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역사는 기원전후에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 경에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었습니다. <삼국지·삼국사기·일본서기> 등의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보면 약 십이개국 정도의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년 전이었습니다. 100년 먼저 망했던 사실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사실에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간단한 산술도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어 왔습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시대로 인식한다면 600년 동안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갔던 고대 영남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삼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양산·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장수·임실·남원 등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가야사는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들은 독립적인 가야의 여러 나라들의 형성과 발전에 적합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기도 어렵게 하였습니다. 가야는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야(加耶)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입니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은 '가라의 나라'였습니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습니다. <삼국지>는 3세기 경에 경남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야국(狗邪國, 김해)·안야국(安邪國, 함안)·반로국(半路國, 고령)·불사국(不斯國, 창녕)·독로국(瀆盧國, 거제)·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밀양)·고순시국(古淳是國, 창원)·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加耶, 김해)·아나가야(阿那加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친숙합니다만, 고려시대의 일연스님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 지었던 이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은 몰랐을 겁니다.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안야국·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임나(任那)는 <일본서기>에 주로 쓰여 고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고 꾸미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00년)·삼국사기 강수전(7세기)·진경대사비(932년)」와 같이 고구려인과 신라인들도 사용하였습니다. 임나는 '님의 나라(主國)'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김해와 고령은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섭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에서 임나는 가야의 대명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대가야(大加耶)는 고령의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원래의 대가야는 둘이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였고, 5∼6세기에 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습니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야의 역사는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 집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눕니다. 전기 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세력이었습니다. 전기가야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김해(狗邪國)·창원(古淳國·卓淳國)·함안(安邪國)·고성(古 自國)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합천(多羅國)·창녕(不斯國·比斯國)·의령(爾赦國)·거창(居烈國)·남원(己汶國)·하동(多沙國)·사천(史勿國) 등이 가야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전후의 시기에 김해를 비롯한 창원·마산·함안·고성·사천·진주 등의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야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대개는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었습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사가 시작된 것은 낙랑군·대방군(樂浪郡·帶方郡)과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는 3세기경에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교통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는 항로였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문물이 이동하던 경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선진문물 이동로의 관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의 동외동 패총, 울산의 하대고분군 등에서는 이러한 경로로 수입되었던 중국제 문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소국들의 발전에는 중국 군현과의 외교와 교역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은 사천·고성·칠원·마산 등의 가야가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형제관계와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가야 문화권이라도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3·314년에 고구려에게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남해안의 가야에 선진문물의 공급원이 차단되었습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하였습니다. 이러한 1세기간의 역사적 변동은 가야사의 중심이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 후기가야는 가야금 12곡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라국왕 하지(加羅國王荷知)'의 남제(南齊)와의 외교에 대한 해석,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의 확산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 등을 통한 대가야사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5세기 중후엽에 대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시켰습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가야금 12곡명은 연주곡과 무곡 등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만, 최근에 가야금 12곡명은 서부경남의 가야 여러 나라들의 이름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대가야가 정치적 영향을 미쳤던 산물이 가야금 12곡이었습니다. 고령의 대가야왕은 의령의 사이기국(斯二岐國) 사람 우륵(于勒)을 강제 이주시켜 작곡을 시킬 수 있었고, 가야금 12곡에 서부 경남의 가야들을 포함시키는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하였습니다. 대가야왕은 축제의 마당에 가야왕들을 불러모았고,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479년에 대가야왕은 중국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輔國將軍·本國王'에 제수되었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고령)의 사절단이 중국의 양자강에 이르려면 먼저 남해로 나와야 합니다. 고령에서 남해로 나오는 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 있지만, 당시의 낙동강 하류역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가야에서 섬진강 하구(하동)에 도달하려면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 (운봉)의 육로와 남원→곡성→구례→하동의 섬진강을 경유하였을 것입니다. 5세기 후반의 대가야왕은 이러한 지역에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사절단은 중국의 남제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적증거가 서부 경남지역에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이 확산되는 현상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내용입니다. 대가야식 토기와 금동제 위세품등이 서부경남 일대로 확산되는 과정은 경제교역권(5C중엽)→간접지배권(5C후엽)→직접지배권(6C초)의 단계로 나누어 집니다. 고령의 지산동44호분은 중앙의 주인공을 방사식으로 둘러싸듯 이 35개의 돌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무려 100인 이상을 강제로 죽여 순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세기의 대가야는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삼국사기·창녕진흥왕순수비·일본서기>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권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입니다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안라국왕은 함안에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앞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금관가야 구야국 김해
경남 김해시내는 요즘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땅을 파고 헤집느라 정신이 없다. 김해시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14번 국도에서 호계천 복구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면 대성동 야산이 나오고 10여분쯤 더 올라가면 숲이 시작되는 경계선 바로 너머에 올망졸망 모여 진녹색을 발하고 있는 40~50그루의 차(다)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나라에서 지리산 일대를 제외하고는 야생 차나무밭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 차나무밭은 유래가 매우 깊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차밭인지도 모른다. <삼국사기>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차의 종자를 가져와 이를 지리산에 심은 뒤부터 우리나라에서 차가 성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661년에 즉위한 신라 법민왕 때부터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제사를 부활하면서 제사상에 술, 떡 등과 함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곧 가야에서 차를 재배해 음료로 마셨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실제로 김수로왕 당시에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구전설화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가야의 옛 수도인 김해시에서 자라고 있는 야생차밭은 지리산 차보다도 오래된 2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차밭이 된다. 김해의 차는 조선시대 들어 '장군차', 차나무는 '장군수'라는 이름으로 역사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또 조정에 진상하는 찻잔을 이곳 김해에서 구웠다. 1611년에는 왜인들이 동래 부사를 통해 김해의 찻잔 공급을 요청했으며 이렇게 공급된 찻잔에 대해 '긴카이 차완'(김해다완)이라 부르면서 신주 모시듯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가마터도 사라졌고 김해에서 전문으로 차를 재배해 파는 이도 없어 김해차를 맛보기 힘들다. 마치 가야의 역사가 그러하듯 말이다.
가야, 더 정확히 말해서 가야제국연맹은 그 명칭에서부터 여러가지 견해와 학설이 엇갈리지 않는 대목이 드물다. 몇몇 역사책에 단편적인 기록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전하기만 할 뿐 좀 처럼 전체적인 윤곽을 파헤치기가 힘들다. 아울러 전해오는 얘기마다 신화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가야역사의 상당 부분은 따지고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 마치 차 향기를 머금듯 음미해볼 수밖에 없다.
국립 김해 박물관
야생차밭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조금 북향하면 김해시 구산동 230번지에 가야의 개국설화(開國說話)가 깃든 구지봉(龜旨峰) 아래에 자리 잡은 국립 김해 박물관이 나온다. 대지 1만 5천여평, 연건평 2,800평(지상 3층·지하 1층) 규모로 건물 외벽 윗부분을 강판으로 처리해 '철의 왕국 - 가야'의 이미지를 한껏 강조한 게 특징이다. 건물 내부는 2개의 기획전시실과 1·2층으로 연결된 상설전시실 등 3개의 전시실에 가야유물 1,300여점을 전시한다. 박물관 소장유물은 모두 5,000여점으로 가야유물을 관리했던 진주박물관에서 1,000여점을 인수하고, 국립중앙박물관과 전국 대학 박물관에서 대여·인수받았다. 유물전시는 「전시 1실」의 경우 신석기시대∼가야성립기까지, 전기가야시대 중심지였던 금관가야(김해)의 문화전반을 보여주는 철기·토기, 외래계 유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시 2실」에서는 독창적 문화를 형성한 대가야(고령), 고성지역에 터를 이룬 소가야 등 가야로 총칭되는 여러 나라의 다양한 유물이 선보인다. 정원에는 고대인들의 무덤을 옮겨 복원해 놓기도 하였다. 가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관람시간
<3월 ∼ 10월>
관람시간 09:00 - 18:00
입장시간 09:00 - 17:00
<11월 ∼ 2월>
관람시간 09:00 - 17:00
입장시간 09:00 - 16:00
관람권
일반 (25세 - 64세) : 400원
할인 (19세 - 24세) : 200원
18세이하, 65세이상 : 무료
* 토,일,공휴일 1시간 연장
*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교통안내(버스정류장에서 도보로 5분 소요)
경부선 철도 구포역 ▶김해터미널 ▶백조APT : 123, 128, 128-1, 130, 130-1, 309
김해터미널 ▶ 백조APT : 1, 9, 16, 16-1, 20, 20-1, 21, 24
김해터미널 ▶교육청 : 2, 7, 21, 24
김해터미널 ▶박물관 : 4
김해공항 : 공항버스 이용 김해터미널 하차
가야의 창건설화가 깃든 구지봉
박물관 뒤쪽으로 돌아가면 가야의 창건설화를 낳은 구지봉이 나온다. 문헌마다, 시기마다 그 수가 5~12개로 다르게 나타나는 나라들이 모여 연맹을 결성한 것이 바로 가야제국연맹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서기 42년 이곳 구지봉에 낙동강 하류지역의 추장과 백성들이 모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왕을 맞이하는 노래로 '구지가'를 불렀고, 그러자 하늘에서 황금알 여섯 개가 내려와 사람으로 변해 6가야의 왕이 됐다고 적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왕위에 오른 이가 김수로왕으로, 그가 다스린 나라가 바로 이곳 김해를 수도로 삼았던 금관가야(구야국)이다. 구지봉은 원래 거북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구수봉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거북의 머리와 몸뚱이 사이에 해당하는 부분을 깎아 국도를 냈는데, 1993년도에 길 위로 육교 형태의 통행로를 만들어 겨우 거북의 목을 이었다. 구지봉은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뒤덮고 있으며 두개의 수로왕탄강비가 있고, 가락국의 건국신화를 형상화한 석조물이 있는데, 여섯 알은 수로왕과 오가야왕을, 아홉 거북은 수로왕을 맞는 아홉 촌장(九干)을 나타낸다. 석조물 왼편 숲에는 고인돌이 있는데, 덮개돌에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 새겨져 있다. 비와 석조물은 근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고인돌은 수로왕 출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적어도 이천년 이상 김해를 지켜보고 있는 역사의 증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구지봉석은 지름 2.5m 정도의 덮개돌과 5 6 개의 짧은 받침돌로 된 기반식 고인돌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다. 이 고인돌의 피장자와 축조자들은 철기문화인인 수로집단이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토착의 청동기문화인으로서 구간(九干)들이 영도하였으며, 구지봉은 구간사회인들이 굿과 같은 제의(祭儀)를 벌렸던 신성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도로에서 오르는 입구에는 구지가(龜旨歌)를 새긴 비가 있는데, 구간사회인들이 풍요(豊饒)를 기원하던 주술적 노래가 수로왕을 맞이하는 영신(迎神)의 노래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린다는 것은 이러한 토착사회의 신성성을 빌려 가락국의 건국신화를 재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허황후릉과 파사석탑
구지봉에서 국도위의 육교를 건너가면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의 묘가 나온다. 이 능은 느낌이 다르다. 높이 5m, 지름 10m의 거대한 반원형 흙더미가 아무런 장식물 없이 비석만 앞에 세운 채 들어 앉은 모습이 어느 정도 고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한다. 이끼가 돌처럼 굳어버리면서 노랑, 연두, 회색 등의 갖가지 색상을 빚어놓은 비석도 옛맛을 더한다. 뒷면에 빽빽이 새겨진 글씨는 이끼가 굳어져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다. 조선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으며,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시에 도굴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능비와 상석은 인조 25년(1641)에 설치된 것이고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6m 높이 5m 정도로 길을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방형의 돌담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전면에는 낮은 단의 축대가 쌓여 있다. 봉분 앞의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겨져 있다. 능역내에는 내삼문, 숭선제, 외삼문, 홍전문 등의 건물이 있다.
허 왕후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세운지 6년 뒤인 서기 48년 가야에 도착해 김수로왕과 결혼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 허 왕후의 출신지가 어디냐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인도 뉴델리 지방에 서기 20년까지 존재했던 아요디아국에서 직접 왔다", "아요디아가 망한 뒤 중국 쓰촨성에 머물러 있다가 왔다", "허 왕후나 김수로왕이나 모두 중국 전한 제국을 멸망시킨 왕망의 후예들이다" 등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이라 전하는 것이 있는데,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虎溪寺)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호계사는 호계천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호계천은 복개되어 지금의 호계로로 되었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는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데, 이 돌은 실제로 우리 나라에는 없는 파사석이어서 허 왕후가 인도에서 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보랏빛을 띠는 돌의 색채가 특이하며 높이는 1m50cm 가량에 둥근 돌 7개가 나란히 쌓여 있다. 돌이 위로 갈수록 작아지나 위에서 두번째 돌이 밑의 것보다 더 커, 이 돌이 탑의 지붕석임과 아울러 5층 석탑임을 알 수 있다. <본초강목>은 파사석의 특징으로 돌가루를 닭피와 섞으면 피가 엉기지 않고 물처럼 된다고 적고 있는데, 김해 금강병원의 허명철 원장은 이 탑의 가루를 가지고 텔레비전에 나와 실험해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서기 372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기 48년에 허 왕후가 불탑인 파사석탑을 가지고 가야에 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야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학자들이 이를 근거로 우리 나라 불교 최초 전래시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통설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석탑은 우리 나라 최고의, 그것도 본산지 인도에서 온 불교유적이 되는 셈이다. 이 석탑의 영험에 대한 세인들의 믿음은 대단했다. 이런 만큼 이 석탑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이기도 했다. 김해시 호계사에 있던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이 석탑은 안전했으나 절이 폐사되고 허 왕후릉으로 옮긴 뒤에는 돌조각을 떼어 가져가려는 세인의 손길이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아울러 이 탑조각을 싣고 바다에 나가면 풍랑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까지 겹쳐 석탑의 수난을 부채질했다. 마침내 이 석탑은 80년대 중반 이후 몇 년간 김해시 서상동 김수로왕릉의 창고안에 갇히기도 했다. 지금은 허 왕후릉의 내삼문과 외삼문 사이의 비각 안에 놓여 있는데 도난경보장치가 설치돼 있어 비각 안에 손이라도 집어넣으면 바로 경보음이 울리게 돼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 등은 이 탑의 조각이 매우 기이하다고 적고 있으나 그 동안의 파손이 심해 잘 알아보기 힘들어 안타깝다.
수로왕릉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하여 오래 전부터 가락국 시조 수로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김수로왕릉은 고려 문종대까지 잘 보존되었으나 조선초에 들어 황폐해져, 세종 21년(1439)에 능역 30 보를 정화하고, 세종 28년(1446)에는 수로왕비릉과 함께 봉분의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능역을 확대하였다. 선조 13년(1580)에 상석, 석단, 능표 등의 석물을 시설하여 왕릉과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임진왜란 시에 도굴 당하기도 하였으나, 인조 25년(1647)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에 숭선전의 호를 내려 침전을 개축하였으며, 아울러 안향각 신도비각 석수도 설치하였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6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봉분 앞에는 능비, 상석, 장명등, 망주, 석조물 등이 있고, 능역내에는 숭선전, 가락루, 홍전문, 숭화문 등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199년에 158세로 수로왕이 붕어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一丈)의 빈궁(賓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고 전한다. 현존 수로왕릉의 평지라는 입지조건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芝峰類說)>의 도굴기사와 현존의 높은 봉분을 보면, 현 수로왕릉은 대형돌방무덤일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까지 조사된 김해지역의 고분군에서 3 세기 이전에 대형 봉토를 갖는 돌방무덤이 존재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기원 199년에 붕어한 수로왕의 무덤은 현 왕릉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며, 이후 어느 시기에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개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왕릉 앞의 납릉정문(納陵正門) 위에는 신어상(神魚像)이라 불리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있는 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문양이 인도의 야요디야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인도 아유타국의 허왕후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전하는 것과 연결시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봉분(封墳)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주변에 특별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정도이고 능비(陵碑)·상석(床石)·장명등(長明橙)·망주(望柱)가 있으며 왕릉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을 비롯하여 안향각(安香閣)·곡사청(曲祀廳)·제기고(祭器庫)·납릉정문(納陵正門)·숭제(崇祭)·동제(東祭)·서제(西祭)·신도비각(神道碑閣)·문무인석(文武人石)·마양호석(馬羊虎石)·가락루(駕洛樓)·홍살문·공적비·숭화문 등의 부속건물 및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왕릉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수로왕릉으로 인정되어 왔다.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 왕릉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기록과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가락국의 연대나 수로왕 실재 연대를 종합해보면 그 상한은 대개 AD 1세기 중엽에서 3세기 사이가 된다. 이 때는 문화단계로는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 국가발전단계로는 부족연맹체(部族聯盟體) 시기로 고대국가발생 이전의 과도기적 단계이며 본격적인 고총고분(高塚古墳) 이전 단계이다. 김해지방에서 이 단계의 주류를 이루는 분묘는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로 보아서는 토광묘일 가능성이 높으며, 후반기에는 수혈식석실묘(竪穴式石室墓)가 일부 등장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수로왕릉이 처음부터 설치된 것이 확실하다면 그 내용구조는 토광묘 혹은 수혈식석곽묘일 것이다. 지봉유설(之峰類說)에 기록된 왕릉의 도굴기사가 만약 정확한 것이라면 이 왕묘의 내용구조는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이 많다는 점과 무덤 설치 당시에는 해안선이 현재의 왕릉 부근까지 들어와 있거나 아니면 이 일대가 늪지대였을 가능성이 많은데 현재의 왕릉이 낮은 평지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 등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 왕릉내 공원에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2기가 있다. 1기는 상석이 길이 1.9m × 폭 1.75m × 두께 0.52m의 소형 지석묘인데 상석이 비스듬히 한쪽으로 기울어져있으며 그 아래 지석과 석실이 일부 지상에 노출될 지경에 있는 기반식지석묘(碁盤式支石墓)이다. 나머지 1기는 상석이 길이 4.4m × 폭 3.8m × 두께 1.6m이며 지면과 나란히 하고 있으므로 그 아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현재 외형상으로 보아서는 개석식지석묘(蓋石式支石墓)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서상동지석묘와 구지봉지석묘와 연결된 하나의 밀집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비교적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장유화상 사리탑
김해시내에서 1시간 남짓 시외 버스를 타고 장유면으로 가 장유폭포에서 내려 1시간쯤 불모산으로 걸어 올라가면 장유암이 나온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허 왕후를 따라 인도에서 직접 들어 왔다는 불교 남방전래설에 따르면 우리 나라 최초의 사찰이 되는 셈이다. 장유암은 허 왕후와 함께 가야에 온 아유타국의 왕자이자 허 왕후의 동생인 장유화상(본명 허보옥)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 건립한 사찰이라고 한다. 장유암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소실돼 이렇다 할 절집은 없으나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남아 있다. 가야 8대 질지왕(451~492) 때 절이 재건되면서 세워진 탑으로 전하나 현존 석탑은 그 양식상 여말선초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끼가 두껍게 눌러 앉았는데도 정교한 연꽃무늬 등을 볼 수 있으며 탑 바로 옆에 서 있는 높이 20m 이상의 아름드리 전나무 2그루가 탑의 무게를 더한다.
첫댓글 공부 많이 했습니다.
가야는 우리 역사에서 자주 빠지는 부분인 것 같아요. 학생들 역사수업할 때도 삼국에 슬쩍 묻어 몇 줄... 하지만 제대로 알 건 알아야 겠죠? 자료가 너무 자세해서 언제 역사 수업 있을 때 활용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야역사는 그동안 일부러 무시해 왔던게 우리 역사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제 4국으로서 가야역사는 우리 역사에서 지을 수 없는 역사입니다. 관심 가져 주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