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격동 본채는 남쪽에서 보면 ㄱ자 집이었다.
왼쪽부터 방-방-마루-부엌-방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 왼쪽 방은 앞쪽에 미다지, 옆쪽(동쪽)에 여다지가 있었다.
이 방은 주로 장포형이 썼다.
따라서 장포형과 친한 사람들이 종종 놀러와서 놀던 방이기도 했다.
당시야 먹을 게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계란이나 삶아먹고, 동네 중심과 먼 까닭에 가끔씩 들르는 찹살떡, 도청 담벼락에 의지하여 생계를 잇는 포장마차에서 사온 음식이 많았다.
주로 밤 늦게 이런 조촐한 파티가 많이 벌어진 까닭에 그 방서 자다가 깨면 먹을 것이 자주 있었는데, 한번은 삶은 계란 사이에 날계란이 하나 섞여 터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학교에서 배운 나의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악의 온상이기도 했다.
담배연기가 가실 날이 없었던 것이다.
옆방은 샛방이었는데 맨 왼편의 방과 닿지 않은 양쪽으로는 모두 미다지로 되어 있었다.
이 방은 주로 울산누나가 썼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누나를 무서워했던 어린 우리들에게는 출입을 하기에 좀 껄끄러운 방이기도 했다.
그래도 가끔씩 우연히 그곳에 들어가면 뭐든지 감추기를 좋아했던 누나의 짐 속에 허술하게 숨겨진 돈이 발견되어 몰래 가져다 쓰고는 입을 싹 닦기도 했다.
맨 왼편 방과 중간의 샛방 사이에는 통로로 쓰이는 마루가 있었고,
샛방과 안방 사이에는 너른 마루가 있었다.
이 너른 마루는 북쪽으로 다이아몬드형 격자 철창이 있었다.
그리고 겨울을 제외하고는 식사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여름에는 복날이 되면 아버지께서 수박을 사오시곤 했는데, 엄마가 바늘을 가위 손잡이로 두드려 얼음을 깨서 화채를 해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항상 내심 설탕을 조금만 더 넣기를 기대하면서... 요즘 애들 나무랄게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그리고 안방은 실패작이었다. 동편에 창이 하나 있었는데, 금방 집이 들어서는 통에 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굴은 노란 백열전등이 밤낮없이 밝혀주었다.
그 방은 모두의 공간이었다. 부엌으로 난 문이 하나 있었고, 다락이 있었으며, 마루로도 여다지가 나 있었다.
다락에는 오만 잡동사니가 많았으며, 심심하면 괜히 올라가는 곳이기도 했다.
서쪽으로는 작은 창이 나 있어서 해가 질 무렵에는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던 곳이었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돈을 주며 쓰게 한 천자문 중에서 잘 된 부분을 붙여서 전시를 하기도 했는데, 내가 쓴 부분은 "令"자가 있는 구절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서 아버지는 족보의 교정도 보시고, 또 당시로서는 드문 목판활자의 교정도 보셨다.
이제는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수시로 고치면서, 날짜 넘어갈까 일부러 꼬리말을 다는 경우가 있지만...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부엌은 물론 연탄화덕 아궁이였다.
당시만 해도 보일러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겨울에는 발이 부채살처럼 연탄 아궁이를 향해 있었다.
아랫방도 있었는데 아랫방에는 아궁이가 밖에 있었던 것 같다.
이 부엌 아궁이의 공기구멍에는 병아리가 따뜻함을 찾아 숨어들었다가 변사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부엌과 아랫방 사이에 화덕을 두고 밥을 해먹었고, 나중에는 석유곤로도 썼다.
아랫방은 서향의 미다지로 출입을 했는데, 고헌형님이 거처하던 곳이다.
고헌형님이 이곳에서 대학교 4학년을 보낼 때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기만 한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시간표가 붙어 있었는데
"세상에" 중간중간 뻥 빈 시간에 국민학생보다도 적은 수업을 하는 것이 끝내 이해가 안되었다.
그리고 고헌형님을 찾는 사람은 남자들도 있었지만 주로 여자가 많았다.
순영아지매, 영순누나(맞나?), 연진이 이모 등등...
내가 좋아하는 책이 책꽂이에 꽂혀 있기도 했고, 책상 왼쪽에 빼곡히 쌓여 있기도 했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책 중의 하나는 대형 이희승 국어 사전이었고,
나는 책을 찾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그때마다 읽을 만한 책을 찾아 건네주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 《그리스 로마 신화》, 《걸리버 여행기》는 이때 다 읽었다.
《노인과 바다》는 읽을 때는 이런 지리하고 내용 없는 책이 어떻게 노벨상을 받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은 적이 없는데도 자연에 도전하는 노인의 불굴의 용기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요즘 윤진 등이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듯이 애독했다.
형이 직접 "세후에게 줌-大兄"이라는 사인을 해주기도 했는데,
지금껏 그 책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은 신을 경멸하다 자신의 몸까지 먹게되는 비극적 인물 에리시크톤에 관한 이야기였다.
《걸리버여행기》는 얇은 영한대역이었는데, 물론 한글만 읽었고 그런 형태의 책은 그때 처음 보았다.
고헌형님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영화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해주었는데, "神象"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길로 제일극장에서 개봉한 그 영화를 극장을 옮겨가며 세 번이나 보고...
다음으로는 로저무어가 주연한 한일극장 개봉의 "골드"가 있었다.
비록 보여준다는 구두약속만 하고 끝내 함께 못본 영화였지만...
고헌형님은 이듬해 입대하여 이 집을 떠나 제대하여 대명동으로 돌아오셨으나 지금까지 오딧세이를 계속하고 계신다.
안동서 시작한 기나긴 항해는 그 끝을 모른 채 이제 영양에서 고령으로 향하고...
이 ㄱ자 본채는 앞쪽에 타일을 깐 작은 ㄱ자 뜨락이 있어서 비가 세로로 세게 치는 날이 아니면 항상 신발을 안 신어도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주거지인 대명동의 신발을 안 신고는 어느방으로도 갈 수 없는 비효율적인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집이었다.
내가 중1때까지 몇 해 살다가 이 집을 떠난 후 이 집을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부공장인가 뭔가를 하는 사람이 샀다는 소문을 들었고, 소중했던 무화과 나무가 잘려나갔다는 소문도 들었을 뿐 확인은 못했다.
지금 생각에도 그 집은 안방만 빼면 참 밝고 따뜻했다는 생각이다.
첫댓글 그 집에서의 생생한 기억 두 가지: 1) 펜 레터를 했던 장포형님과 4모누나 때문에 매일 대문간에는 우루루 편지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2) 그간 이산 가족으로 지냈던 모든 살림이 마침내 이곳에서 합쳐져 고헌형님의 관리하에 들어간 우리는 몇 차례나 대나무 퉁소에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부록: 장포형님은 빼어난 필체 덕에 집으로 오는 편지의 점유율을 80%나 차지했고 나머지는 4모누나의 것이었다. 장포형님은 매일 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을 듣고 녹취를 했는데 멋진 필체로 적어놓은 가사가 몇 권이나 되었고 보물처럼 애지중지하였다.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유명 가수의 경우에는 잡지나 신문에 난 가로로 둥근 타원형 사진을 오려 붙이기도 했고. 우리도 시간만 나면 그것을 보고 노래를 불러보곤 하였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한 형이 제일 좋아한 가수는 김상진이었던 같다.
사모누나가 하이틴 잡지(제목은 기억 안나는데 사이즈는 요즘 《좋은 생각》만 했다)에서 공모하는 캐치프레이즈에 "귀뚜라미 울음 속에 이슬먹던 추억이"라는 가을을 주제로 한 글을 보내어 기념품을 받은 것도 이 시절이었다. 작가로서의 소질이 비로소 드러난 시기라고나 할까?
사월의 기억 중 잘못된 하나, 펜팔을 통한 팬 레터 중 세련 사모의 것은 대명동의 기억임, 오죽하면 "대구시 대명동 장세련"이란 것만 보고도 우리 집으로 편지가 배달되었을까?
대명동 집이 맞고, 참고로 내 것은 펜팔이라기보다 팬레터였다. 신문과 잡지에 투고한 글과 이름만 보고 보낸 편지들...답장을 해준 것도 더러 있었지.아마 열 통 미만이었을 걸...하이틴 잡지 이름은 '학원'.. 암튼 사월의 기억력에는 두 손 들겠다.가물거리던 것들까지 다 집어내네.정말 그립다...
지금도 "울산시 연암동 장세련"이면 통해.장세정이 것까지 내 이름의 오기인 줄 알고 갖다줄 정도...집 구조도 다른 거 아닌가? 왼쪽부터 방(짠오빠와 하숙생방)-쪽방(재길언니)-마루-안방(훠니랑 내방)-부엌-방(큰오빠방)이었지.순영누나,영순아지매가 맞고..
"학원"이었나?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매달 다른 캐치프레이즈가 잡지 표지의 상단 우측에 기재되었지. 그때 받은 선물이 뭐냐면... 탁상시계였었지 아마. 그리고 요즘은 기억력이 많이 퇴색되었는데 그래도 내가 속한 단체서는 내가 "맞다"면 그걸로 모든 논쟁 종식.
맞다! 사월의 기억력은 가히 수준급이다.얇은 잡지였는데 어떤 기업의 사외보였을 거다.캐치프레이즈 공모에서 받은 선물이지.아까는 수업중에 잠깐 들렀던 터라 "학원"에 시조 투고했던 건 줄 알았지.그때 시조도 귀뚜라미 우는 밤이 소재였거든.
산격동 집의 무화과 나무는 세진이가 댁농고서 가져온 것인데, 영해여중 사택의 큰 무화과를 보면 늘 산격동 집이 생각나지...
산격동서 헌이가 아침부터 무엇에 쓸 돈인가 달라는데 엄마가 내일 준다고 해도 떼쓰다가 내게 된통 맞고 혼난 적이 있지..
산격동 시절이 철들고 거의 처음으로 모든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살던 곳이었죠 아마...
거기서도 난 주부였고, 그때도 우린 이산가족이었지. 아버지가 봉덕동에 계셨거든.내가 집에서 밥을 하다가 나중엔 봉덕동 가서 또 아버지 밥을 해드렸지.산격동에서는 짠오빠랑 많이 싸웠거든.밥이 질다고 잔소리, 반찬이 싱겁다고 잔소리...그 말에 대꾸하면 한 대 콱!! 아야야!
화단 옆 수돗가 앞에서 고헌 형님과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이 한장 있었는데. 고헌 형님이 가지고 계신가요? 형님이나 나나 홀쪽한 모습에 내가 형님앞에 서고 뒤에 서신 형님의 두팔이 나를 감싸 안고 찍은 사진 이었는데... 형님은 군에 가시기전까지는 꽤나 마른편에 속했었지요? 아마도
오라버니한테 디지게 맞고 북쪽 대문 있는 허허벌판으로 도망 갔던가...그랬었는데...ㅜㅜ 오라버니 방에서 수전노 등등이 들어있던 희곡집을 읽었던 기억도 잇고 오라버니를 찾아온 모동 사는 **(이름도 기억 남)이라는 아가씨가 하루 자고 간 기억도 오라버니와 사귀던 어떤 아가씨의 기억도 어린 내겐 특별햇는데...
아지매는 이 글을 못읽게 해야겠다. 혹시 훠니누나가 형한테 맞은 보복을... 맞아 여자 울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분명히 인용을 하더라고.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