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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시조세계 겨울호 작품평
연작의 가능성 그리고 생명 불어넣기
권 혁 모
유우석의 ‘죽지사(竹枝詞)’ 두 번째 시이다. “복숭아 붉은 꽃은 산위에 가득하고 / 촉강(蜀江)의 봄물은 산을 치고 흐르네 / 쉬 시드는 붉은 꽃 임의 마음 같은데 / 끝없이 흐르는 물은 나의 시름이어요.(山桃紅花滿上頭 蜀江春水拍山流 花紅易衰似郞意 水流無限似儂愁)”
중국 당대의 허베이성 뤄양(洛陽) 출신인 그는 당시에 퍼졌던 민요를 개작하여 주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하는 등, 시문을 닦아온 문학자이자 철학자였다.
칠언절구로 쓰여진 죽지사의 기(起)에서 복사꽃 피어나는 봄의 한 시절로 발단이 된다. 승(承)은 그렇게 당찬 봄은 촉강의 계곡물조차 산을 치고 흐른다 하였고, 전(轉)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붉은 꽃은 임의 마음인양 쉬 시들어 버린다 하였다. 그리고 결(結)은 힘찬 봄 계곡물을 끝내 시름으로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좋은 복사꽃 봄 한철 → 촉강을 낀 봄의 당당함 → 임의 마음 닮아 쉬 시드는 꽃 → 임을 향한 끝없는 시름>에 이르기까지 각 구는 평범한 의미의 연결이 아닌 인과(因果)의 관계 그리고 대비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각 구는 독립적이되 상관 관계적이며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정완영 선생은 시조를 “흐름(流)이 있고, 굽이(曲)가 있고, 마디(節)가 있으며 풀림(解)이 있는 우리의 민족시가 문학”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조의 완결 조건을 유우석의 ‘죽지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현대 시조가 자수율과 음보율에만 치중한 것에 대하여 보다 본질적인 시조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반성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한 시조의 모습은 형태론적 시조의 율을 넘어, 장과 장은 물론 전·후구의 구조론적 가치가 단순한 등가적, 병립적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한 수에서 초·중·종장의 등가적(等價的) 의미 열거 수준은 자유시와의 변별력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초부터 가까이 했던 <현대시학>은 빛바랜 세월을 넘어 서재 한 곳에 보물로 남아 있다. 조병화의 <남남>을 비롯한 임성숙의 <여자>, 나태주의 <변방> 의 연재 시가 다음 호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 외에도 구상의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김구용의 <이거(二居)>, 유병근의 <서신집(西神集)> 등의 기라성 같은 이들의 작품이 연재되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문학>과 <현대문학>에선 박두진의 <수석 열전>이 오랫동안 연재되었으니, 어쩌면 연재시의 성패 여부가 그 잡지의 인기를 가름할 수 있었던 때였다.
당시에 누군가 함석집 나의 자취방 문 앞에 두고 간, 조병화의 <남남> 연재시 자필 노트 한 권이 지금 이렇듯 큰 갈림길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하였는지 모른다. 후일 단행본으로 출간 된 시집 <남남>을 비롯하여 <여자>와 <수석 열전>을 구하여 지금껏 비좁은 나의 서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월간 문학잡지의 추억 뒤편에, 당시의 독자 수준에도 못 미칠 부족한 소위 등단 시인(?)의 작품이 출판물 홍수 시대를 부추기고 있는 중이다. 중국 덩샤오핑이 주창한 개혁개방의 상징 ‘흑묘 백묘론(黑猫白猫論)’이 문학인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시점에 와 있다. 이제 수준 미달의 작품까지도 추천이라며 인쇄체만 되면 똑 같은 시인이 되는 그런 아이러니의 현실에 와 있다.
70년대 문학지 연재 시와의 대비 선상에서 이정환의 <피요르드>를 바라본다. 시조도 자유시처럼 활달할 수 있고 때론 무거울 수 있으며, 사유의 공간을 무한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피요르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1
소리치고 소리쳐도 아파하지 않는다
떨어뜨려야 할 것
어찌 저
물줄기뿐이랴
네 속을 갈아엎어서
흩뿌리고 싶은 날.
12
비롯됨과
마침의 일
처음과
나중의 일
모든 것
품에 안고
죄다
열어 보여준
내 목숨
안팎의 경계
피요르드
피요르드.
- 이정환의 <피요르드> 연작 중에서
피오르드는 빙하가 후퇴한 후 그 골짜기가 바닷물에 의해 침식이 일어나서 생긴 좁은 만(灣)이다. 수십, 수백 미터 대빙하의 끝자락이 부서지고 떨어지는 생채기! 이정환은 그 어마어마한 붕괴의 현장에 와서 다함없는 절망을,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자연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려고 한다. 눈앞에 펼쳐진 벽해와 그 앞을 막아선 거대한 빙하의 대치 상황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아파하지 않는 불가항력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싸움의 최전선에서 아직도 부서져야 할 것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앞에 인용은 하지 않았으나 “참 많은 말을 하였네, 저 바람 속 / 참 많은 것을 보았네, 저 햇빛 속 // 눈 감고 / 치솟아 오르는 / 까마귀, 저 울음 속” 라는 다섯째 수의 외연(外延)은 역시 피오르드가 아닌 화자 자신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은 말을 하였고 많은 것을 보았으며, 결국 그 상황은 절벽(절망)의 세상 끝을 향한 까마귀의 처절한 울음 속이었던가?
마지막 12수는, 비롯됨과 마침, 처음과 나중이라는 일련의 인과 관계를 품에 안고 자신의 모든 것 다 보여주려는 그 한 순간이 바로 피오르드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맺는다. 결국 소재이자 제재로 선택된 ‘피오르드’는 단순한 풍정(風情)의 대상물이 아니라, 화자 삶의 시종(始終)을 연결한 기나긴 세월의 대치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살아있음에 대한 신비와 부질없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시간의 단위 중에서 가장 긴 것이 겁(劫)이다. 1겁은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약 15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그 겨자씨 한 알씩 전부를 다 꺼내어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도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을 박옥위는 하늘 엽서로 띄워 보내고 있다.
뒤늦게 건네받은 비엔나 발 그림엽서
답하지 못한 엽선 가벼워도 무거워
해맑은 봄날의 우정, 그건 나비였구나
꽃띠 같은 나비들은 봄강을 건너와서
솔체꽃 숲속에서 길을 잃었던 게지
에돌다 돌아온 나비, 어디로 날아가나.
- 박옥위의 <하늘엽서(부제 보내지 못한 답서)> 중에서
박옥위의 <하늘엽서>는, 비엔나에서 보낸 그림엽서를 받고도 답장을 보내지 못한 벗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리움에서 비롯된다. 지난날 해맑았던 그 우정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였다고 한다. 언제나 가까이에만 있어야 할 우정이지만, 이미 끝나버린 아픔을 스스로 진정시키고 있다.
젊었던 봄날 한때의 나비 한 마리를 솔체꽃 숲속에서 잃어야 했던 우정! 정겨운 편대 속에서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야 하는 시인의 안타까움은 하늘에 닿아 전해지게 될까? 현대라는 복잡한 숲속에서 이만치 해맑은 우정은 박옥위의 “꽃띠 같은 나비들”이라는 추억 영화 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채천수의 ‘똘똘이식당’은 우리네 수수한 삶의 현장이다. 대구의 상징인 직물상가가 밀집된 서문 시장, 필자도 얼마 전 비좁은 시장 통로에 쪼그려 앉아 삼천 원짜리 비빔밥 한 그릇 맛있게 먹었던 곳 아닌가? 나물 종류도 보리밥도 많이 담아 참기름까지 듬뿍 넣어 주던 초저녁 시장 풍경이 아직도 알전구로 걸려 있다.
평생을 데리고 산
서문시장 경기하며
저마다 짊어지고 온 해거름 그 허기를
훌 섞어 다 받아주는 그런 골목이 있다.
마음도 창고하며 뭘 담고 비울 것인지
동산병원 링거액 같은
술병을 앞에 놓고
너와 나 치료해보라는 그런 골목이 있다.
- 채천수의 <똘똘이식당> 전문
언제나 서문시장의 경기가 맨 먼저 보이는 똘똘이식당 골목은 해거름 무렵의 허기조차도 다 받아준다고 하였다. 사람 사는 마을에서 허기를 해결해 주는 것보다 더 고마운 것이 어디 있을까? 시장 골목은 그런 허기는 물론 지친 삶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곳이었다.
이어 화자의 시선은 식당 안으로 향한다. 밖은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는데, 식당에 앉은 자신은 마음의 창고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길 건너편 동산병원에서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생명의 링거액을 투입하듯, 자신은 링거액 같은 술병으로 삶의 매듭을 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서문시장 똘똘이식당 골목길은 희비를 품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거기에서 화자는 술병을 앞에 두고 마음의 창고를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당 선생으로 하여 유명해진 ‘선운사’의 <선운사 동구>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 막걸릿집 여자의 / 육자배기 가락에 /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선운사 미륵불의 배꼽에는 신비스럽게도 어떤 ‘비결’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이면 한양은 망하게 되고 새 세상이 열린다 하였다. 또한 그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숨겨져 있는데, 누구나 이 비결을 꺼내려하면 벼락이 떨어져 죽게 된다고 한다. 강현덕은 동백꽃 선운사에 와서 부처님 배꼽바위에 마음을 흘려 놓고 있다.
꽃무릇 아침공양 오늘도 좋으셨나 봐요
돌 속에 오래 살아 돌이 되신 부처님
아직도 붉은 포만이 얼굴에 남아있네요
부처님 배꼽 속엔 아직 그게 있나요
그것 지키려고 거기에만 계신다는데
무엇을 지킨다는 게 그리 단단한 건가요
오늘은 제 배꼽이 자꾸 간지러워요
꽃무릇 씨방 같은 게 제 안에서 터졌나 봐요
이제야 지킬 일 하나 제게도 생기나 봐요
- 강현덕의 <선운사 부처님 배꼽> 전문
강현덕의 <선운사 부처님 배꼽>은 결국 자신이 간직한 비결을 지키기 위함이다. 부처님 배꼽 속의 비결을 지키기 위해 돌이 되신 부처님! 중생들은 그 온화하신 모습을 만나기 위하여 여기 찾아오게 된 것이다. 꽃무릇 아침 공양을 마친 부처님 앞에서 누군들 기분 좋지 않은 이 있을까? 비결을 지키기 위해 돌 속에 얼마나 살았으면 부처가 되어 있을까? 시인의 만감어린 생각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비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던 갑오년의 농민들에게 이 배꼽 부처는 구원의 메시아로 떠올랐던 것이다. 부패한 세상을 뒤엎고 밝은 세상을 염원했던 그들에게는 꿈과 구원의 존재가 바로 배꼽이었을 때가 있었지 않았나?
부처님의 배꼽은 바로 화자 자신에게도 있었다. 자꾸 간지러웠고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이제 자신도 또 하나의 비결을 얻어 지켜야 할 일, 여자의 길, 혹은 벼락살까지도 함께 받아들일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상야의 <소나기>에서 아기에게 젖 먹여놓고 떠나는 농촌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떤 사물에 생명 현상을 불어 넣는 활유법은 시를 읽는 재미 요소를 더하게 한다. 단지 정물(靜物)인 사물에 생명 현상을 이입하여 역동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상야는 활유를 넘어 거기에 인격적 요소까지 담아내고 있다.
허겁지겁 달려와
흠뻑 젖 먹여 놓고
가슴 여밀 시간도 없이
뒷정리도 다 못하고
또 간다.
머리에 함지박이고
새참 나갈 시간이다.
- 이상야의 <소나기> 전문
소나기는 지나가는 비이다. 부족함도 과함도 없는 단비! 이상야는 “허겁지겁 달려와 / 흠뻑 젖 먹여 놓고” 떠나는 비로 의인화하였다. 포만감에 이르도록 젖을 먹이고 “가슴 여밀 시간도 없이 / 뒷정리도 다 못하고” 떠난다며 농촌의 분주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젖을 먹인 후, 무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들녘을 향하는 지어미의 모습을 소나기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아이에겐 그렇게 자애롭고, 힘들게 일하는 지아비를 위해 함지박을 이고 가는, 그리고 가슴조차 제대로 여밀 시간이 없는 여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또 어디 있을까? 소나기를 새롭게 쓰는 에스프리(esprit)가 돋보인다.
김연미의 <나리꽃 처용가> 역시 앞의 작품과 같이 활유법을 차용한다. 깊은 산속 나리꽃에서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은 8구체 향가인 처용가를 떠올리고 있다.
역신(疫神)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고 있는 불륜의 현장 앞에서도, 처용은 오히려〈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이윽고 처용에게 감복한 역신은 처용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아도 문 안으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던 것이다.
억울해요.
결백해요.속을 뒤집어 보일까요
벌건 대낮
부끄럼 없이
치마 걷은 저 여인
다리가
여섯이구나
딴 살림을
차렸어.
조신하게 두 손 모아
고개 숙였던 그 속내
들통 난 오점들을
정수리까지 뒤집다가
한여름
따가운 눈총에
나리꽃 지고 있다.
-김연미의 <나리꽃 처용가> 전문
호젓한 등산길에서 산나리꽃을 발견하면 반가움이 든다. 갈래진 노란 혹은 붉은 꽃잎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정원에 심은 개나리꽃보다 훨씬 작아 아담하여, 마치 여인의 버선처럼 휘어진 곡선이 매력을 더한다.
김연미는 나리꽃을 벌건 대낮에 부끄럼 없이 치마를 걷어 올린 여인으로 재탄생시켰다. 본의 아니게 딴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지만, 애써 억울하다며 속마음을 뒤집어 보여 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저간의 모든 사연이 들통 나게 되었고 드디어 고개 숙이기까지, 한 여름은 이러한 나리꽃의 불륜을 그냥 놓아두지는 않았던 것! 따가운 햇살의 눈총은 드디어 예쁘디예쁜 나리꽃을 지게하고 만다.
나리꽃을 처용의 부인으로 설정하였다면 그를 범한 역신은 누구였을까? 불륜의 관계를 용서하며 오히려 노래를 불러 축하해 주는 처용의 슬기는 결국 남녀의 치정 관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용의 병든 아내를 치유하기 위함 내지는 역신을 몰아내려는 주술적 기능을 담은 내용이라 한다면, 그 현대적 화두를 김연미는 나리꽃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성호 이익 선생은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더욱 단단하게 느껴지며, 앞에 계신 듯하더니 어느새 뒤에 계신다.”라고 하였다. 산골마을의 중학교 교사 김희선은 교단 일기를 통하여 이 시대의 진정한 선생님으로 남아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오늘도 아이들은 몸살을 앓고 있다
꿈꾸기 이전부터 빼곡한 종이 위엔
마음껏 나래 펼쳐볼 여백마저 사라져
해맑은 웃음 속에 가려진 그늘들이
기성의 돛을 따라 무겁게 떠다닐 때
나만은 백지로 남아 너희 겉에 다가가리.
- 김희선의 <교단일기 3> 전문
김희선은 교단일기를 통하여 우리의 교육 현장을 고발하고, 작금의 어려운 교육 여건 속에서 자신은 끝내 올곧은 선생님으로 남아 있고자 한다.
세계사 속에서 우리나라가 이만치 잘 살 수 있게 된 것도 교육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 학부모들의 극진한 자식 사랑은 올바른 교육 쪽이기보다는 입시 위주 쪽일 것이다. 이에 편승한 학교 교육은 본래의 목적인 전인 교육을 벗어나 있으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과도한 학력 향상 요구로 인한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될 때가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해맑은 웃음은 이제 그늘 속에 가려지게 되었고, 아름다운 꿈을 지녀야 할 어린 시절은 기성인들의 모습만 뒤따라가게 되었으니, 시인 선생님이 해 줄 것은 무엇인가? 김희선은 이에 대한 해답으로 언제나 선입견 없이 백지가 되어 학생들에게 다가가려 한다는 것이다.
김희선의 <교단일기 3>은 학생의 입장에서 꿈을 그릴 여백조차 이미 가득 채워진 빼곡한 종이를 발견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백지로 다가가려는 선생님의 간절한 소망을 메시지로 전하고 있다.
차문정의 <조각난 날들의 은유>는 쉬운 언어의 연결이되 쉽지 않은 애매성(ambiguity)이 시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시간이 건반 위를 물결치듯 오가는 동안
만조처럼 차오르는 모카커피 깊은 향
오래된 그리움들로 기다림은 철이 들고.
한 소절 한 음절 불면으로 옮긴 악보
떠난 자가 남긴 곡조가 산 자를 위로한다
무수한 그대를 향해 전율하는 피아노.
- 차문정의 <흑백 이야기> 전문
차문정의 <흑백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지되어지는 그런 시와는 구별되고 있다. <흑백 이야기>에서 보이는 적절한 애매성은 장과 장이 유기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다. 형식적 논리학에서의 애매성은 언어의 불충분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비형식적 논리학인 시에서의 애매성은 오히려 우리 일상 언어의 풍부함을 보여주게 된다.
유택렬 화백이 남긴 진해의 오래된 문화 공간을 ‘흑백’이라 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다양한 가능성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은 셈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포괄성 혹은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차문정의 작품은 읽는 것으로도 시의 맛이 난다.
“시간이 건반 위를 물결치듯 오간다”는 첫수 초장을 비롯하여 “만조처럼 차오르는 모카커피 깊은 향”이라든가, “한 소절 한 음절 불면으로 옮긴 악보”등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새롭게 하에서 이미지의 연결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러한 새롭게 보기의 마지막은 “떠난 자가 남긴 곡조는 산 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차문정의 <흑백 이야기>에 깔린 애매성에 불구하고 읽는 이들은 조각난 날들을 연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흐르는 세월의 창가에서 피아노 소리와 더불어 옷깃을 여미며, 지난날을 추억해 보는 것도 삶의 소중한 과정이 아닐지? 피아노 소리로 잔잔히 다가오고 있다.
<시조세계> 지난 가을호에는 연작의 가능성을 비롯하여 생명 불어넣기의 유의미한 작품들이 많았다. 70년대의 획을 긋는 권위 있는 문학 전문지가 서점에서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던 월간 문학 전문지의 연재시(연작시)가 우리 시조 전문지에 불붙일 가능성은 없을지를 이정환의 <피요르드> 연작에서 되돌아보게 하였다.
또한 저마다의 서정성 있는 빛깔을 지닌 박옥위의 <하늘엽서>, 채천수의 <똘똘이식당>, 강현덕의 <선운사 부처님 배꼽>, 이상야의 <소나기>, 김연미의 <나리꽃 처용가>, 김희선의 <교단일기 3>, 차문정의 <흑백 이야기> 등의 작품은 시조의 품과 격을 견지하게 하였고, 활유법을 통한 생명 이입은 이야기를 더욱 활력 넘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필자에게 한 가지 걱정이 남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글 읽기의 오류와 사고의 오류를 범했던가 하는 점이다. 시에도 가슴이 있다면 못을 박지 않았을지? 선입견 없는 생채기에도 용서를 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