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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7.12~7.19 |
1961.7.5~7.10 사람들은 만날 때 “재건합시다”라는 인사말을 했고, 재건체조가 널리 보급되는가 하면 젊은이들은 돈을 쓰지 않는 ‘재건 데이트’를 즐겼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성균관대 교수 김일영) |
1961.7.1~7.4 서울 시내버스에 탑승해 승객들의 요금을 받고 차량의 출발과 정지를 돕는 차장들이다. 제복을 입고 완장을 두른 모습이 활기차고 밝다. 이때만도 버스 차장은 여성들의 몫이 아니었다. 5.16혁명으로 지휘권을 손상당한 매그루더 대장의 미8군사령관직이 부사령관이던 멜 로이로 교체되었다. 후일 장도영은 5.16혁명 이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7월4일 박정희 의장은 송요찬 내각수반을 임명하고 임명장을 수여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부패를 일소함과 아울러 민족 정기를 바로잡고 국토통일에 앞장서며 국가경제 부흥에 총력을 다할 것”이라고 선서했고, 박정희 의장은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게 되었으므로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이 나라 국가재건 사업에 앞장서 달라”고 훈시했다. |
▒ 집무실은 산업현장과 민생현장 ▒
미 국무성, “윤보선 대통령 하야 반대” 1961.8.25~8.26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국방과 경제가 두 축이었다. 북한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대통령은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여 나라를 지키려 했다. 국방을 통해 지키려 한 목적, 그리고 국방을 위해 갖춰야 할 목표는 가난이 없는 조국, 잘사는 조국이었다. 대통령은 본인이 병역을 기피했거나 아들을 기피시킨 사람은 요직에 중용하지 않았고 국회의원 공천을 주지도 않았다. 특별보좌관단을 만들기 위해 대학교수를 수소문할 때도 이 원칙은 어김없이 지켜졌다.” “1961년 8월12일, 박의장은 ‘앞으로 2년 더 군정을 실시하고 1963년 여름에 민정이양을 실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격노했다. 박정희 의장에게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듯했다. 대통령은 8.15 기념일을 기해 하야를 강행하되 최고회의나 언론기관에 연락하지 말고 대변인 성명으로 끝내자고 했다. 하야성명의 골자는 ‘2년 군사정권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지정해주기까지 했다. |
1961년 8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출범 1961. 8.15~8.16 국가재건을 위한 국민운동은 그의 다이내믹한 카리스마에 의한 국가주도형의 톱다운 방식으로부터 국민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는 다운업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범국민적인 국가재건 운동에 몰두하는 그의 소박한 정열과 진정성이 담긴 것으로, 실사구시에 의한 혁명과업 수행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의장은 민정이양에 대한 압박으로 혁명정부 종식의 일정을 밝혀야 했다. 그가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함으로써 한미관계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있었지만, 민정이양은 혁명을 시작하자 마자 끝내 버리겠다는 모순의 약속이었다. 그는 경제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모순 논리를 저돌적으로 돌파해 버린다. “혁명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여러 경제 얘기를 하면서 의견을 묻다가 ‘경제단체 같은 것을 만들어서 경제인들이 국가재건에 기여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고 경제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경제인협회가 출범했다.” (이병철, 전경련 창립 20주년 특별좌담에서) “5.16 혁명이 일어나고 호암은 부정축재자로 연행되어 박정희 소장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행 조세법에 대한 근본적인 부당성을 설명하며 오히려 박 소장을 설득하였다. 호암의 역설에 공감한 박 소장은 부정축재 혐의를 받은 기업에게 벌과금을 추징하는 것으로 수사를 종결했고 이 사건은 당초보다 가볍게 마무리되었다. 5.16 직후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된 상황에서 박정희 의장과 이병철은 기업인들을 풀어주고 활동의 장을 마련해 주는 대신 기업인들이 국가 기간산업을 하나씩 맡아 일으키겠다는 것으로 이른바 ‘빅딜’을 한 셈이다. 오늘날 전경련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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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 간도 크다. 그러니 혁명을 했지” 1961.8.12~8.14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라는 미국과 구정치인들의 요구는 혁명과업 수행의 걸림돌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정권을 내놓으라고?” 박정희 의장은 때로 고심하고 때로 동요하는 듯하면서도 이 걸림돌을 넘어 뚝심있게 앞으로 갔다. 강원도 삼척지구에서 산업철도인 황지선을 착공, 태백산 일대의 지하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군 지프가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보여준다. “박의장은 군복차림으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행사장에는 그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재건체조를 비롯해 ‘재건청년가’(유달영 작사, 형석기 작곡)와 ‘재건의 깃발아래서’, ‘태극기의 노래’, ‘새나라의 노래’(박두진 작사, 김성태 작곡) 등이 각급 학교와 재건대 교육장에서 울려퍼졌다. 혁명정부의 대과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경제개발의 첫 계획을 실천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우리 국민의 오랜 의식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음악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고 생활문화면에서도 서서히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가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땀 흘려 일해야만 했다.” (인터넷 동부신문) “1961년 6월12일 공포된 '국가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민단합운동, 학생봉사, 계몽활동, 허례의식일소를 위한 표준의례준칙제정, 국민저축, 의생활개선, 상도덕앙양, 기일내 납세, 시간관념 고취, 가족계획, 식생활개선운동, 문고보급, 자매부락결연, 사랑의 금고설치, 재해 및 기아추방, 국제친선 및 펜팔, 기념비 건설사업 등 국민총동원운동을 전개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모법(母法)인 1964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법의 폐지로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로 바뀌었다가 1980년 공포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흡수됐다.” (인터넷 이천신문) |
영화<마부>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1961.8.1~8.11 “5.16 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 끊었소. (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 꽁초에 불을 붙이면서 씩 웃는다) 담배는 하루에 이 놈을 두 갑 피웁니다.” “내가 의장실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원짜리 냄비우동 한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그날 식단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백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동서고금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전 KIST 이사장 김병희) 가난한 농어민의 고리채를 혁명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취지에서 실시된 이 정책은 군사정부 “박정희 의장은 ‘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자답하고 있다. 5.16혁명 당시의 한국이 반(半)독립국가, 반식민지국가와 다를 바없는 상태였다는 것은 61년의 한국의 자립도가 재정적으로는 39.2%, 국방비에 이르러서도 겨우 4.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도 명백한 것이다.” (일본 東海大 교수 하야시 다테이코) “이 시절 ‘재건’과 함께 유행하던 말이 ‘새나라’였다.장날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잡화상의 박정희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한 것은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지 한달여 뒤인 8월10일이다.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중장 계급장을 단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선임자들로부터 경례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주한미군 지휘부 장성들과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10일 혁명 유공자 50여명이 특진할 때 박소장도 중장이 되었다. |
▒ 60년대 진로를 결정한 ‘월남파병 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