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친정어머니 생신날이었다.
그녀는 들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살면서도 친정집 나들이를 거의 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녀는 외출 준비를 하다가 마침 홈쇼핑에 주문한 간고등어가 생각이 났다. 친정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이 바로 고등어였기 때문이다.
"그래, 간만에 인심 좀 쓰자."
그녀는 큰 고등어를 대여섯 마리 골라 종이가방에 담았다. 친정에 도착해 드렁크에서 가방을 꺼내는데 남편이 물었다.
"이건 뭐야?"
"응, 고등어. 엄마가 워낙 좋아하셔서."
그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우리집 갈 때는 이런 거 한 번도 안 들고 다니던데, 너 참 효녀다?"
그는 남편의 말투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댁에 가서는 내가 밥하고 청소하고 말동무까지 다 도맡아 해주잖아. 물질적으로 못하니까 몸으로라도 때우잖아! 당신이 해야 할 효도를 내가 해주는 거야. 당신은 우리집에 와서 뭐 하나 하는 거 있어? 주는 밥이나 먹고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게 전부 아냐? 그러면서 그깟 고등어 몇 마리 주는 것도 아까워서 너희집, 우리집 따져야겠어?"
남편은 질세라 반격을 했다.
"야! 내가 그깟 고등어 몇 마리가 아까워서 이러는 것 같아? 우리집 갈 때는 늘 빈손으로 가는 게 당연하고, 너희집 갈 때는 가져갈 게 뭐 없나 눈에 불을 켜는 네 모습이 실망스러워서 한마디 한 거야. 그리고 우리 엄마는 너 힘들까봐 김치랑 밑반찬까지 다 해주시잖아. 가끔은 애들도 봐주시고, 너한데 할 만큼 해주시는데 시댁 가서 밥 좀 하는 게 그리 억울하냐? 우리 엄마한테 받을 건 다 받으면서 맘속으로는 장모님밖에 생각 안 하니까 나도 화나서 그런 거 아냐!"
그녀는 머리에서 김이 날 것만 같았다. 마음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말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신에 당신 집은 주말마다 가잖아. 어떻게 매주 가면서 이것저것 싸들고 다녀? 그래, 싸들고 가자 이거야? 매주 싸들고 갈 수 있게 돈이나 벌어 오시지? 우리집은 더 가까운데도 당신이 부담스러워 하니까 자주 못 가잖아. 자주만 가봐, 나도 빈손으로 가지 절대로 이것저것 안 싸들고 다녀. 그리고 김치 해주시는 어머니만 진짜 어머니고 김치 안 해주는 우리 엄마는 엄마도 아니냐? 가끔 아이들 맡아주시는 어머니는 진짜 부모고 일하는라 바빠서 애 한번 봐주지 못하는 우리 엄마는 그저 동네 아줌마에 불과한 거냐고! 내가 어머님한테 뭐 해달라고 한 적 있어? 당신 귀한 아들 입맛 없을까봐 해주는 건데, 우리가 공짜로 받아먹은 것도 아니야. 김치 값, 쌀 값 다 드렸고 그렇게 못했을 때는 선물도 사드렸어. 당신 집에 더 많이 풀면 풀었지 우리 집에 해드린 게 뭐 그리 많다고 난리야? 차라리 우리집에 가기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그녀의 매몰찬 분노는 어느덧 슬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서 소리쳤다.
"당신은 그렇게도 처가에 가기 싫어하는데 나는 반대로 기쁜 마음으로 시댁에 가고 있잖아. 난 뭐 좋아서 헤헤거리면서 가는 줄 알아? 당신 때문에 귀찮아도 참으면서, 어차피 내 일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나도 내 자식이 이렇게 예쁜데, 어머님은 당신 자식이 얼마나 그리우실까 생각하면서 당신 얼굴 보여드리려고 가는 거잖아. 그러면 당신은 우리집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을지언정, 어쩌다 한 번 가는 건데, 내 기분 생각해서 싫은 내색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어? 일 년에 몇 번이나 간다고 갈 때마다 태클 걸어서 왜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냐고! 왜?"
그녀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다음부터는 시댁도 챙길 테니까 이번만 눈감아 달라고 하면서 그냥 넘겨 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결혼 6년 동안 쌓여온 감정들을 한 번쯤은 터뜨리고 싶었던 욕구가 이때 폭발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생신날에 불참했다. 그런 기분으로 가봤자 엄마 마음만 더 아프게 할 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결혼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모든 걸 다 버리고 택한 걸까.'
그녀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던 그 시절의 생각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딸이라는 위치가 참 서글펐다. 그렇다고 어제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헤매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몸살기가 있어서 못 왔다며? 약은 지어서 먹은 거야? 전 서방이 네 몫까지 애쓰다 방금 갔어. 근데 무슨 일 있니? 사람이 달라졌더라. 오늘은 나한테 살갑게 말도 많이 하더니 자주 못 와서 죄송하다고, 앞으로 잘해 드리겠다고도 하면서 내 손을 잡더구나. 용돈도 많이 주고 갔어. 성격이 좀 내성적이라 그렇지, 알고 보면 속이 깊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싸우지 말고 전 서방한테 잘해, 알았지?"
잠시 후, 남편과 아이들이 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엄마 품이 그리운 아기처럼 남편에게 와락 안겼다. 화해를 요구하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그녀는 남편 품에 안겨 생각했다.
'힘든 세상이야. 정말 끔찍하게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쩔 때는 힘에 겨워 모든 걸 다 버리고픈 충동도 느끼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눈물겹도록 행복한 순간이 있으니 그게 사는 맛 아니겠어.'
결혼을 한다는 것은 둘만의 결합이 아닙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부분을 간과했다가 심한 몸살을 앓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과 환경의 결합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단절시켜 사랑하는 사람만을 데려온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을 먼저 챙겨드리세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episode 2
결혼을 하고 함께 살아도 남자는 여자보다 철이 좀 늦게 드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랬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살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싱글의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가 양복 투정을 부렸다. 며칠 후 있을 사촌 여동생의 결혼식에 입고 갈 만한 양복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양복을 잘 입지 않는 직업이다 보니, 결혼 때 장만했던 양복들이 어쩐지 후줄근해 보이기만 했다.
"응, 그래? 그럼 이번 주말에 백화점 가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남편에게 약속했다.
남편은 평소 백화점이나 , 할인점 같은 곳에 따라다니느 것을 싫어했다. 예외가 있다면 자신의 물건을 구입할 때였다. 그날도 앞장서 백화점으로 갔다. 불경기라 신사복 매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직원이 골라주는 양복들을 여러 개 입어보고 맘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녀는 자꾸 가격표를 만지작거렸다. '비싸다'는 무언의 항의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개의치 않았다.
'양복은 아무래도 좋은 것을 사는 것이 낫지'
그녀의 표정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양복을 샀다. 신상품이지만 세일가로 해준다는 직원의 말에 싸게 산 것 같아 흐뭇하기까지 했다. 바지 기장을 줄이는데 3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기에 그들은 백화점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토요일인데 손님은 별로 없고, 세일코너에만 좀 몰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그가 손목을 재빨리 잡아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샌들 끈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 샌들은 그녀가 연애할 때부터 신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 샌들이 제일 편하다며, 여름이면 항상 꺼내 신었는데 줄이 삭아 끊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샌들을 질질 끌면서 다녔지만,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양복을 받아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 산 양복을 다시 한 번 입어보고 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방에 앉아 있는데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거실 밖에 나가보니 그녀가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끊어진 샌들의 끈을 붙이기 위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가죽 때문에 바늘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신발장을 열어보았다. 그곳에 가득 찬 신발은 철마다 샀던 그의 운동화와 구두들이었다.아무리 봐도 그녀가 신을 만한 신발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우 찾아낸 것이 결혼 전부터 신던 구두 정도였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많은 돈을 벌어다 주진 못하지만 남들만큼 해준다고 생각했는데...... , 이 정도면 가정에 충실하고 괜찮은 남자인줄 알았는데...... .'
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가 그 샌들을 매일 신었던 이유는 결코 편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그것밖에는 신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끄러움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쪼그려 앉은 그녀의 뒷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하기보다는 궁색하게 여겨졌다. 남자들은 때로 자신의 무능력과 무관심을 탓하기보다, 오히려 화를 낼 때가 있다. 그도 그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 말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샌들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거 고쳐 신어서 뭐 하려고, 이번 기회에 좋은 샌들 하나 사."
"집에만 있는데, 여름도 다 지나가는데...... ."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그 샌들을 집어들었다.
"야!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 신발 빨리 버려. 버리지 못해!"
그렇게 소리를 질렀지만 마음이 너무 상하였다. 몇 번 입지도 않을 양복을 사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였다.
함께 살면서 그녀에게 그토록 미안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초라한 모습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그녀에게 예쁜 샌들을 사주리라 마음을 먹고 보니 돈이 없었다. 월급을 타다 주고 용돈을 받아 쓸 줄만 알았지, 자신이 따로 모아놓은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하면 뭐 하나, 여전히 철부지인데.'
신용카드라도 긁어서 사줄까 하는 마음에 집을 나섰다. 때마침 길거리에서 신발을 파는 사람이 보였다. 만 원짜리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쨌거나 미안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리본이 달린 하얀 샌들을 샀다. 하지만 검은 비닐봉투에 아무렇게나 담아준 싸구려 신발을 그녀에게 던져주고는 마음이 더 아팠다. 양복 값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괜히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현관 앞에는 그녀의 낡은 샌들이 예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버리기 아까웠는지 끈을 잘라 샌들에서 슬리퍼로 변신시킨 것이었다. 저 슬리퍼, 또 몇 년을 여기서 버티려나. 문득 그 신발이 그녀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새 신발을 신어 보이며 웃는다.
"내 발이 평발이라서 이런 샌들은 잘 안 들어가. 마치 신데렐라 신발을 신는 것 같아."
그는 아내의 발을 조심스레 잡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부부로 산다는 것 (최정미 외 지음)
첫댓글 길지만 우리친구들 끝까지 한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