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있는 널따란 화강암 암반으로, 깊은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이룬다.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였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그런데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이와 관련하여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가 전한다. 가까이에 거창의 대표적인 정자 요수정(樂水亭)과, 구연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 그리고 거북 형상의 돌출된 바위가 잘 남아 있어 경관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거창군이 관리한다.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이 조선 중종 때 은거하면서 구연서원을 건립하고 학문에 능하였으나 숨어 살면서 안빈낙도와 후학 교육에 힘쓴 분의 비석 "산고수장". 수승대 유원지 안에 있는 구연서원은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이 신권(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성팽년(成彭年)과 1808년 신수이(愼守彛)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 이곳에는 신권의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 열녀, 효자비가 많다.
구연서원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년(1740)에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수승대 동쪽에 위치한 구연서원은 요수선생이 중종35년(1540)에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친 곳입니다. 숙종20년(1694)에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어 요수신권·석곡 성팽년·황고 신수이 세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구연서원 남쪽으로는 문루인 관수루가 있습니다.
2005년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된 '거창구연서원관수루'는 영조 16년(1740)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의 안의 현감 조영우가 명명하여 글을 쓰고, 부사 김인순이 건 누액(樓額)이 있다.
신선생장수동
거북이 꽁지와 옆구리 머리에 이리도 상처를 내고 등에는 예술과 자연미적인 감각이 없는 무식한 관리자가 경치석으로 담장까지 쌓아서 소나무를 살렸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이라도 등어리에 있는 경치석 담장을 철거하고 전문가가 자연석으로 잘 조성을 해 거북이가 살아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자연은 다듬는 다고 아름답지 못하다.일본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다듬되 파손하지 않고 멋을 냈지만, 우리의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의 축소판으로 꾸미는 것인데 이렇게 망가터리 놓고 그기에다 니스칠까지 하였으니 이것을 주도한 조경사는 과연 누구일꼬! 이렇게 지시한 관리자는 누구일꼬! 고목을 그대로 두고 천년의 세월을 자연 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야 하는데 이 모습을 볼수록 짜증나고 서툰 이발사가 까치집으로 이발한 것과 다럴바가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할꼬!!!
효자 신성렬 진양강씨지려비의 내부 현판
수승대는 옛날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처음에는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1543년 이황 선생이 거창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같으므로 ‘수승’으로 고친다고 이른 4율시에서 비롯됐다. 바위둘레에는 이황 선생의 옛 글이 새겨져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 하노니/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나의 눈 수승대搜勝臺로 자꾸만 쏠려/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이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이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르며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또 수많은 현인들과 은사들이 찾았던 대라 하여 모현대(慕賢臺)라 불렀다.
거북바위는 수승대의 중요 경관 요소이다.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있는 모습이 마치 거북처럼 보인다고 해서 거북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거북 바위 위에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거북바위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거북이 모양도, 바위 위 소나무도 아닌 바위 둘레에 새겨진 시(詩)때문이란다. 16세기 중반 수승대에 가까운 마을을 잠시 방문한 퇴계 이황이 ‘수송대(愁送臺)’의 명성을 듣고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면서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바꾸자고 시를 만들어 여러 사람들에게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이 장소에 연고를 가진 갈천 임훈이 완곡하게 원래 이름 수송대 그대로가 좋다는 화답시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한 시를 읊은 뒤로부터 '수송대'가 '수승대'로 불렸다고한다. 이처럼 거북바위에는 퇴계이황의 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새겨져있다. 외에도 바위 둘레에는 옛 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 차 있다. 바위 주변을 돌아보면서 새겨진 시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자연을 이렇게 훼손하였으니 그렇게 아름다웠을것 같은 거북이 머리가 성형한것과 같이 망가지고 이름석자를 남기기 위해 거북이 옆구리를 깍아서 죽어버렸으니 생동감이 없고, 등에는 예술과 미적인 감각이 없는 무식한 관리자가 경치석으로 담장까지 쌓아서 소나무를 살렸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으니 지금 이라도 등어리에 있는 경치석 담장을 철거하고 전문가가 자연석으로 잘 조성을 해 거북이가 살아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수승대 앞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과 세필짐(洗筆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류를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바위 한쪽에 오목한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데 이곳에 한 말의 막걸리를 넣었다가 스승에게서 합격을 받으면 막걸리 한 사발씩을 먹었다는 장주갑(藏酒岬)이다.
신성렬 진양강씨지려
효자 증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신성렬 열녀 증 통훈대부사헌부감찰 신성렬 처 증 숙부인 진양강씨 효렬지려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한 효자 신성렬과 강씨 부인의 효렬각이다. 위천면 황산리 769번지 구연서원 서편에 있다. 구연서원 곁으로 정려가 3개소 있는데 제일 위의 것으로 1883년에 세웠고 정려 안에는 비석이 나란히 서있으며 기문은 현판으로 되어있다. 좌측이 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愼性烈之閭(효자 증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신성렬 지려) 오른쪽이(열녀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신성렬처증숙부인진양강씨지려)로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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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 효자 증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신성열처 증 숙부인 진양강씨 효열지려 사람의 아들이 되어서 아들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효이고 아내로서 아내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열이다. 이러한 인륜을 다하기에는 그 하나도 하기 어려운데 한 집에서 효와 열이 나란히 있는 사람은 아마도 처사 신공 부부일 것이다. 고종20년(1883)계미에 어사의 계문을 올려 효자 신공과 열녀 진양강씨의 대문에 정려를 명하고 이어 신공에게는 사헌부 감찰을 강씨에게는 숙부인을 추증하였다. 그 손자 학구가 그 가승과 매산 홍문경공이 지은 묘갈명을 가져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기에 내가 공경스럽게 읽어보니 그 부부의 실적이 빠짐없이 실려 있어 가히 천년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그의 나이 여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미 지극한 애도로 예를 다하였으니 조객들이 기특하게 여겼고 3년 동안 채식만 하면서 또래의 아이들과 장난도 치지 않고 제사 때마다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슬피 울었다. 계모를 섬기되 친어머니 같이 부드러운 얼굴과 정성된 마음이 항상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를 모심에도 공경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문 옆에 자면서 감히 부친을 향해 발을 뻗지 않았다. 기척을 살피느라 밤에 잠을 자는 날이 드물었고 닭이 울면 반드시 일어나 추운지 더운지를 살피고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서도 그렇게 하였으며 음식을 드릴 때도 직접 장만하여 정성을 다하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무릇 학문에 있어서도 성실하여 특히 효도와 공경에 힘쓰고 남는 시간은 소학 한권을 평생의 부적으로 삼고 논어와 가례에도 더욱 힘을 쏟아 책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의리를 탐구하여 투철하고도 자세히 알아내었다. 자식 된 도리로 연로한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일찍이 두 동생을 가르쳐 유림에 드나들며 자기를 위한 학문에 종사하였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지 않았는데 이웃 마을에 천연두가 전염되었을 때 그는 어버이 곁을 떠나기 어렵다고 구차하게 피하지 않다가 마침내 천연두를 앓다가 죽었으니 인근의 아는 사람들이 다 놀라 탄식하며 효성스럽도다. 신공이여! 이제 우리는 누구를 우러러 의지할꼬? 하였다. 강씨 부인은 본래 고요하고 정숙한 행실이 있었다. 이제 남편을 잃은 아픔을 당하게 되자 직접 염습할 도구를 살피며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오직 부지런히 하다가 마음속으로 죽기를 맹세하고 밤을 틈타 방에서 조용히 스스로 목을 찌르니 피가 샘물처럼 솟았다. 온 집안이 놀라 시부모가 울면서 타이르기를 비록 참으로 옳은 일이기는 하나 네 남편이 땅속에서 눈을 못 감을 것이다. 어찌 참아 어린 아이를 두고 그럴 수가 있느냐? 하였다. 강씨 부인은 슬피 탄식하며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이나 죽지 못하는 것 또한 운명이구나. 위로는 시부모가 계시고 아래로는 아이들이 나를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것이 남편의 부탁이라 하고는 억지로 마음을 삼키니 다행히 소생하였다가 마침내 삼년 뒤에 세상을 마쳤으니 아 또한 열렬하도다! 무릇 학문의 길이 몸을 닦는데서 비롯하여 형가에 이르는 것이다. 남편은 어버이께 효도하고 부인은 그 남편을 따라 그 효열 정려가 나란히 우뚝 서서 아름답다 우니 이 어찌 그의 학문이 순수하고 행실이 온전하여 아내까지 감화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가히 백세에 본받을 일이니 어찌 특별히 한 고을만 감탄하고 흠모할 일이겠는가? 삼가 이 글을 써서 돌려보내어 정려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공경하도록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총리 군국사무 원임규장각 제학 시강원사 안동 김병국 지음 통훈대부 행 안의현감 풍산 홍영주 삼가 씀
수령이 400년이 된 이 은행 나무는 기부스를 했으니 살려서 내기 위한 처방이나 보기가 힘들다.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가조의 운해-사진첩에서 복사
거창 시내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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