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3호(1934년)에 실린 글 한 토막을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합니다.>
주께서 “네 두루마기를 보라”
금향단
1933년 12월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나는 기도하는 중에 이상하게도 밝은 빛 속으로 눈이 열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남들이 말하는 묵시하고 할지 환상이라고 할지 모르나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나의 영적 경험이었다.
내가 기도하던 방은 사방 일곱 자밖에 되지 아니하였으나 나의 눈앞에 환하게 열린 지경은 아주 넓었다. 바로 그때 그 빛 속에 희고도 빛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면서 즐거워하는 모양을 보았는데 그 주위에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병풍 같은 것으로 세 겹이나 둘러싼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앉아있는 편에서는 들여다 볼 수 있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앉았고 나의 왼편에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앉았는데 그중에는 내가 알 사람도 몇이 있었으나 대개 모를 사람들이었다. 그들이나 나나 할것없이 피차 마주보아 주의할 사이도 없이 앞에 있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춤추고 즐거워하는 그 찬란한 광경에만 정신이 팔려 거기만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마침 이때에 나의 오른편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시었다. 그 얼굴의 인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입으신 옷은 그 앞에 춤추는 자들이 입은 찬란한 옷보다 훨씬 더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나타나신 주께서 내 왼편에 있는 무리들에게로 나아가시더니 그중에 한 사람의 옷을 오른손으로 만지시면서 “이 흰옷 입은 무리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운 웃음을 웃지 말고 각각 너희들이 입은 두루마기가 검고 낡은 것을 보라” 하실 때에 그 만지시던 두루마기는 마치 불에 탄 것과 같이 부스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두루마기가 다 이와 같이 검고 낡은 것을 각각 발견하고는 모두 그 앞에 있는 흰옷 입고 춤추는 사람들의 광경은 볼 생각도 아니하고 낙망의 빛이 제마끔 그 얼굴에 떠올랐다. 이러고 나서는 이 이상한 빛의 광경이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적은 방 한가운데 그냥 앉아 있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의 경험이었으나 그 후에도 잊혀지지 아니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다. 나와 그 많은 사람들은 찬란하게 옷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할 수는 있었으나 제 두루마기가 때 묻고 낡아진 것은 몰랐던 것이다. 하늘사람들이 영광 중에서 즐기고 있는 모양을 넘겨다보고 구경은 하면서 그 생활에 참예할 두루마기는 준비하지 아니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이상한 광경 중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교훈 가운데 두루마기의 뜻을 더 밝히고 알고 싶어 성경을 몇 곳 찾아 삼고하여 보고 싶었던 것이다.
기억이 나는 대로 스가랴 3장을 찾아보니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사실이 기록된 중 “여호수아가 누추한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데 여호와 -- 앞에 뫼신 자에게 일러 가라사대 그 누추한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 내가 네 죄악을 제하여 버렸고 또한 너를 아름다운 옷으로 입히리라”(3.4) 하신 말씀이 있었다. 3장 전부를 자세히 읽어보면 더 밝히 알 것이니 그 누추한 옷은 죄악의 생활을 가리킨 것이다. 죄악의 생활에서 떠나는 날은 곧 누추한 옷을 벗기는 날이다. 흰옷 곧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한 화관을 쓴 후에 천사들 중에 왕래케 하는 때는 주의 도와 율례를 지키는 때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묵시록 3장에 “그 옷을 더럽게 하지 아니한지라 저희가 합당한 자니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오”(4.5),
6장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니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를 기다리라”(9-12 참조),
7장에 “이는 큰 환란 가운에서 온 자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는지라”(9-14 참조),
16장에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일깨어 자기의 옷을 지켜”(15),
마태 22장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아니한 것을 보고 어찌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11-14 참조).
이밖에도 성경에 옷과 두루마기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으나 이상 몇 곳의 것들을 들어 넉넉히 그 속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속사람이 마땅히 입어야 할 신령한 옷과 두루마기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세상 형편에서 가난하여 헤어지고 낡은 옷을 입은 것이야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이 영적 의복을 아름답게 준비하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서 슬피 울고 이를 갈리라”(마 22.13) 하신 무서운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 옷과 두루마기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입는 영체의 피복 곧 영광을 말함이다. 인간 죄악의 누추한 것으로 살아온 것을 어린양의 피(主의 眞理)에 씻어 청결케 하며 낡아지고 삭아져버린 사람의 지혜, 세상의 이론으로 성립된 종교내용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영원하신 사랑과 빛나는 진리로 하늘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옷을 예비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여호와를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을 즐거워함은 저가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며 의의 두루마기로 나를 입히심이 신랑이 화관을 쓰고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음이라”(사 61.10) 하셨고 “그 아내가 은혜를 받아 빛난 …… 입었은즉 이 세마포는 곧 성도의 옳은 행실이로다”(묵 19.8) 하였으니 이 두루마기와 옷은 틀림없이 예수교인의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계명 곧 예수의 진리를 좇아 사는 생활내용을 “성도의 옳은 행실” “구원의 옷, 의의 두루마기”라 하였음이 분명할진대 이는 곧 우리의 종교원리를 대표한 것이오 구원의 원칙을 지칭한 것이다. 이 옷을 입지 않고 하늘에 갈 자 누구냐? 이 큰 진리를 소유하는 생활 없이 구원을 얻을 자 있느냐?
이 진리의 옷을 입어 하늘에 갈 자요
이 종교원리에 살아 예수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