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하리라” - 부안, 동학을 새롭게 풀 ‘열쇠의 땅’
<부안독립신문>에서 동학(東學)사상과 1894년의 동학혁명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 달란다.
21세기에 왜 굳이 지나간 옛것에 다시 눈을 돌리려는 것일까? 오래된 옛길에서 새 길을 찾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려는 마음가짐 때문이요, 가장 민족적(民族的)인 것에서 가장 세계적(世界的)인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19세기 조선 민초(民草)들의 사상이자 민초들의 혁명이었던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을 21세기 민초들의 눈으로 다시 공부하고 다시 해석해 냄으로써 이 땅의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 지구촌 사람들이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 해결에 필요한 지혜를 찾아보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통일신라시대에 진표 율사가 부안 땅을 찾은 이후, 이상향의 땅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부안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先知者)들과 뜻있는 지식인들이 다투어 찾아 들었다.(『부안김씨고문서』 참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革命家)들도 다투어 몰려들었다. 조선후기(朝鮮後期)와 근대(近代)에 들어와서는 동학당과 서학당, 영학당과 활빈당 등 변혁(變革)을 꿈꾸던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어 저마다의 꿈과 소망을 펼쳐보고자 하는 변혁의 용광로 역할을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종교운동과 정신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종교가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예를 들면, 18년간이나 우반동 반계서당에 칩거하면서 조선 실학(實學)을 대표하는 대저술인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 유형원(柳馨遠·1622~1673) 선생. 월명암(月明庵) 주지로 있으면서 반농반선(半農半禪)의 기치를 내걸고 불교개혁운동을 펼쳤던 백학명(白鶴明·1867`~1929) 스님. 1916년에 원불교를 창시했던 소태산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가 5년간 변산에 은거하면서 교단 창건을 위한 준비에 몰두했던 사실 등은 부안 땅이 지닌 잠재력, 신비스러움, 무한한 가능성 등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안 땅의 가능성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는 또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1891년 음력 7월의 어느 날.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 선생이 부안 땅에 왔다. 옹정리(瓮井里·현재의 부안읍 옹중리)에 사는 김영조(金永祚)라는 제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것이다.(『김낙철역사』 참조)
이때 해월 선생은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花開於扶安 結實於扶安)”라는 말을 했다.
장차 동학의 역사에서나, 민족의 역사에서 부안이야말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 커다란 결실을 맺게 될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부안이 역사적으로 이상향의 땅이자 변혁을 위한 성스러운 공간으로 손꼽혀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같은 부안 땅이 최근에 우리 시대가 낳은 커다란 사회적 질병인 ‘개발논리’ 앞에 노출되어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다. 고통이 컸었던 만큼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도 강한 것이 아닐까? 바로 여기에 동학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동학에 대한 오해 몇가지
동학이야기를 풀어 가기 전에 우선 먼저 동학에 대한 세간의 오해 몇 가지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첫번째 오해는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립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동학을 설명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등장하는 동학이 서학(西學)을 ‘깊이’ 의식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은 서학에 대해 ‘운즉일(運則一), 도즉동(道則同), 이즉비(理則非)’라 하여 동학과 서학은 하나의 시운(時運)이며 도(道)도 같지만, 이치만 다를 뿐이라고 하였다. 무조건 서학을 배척하고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서학이 지닌 근대성(近代性)과 보편성(普遍性)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을 그저 서학에 대한 대항이데올로기로서 성립된 사상이라고 보는 세간의 이해는 온당한 이해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두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조선 사람들에게 알맞으면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가장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민초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의 결과물이 바로 동학이며, 그것을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수운 선생이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두번째 오해는 동학은 기존의 유불선 삼교사상에서 장점만을 따온 혼합사상이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사이비 사상이라는 견해이다.
이 같은 견해는 유학(=성리학)이나 불교, 도교 등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주장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학은 유불교 삼교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포함삼교(包含三敎)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유불선만 포함하지 않았다. 서학도 포함하였다. 서학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감록사상을 비롯한 민간 신앙적 요소도 두루 포함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19세기 중엽 이 땅에서 유행하던 모든 사상을 다 포함하여 성립된 사상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런데 동학은 기존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저 포함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포함하였다. 바로 이것이 동학의 독창적 측면이다. 봉건적 굴레와 외세의 침탈 때문에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살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서학, 더 나아가 민간 신앙적 요소마저 포함하여 이 땅의 새로운 생명사상으로 정립해 낸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그러므로 동학이 기존사상을 포함한 것만 주목하고, 기존사상을 넘어서 새롭게 창조해 낸 독창적 요소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동학을 이해하는 온당한 태도는 아니라고 하겠다.
포함삼교, 서학, 민간신앙까지 포함, 뭇 생명 살리기 위해 등장
세번째 오해는 동학을 하나의 Religion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학은 절대로 Religion이 아니다.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동학은 Religion이라는 용어, 즉 그것의 번역어인 종교라는 용어가 이 땅에서 대중화되기 이전에 성립되었다. Religion으로서의 종교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00년대부터이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과 같은 근대적 신문,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 등과 같이 신문화운동을 펼치던 각종 학회들이 펴내던 잡지들이 속속 등장하면서부터 비로소 종교라는 말이 널리 쓰여 지기 시작하였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는 용어 역시 일본을 통해서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동학이 종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수운 선생님 말씀을 빌리자면 “도(道)로써 말하면 하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요, 학(學)으로써 말하자면 동쪽, 즉 조선 땅에서 받았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는 것이다.
도라는 관점에서는 천도이고, 학문이라는 관점에서는 동학이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이 마땅히 밟아가야 할 길이요, 사람이 마땅히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야 할 우리 학문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동학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교단의 원로(元老)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하나.
일찍이 동학의 선배들은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한다’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동학이 Religion이 아닌 까닭이 숨어 있다. “동학을 한다”는 말은 동학이야말로 어디까지나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할 길이요 실천해야 할 학문이라는 뜻이겠고, 이른바 유일신(唯一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분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요약하자면,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학의 장점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극복하여 가장 자주적인 학문을 지향하고자 했던 동학! 포함삼교(包含三敎)뿐 아니라 서학과 민간 신앙마저 포함하여 뭇 생명을 다 살리기 위한 새로운 생명사상으로 등장했던 동학! 그리고 서양식 종교가 아닌 조선 땅 도학(道學)의 새로운 전개로써 경상도 경주 땅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학!
부안동학을 대표하는 인물 김낙철, 김영조
그런 동학이 전라도 부안 땅에는 언제쯤 들어오며, 누가 먼저 동학을 받아들였을까? 부안 동학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 출신 김낙철(金洛喆·1858~1917) 대접주와 옹정리 출신 김영조(金永祚)가 있다. 김 대접주는 부안에서 대대로 살아 온 명문 양반 집안 부안 김씨 문중 출신에다 지주(地主) 신분이었다.
양반에다가 지주였던 김 대접주는 무엇이 부족해서 동학에 입도했으며, 무엇이 부족해서 혁명 대열에 가담했을까? 그리고 무엇이 부족해서 여러 차례나 투옥되면서까지 동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했던 것일까?
김 접주의 존재는 동학이 없는 자들만의 사상이 아니요, 동학혁명이 단순한 민중반란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김 대접주는 또한 1차와 2차 동학혁명에 모두 참여했던 지도자였으면서도 해월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른바 북접(北接) 계열의 지도자였지만, 1893년 2월의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운동에 적극 참여했을 뿐 아니라 1·2차 동학혁명에도 적극 참여했다.(『전봉준판결선고서 원본』 참조) 이런 사실은 갑오 동학혁명을 남접(南接), 즉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지방의 ‘지역’ 단위의 혁명으로만 이해하려는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시사한다.
요컨대, 동학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의 땅이 바로 부안 땅이요, 열쇠의 인물이 바로 김낙철 대접주인 것이다.
부안독립신문 / 2006년 1월 16일자 / 박맹수 / 모심과 살림 연구소 소장 ========================================================================================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변해야”
동학사상, 동학혁명에 나타난 지도자상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모심과 살림연구소 소장)
동학은 지식인이 만든 사상이 아니고 바로 민초들이 만들었던 사상이고 혁명입니다. 풀뿌리 백성들의 소망과 꿈을 최제우 선생이 정리해서 만들어낸 사상이 동학사상이고 민초들이 세상을 아름답고 신명나고 살기 좋게 만들어 보려고 농사만 짓다가 죽창을 들고 일어선 혁명이 동학혁명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평범한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전라북도 같은 경우에 가장 정서적으로 공통되는 과거의 운동 역사가 동학운동이고 동학사상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동학사상, 동학혁명으로부터 오늘 21세기 과제, 특히 현재 부안사회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어려운 과제를 풀 수 있는 어떤 지혜를 모색해 가보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동학사상을 만드신 분은 최제우 선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우하신 분이었습니다.
첫째로 불우했던 것은 조선시대에는 과부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재가를 못했습니다. 그런 법을 조선시대 500년을 지탱했던 경국대전에 묶어놨어요. 만약에 재혼하면 그 사람은 정절를 잃었다는 식으로 딱지를 붙여서 거기서 나온 자식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어요.
최제우 선생의 아버지는 영남에서 굉장히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근암공 최옥이라는 분인데 학맥을 타고 올라가면 퇴계 이황 선생에게 닿아 있습니다. 그의 기록을 확인해보니까 영남 일대에 있는 선비 400명과 편지를 주고받고 내왕하고, 지금도 근암공을 기리는 모임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어요. 60살이 넘어 젊은 과부하고 결혼하는데 거기서 태어난 분이 최제우 선생입니다. 예닐곱 살 때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열예닐곱 살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어요. 집안에서도 정식 아들로 대접을 못 받았다는 얘기죠.
뜻을 못 펼치고 부모마저 다 돌아가시니까 20살에 방랑하면서 살아보려고 별 시도를 다해봅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팔아가지고 장사를 해요. 경주나 언양이나 그 일대는 철이 많이 나옵니다. 철을 재련해서 호미나 삽을 만들기 전에 원철, 선철이라고 하는데 고걸 도매로 파는 철점을 하다가 쫄딱 망합니다. 그것도 안 되니까 무술을 익히려다가 좌절하고.
그러다 처가에서 얹혀살다가 1859년 서른다섯 살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서 공부만 하죠. 득도한 뒤에 집에 있던 여자 종 두 명을 해방시켜줍니다. 한 명은 며느리 삼고 또 한 명은 수양딸로 삼았습니다. 나중에 그 수양딸이 증언하는 내용 중에 동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파문을 일으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었습니다. 그 때 대신사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대답하기를 많고 말고. 많아여도 세상에 많았다. 마룡동 대신사를 만나러 찾아오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느 정도 사람이 많이 왔냐면 그 때 찾아오는 제자들이 건시와 꿀 같은 것을 가져오는데 곶감이 어찌나 쌓였는지 곶감을 나눠 먹고 버린 싸리가지가 산같이 쌓여서 그 밑에서 나무하는 일꾼들이 산으로 가지 않고 그 싸리나무 가지를 한짐 씩 지고 갔다.”
도대체 동학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부안을 새로운 부안으로 만들려고 꿈꾸는 분들, 부안 분들이 열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되겠죠.
그렇다면 동학의 무엇이 조선 민중들을 사로잡았을까. 이것 때문에 최제우 선생은 반란을 도모한다고 3년만에 처형을 당하죠. 양반의 자식도 아니고 높은 벼슬을 했던 분도 아닌데 당신 스스로 한평생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하려고 했던 일들이 전부 실패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얘기했던 최제우 선생의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몰려들게 했을까. 바로 동학이 민중들의 꿈과 소망을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의 핵심은 동경대전에 논학문(論學文) 속에 있습니다.
동학사상의 핵심, 조선 민중들을 수없이 몰려들게 하고 열광하게 했던 핵심은 딱 한글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시(侍), 모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시는 거냐, 모신다는 게 뭐냐, 아주 쉽게 얘기하면 시는 절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새만금 반대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절하면서 했죠. 절할 때 만큼은 마음이 순수해지고 맑아지고 정돈이 됩니다. 이 절하는 마음을 최제우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시자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 시는 절하는 마음인데 두 길로 실천이 돼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안으로 하나는 바깥으로. 안은 자기자신이죠. 바깥은 이웃이나 세상입니다. 안으로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이래서는 안돼 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가 하나가 됐을 때 그 상태가 내유신령입니다. 내유신령이 사라지면 외유기화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습니다.
늘 내가 내 안의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노력, 실천, 움직임을 유지하는 것이 그것이 내유신령이다, 내가 참 나한테 절하고 살자 그겁니다. 내가 나한테 절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이웃에게 절하는 마음, 내유신령 외유기화를 하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 이거죠. 이걸 한번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주체성입니다. 동경대전을 읽어보니까 그 때 논쟁이 되는 게 서학입니다. 꼭 천주교만이 아니고, 동학이 생길 때 뭐가 제일 인기가 있었느냐면 서양의 양복 등 가장 첨단 문명과 관련된 것이 서학입니다. 서양의 종교도, 첨단 과학기술도, 국가체제도 서학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운 선생을 찾아와서 당신이 만든 사상이 서학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즉 요즘 잘 나가가는 그런 겁니까 하는 얘기에요.
吾亦生於東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爲東 東何爲西(오역생어동수어동 도수천도 학즉동학 황지분동서 서하위동 동하위서)라고 했어요. 나는 동쪽에서 태어나서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니 즉, 이땅에서 태어나서 이땅에서 도를 받았으니 그 받은 것을 도라는 말로 표현하면 하늘서 받았으니까 천도라고 할 수 있는데 학문으로 말하면 동학이다, 이것을 요샛말로 번역하면 주체성, 자존심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부안에서 일을 하려고 할 때 부안만의 역사가 있고 문화, 전통, 특징이 있잖아요. 부안만이 가진 문화, 특성에 가장 정통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하고 어떻게든지 더 열린 사회로 살려내려는 고민을 해야 진정한 지도자가 될 겁니다. 하물며 땅은 동과 서로 나뉘는데 어찌 동을 서라고 하고 서를 동이라고 하겠느냐. 주체성 있고 이땅 현실에 적합한 현실에 맞게 적합한 뭔가를 실현하려고 하고 꿈꾸려 하면 이뤄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원주의입니다. 서학과 싸움을 하다보니까 동학과는 계속 갈등을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했겠죠. 동학은 일등이고 서학은 이등 삼등입니까. 물었더니 수운 선생이 뭐라고 답변하냐면 동학과 서학은 運則一也(운즉일야)요 道則同也(도즉동야)요 理則非也(리즉비야)라고 말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 생각이 다른 사람, 또는 다른 길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대할 때 읽을 수 있습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140년 전에 수운 선생이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대동소이하다는 말입니다. 비유적인 얘깁니다. 과거 성현들의 말씀에 動亂者(동난자)도 聖人(성인)이요, 靖亂者(정난자)도 聖人(성인)이라고 했습니다. 난을 일으킨 사람도 성인이고 난을 가라앉히는 사람도 성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부분인데, 부안에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태풍에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힘이 부안 땅에 스며들었습니다. 이것을 살려내는 새로운 철학과 비전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을 동학에서 찾는다면 다원주의적 사고입니다.
동학 조직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접화군생의 접입니다. 1860년에 나와서 1894년까지 35년간 동학의 동자만 들어가면 잡아다가 그냥 죽여도 괜찮은 시기, 가족들은 노비로 삼아도 되는 시기, 그런 시기를 동학이 지나오거든요. 그래서 1894년에 혁명으로 떨쳐 일어난 사람들이 조선 인구의 3분의 1이랍니다.
그 어려운 시기를 견딜 수 있도록 한 것이 동학의 포접조직입니다. 하여튼 동학이 들어가면 다 살려냈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동학을 비판하고 탄압한 보수지식인들이 남긴 기록에 나옵니다. 동학은 귀천이 없어서 천민들이 다 좋아했다, 부자들이 동학만 들어오면 돈을 다 낸답니다. 1893년에 삼례에서 20일간 집회를 하는데 거기에 돈을 댄 부자들이 수십명 거덜나가지고 이 사람을 돕자는 통문을 해월 선생님이 발표하고 그랬습니다.
또하나 포함삼교로서의 조직입니다. 사상 신조, 모든 생각이 다른 사람도 더 크고 좋은 일을 위해서 모두 함께 극복합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동학이 어려울 때 절로 도망갑니다.
최제우 선생이 전통 주자학 집안에서 이상한 동학을 퍼뜨리니까 탄압을 받습니다. 못견뎌 피신해 남원 절로 들어옵니다. 거기서 4개월을 삽니다. 동학의 핵심사상인 논학문을 거기서 짓습니다. 누가 뒷바라지 했겠습니까. 바로 선국사 스님들입니다.
결국 불교가 꿈꾸는 용화세상이나 동학의 지상신선의 세계나 길은 다르지만 꿈꾸는 것은 같다고 생각했겠죠. 유교는 가만 있었냐.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부 유교 지식인이었어요. 인의 세계 덕치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학이 들어오면 자기들이 본래 추구하려고 했던 것과 동학이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접화군생으로서 접, 포함삼교로서 포, 어떻게 우리가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부안이 낳은 위대한 대접주가 있습니다. 김낙철 대접주, 쟁갈리 출신입니다. 이분은 전봉준과 같이 봉기했습니다. 그런데 전봉준하고 같이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안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부안현감인 이철화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나중에 이철화가 동학군과 내통했다고 잡혔을 정도에요.
당시에 동학의 포접조직은 옆에 포가 무슨일을 해도 간섭하거나 지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자율, 자력, 자립, 자치조직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여건에 맞게 봉기하겠다고 했습니다. 부안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봉기를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화두를 하나 주셨습니다. 花開於扶安(화개어부안) 結實於扶安(결실어부안). 부안에서 꽃이 피어서 부안에서 결실이 맺힐 것이라는 얘깁니다. 제 얘기가 아니고 최시형 선생님이 1890년대 초에 다녀가시면서 한 얘깁니다.
조직이 건강할 수 있는 것은 자치, 자립, 자력 이런 것 덕분이란 말이죠. 군에서, 도에서 돈 받으면 맛이 갑니다. 갑오농민전쟁 때 중도를 지켰고 봉기하지 않았던 포접조직이 3,1 독립운동 때는 엄청난 진원지가 됐습니다. 한순간에 똑같이 가는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열린 사고를 하는 리더십이 있을 때 아주 부드럽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부안독립신문 58호 (2005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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