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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만약 이게 과제물이었다면 저는 마감시간이 너무 지난 것이라 제출도 못했을거예요. 부여답사를 가면서 기행문을 써야겠다는 숙제를 저 자신한테 냈었는데 이제서야 숙제를 마쳐서 홀가분합니다.
부여에 남아 떠도는 백제의 흔적
고 동 실
논산에서 부여로 가는 길
2013년 6월 15일 오늘은 부여답사가 있는 날이다. 나는 곡성에서 7시 52분 무궁화호열차를 타고 논산으로 향했다. 열차 안에서 부여에 관한 자료를 읽어보았다. 어제 인터넷을 통해 부여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역시 논산역에서 택시로 이동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논산에서 부여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않다고 하니 큰 걱정은 아니다. 아침 9시 32분 논산역 도착. 나는 서둘러 역사를 빠져나오자마자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기사와 부여와 논산에 대해서 짧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논산은 군사훈련소가 있으니 아들을 둔 부모들이라면 한번쯤은 다 왔다가는 지역이고, 부여는 관광지니 택시를 이용하는 관광객은 주로 일본인들로 서너 명이 짝을 지어 부여에서 논산 익산까지 백제유적지를 둘러보고 간다는 것이다.
얼마간 달리니 도로 한복판에 ‘사비문’이라 적힌 기와지붕을 얹은 구조물이 나온다. 이곳부터 부여이다. 백제의 수도 사비. 금와왕은 길림성 연길에 동부여를 건국하고, 졸본성에선 고구려가 건국된다. 한강 이남으로 내려온 고구려 유민들은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하지만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다. 무녕왕은 백제중흥을 꿈꾸며 다시 천도계획을 세우고 그의 아들 성왕이 드디어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천도(538년)하면서 백제의 중흥시대를 연다. 사비시대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23년간이나 지속된다. 백제의 건국 이래 부여란 지명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용된다.
택시기사에 의하면 논산시는 인구가 13만 명이고 부여는 8만 명쯤 되는데 정부지원의 부족으로 사비터널을 뚫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여는 지금도 땅만 파면 도자기파편 등 유물들이 나와서 개발을 못하고 있다는 등의 현지인의 애로를 줄줄이 풀어 놓는다. 조금 더 달리다보니 왼쪽으로 논과 밭이 있는 등성이가 보이자 저기가 얼마 전에 금동향로가 발견된 곳이라고 한다. 1993년 추운 겨울 논으로 변한 절터에서 발견됐다는 백제금동대향로는 1300여년이나 땅속에 묻혀있었다. 누군가가 급하게 숨겨 놓았는지 목곽수조안에서 발견되었다. 뚜껑과 몸통, 다리 세부분의 문양들은 백제예술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부여시가지로 막 들어오니 중앙로타리에 거대한 성왕이 옥좌에 앉아있는 조형물이 제일먼저 눈에 띤다. 택시는 부소산성 앞을 막 지나쳤다. 구드레 공원 앞과 부소산성 앞이 같은 곳인 줄 알았던 난 당황해서 집결장소를 확인해야했다. 한 시간 전 열차 안에 있을 때 천세진 학우는 이미 부여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구드레 공원 앞이 집결지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버린 게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집결장소가 호암리 천정대입구라고 하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구드레 공원에서 차를 돌려 왔던 시내를 빠져나가서 오른쪽으로 커버를 튼다. 천정대는 아직도 4km나 남았다는 팻말이 눈에 들어온 순간 시간에 늦을까봐 불안해졌다.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길 끝 눈앞에 붉은 색 대형버스가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안심이 되었다. 택시비로 오만 원을 건네자 만 원짜리 한 장과 몇 천 원의 거스름돈을 내 주었다. 다행히 천세진학우도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니 안심이다. 손종흠 교수님과 학우들과 인사 나누고 나니 비로소 오늘 답사가 시작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천정대에 올라
우리는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20여분쯤 올랐을까. 풀들이 뒤엉켜있는 길을 걷는 게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없었던 곳인가 보다. 손교수님은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풀숲을 해치며 앞장서시고, 뒤따르는 우리는 어젯밤까지 마감이었던 과제물들에 대해 힘들었던 경험들을 얘기 나누며 걸었다. 공주처럼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고 온 조현미 학우는 숲의 요정마냥 사뿐사뿐 내딛는 모습이 불안해보이지만 재밌기고 하다.
<천정대에 올라온 손종흠교수님> <천정대에서 바라본 왼쪽풍경> <천정대에서 바라본 오른쪽풍경>
10시 48분. 우리는 천정대(天政臺) 대리석 테이블에 둘러앉아 교수님의 해설을 듣고 있다. 백제왕들이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천정대라는 것이다. 대(臺)라는 것은 자연적인 지형이 평평하면서 높이 되어 있는 곳이다. 천정대는 취령봉 정상에 있는 절벽바위로 호암(虎岩;범바위)으로 고대로부터 신성시하여 영지(靈地)로 여겨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삼국유사』에 호암사(虎岩寺)에는 정사암(政事岩)이란 바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의 재상을 뽑을 때 후보자 서너 명의 명단을 적어 함봉(緘封)해서 이곳 바위에 두었다가 열어보면 도장이 찍힌다고 한다. 그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고 하니 민주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다. 왼쪽 편 멀리 최근에 만든 다리가 보인다. 백마강이 아래로 넓게 펼쳐져 있고 멀리 하늘 끝 산을 둘러앉은 고즈넉한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백마강(白馬江)은 원래 백강(帛江)으로 펼쳐 놓은 비단이 희게 보이는 것처럼 성흥산성에서 보면 햇빛에 반사되어 강이 하얗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송시열에 의해서 백제 무왕과 연관시켜 백마강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손 교수님의 말씀으로는 어떤 택시기사는 ‘20년을 살면서도 천정대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니 그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인가 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산을 내려왔다.
낙화암을 바라보며
다음 행선지는 낙화암(落花岩)이다. 사실 낙화암은 부소산성에 있는 절벽바위인데 낙화암을 잘 보기위해서는 강 건너편에서 보는 게 제격이라고 한다. 강가에 있는 풀밭을 헤치고 펼쳐진 부소산성은 배를 타고 조금만 가면 손에 잡힐 듯이 있었다. 절벽바위 아래 붉은 글씨로 낙화암이라고 적혀 있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멀리 붉은 색이 눈에 얼비친다. 글씨는 조선시대 송시열이 궁녀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꽃에 비유해서 명칭을 붙여 새겨놓았다고 한다. 원래는 타사암(墮死巖)이었던 곳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이름이다. 낙화암 위에 보이는 정자는 ‘백화정(白花亭)’으로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이다.
왼쪽 아래에 숲에 가려진채 고란사가 얼핏 보인다. 고란사는 백제말기에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 헌종이 백제 멸망과 더불어 백마강에 산화한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말도 전한다. 이 절 뒤의 절벽 그늘진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형의 양치식물을 고란초라고 하는데서 절 이름과 연관된다. 백제 임금이 항상 고란사의 약수를 애용했는데 궁녀들은 약수를 뜨면서 고란초 잎사귀를 띄워 가져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고란약수를 마시면 삼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약수를 너무 많이 마셔 갓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란사 아래 선착장이 보인다. 관광객들이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둘러보는 관광 상품으로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면 한번 이용해봄직도 하다. 고란사선착장 바로 왼편으로 섬처럼 조그만 바위가 물위에 떠있다. 그것이 조룡대라고 한다. 만약 조룡대에서 소정방이 백제 무왕의 혼백인 용을 낚지 못하고 역으로 용에게 잡아먹혔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당나라군은 혼비백산하고 자기네 나라로 줄행랑을 놓았을까. 풍랑을 일으켜 국운을 회복시키려던 무왕의 화신인 용이 백마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백척간두에 선 의자왕의 심정을 잊었을까. 용을 낚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발자국이 지금도 바위에 남아있다니 백제의 전설은 흥미로울 수밖에. 고란사의 쇠북소리를 들으려고 10만 명이 모였던 장소에 우리는 서있다.
<하얀색 건물은 선착장이고, 바로 왼쪽에 조룡대가 있고 선착장 뒤 약간 오른쪽에 고란사가 있고, 오른쪽 사진의 황포돛배가 있는 바로 위가 낙화암>
우리가 바라보는 낙화암 건너편에서 부소산성의 오른편에는 반월루가 있고 왼편에는 영일루가 있다고 한다. 이름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샘솟듯 솟아나는 백제의 추억을 추억하는 시간이 즐겁다. 신라의 경주 반월대가 있듯이 이곳 백제는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한 규모라는 것이다. 얼마나 큰 국가였던가. 화려했던 백제문화는 백강을 떠돌며 요요히 흐른다. 넓은 강 물결은 잔잔하다.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천혜의 난공불락을 우리가 점령했다고 감격했던 말이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여기서 다시 만난다. 돌아서는 길은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 있어 사진에 담는 학우들도 보인다. 진보라 빛 꽃창포가 요염하게 피어있기도 하고 갈대들이 서 있는 풀밭 길을 총총히 걸어 나왔다. 버스에서 바라보는 고즈넉한 마을 풍경은 천성 시골이다. 부들은 저들끼리 부들부들 거리다 지쳐 흐무러지듯 엉겨붙어있다. 여행노트에 부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여기가 진짜 자온대(自溫臺)
우리가 탄 버스는 어느새 부여읍내에 성큼 들어섰다. 아침에 택시타고 오면서 눈여겨 봐두었던 성왕동상을 막 지나친다. 두 번 보니 더 반갑다. 부여 사람들에게 백제성왕은 지금도 옥좌에 앉은 임금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나 보다. 다음 나오는 조형물은 백제금동향로이다. 거대한 동상들이 한눈에도 화려했던 백제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어떤지 알듯하다.
버스는 백강이 훤히 보이는 관광단지 안의 주차장에 섰다. 이제 우리가 볼 것은 구드레 바위이다. 100미터쯤 되는 시멘트 길을 걸어가다 손 교수님이 멈춰선 곳, 바로 자온대다. 아무런 표시도 없이 허름한 슬레이트 집 옆에 눈어림으로 2-3m의 길이에 높이가 1m정도밖에 안 되는 바위가 초라하게 웅크린 자세로 놓여있다. 두 갈래의 골목길이 맞닿는 지점 왠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바위에 얽힌 이야기가 기대된다. 부여 관광안내판에는 규암리 금강교 건너편의 넓적한 돌이 자온대라고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 교수님의 말씀으로는 그것은 바로 우암 송시열이 착각한 것이고 거기에 ‘自溫臺’라는 우암의 글씨가 새겨져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제 의자왕이 강 건너 왕흥사로 예불을 드리러 갈 때 잠시 앉아서 쉬던 곳으로 바위가 구들장처럼 저절로 따뜻해져서 붙여진 이름으로 온돌바위라고도 한다. 유신
<자온대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서로 한바탕 웃음으로 더위를 날려 보내고 점심식사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엔 이미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 바로 옆 호텔이 우리들의 숙소라고 한다. 청국장 냄새가 구수하니 좋다. 손 교수님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었는데 이제 여유 있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화제의 절반은 과제물에 관한 중압감일 것이다. 학우들의 갖가지 사연들로 과제마감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겼던 일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공부해야 했던 나도 이번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늘어놓자 학우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난 더 과장하면서 흥미롭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즐거운 점심시간이 지나자 이제 오후답사가 시작된다.
궁남지와 서동요
우리는 서동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렸다. 교수님을 따라 산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텃밭처럼 생긴 곳에 멈췄다. 『삼국유사』기이에 실려 있는 전설로 제30대 무왕(武王;재위600-641)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고 한다.
<서동어머니가 살던 집터와 우물> <서동공원입구> <포룡정과 궁남지>
무왕의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고, 항상 마를 캐다가 파면서 살았다. 교수님의 해설에 의하면 이곳은 궁남지와 왕포천과 백마강으로 물이 흘러들어가므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산사태의 피해를 입거나 홍수로 잠기거나 하지 않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5년 전까지도 오리를 키우는 곳이 주변에 있어서 오리똥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우물에 나무 울타리를 쳐서 관광객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게 해 놓았다. 정도전과 신숙주의 태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유머감각이 넘치시는 교수님이 더 개구쟁이 같은 생각이 들어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궁남지(宮南池)는 궁성의 남쪽에 있는 연못으로 자연적인 늪지에 인공적으로 물을 끌어다가 넓힌 반자연적인 연못이다. 일본 정원의 원조라고 불릴 만큼 유명하다. 백제 무왕 35년(634)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인 것이다. 연못 중앙에 섬을 만들고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련하여 정자 이름을 포룡정(包龍亭)이라 하였다. 포룡정은 지금 호수보다 3배 정도는 더 넓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원유지(苑囿池)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965년 12월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73년에는 정자를 중건하였으며 2005년에 보수하였다고 설명이 되어 있다. 신라의 안압지가 화려한 반면 백제의 연못은 안정되며 깔끔하고 묵직하며 간소한 맛이 있다. 20여년전만해도 원래 보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연꽃 늪지가 삼분의 일로 줄고 분수를 설치하여 서동공원으로 관광지화 되면서 조용하고 잔잔한 호수의 이미지가 달라졌다고 한다. 궁남지를 걷는 길은 기분이 좋다. 연못의 주위 경관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광한루에서 보았던 키 큰 그네가 있어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너른 잎사귀들 안에 숨은 연꽃은 화려하다. 버드나무가지가 못가에 축 늘어져 운치를 더하는 궁남지. 연못 중앙에 있는 포룡정으로 향하는 걸음은 가볍다. 손 교수님은 포룡정 정자 안 현판에 걸린 서동요(薯童謠)의 음독과 훈독을 섞어 썼던 향찰 표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他密只嫁良置古(남몰래 시집가 놓고)
薯童房乙(서동방을)/夜矣卯乙抱遺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손잡고 데이트하던 곳이라는 왕포천을 둘러보고 이곳에 어울릴 것 같진 않지만 관광화의 일원으로 세워진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의 웅장한 기상도 만끽했다. 금방 백제병사들이 무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동상의 규모와 생동감에 놀랐다.
<왕포천> <백제오천결사출정상> <용정리로 바뀐 용전리>
용전(龍田)리와 맹광이 집터
우리는 더위를 즐기며 이번에는 용정리로 향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청마산 용정암’이란 표지판이 서있는 마을 입구이다. 원래는 ‘용전(龍田)’리였다. 지명 전설에 의하면 소정방이 조룡대에서 백마를 이용해서 낚은 의자왕의 화신인 용을 던지니 바로 이 마을에 떨어졌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용이 썩는 냄새가 난다고 그 용의 시체를 마을 사람들이 들어서 던졌는데 떨어진 곳이 계룡산 밑에 있는 ‘구리내’란 마을이고, 그 마을에서 다시 남쪽으로 던졌는데 물이 많은 논실에 떨어졌다. 용은 논실에서 놀다가 그 옆의 ‘사근다리’라는 마을에서 삭은 다음, 사근다리 옆에 있는 거무내에서 검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뒤쪽으로 망월봉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등잔바위라고 해서 백제의 책이나 유물을 숨기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버스에 올라타서 물 한 모금 마시니 더위가 약간은 가시지만 여전히 찌는듯하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백제의 유적에 몰입하는 일이다. 바깥 풍광들도 우리들처럼 더위에 지쳐있는지 시내는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인다. 다음 장소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로터리 밑 사근다리에는 백제에서 가장 유명한 맹광 또는 만광이라고도 하는 점쟁이집터가 있다. 소정방의 협박에 못 이겨 의자왕이 피난처를 알려준 죄로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맞아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분을 못이긴 사람들이 그의 집에 연못을 팠다고 하니 역사의 한은 여기서도 서리서리 맺혀있나 보다. 지금은 세차장으로 되어 있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도로가에 ‘百濟謝恩橋止’라고 새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것마저 세월의 풍파에 얼마나 견뎌낼지 의문이지만 역사의 현장을 찾는 일은 현실 세계 속에서 수수께끼 같은
의열사
우유 빛 밤꽃이 흐드러진 나른한 오후, 유월 하늘은 파랗다. 우리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막에 다다랐다. 거기에 의열사(義烈祠)가 서 있다.
<의열사 앞에서 해설해 주시는 손종흠 교수님> <의열사 앞에서 바라본 전경>
마지막까지 백제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의로운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충신 이존오와 조선의 충신 등 6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이존오는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의 횡포를 탄해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여 장사(長沙) 감무(監務)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 사대부였던 이존오의 시조 한 수를 떠올린다.
구름이 무심(無心) 말이 아도 허랑(虛浪)다
중천(中天)에 이셔 임의(任意)로 이면셔
구타야 광명(光明) 날빗 라 가며 덥니
의열사는 원래는 용정리 망월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1723년(경종3)에 세웠다고 한다. 반면 부소산 삼충사는 최근에 세운 것이다. 사당은 보통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는 제사를 지낼 때에만 열고 사람은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가서 둘러본 다음 나올 때는 반드시 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무덤주변에는 주로 백일홍이라는 배롱나무를 많이 심지만, 사당주변에는 보통 대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올라오면서 가는 대나무가 있는 걸 본 것도 같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아래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청소년수련관이 가운데 턱하니 들어서 있어서 궁남지의 풍광을 내려다보는 시야를 가린다.
백제탑의 시원 정림사지 오층석탑
이제 우리는 다시 버스로 읍내의 동남리로 향했다. 버스를 내려 급수대를 막 지나쳐오면서 한 모금 들이킨 수돗물은 그야말로 입안을 녹이는 꿀이다. 멀리선 바라본 정림사 오층석탑은 은은한 멋을 풍기는 한 폭의 수묵화다. 연당이 앞에 있어 더 운치가 있고 저 너른 뜰에서 뛰어놀았을 백제인들을 그려본다. 훤한 대낮인데도 왠지 모를 쓸쓸함을 자아내는 고풍스런 백제미가 여기 한곳에 온통 응축된 덩어리로 고여 있는 것만 같다.
<연당이 보이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석불좌상>
정림사 오층석탑은 백제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석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가 8.33m로 전체가 소박하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약간 펑퍼짐한 맛도 있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느낌이 든다.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은 목조 건축 구조를 모방한 것이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탑의 시원 양식이 된다. 1층 몸체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공적을 적어놓았다. 글씨의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화강암에 골로 남아 있어 쓸쓸한 백제의 패망을 알리고 있는데, 천년이 지난 지금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잠깐씩 머물렀을 시선들이 얼마나 따가웠을까. 초층탑신(初層塔身)에 새겨진 비문을 줄여서 ‘당평제비’라고 불리기도 했고, ‘소정방비’라고도 불렸다. 능주장사 판병부에 있던 하수량이 글을 짓고 하남사람 권회소가 글씨를 썼다고 한다. 비문의 제목은 전서로 새겨져 있고, 의자왕, 태자 융, 효, 인 및 대신과 장군 88인, 백성 12,807명을 당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정림사의 연당만 아니라면 절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원의 만복사지와 비슷하다. 아마도 정림사의 영향을 받아 만복사가 지어졌을 것이다. 기와 명문을 통해 1028년 고려시대에 정림사가 지어진 것으로 확인된다니 그럴 만도하다.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비로자나불로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으로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에 창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월의 풍파에 마모된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운 듯 바라보는 시선마다 눈길을 머뭇거리게 한다. 마침 안내판에 남원 만복사의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설명이 나와 있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만복사를 다녀온 지 한 달밖에 안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만복사지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한편 반갑다.
성흥산성에 오르다
버스에서 내려 성흥산성을 올라가는 길은 한참을 걸어야 했다.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산길을 버스가 올라가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버스기사는 한참 아래에서 승객들을 부려놓았다. 땀범벅이 되는 길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오르막길을 가다보니 웬걸 꽃사슴 가족이 보인다. 옛날 그 시절에는 골짜기 숲을 헤치며 한가롭게 노닐었을 짐승이건만 시대가 변하니 짐승들도 사는 집도 환경도 저마다 변할 수밖에. 인간위주의 삶 속에 더부살이 하는 꽃사슴 가족. 우리에 갇힌 삶이나마 행복했으면 싶다. 성흥산성은 마치 암벽 타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가파른 바위가 길 가장자리를 꽉 매우고 있다.
안내판에 의하면 여기는 임천면 군사리로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해발 250m의 성흥산 정상부에 돌로 쌓은 석성과 그 아래 흙과 돌로 쌓은 토성이 있다. 석성의 둘레는 1350m이고 높이는 4m라고 한다. 산 정상에서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고 하니 얼른 올라가 봐야겠다. 백제 동성왕 23년(501)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하는데 당시 이곳은 가림군이었으니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에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한 것은 바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성안에는 남·서·북문 터, 군창 터, 우물과 보루 등이 남아 있다.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길은 위험하긴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정상에 오른 우리들은 모두가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도록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는다. 시야를 훤히 비춰주는 하늘 아래 세상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다. 아마도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은 이 맛에 높은 곳으로 오르길 멈추지 않는가보다.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지가 바로 이곳이며 고려시대까지도 군사요충지로 활용되곤 했다는 성흥산성에 우리는 서 있다.
<성흥산성에서 바라본 백강과 부여전경><사랑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유금필 사당>
흑치상지는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노략질을 하자 무장들과 도주해서 백제부흥을 꿈꿨다. 그러자 소정방은 황급히 의자왕과 왕족, 귀족 등 1만 3천여 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하게 된다. 662년 당나라는 부여 융과 장수 유인궤를 보내 백제 부흥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이때 부흥군은 내분이 일어나면서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풍왕이 복신을 제거한다. 당 고종은 사자를 보내 흑지상지를 회유하고 마침내 투항하게 된다. 흑치상지는 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 받고, 664년 웅진 도독이 된 부여 융과 함께 귀국한다. 백제 부흥군의 맹장이 당나라 장수로 돌아온 것에 대해 백제 유민들은 그 심정이 어땠을까. 백제를 부흥시키리라 맘먹고 가슴에 칼을 갈고 있었을 터이었건만 이미 금이 간 거울은 한번 어긋난 그림을 붙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결국 내분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버린 백제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곳은 강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햇빛이 물에 반사되면서 하얀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부여의 백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흥산성. 가을 단풍이 질 때 수증기가 하얗게 피어나는 4시에서 4시 30분경에 보면 백강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고 한다. 400년 된 느티나무가 사랑나무로 불리며 백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랜 세월 한 곳에 붙박여 살아온 나무는 많은 이들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무럭무럭 자랐나 보다. TV사극의 남녀가 만나는 장소가 나오면 거의 여기라고 하니 이곳 풍광이 세간에 많이 알려지긴 했나보다.
우리는 발걸음을 떼어 좀 더 높은 지대로 행했다. 우물도 보인다. 조금 비탈진 곳에 이번에는 고려 초기 장수 유금필의 유적이 있다. 유금필은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지친 다리를 쉴 정자가 보인다. 우리는 모두 정자에 둘러앉았다. 이제 하루해가 저물 것이다. 빛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사라지면 다시 새날이 밝는다. 세상 이치는 늘 밝음을 향하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빛에 가려진 어둠 속에서 백제의 혼은 천삼백 오십여 년을 거슬러 라 우리와 만났다. 아픈 역사 속에서 이야기로 남은 수많은 사실들은 하나같이 감동으로 와 닿는다. 풍광이 풍광인 만큼 정자에 앉아 우리 가락을 감상해 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다. 아리랑을 부르는 손 교수님의 노랫가락에 우린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로 시작하는 정선아라리에서 예천아리랑, 진도아리랑까지 전국을 한 바퀴 돌고, 이제 포항에서 온 오낙률 학우의 시조창까지 감상하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정도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오르막보단 훨씬 가볍다. 마침 버스도 비탈길에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으니 발걸음이 더욱더 경쾌하다. 하루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이제 저녁 식사시간이다. 저녁밥은 찬 걱정 없이 입맛이 절로 살아날 것이다. 여행의 흥분으로 들썩이는 저녁식사는 오리불고기가 아니라도 즐거울 테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다가 이어진다. 무르익던 수다가 천동암 학우의 자작시 낭송으로 차분해졌다. 바로 손 교수님의 강의가 이어졌다. 하루의 답사 일정에 대해 복습을 하고 다음날 일정까지 훑어주시는 열정. 가르침에 대한 열정에서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전이되는 시간은 늘 진지하다. 부여의 백제 멸망과 관련된 유적을 돌아보면 우선 왕궁과 백마강, 다음은 서쪽 중국병사들의 침략경로, 마지막은 탄현과 황산벌에 온 신라군의 침략경로 등으로 요약된다.
오늘 돌아본 백제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한 무왕과 의자왕의 전설, 우암 송시열이 잘못 규정해 놓은 자온대, 목숨을 걸고 탄현과 기벌포를 방어해야 한다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충신 흥수와 성충과 관련된 유적 등을 둘러보았다.
내일은 기벌포로 불린 장암산성과 부소산성 동쪽 거므네에서 의자왕이 소정방에게 잡히고 배에 실려 가면서 서천군까지 백성들이 울며 따라갔다는 유왕산을 보고 황산벌로 가서 계백장군 유적을 둘러보고, 개태사까지 보고 나면 모든 답사일정은 마무리 된다.
그간의 대학원과정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을 주고받다보니 몸이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일찌감치 씻고 요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하루가 짧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즐거운 시간들은 금세 지나가는 법이다. 학우들과 속 얘기를 나누다보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졌다. 뒤풀이에 참석 못한 게 약간 아쉽기도 했다. 여행지에서의 밤은 역시 짧다.
새날이 밝다, 장암을 바라보다
포포유작이해위(抱抱有雀爾奚爲) 참새야 참새야 너 무얼 하니
촉착망라황구아(觸着網羅黃口兒) 어린 네 새끼 그물에 걸렸구나
안공원래재하허(眼孔元來在何許) 눈깔은 어디에 두었길래
가련촉망작아치(可憐觸網雀兒癡) 멍텅구리 참새야 네 모습 가련하다
<기벌포의 장암진성>
귀양살이 하던 두영철이 귀양살이에서 풀려 개성으로 돌아갈 때, 그 곳에서 알게 된 어떤 노인이 그에게 벼슬이란 좋은 것이 못되니 앞으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말라고 충고하였고, 그도 노인의 말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는 뒤에 다시 벼슬길에 나서 평장사 자리에 올랐다가 죄를 얻어 다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귀양길에 노인이 그를 전송하며 이 노래를 지어 꾸짖었다고 한다. 정치에 대한 무상함과 두영철의 어리석음을 표현한 고려가요이다.
교수님에 의하면 굴뚝 뒤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경관은 구름과 물뿐이라는 것이다. 서해안과 남해 쪽으로 들어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초기까지도 중요한 군사적 최적지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여기서 막았어야 하는데 성충과 흥수가 이곳을 지키지 못한 게 한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곳을 역사적 유적지로 활용한다면 어떤 방안이 있을까 궁리해 본 결과 서천군에서 공장을 사들여서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기벌포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우리는 모두 기벌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후망산(後望山) 언덕에 올라 굴뚝 바위산을 바라다보았다. 바위산을 뚫어 굴뚝을 만들거나 터널을 놓아 도로를 만들어 양쪽으로 분할시킨 현대문명은 인간위주의 삶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자연훼손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지역을 개발하고 관광자원화 시키는 것이 굳이 산을 이등분시켜야만 할 것인가. 개발은 무엇을 위한 개발인가.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내내 행정과 역사문화의 보존을 책임 맡은 분들의 마찰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
후망산은 해안을 바라보며 경비하는 산으로 ‘숫망산’으로 앞에 암망매(전망산 또는 굴뚝산)이 있어 암수가 된다. 숫망산 정상에는 조선 세종 때 세운 봉화대가 있었고, 산꼭대기에는 두꺼비바위가 있는데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안내판에 소개된 ‘추 부자와 두꺼비바위 전설’에 따르면 가뭄에 마을 여인이 추 부자 집에 물을 길러 갔다가 거절당하자 그날 저녁 번개와 큰비가 오더니 두꺼비바위가 두 쪽이 났고, 추 부자는 몰락했다고 한다. 인간은 역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하고, 자연재해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교훈을 이런 전설을 통해 드러내는가 보다. 내려오는 길에 까맣게 잘 익은 버찌도 따먹고 풀잎사귀에 앉은 노랑나비랑 볕을 쬐는 달팽이도 보면서 여행의 재미를 한껏 즐겼다.
이제는 원당산이 아니라 유왕산(留王山)
이제 우리는 양화면 유왕산으로 향했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 모들이 송송 거리며 잘도 자라고 있다. 아직은 여린 모지만 이제 여름 장마만 지나면 금세 큰 키로 자랄 것이다. 마침 잘 익은 버찌가 있어 따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흥산에 올랐던 이미 단련된 등산실력들이라 그런지 동네 앞산을 오르듯 가볍게 오르막길을 올랐다. 유왕산에는 ‘百濟流民情恨不忘碑’와 잘 다듬은 대리석 제단이 놓여 있다. 비석의 옆면에는 ‘유왕산탄식(글 김정은, 곡·노래 안창호)’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요즘 뉴스에서 오르내리는 낯익은 이름(동명이인이겠지)이라 카메라에 담아 본다.
<유왕정에 있는 불망비와 유왕산에서 바라본 백강>
한서린 유왕산에 황혼이 지면/ 삼천궁녀 원혼서린 강물이 운다/ 울면서 떠나간 님 차마 못잊어/ 뱃길따라 찾아온 길 유왕산기슭//유왕산 산기슭에 밤새가 울면/ 갓개포구 조각배에 한이 서린다/ 백제의 천년한을 잊을 길없어/ 흐느끼며 돌아보는 유왕산기슭
부여사람들은 지금도 유왕산에 올라 제를 지낸다고 한다. 백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후손들은 백제의 추억을 더듬기 위해 이 유왕산에 오르는가보다. 안내판에 의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머물렀던 산이라고 해서 옛 지명은 남당산이라 하며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 되면 이곳에서 부녀자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으면서 이별의 한을 노래로 읊조리면서 정담을 나눴다는 풍속이 전해 온다고 한다. 그리 높지 않은 낮은 산이지만 유왕정에 오르니 백강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인다. 저 뱃길 따라 포로로 잡혀가는 수많은 백제인들, 백제의 멸망과 가족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당나라를 원망했을 남은 백제 사람들의 한은 지금도 서리서리 백강에 남아 물결이 되어 흐르는가 보다. 손 교수님의 해설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임금을 포로로 잡아가는 당나라를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의미의 ‘원당산’이었는데 중국과의 외교 문제 우려도 있고 해서 얼마 전(유왕정 현판에는 1992년 9월로 나와 있음)에 유왕정이란 정자를 짓고 ‘유왕산’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주보는 산이 망배산이다. 망배산은 관료들이 모여서 멀리 떠나는 임금님께 절을 올렸던 곳이다. 역사의 수수께끼는 이런 설화 속에서 찾을 수 있나보다. 역사는 문자발생 이후에 생겼고, 문자의 기록은 왜곡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는 모순이 숨어 있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은 여색을 즐기며 낭비벽에 어리석고 독단적이고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전설 속의 의자왕은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박탈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면서도 백성들의 존경과 동정심을 한 몸에 받았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권력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호칭부터 달리 부르며 너무나 쉽게 비웃고 도마 위에 올린다. 막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나 듣는 청중들이나 잘잘못을 따지기에 급급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것이다.
소정방이 만약에 의자왕을 김유신한테 넘겨주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그 먼 옛날을 그리며 유왕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이제 점심식사시간이다. 양화에서 먹은 점심은 김치찌개이다. 여행을 가면 그 지역만의 특별한 음식을 먹는 재미도 쏠쏠한데, 글쎄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부여만의 음식은 아직 못 찾은 것 같아 좀 아쉬움이 남는다. 그 지역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의 소박한 식사는 여느 관광지에서 눈요기에 치중한 음식보다는 몇 갑절 지역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잠시나마 양화 사람이 되어 양화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진짜배기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한 눈에 내려다 본 황산벌
이제 우리는 황산벌로 향했다. 버스는 ‘황산대교,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지나친다. 백강을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아마도 그 시절에 세웠나보다. 개발이란 이름 아래에 강이고 산이고 마구 파헤쳐져서 당장은 편리할지 모르나 옛 모습의 정다움은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는 세상이 약간은 씁쓸하다. 여행은 늘 사라진 옛것을 그리워하는데서 시작하는가보다.
어느새 연산면으로 접어든다. 우리는 관동리(官洞里) 노인회관 앞에서 하차했다. 관동리라는 지명은 원래는 ‘관창골’이었다가 ‘관동’으로 바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관동리’로 바뀌었다. 오천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장군이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들을 맞아 싸우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김유신 휘하의 장수 품일의 아들 관창(官昌)은 나이 16세의 화랑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신라군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적진으로 돌격한다. 노장이었던 계백장군은 차마죽이지 못하고 어린 관창을 몇 차례나 돌려보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적으로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판단이 섰을 때는 이미 황산벌은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격전장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네 번이나 백제군이 승리했으나 오만의 나당연합군을 어찌 오천이 막을 수 있겠는가. 역사는 관창의 용맹과 계백장군의 지도자로서의 의리와 품격을 지명전설로 남겨놓았다.
<험한 산길을 오르면서 앵두를 따먹는 재미에 지치는 줄 몰랐던 우리는 드디어 멀리 황산벌을 내려다본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지만 올라갈 때 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오는 길에 앵두를 따먹는 재미가 더위보다 더 시원하다. 우리의 일행 중 두어 사람이 대열에서 이탈해 다른 길로 오는 바람에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여겨 그냥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로 했다. 우리가 이번에 찾은 곳은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계백장군묘소이다. 전란이 끝난 후 백제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한 곳으로 추정하는 이곳은 4,50년 전 묘가 노출되었을 때 철제무기가 나온 적이 있으며, 주위의 산 이름들이 충장산(忠蔣山), 충훈산(忠勳山), 수락산(首落山)이고, 이 일대를 가장(假葬)골이라 한다.
20세기에 와서 상징적으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역사교육의 현장으로는 제격이다. 묘 오른쪽에는 ‘百濟階伯將軍之墓’라고 비석을 세워놓았고, 무덤도 규모가 상당하다. 손 교수님에 의하면 풍수학에서 묘에 뒷산이 없는 것을 ‘후절지’라고 하는데 단종의 묘나 한용운의 묘처럼 이곳도 후절지라고 했다. 국운이 달린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처자식을 죽여 결사대의 굳은 각오와 충정을 드높인 장군의 결단을 후세 사람들은 우러러보는 것이다.
<계백장군묘> <개태사> <철확>
개태사에서 본 철확
우리는 이제 마지막 답사지인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개태사로 향했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고 나라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후백제와의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에 개태사를 창건하도록 하였다.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하게 하며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여 산 이름도 천호산(天護山)이라고 부르고, 사찰 이름도 개태사(開泰寺)라고 불렀다. 이처럼 개태사는 고려의 비보사찰로 역사 속에서 백제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곳으로서의 의미가 깊다. 당나라 오만 군이 황산벌로 진격하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후백제 왕인 견훤의 아들 신검이 왕건에게 항복하고 이에 견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곳에서 등창을 앓다가 쓸쓸하게 죽은 곳이기도 하다.
개태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석불이 있고,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계승해서 복원시킨 오층석탑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지막 답사지에서 감탄을 하며 보았던 거대한 철확도 있다. 이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보물임에 틀림없다. 조선 고종24년(1887) 정해년의 대홍수로 약 2km정도 하류로 떠내려갔고, 일제 강점기에는 총알을 만들려고 가져가려고 가장자리를 망치로 깨다가 천둥 번개 때문에 가져가지 못하고 버려두었던 것을 최근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철확에 대한 흥미로운 전설도 있다. 논산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가서 개태사의 철확을 보았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그만큼 신비롭고 거대한 철확으로 개태사의 전성기를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거대한 솥에서 부글부글 끓었을 된장국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긴 줄을 늘어섰을까. 거기에는 왕족이나 귀족, 호족, 양반도 있었을 테고 일반 백성은 물론, 어쩌면 굶주림에 허덕이던 천민들도 뒤꽁무니에 서서 제 차례가 오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부처님 앞에선 만민이 다 평등했을 것이니 말이다. 단번에 끓여서 여럿이 나눠먹는 풍경을 그려본다.
답사의 마무리는 대전에서
<대형스크린이 설치된 대전의 길거리><구 홍명상가 앞의 목척교에 선 필자><대전역광장>
이제 경기 서울로 위로 올라갈 분들은 올라갔고, 난 옛 추억을 더듬어 잠시 산보하기 시작했다. 번화한 대전의 거리를 인은수 학우의 설명을 들으면서 걸으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여기가 홍명상가죠, 저기는 중앙테파트, 여기는 공원 등등. 이미 내가 기억하는 20년 전 풍경은 이미 사라지고 그곳엔 ‘목척교’라는 거대한 현대식 아치가 설치되어 있다. 골목 길거리 천정을 수놓은 스크린이 상가의 휘황한 불빛들과 어울려 감각적인 현대도시의 풍경을 자아낸다. 작년에 보았던 여수엑스포에서의 대형스크린과 비슷하다. 설치한지 이제 한 달도 채 안된 상태로 시범운영중이라는 말에 대전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상가와 대전역 입구는 이십년 전 그대로 인듯하면서도 막상 혼자 이곳을 찾았다면 많이 헛갈렸을 것이다. 인은수 학우가 버스안내까지 해주어서 나는 택시가 아닌 버스로 서대전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마침 8시 21분발 곡성으로 가는 KTX가 바로 있단다. 종착역은 여수, 엑스포로 인해 새로 생긴 교통로를 처음으로 이용한다. 열차를 타고 오는 두 시간 내내 옆 좌석에 앉은 승객의 주사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시골의 중년 남성 두 사람은 지인의 결혼식을 다녀오는 모양이다. 한사람은 이미 만취한 상태에서 맥주 캔을 따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만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테이블에 놓여 있던 술이 쏟아져서 옆 좌석까지도 흘러버렸다. 드디어 철도여승무원이 왔고, 신문지 등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객실 내에서는 음주를 자제해 달라고 했다. 승무원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인데 그 남자는 시비를 건다며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자꾸 하게 되고 급기야는 좀 과장되게 신경질까지 부린다. 일행은 미안한지 내내 주위 승객들의 눈치를 보며 동료의 실수를 어떻든지 사과하고 싶었나보다. 취한 남자가 객실 밖으로 나가버렸고, 일행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미안한 마음에 말을 걸어온 것 같다. 가까운 친척이거나 친구일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자신은 남원까지 간다면서 남원에는 만복사지가 유명하다며 규모가 상당히 큰 절이었다고 했다. 만복사 앞은 백들이라고도 하는데 그 앞까지 배가 들어오기도 하고,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요천으로 흘러왔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고도 했다. 거기에 나는 만복사에 빨래들이 하얗게 널려서 백들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고 거들었다. 문득 정림사에서 만복사를 떠올렸던 때가 그리워졌다. 그러는 사이에 열차는 남원에서 멈췄다. 취객도 무사히 내렸을 것이다. 열차 안에서 만난 짧은 만남 속에서 스스럼없이 주고받은 서너 마디의 말들이 따스한 인심으로 전해져 온다. 곡성에 도착 한 것은 열 시 조금 지나서였다.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부여의 유적을 찾아서 떠난 여행은 많은 몽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주었다. 천삼백 오십년 전 백제의 수도 사비를 거닐다 온 지금 백제가 너무나 그립다. 끝. (2013.6.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