정치인 전주의 이철승(李哲承)과 처남남매간이라는 이유로 산중 오지나 섬 학교로만 좌천 핍박이 자심하니 구차하다 하여 사직하여 버렸다. 둘째 처남 종현(鍾玹)도 6·25 때 구속되어 좌익들이 후퇴하면서 고부 금광굴에 몰아넣고 집단 난사하여 학살할 때 시체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이후 술로 살다가 가신 분이고, 막내처남 종민(鍾珉)은 특이하게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내가 이 집으로 장가든 4년 후 급성 패혈증으로 서거할 때까지 이 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일어판 칼 막스의 <哲學의 貧困>이나 월북한 학자 백남운(白南雲)의 일어판 <朝鮮社會經濟史> 등도 이 분이 보던 책이다. 그리고 동서는 전남 나주 영산포의 토반 부호인 경주이씨 이사형(李社炯)인데 내가 장가든 때에는 전라남도 도의원이었으며 3년 후에는 자유당으로 나주에서 출마 제4대 국회의원을 하였으나 4·19혁명 이후로는 정계를 은퇴하였다. 아내는 3남 2녀 중 막내다.
내가 장가를 들 때만 하여도 ‘부자가 망하여도 10년은 간다’고 했듯이 양곡을(주로 벼와 보리지만) 수납하는 공판장과 양조장을 독점하고 있어 그 밑천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고 야당으로 전락하여 권력의 날개가 부러지기는 하였지만 처 중부 한민당의 중진의원인 라용균의 그늘이 커서 이 분의 큰아들 라종구(羅鍾九)는 군정 때 경찰의 최고 책임자
운학동 마을 입구의 라씨들 제각
처 장조부 운계공 라사일의 묘 앞에서(이계만, 나종한, 필자, 홍병표, 정한철)
였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의 비서실장이었고 처 백부 운강공 라홍균의 두 아들 라종렬(羅鍾烈)과 라종대(羅鍾大)가 각기 전라북도 경찰국의 사찰과장과 전라남북도 CIC대장을 오랫동안 하였던 직후여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던 여운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때였다.
이 보다 2~3년 전에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치안국장 김종원(金宗元)의 지휘 아래 경찰 1개 소대가 라종대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여 각종 총기류 27정을 압수하고 라종대를 구속한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어 세간의 화제였었다. 라종대가 수집벽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CIC 대장을 그만 둔 민간인 신분으로 불법적으로 여러 총기류를 27정이나 소지하고 있었다면 그 권세를 짐작할 만하다. 소문에 의하면 군인 기피자나 범법자 등이 운학동에 숨어 있으면 경찰이 감히 마을 안으로 잡으러 오지 못할 정도로 운학동의 라씨들 세도가 대단하였다는 소문이다.
처갓집 이야기가 장황하게 길어졌지만 나와 일생을 같이 할 사람 집안의 내력과 생장사적(生長史的)인 배경, 그리고 문화적인 환경을 이해하는데 다소의 도움이 될 것이요 내 자식들을 위하여서도 모계의 뿌리를 대강은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싶어 내가 들어서 알고 있는 만큼만 적은 것이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 시절의 풍습과 사회상에 공감 됩니다.
아~~~~~~ 아버님 세대는 이렇게 살았구나.
혜성고, 중앙여고...고향의 정감어린 학교명에 잊고 살았던 고향이 그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