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초창기의 에피소드
전홍열(全弘烈) 선생은 일본음(日本音)이 '겡고우레쓰(全弘烈)', 체조 시간의 학생 정렬 때에 전후 열(前後列)도 일본음으로 "겡고우레쓰"이다. 어느 날, 갑반 급장(甲班級長) 권동하(權東河)가 체조 시간에 당한 일이다. 시작종을 치고 학생들이 전·후열(前後列)로 모여 서고 급장은 앞에 서서 정열을 시켰다. 전홍열 선생이 교무실에서 나오므로 급장이 "겡고우레쓰" "차려" 호령을 불렀는데, 학생은 전후열(前後列) 차려 자세로 서 있고, 선생이 달려와서 다짜고짜 급장의 뺨을 치고 들고 차며 이르기를, "선생을 모욕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며 노발대발하여 운동장에 한 시간 차려 자세로 벌을 받았다. 시간을 마친 뒤 선생은 급장을 교무실에 불러 놓고 여러 선생 앞에 다시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급장은 하도 어이가 없어 "체조 시간에 전후열(前後列) 차려"의 호령을 부르는 것이 무엇이 죄입니까?"라고 반문하니, 선생 말씀이, "겡고우레스는 나의 이름이 아니냐? 나에게 차려 호령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버릇이냐?"라고 호통을 쳤다. 옆에 있던 정수일(鄭秀日) 선생이 껄껄 웃으면서, "급장의 잘못이 아니라, 선생이 착각을 한 듯하오."라고 전 선생을 조롱하였다. 선생이 낯이 붉어지며, "내일 아침 일찍 선생 숙사(宿舍)로 오라."라고 하고, 황황히 퇴근하였다. 급장이 그 이튿날 일찍 선생을 찾아가니, 선생 말씀이, "어제 일은 일체 불문(不問)에 붙일 터이니, 교무실 이야기는 학생들에게 하지 말라"라고 간곡히 당부하며, 후일에는 학점(學點)을 잘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윤창근(尹昌根) 선생이 역사 시간에 중국 역사 이야기를 하다가, 동양 철학에 언급되었을 때 한광수 군(韓光洙君, 龍門 上金谷洞에서 通學하였고, 卒業 後 龍門面에 勤務하였다)이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철학에 대한 설명을 해 주십시오." 하니, 선생 대답이, "철학이란 것은 대단히 의미가 심장(深長)하여 제군(諸君)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하여도 잘 모를 듯하니, 가까운 예를 들어 설명할 터이니 기억하여 두라. 그 구체적 예는 손바닥을 한 짝으로 공중을 처서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바닥을 맞부딛히면 소리가 난다. 이 신비성을 알아내는 것이 철학이다."라고 하셨다. 한군(韓君)이,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안 나는데, 두 손바닥을 마주 치면 소리가 나는 원리가 철학이니라. 이렇게만 외워두고 차차 공부를 더 많이 하면 저절로 알 때가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청복동에서 다니는 최현주(崔賢柱) 군은 자기 백씨(伯氏)가 사 주는 검은 가죽 구두 한 켤레를 신고 다니었는데, 그것을 진귀하고 소중히 여겨 집에서 나와 한천교(漢川橋)까지는 다른 신을 신고 와서 거기서 구두로 바꾸어 신고 등교를 한 후 하학(下學) 때에는 거기서 다시 다른 신으로 바꾸어 신었다. 학생들은 그 가죽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이 하도 부러워서 돌려가며 한 번씩 신어 보았다.
고등과(高等科)에 다니는 장병억(張秉億) 군은 그 자제가 보통학교(普通學校, 現 醴泉初等學校)에 다녔다. 아침 생천동에서 학교에 올 때에 책보와 도시락을 아들에게 들리고, 본인은 뒤따라오다가 백전동 잣밭고개에서 책보와 도시락을 갈라, 아들은 보통학교로 가고, 본인은 대창학원으로 들어왔다. 오후에는 자제가 아버지 보따리를 가지러 학교에 오기 때문에 학생들은 많이 조롱하였고, 그 외에도 부자 통학하는 학생이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여 "쉬쉬"하며 비밀에 붙이었다.
예천읍 매립 장소에서 공진회(共進會, 小規模 博覽會)를 개최하였는데, 대창학원에서도 학생들의 제품이 많이 출품되었다. 그 중에 용산동에서 다니는 고등과 학생 이춘우(李春雨) 군이 1원짜리 지화(紙貨)를 그렸는데, 그 솜씨가 어떻게 뛰어났는지 보는 관중마다 놀라며 어찌 지화 한 장을 출품하였느냐고 수근거렸다. 그 후 대창학원 학생의 작품임이 드러나자, 대창학원에도 천재가 났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대다수 학생들이 담배를 피웠으므로 휴식 시간에 변소에 몰려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가 변소 지붕 위로 무럭무럭 올라 학교에서는 큰 두통거리가 되어 조회 시간에 여러 차례 훈시를 하였지만 끝내 금지를 시키지 못하였다.
개교 후 얼마 되지 아니하여 학생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이 내렸다. 혼자 이발소에 가서 상투를 끊기가 쑥스러워 2-3인씩 작반(作伴)하여 이발소를 갔는데, 권동하(權東河), 김수희(金守熙), 김원봉(金元鳳) 세 사람이(醴泉邑 龍山洞 2區 한 동내에서 다니었으므로) 같이 후에 대한일보 지국(大韓日報支局) 김기수 씨(金基洙氏, 前 國會議員) 집자리에 있던 이발소에 갔다. 이발사가 웃으면서, "상투 자르러 왔구나"하며 가위로 학생들의 상투를 끊어 3년 동안 달고 다니던 상투가 덩그렁 땅에 떨어졌다. 한편은 기쁘고 속 시원하며, 또 한편은 섭섭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매일 아침마다 상투를 끊어낸 학생이 불어갔는데, 용산동 김원봉(金元鳳)의 부친은 학교에 와서 자기 아들의 얼굴이 달라졌으므로 원봉(元鳳)이를 옆에 두고 "원봉이 왔느냐?"라고 물어서 일장 웃음바다가 터졌다.
학생들에게는 "금광 학생(金鑛學生)"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뒷골목으로 다니는 학생"이라는 멸시도 받았다. 왜 금광학생이냐 하면 학교에서 교복을 제정하였는데, 누런 광목으로 작업복같이 만들어 입었다. 그 맵씨가 흡사 금광에서 일하는 인부의 작업복과 다름이 없고, 또 중국 우동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옷맵시와 비슷하였으므로 이른 별명이었다. 왜 뒷골목 학생이냐 하면 먼 곳에서 통학하는 학생이 읍내에 들어올 때는 뒷골목 뒷골목으로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왜 뒷골목 길로 다녔는가? 날씬한 보통학교 학생과 비교하여 자기의 맵시가 너무나 초라하고, 보통학교 학생들이 "키다리 학생" "어른 학생" 등 놀리어대므로 수치스러워 보통학교 학생을 피하여 다녔던 것이다. "면서기 학교(面書記學校), 순사 학교(巡査學校)"라는 별명도 있었다. 왜냐하면 면서기, 순사 시험에는 거의 합격을 독점하여 졸업생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천군 뿐 아니라, 타군(他郡)에서도 면사무소나 경찰서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스운 이야기 가운데서도 학생들은 전력을 기울여 자기 앞날을 향하여 착실히 공부하고 힘차게 전진하였던 것이다.(權東河, <松臺> 創刊號, 1972, pp.52-55)
6. 야학부 증설
다시 수용에 누락된 자와 주간(晝間)에는 생활에 급급하여 취학치 못한 이들은 야간부(夜學部)를 증설(增設)하여 달라고 진정하였으나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거절하자 또다시 57명이 단결하여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3월 3일에 야학부를 개학하였다. 그러나 이 야학부는 재정상 경영이 매우 어려웠다. 이를 보고 안타깝게 생각한 예천군수 김병태(金秉泰)는 1922년 4월 7일에 예천향교 직원(醴泉鄕校直員, 只今의 典校)에게 청하여 향교 재산 중 50원을 기부케 하기도 하였다.
7. 대창학원생 수학여행
1922년 5월 5일 교원 5명, 학생 182명, 청년회원 25명이 안동군 하회(河回)에 수학여행(修學旅行)을 하고 그 다음날 무사히 돌아왔다. 같은 해 9월 26일에는 학생 300명이 감천면 수락대(水落臺)로 추계(秋季) 수학여행을 하였다.
8. 2부제 증설
개학 이래 입학 지원자 480명 중 교실의 관계로 3학급, 188명만 수용하여 오고 있던 중 1922년 4월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동을 구제하기 위하여 2부제(二部制) 수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보통과 학생 약 120명을 증모(增募)하여 학생 총수는 300명에 이르게 되었다.
9. 5군 연합 정구대회
예천군에서는 주요 물산 품평회(主要物産品評會)를 기회로 예천, 상주, 봉화, 영주, 문경 등 5군을 연합하여 1922년 11월 10일 오전 10시부터 대창학원(大昌學院) 코트에서 정구대회(庭球大會)를 개최하였다. 전 날부터 각 군에서는 선수, 응원단이 몰려왔고, 당일에는 6천의 관중이 물밀듯하였는데, 다섯 차례의 대전(對戰)으로 예천군팀이 승리하였다.
10. 대창학원 후원회 조직
재원(財源)이 풍부치 못하여 여러 가지 비품이 부족하기에 유지들의 발기로 대창학원 후원회(大昌學院後援會)를 조직하고, 1923년 9월 16일에 같은 학원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본회(本會)는 아래의 사업을 행한다.
가. 학생 문고(文庫) 설치
나. 상설 운동 기구의 설치
다. 모범 학생의 표창
라. 기타 교육상 필요 사항
2) 보통회원(普通會員) 및 특별회원(特別會員)으로 조직하여 전자는 학부형으로, 후자는 지방 독지가(篤志家)로 함
3) 월연금(月捐金)은 보통회원은 10전(錢), 특별회원(特別會員)은 50전 이상으로 함.
4) 보통회비는 사업비에, 특별회비는 학원 유지비에 충용함.
임원은 회장 이승교(李承敎), 부회장 안정호(安政鎬), 박원석(朴元錫), 이사(理事) 장규영(張奎永), 이병대(李炳大), 문하영(文夏永), 장기생(張基生), 평의원(評議員) 김동혁(金東赫) 외 14명
11. 일본제대 출신 교사의 초빙
재정의 곤란으로 한때 고등과(高等科)를 중지하고 보통과(普通科)만 계속 중이었으나, 대창학원후원회(大昌學院後援會)가 조직된 후인 1923년 10월 26일에는 고등과를 다시 설립하고 일본제대(日本帝大) 출신인 월강묘삼랑 학사(月岡卯三郞學士)를 초빙하였다. 월강(月岡) 선생은 중산모자에 스틱을 든 거구(巨軀)의 양복신사(洋服紳士)였다. 호탕한 성격에 술을 말로 마시는 실력파, 그러나 소박하고 겸양(謙讓)한 선생의 태도는 촌부자연(村夫子然)한 풍모였다. 소학(小學) 출신의 순사(巡査)도 사벨의 힘을 과시하는 세대에 최고 학부를 나온 선생이 전등 시설도 없는 한촌(寒村)에 와서 사설 강습소(私設講習所)의 교사로 근무하게 된 이유는 일종의 미스테리였다. 고등반 담당에 영어, 수학, 일본어를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