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2024년 겨울편
20241223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유희경(1980~)의 '대화' 중에서
광화문글판의 교체를 통해 계절의 바뀜과 세월의 흐름을 감지하는데, 올겨울은 12월이 한참 지나서 광화문글판을 찾았고, 광화문글판을 음미하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여 한 달이 거의 흐른 시점이다. 올겨울 광화문글판을 통하여 유희경 시인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가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대한민국 시단을 이끌고 있음도 알았다. 그의 시&산문집 <나와 오기 - 유희경의 9월>을 교보문고에서 구입하여 개략적으로 읽어 보았다. 읽었다고 하지만, 그의 시 작품들이 쉽게 잡히지 않아 수박 겉핥기로 살폈을 뿐이다. 광화문글판의 문안을 발췌한 '대화' 작품도 겉핥기였지만, "아직/네가 여기 있는 기분"이 느껴져서 "오늘은 볕이 좋다"는 감각이 실감나게 가슴을 따스하게 물들인다. 오기와의 대화, 나를 마주하는 대화, 진실의 만남과 대화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오기를 우리 주위에서 또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찾고 또 만나야 할 것이다.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을 씻는다/ 그런데도/ 아직 네가 여기 있네/ 책장에 기대서서/ 책을 꺼내 읽고 있네/ 그 책은 안 되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손이 다 젖도록 나는/ 생각해본다/ 그 책은 옛일에서 왔고/ 누가 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옛일일까/ 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다 해서/ 네가 읽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 곤란하게도/ 젖은 내 손이었다/ 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 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 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
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너는 책에 푹 빠져 있고/ 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 어디 있을까 나는/ 체념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희경의 '대화' 전문
*아래에 교보생명 공식 블로그에 실린 글 문안 선정 취지와 시인과의 인터뷰 일부를 옮겨 놓는다.
1.광화문글판 2024년 겨울편 문안 선정 취지 : 추운 겨울을 녹이는 따스한 햇살처럼, 유희경 시인 <대화>
2024 광화문글판 겨울편 문안은 유희경 시인의 <대화>에서 가져왔습니다. 제목과는 달리 독백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대화> 중, 광화문글판 겨울편 문안을 장식한 문장은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햇살을 통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자는 격려를 전하고자 해당 문장이 선정되었는데요. 따뜻한 문장만큼이나 이번 광화문글판 겨울편의 디자인은 환하게 햇빛이 쏟아지는 전철 객실 안의 모습으로 보는 이들에게 온기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추운 겨울 눈을 녹이는 따뜻한 햇살이 느껴지는 같은데요. 여기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는 마치 나를 믿어주고 응원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오르게 해 뭉클함을 안깁니다.
2.광화문글판 2024년 겨울편 문안의 주인공 유희경 시인 인터뷰 - 겨울편 문안인 시 <대화>에 대해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대화>는 저한테 굉장히 집중해서 쓴 시였 습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대화'를 하게 되면 대화가 끝나고 혼자 남겨졌을 때 허전함을 느끼곤 하잖아요. 대화를 하면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내어주니까요. 마치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의 허전함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 기분을 이야기한 시입니다. '너랑 헤어지는데 왜 이렇게 쓸쓸한지 몰라'를 복잡하게 쓴 시예요(웃음). 광화문글판 겨울편에 <대화>의 한 구절이 올라가 있지만, 사실 시 전체를 보아야 해당 문장이 주는 느낌을 더 오롯이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첫댓글 "'네가 두고 간 커핏잔을 씻는다
그런데도
아직 네가 여기에 있네"에
난 밑줄을 그어본다. 까마득한 옛날의 그누군가를 사랑했었던 애절함의 순간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은 거리와 상관 없이
늘 마음 속에 살아있다.
그러면서 삶을 추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