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착잡한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형평운동 지도자였던 강상호 선생의 묘를 후손들이 국립 현충원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진주신문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았지만, 그동안 강상호 선생에 관련된 여러 일들을 전해 듣고 있어 더 마음이 착잡하다.
강상호 선생께서 작년에 뒤늦게 독립 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후손들이 진주시에 묘역을 제공해 달라는 청원을 낸 것도 들었다.
현재 선생이 묻혀있는 묘역이 다른 사람 소유여서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을 갖추었으니 이장을 추진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후손들은 선조가 국립묘지에 묻힌 것을 독립유공자의 징표로 여겨 자랑스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리고 관련 법규에 저촉되는 일이므로 청원을 거부하였다는 진주시의 입장도 이해한다. 당연히 모든 일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터이니. 나는 강상호 선생 묘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오랜 역사의 아픔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내가 강상호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꼭 25년 전이다. 진주에 내려와 경상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고, 형평운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다니면서 강상호 선생을 처음 알았다. 강상호 선생은 형평사를 창립한 선각자였을 뿐만 아니라 형평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일제 침략기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형평운동 내내 백정 차별 철폐와 신분 해방을 위해 일하신 분이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강상호는 누구일까?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당시 진주에 강상호 선생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를 아는 과정은 조각 그림 맞추기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자료를 뒤졌다. 그럴수록 그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주는 정말 훌륭한 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 진주에는 만석지기 지주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인 강재순 님이 강상호 선생의 선친이었다. 강재순 님이 봉양학교(오늘날의 봉래초등학교) 설립자라는 것은 일제가 남긴 교육휘보에 남아 있다.
진주의 여러 사람이 그의 재력을 증언해 주었다. 그는 땅 많은 지주였지만, 후덕하였던 것 같다. 주민들을 위해 덕을 쌓은 그의 부인에 대한 감사의 비가 강상호 선생 묘역 가까이 새벼리에 지금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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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촌 강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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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호 선생에 관한 기록은 꽤 많았다. 중안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 단체 사진이나 진주농업학교 졸업생 명부를 통하여 강상호 선생이 이 학교를 다닌 것을 알았다. 아버지를 이어 봉양학교 운영에 관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3·1운동 주동자로 잡혀 진주에서 열린 1심 재판에 1년 언도를 받았다는 매일신보 기사도 보았다.
정작 대구에서 열린 2심 재판 판결문의 피고인 명단에 그의 이름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재판 내용에 강상호 선생의 행적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1심 판결 이후 상고를 하지 않은 탓이라고 짐작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1심 재판 기록이 6·25 전란 중에 소실되어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 너무나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3·1운동으로 복역하고 나온 강상호 선생은 많은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 민족지로 창간된 동아일보의 초대 진주지국장을 역임하였고, 민족 교육을 위해 경남의 유지들이 주도한 사립고등보통학교 설립 운동(훗날 일신여고, 오늘날의 진주여고로 발전됨)에 참여하였다.
농민들의 처지를 위해 만들어진 진주노동공제회 간부로 활동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려는 일제에 저항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잡혀갔다는 신문 보도도 있다. 무엇보다도 강상호 선생을 우리 역사에 우뚝 서게 만든 것은 형평사 창립과 형평운동의 확산에 기여한 일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가장 차별받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활동한 형평운동은 일제 시대에 전국에서 벌어진 사회개혁운동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창하고 실천한 형평운동은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그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였다. 당시 언론 기사를 보면,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이란 문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진주를 인권 발전의 선진 지역으로 만든 역사적인 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진주에서 강상호 선생이나 형평운동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후손이 잘 되어야 선조가 빛난다”는 속설처럼, 강상호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려줄 후학이나 후손들이 별로 없었다. 후손들은 모두 어렵게 지냈다. 선조로부터 받은 그 많은 재산을 강상호 선생이 형평운동을 한다고 다 없앴던 탓으로 자손들은 남들처럼 편케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심지어 강상호 선생이 누워계신 묘역조차 남에게 넘겨야 했다.
진주의 강상호 선생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형평운동의 위대한 역사를 이해하고 강상호 선생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 표석도 없이 남의 땅에 쓸쓸히 누워계신 선생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해 전에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분이 비석을 세워드린 일도 있다.
나는 형평운동의 역사를 배우러 오는 일본 인권 활동가들이 꼭 강상호 선생 묘역에 들려 그의 생애를 되새기며 예를 갖추는 것을 자주 보았다. 강상호 선생을 세계 인권운동의 선각자로 인식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강상호 선생이 후손들에 의해 진주를 떠나려고 한다. 정말 그래야 하는가? 만약 형평운동의 선각자를 떠나보낸다면 앞으로 진주는 어떻게 형평운동을 자랑스런 역사라고 내세울 수 있을까? 유적을 없애는 역사 도시가 이해될 일인가? 선각자나 위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는 도시가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
진주는 진주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형평운동은 진주정신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유적도 내팽개치고, 선각자도 돌보지 않는다면 진주는 과연 어떤 도시가 될 것인가? 그러면서 진주정신을 주장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강상호 선생께서 진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상호 선생 묘역 이전은 후손들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진주 시민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상호 선생은 엄연히 진주의 공인이고 진주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묘역이다. 지혜를 모으면 묘역을 마련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지로 있는 현재의 묘역을 소유자와 협의하여 구입한 뒤 시민의 공원으로 만드는 방법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현 소유자나 시민을 대표하는 진주시 당국, 강상호 선생의 후손, 그리고 진주정신과 역사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면 좋은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강상호 선생께서 진주에 계속 계시면서 형평운동의 정신을 일깨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중섭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 글은 본지 818호 ‘백촌 강상호 결국 진주 떠나’ 기사를 접한 김중섭 교수(경상대)의 기고문이다. 김중섭 교수는 기고에 앞서 “인권의 선각자이며 진주정신의 표상인 강상호 선생이 고향 땅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결국은 묘지마저도 쓸쓸히 이장을 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진주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