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시대
공민왕 사후 고려의 정치를 좌우했던 인물은 권문세족 출신의 최영과 신진 무장세력의 이성계였다. 최영은 이성계에 앞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오른 인물로 우왕을 보필하며 고려의 중요 정책을 결정했다. 반면 동북면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성계는 뛰어난 활솜씨로 전공을 세우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성계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진사대부인 정도전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지방 향리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했지만, 권문세족의 위세에 눌려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정몽주, 이색 등은 고려 내부에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파였고, 정도전, 조준 등은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권력 독점으로 인해 관리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였고, 급료인 녹봉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정도전은 이러한 고려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성계와 손을 잡았으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그 불씨가 되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롭게 중원의 패자로 등장하여 과거 원나라가 고려에 가졌던 권리를 주장하며 고려를 압박했다. 특히 고려에게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우왕과 최영은 명에 적극 대항하며 이성계와 조민수로 하여금 요동 정벌을 지시했다. 원·명 교체기에 빈 땅이었던 요동 정벌은 성공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에서 칼끝을 돌리고 말았다. 이성계는 명과 싸워 패했을 경우 과거 원나라의 지배가 재현될 것을 두려워하며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는 회군 즉시 최영을 죽이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후 반대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또한 정도전과 조준은 개혁적인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실시하여 대토지를 소유했던 권문세족을 몰락시켰다. 또 고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키는 정몽주 같은 세력도 있었으나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곧 제거되었다. 이제 고려에는 창왕, 공양왕과 같은 허수아비 왕들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임금에 올라 새 나라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은 신진 무장세력인 이성계가 건국했지만, 실제 조선의 기틀을 만든 것은 성리학자인 정도전이었다.
이성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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