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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의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그 본래의 정치가이자 관료로서의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평생 절친한 벗으로 지냈던 한음 이덕형과 함께 많은 재치넘치는 일화를 남겨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래동화의 형태로 각색되거나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아 정치가로서, 특히 청백리로 칭송된 이항복의 본모습을 아는 데에 더 걸림돌이 되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등으로 불렸다.
우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유명한 권율(權慄) 장군의 사위이기도 하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유성룡과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1602년 전란의 공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어 호인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더 많이 불리웠고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오성과 한음]이야기로 어린이들에게 더 친숙한 조선시대 선비이자 정치인이 된다.
이항복은 관료로서는 비교적 출발이 늦은 편이었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동네 장난꾸러기로 유명했다.
한음 이덕형도 이때부터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재치와 유머넘치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보다 못한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꾸지람을 듣고서야 뉘우치고 뒤늦게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또래 친구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도 한참 뒤인 스물 네 살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 정계에 나섰다.
그러나 이항복은 소년시절부터 물욕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자기가 새 옷을 입은 것을 보고 가난한 이웃집 아이가 부러워하자. 그 자리에서 새 옷을 벗어 주었고, 신까지 벗어 남에게 주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한 모습도 있었으니 유명한 권율 장군과의 감나무 일화가 그것이다.
이항복의 집 마당의 감나무가 이웃해 있던 권율 장군의 마당으로 가지를 뻗자 세도 등등했던 그 집 하인들이 허락도 없이 감을 따 갔다.
이에 이항복이 권율이 기거하는 방문에 창호지를 뚫고 ‘이 팔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고 답했다.
다시 이항복이 ‘저 마당의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그것도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며 소년의 재치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다.
이항복 선생 신도비
이항복이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된 계기는 바로 임진왜란이다.
도성의 함락이 목전에 닥치자 선조는 피난길에 오른다.
조정의 대다수 신료들은 자신의 가족을 챙겨 도망치기 바빴고 성난 백성들은 궁중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약탈에 나섰던 험악한 순간 왕과 왕비, 세자를 호위해 궁을 나선 이들은 겨우 십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먹을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황급히 궁을 빠져나왔던 이들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고 끝까지 함께 한 이가 바로 도승지 이항복이었다.
이항복 선생 영당
전란 중 왕의 신임을 얻어 병조판서에 오른 이항복은 친구인 이덕형, 좌의정 유성룡과 힘을 합쳐 민심을 수습하고 탁월한 명나라와의 외교력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이후 이항복은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오성부원군’에 진봉되는 등 ‘전쟁영웅’ 대접을 받지만 그 특유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공직생활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끊임없는 당쟁 속에서도 결코 어느 한 당파에 속하지 않고 소신과 의리를 지켰고 왕 앞에서도 바른 말만 했으니 주위에는 시샘과 모함을 일삼는 정적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왕조차 이항복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도 그를 탄핵하는 이들의 압력에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이항복 선생 묘
결국 광해군 때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집권파인 북인과 광해군의 미움을 사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항복이 귀양길에 오른 당시 철령을 넘으며 읊은 시는 지금까지도 신하의 충정을 담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철령 높은 고개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서도 백성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줄 알았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퇴궐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 이항복의 하인들이 앞에서 ‘물렀거라’를 외치는데 광주리를 인 노파 한사람이 미처 피하질 못해 가로막게 되었다.
이에 하인들이 방망이를 휘둘러 노파의 광주리를 엎으며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하며 호통을 쳤다.
잠자코 있던 이항복은 집으로 돌아와 하인들을 호되게 야단쳤다.
“너희가 한가지라도 잘못하면 곧 내 잘못이 된다. 백성이 억울함이 있으면 그 원망이 누구에게 돌아오겠느냐, 곧 정승인 내가 아니겠느냐?”
이 때 봉변을 당했던 노파가 이항복의 집에까지 따라와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마빼기 하얀 늙은 놈아”
이항복은 급히 하인들에게 피해 있으라 하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종놈들을 시켜 여인네 머리에 인 광주리를 내려치는 법이 있다더냐? 그러고도 네가 이 나라 정승이냐? 백성들을 더 살릴 궁리는 안하고 깔아뭉개고 위세를 부리는 것이 정승이냐?”
이항복이 한참을 듣고만 있자 마침 집에 와 있던 손님이 왜 가만히 계시냐고 항의를 했다.
이항복은 “내 잘못으로 저리 하는데 어찌 내입으로 그만 두라고 할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래도 노파의 욕설이 끊이질 않자 결국 이항복은 자리를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직 복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지. 아직도 욕 얻어먹을 복이 남아 있으니”
이항복은 그 지위와 권력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으나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도 누구보다 앞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던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권력자들에게는 강직과 소신으로, 백성 앞에서는 겸손과 경청의 미덕을 갖춘 도량이 큰 정치인이었다.
화산서원(경기도 포천시 소재)
☞ 이항복 유적지 찾아보기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에 자리잡은 화산서원은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 창건된 서원이다.(경기도 기념물 제46호) 내부에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화산서원 근처에는 이항복과 부인 안동 권씨를 모신 묘소와 영당, 신도비가 있는데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은 분위기가 생전의 고인의 소박한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이덕형 李德馨 | |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덕형 초상 | |
출생 | 1561년 조선 한성부 성명방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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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13년 (53세) 조선 경기도 광주부 조안면 (現 대한민국 남양주시 조안면) |
필명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
직업 | 문신, 학자, 정치가, 시인 |
학력 | 1580년 문과 급제 |
활동기간 | 1580년 ~ 1613년 |
장르 | 한시, 시조 |
부모 | 이민성(부), 문화 류씨 부인(모) |
친지 | 이산해(장인) 류전(외숙부) 이이첨(10촌 형) |
배우자 | 한산 이씨 부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이덕형(李德馨, 1561년 ~ 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며 1613년 경기도 광주 사저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덕형은 1561년 한성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전)의 누이동생인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두뇌가 영특하여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났고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았다고 한다. [1] 14세 때에 영의정으로 있던 외숙부 유전의 집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외가로 가서 지냈는데,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당시 명망있던 문신 겸 서예가, 학자인 이산해의 둘째 딸이자 이지함의 종손녀인 이씨와 결혼하였다. 뒤에 그는 가문을 따라 남인이 되었고, 장인 이산해와 처남 이경전(李慶全) 등은 북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산해의 사위인 덕에 화를 모면했다. 실록에 의하면 그가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화패(禍敗)를 면할 수 있었다.[2]'고 한다.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1580년(선조 14년) 약관 20세 때 문과 별시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다.[3] 이어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인 율곡 이이에게 발탁되어 홍문관정자(正字)가 되었다. 이때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하고 이덕형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고 한다. 과거 합격 동기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함께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그 뒤 이덕형은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이 되었다. 겐소, 다이라 등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출처 필요].
1591년 8월 그의 처남 이경전이 사가독서에 선발되지 않았으므로 장인 이산해가 크게 노하였는데, 이때 장인 이산해의 부탁을 받고 다시 아뢰게 하여 이경전이 마침내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4]
1592년(선조 25년) 사헌부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실패,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3년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을 수행하였고,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특히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의 아내 한산 이씨는 왜군에 포로로 사로잡혔고, 왜군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다.
1599년(선조 32년) 윤 4월 9일 중국 명나라의 장수 유제독(劉提督) 휘하의 항왜가 독약을 잘 만들자, 이덕형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도감의 초료를 내서 항왜 사야여문(使也汝文) 등에게 주어 항왜를 꾀어내게 하였다. 그런데 그 항왜가 황해도 평산군에 이르러 달아나자 제독이 크게 노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잡게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선전관 이괄을 보내 계략으로 잡아 참수하게 하고 그 머리를 보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투항한 항왜를 죽였다는 이유로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겨우 무마되었다. 1599년 겸문학(兼文學), 그해 12월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며, 1600년 1월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의정이 되고 곧 도원수를 겸하였으며,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종결 후의 군대 정비 및 민심 수습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중의 공신을 책봉할때 호성공신, 선무공신에 모두 추천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1608년 6월 진주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609년 10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명나라에서 임해군의 존재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유로 들어 광해군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그는 스스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설득하고 되돌아왔다. 1611년 8월 좌의정, 1612년 11월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6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대북파의 탄핵에 몰렸으며, 병을 얻어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 그의 일족인 이이첨이 대북의 영수였으나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와 영창대군의 사형을 극력 반대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병을 이유로 의정부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모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13년 10월 사저가 있던 당시의 경기도 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인조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시에 위치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에 있다.
조선 성종 때 정승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가 이덕형의 선조이며, 이인손의 아들 이극균은 이덕형의 5대조가 된다.
당시 광해군 조정의 실력자이자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의 사형을 주장하던 이이첨은 그의 친족으로, 이덕형은 이극균의 5대손이고, 이이첨은 이극돈의 5대손이었다.[5] 이덕형의 5대조 이극균은 이극돈의 동생으로, 이들 형제는 각각 이인손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었다.
광해군의 패륜정치에 항의하다가 경기도 양주목 노원(蘆原:지금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으로 은퇴해 있던 이항복은 이덕형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어려운 일에 처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우정을 지켰으며, 이항복은 무덤 속에 넣는 이덕형의 묘지명(墓誌銘)을 직접 지어 그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하기도 했다.
전임 김수 |
제319대 한성부판윤 1592년 음력 12월 18일 ~ ? |
후임 한준 |
전임 유근 |
제322대 한성부판윤 1593년 음력 4월 25일 ~ ? |
후임 유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