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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해주(海州).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현종 때에 궁중에서 가장 천하다는 무수리로 입궐하여, 숙종 때 승은을 입고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의 황후 첩지를 받았다. 이후 숙의(淑儀), 귀인(貴人) 등을 거쳐 마침내 그 품계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출신 성분이 천한 무수리라, 본인은 물론 아들인 영조에게까지 큰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다른 역사 서적에서는 그녀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교접비로 궐로 들었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설도 있다.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희빈 장씨(禧嬪 張氏)가 중전일 때는 그녀에게 항상 괴롭힘을 받다가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도 숙빈 최씨는 왕후가 될 수 없었다. 숙종이 장희빈의 일이 재발할까 염려되어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
1694년, 왕자 금(昑)을 낳으니 이가 바로 후일의 영조(英祖)이다. 1718년, 병으로 49세로 졸하여 이후 연잉군(영조)는 이후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인 영빈 김씨(寧嬪金氏)가 양육하였다고 한다. 선원록(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영조의 위 아래로 각각 딸이 한 명씩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왕세제를 거쳐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조선의 제 21대 왕 영조대왕(英祖大王)이다. 그는 즉위 원년,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이것이 후일 육상묘(毓祥廟)를 거쳐 현재의 육상궁(毓祥宮)이 되었다.
숙빈의 묘소 또한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되었으며, 영조가 그녀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니 그 정성이 지극하여 백관이 모두 흐느꼈다고 한다. 또한, 영조가 그녀에게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려 화경숙빈(和敬淑嬪)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후일 여러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올려졌다.
경기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영장리(靈場里)에 위치하고 있는 소령원은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묘소로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원’은 세자와 후궁의 무덤을, ‘묘’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을 봉할 때 쓰는 명칭입니다. 숙빈 최씨는 일개 무수리에서 후궁자리에까지 올라 영조를 낳지만 영조가 즉위하기 5년 전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모셔지지 못하고 ‘묘’ 에 모셔지게 됩니다. 영조는 즉위 후 숙빈 최씨의 미천한 출신배경을 콤플렉스로 여겨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영조29년에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지게 되었죠.
그래서 숙빈 최씨의 묘에는 비석이 세 개가 있습니다. 숙종 44년(1718년) 후궁 숙빈 최씨가 사망 시 ‘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 라고 두 줄 세로로 써서 세운 비석은 영조가 즉위하지 못했을 당시에 세워진 것입니다. 영조가 왕위에 있으면서 친필의 비석 두개를 세우는데 정자각 우측 위쪽에 각각 비각 속에 들어 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세운 것에는 ‘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 쓰여 있는데요.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 신위에 올라가지 못하자 즉위하던 해인 1725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궁정동에 사당을 만들어 숙빈묘(廟)라 하게 됩니다. 1744년 이를 육상묘(毓祥廟)로 개칭한 후, 육상궁으로 승격시키면서 소령묘(墓)도 소령원(園)으로 승격됩니다. 이 육상궁에 1908년 7월 23일 왕과 추존왕의 생모 5명의 신위들을 모아 봉안하면서 육궁이 됐으나 1929년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의 신위를 봉안해 현재 칠궁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영조가 왕이 되고 29년이 지난 1753년에 비석을 하나 만들어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와 같은 내용이 적힌 또 다른 비각을 세웁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에서 시묘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실제 시묘살이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을 시켜 대신 하도록 했을 터이죠. 시묘막은 99칸짜리 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6.25 전란으로 다 타버리고 현재는 깨어진 기왓장과 함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다음은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묻어나는 소령원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사냥을 하고 이산 저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미리 산을 지나가다 초라한 장례로써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하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에게 사연을 물은 즉 원채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 즉 아래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상주를 위해서 영조는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을 보내라는 편지를 써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이 뒤편에 묘소를 다시 잡아주고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습니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가 산을 내려와 선비를 찾아가서 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냐고 묻자 이 선비는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합니다. 이에 영조는 깜짝 놀라며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하고 돌아가면서 명지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 최씨가 서거하자 각지에서 명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였으나 영조는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입니다.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합니다. 영조는 소령원 자리를 잡아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하여 궁궐로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얼마만큼 맞추나 시험하기로 합니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 박사정(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보내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 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가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지 않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도성에 들어와 모화관 부근에서 나무를 팔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영조가 이 나무꾼을 보고 어디서 해온 나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시에 말하던 대로 자랑스럽게 양주(당시에는 양주군에 속했음) 소령릉이 있는 마을에서 해왔다고 대답하자 영조는 이 나무꾼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신들 앞에서 다시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죠. 이때 영조는 대신들에게 백성들은 소령릉이라고 하는데 조정 대신들은 왜 소령원이라 부르냐고 호통을 친 일도 있습니다. 후에는 대신들이 능으로의 승격을 주장했다지만 영조는 궁중의 법도에 맞춰 그대로 원으로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 영조는 나무꾼에게 통훈대부에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능세원(능에서 나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영장리에 김해 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의 8대손 이라고 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의 모친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이런 이야기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 소령원은 원(園)인데도 유일하게 참봉이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령원에서 앞을 보면 안산인 고령산이 눈에 들어오고,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는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입니다. 보광사와 소령원 곳곳에 남아 있는 영조의 흔적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입니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을 아들이 알고 헤아리지 않았을까요?
첫댓글 영조대왕의 효심이 눈물겹습니다 후손들이 마땅히 본 받아야 될 일인데 나부터
효를 다 못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