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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변천으로 본 송두용의 신앙여정
A. 들어가며
송두용 선생의 신앙잡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참 특이한 경우이다. 적게는 두 번에 끝난 것도 있고, 10년 이상 지속한 것도 있다. 왜 이렇게 바뀌게 되었을까. 오늘은 잡지의 변천에 따른 송 선생의 생애 변화와 신앙의 발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2014년 송두용 기념회에서 발표한 것인데, 다시 잡지 변천에 집중하여 재정리하였다. 이진구 선생이 쓴 ‘성서신애의 발자취’ 등 오류동집회의 잡지들과 송두용 신앙문집, 그리고 추억문집을 참고하였다.
B. 잡지의 변천
1.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실린 글들
송두용 선생은 동경에 유학했고, 우찌무라성서연구회에 다녔다. 거기서 여섯 명이 뭉치게 되었고, 귀국하여 ‘성서조선’을 창간한다. 이때는 송 선생의 신앙초기였기 때문에 ‘만인의 구원, 하나님께 순종하라, 기도하자’와 같이 신자로서의 출발을 다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글들이 많다. 그리스도 신자란 무엇인지 보자.
그리스도 신자는 누구인가? 그는 과거를 회고하고 운명의 여하를 운운하는 숙명론자가 아니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전진하는 낙천가다. 그에게는 비애, 번뇌, 고통이 없음이 아니나, 환희, 평안, 위자(慰慈)가 그 모든 것을 이긴다. 이것이 곧 진정한 의미에 신자이며, 구주 예수의 참된 종이다.
2. 영단(靈斷)
1945년 나라는 광복을 맞았지만, 4개월 전에 이미 김교신 선생은 돌아가셨다. 이에 송 선생은 큰 책임감을 느껴, ‘전등불이 꺼졌으니, 호롱불이라도 켜보자는 심정으로’ 잡지를 창간한다. 이것이 송 선생 최초의 잡지 ‘영단’이다. 1946년 1월, ‘영단’을 시작할 때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오류동 가정모임의 형제 자매끼리 나누어보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독자 13명이던 것이 차츰 30부, 50부, 100부로 늘었다. 한 책에 사과 한 개값 10원이었다고 한다.
‘영단(靈斷)은 어떤 잡지였는가?
송 선생은 해방이 되면서, 오류동 지역의 유지로서 군위원장, 간사, 발기인, 대장 등 이런저런 단체와 모임에 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노끈, 사슬, 고랑 등으로 꼭꼭 묶이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는데, 이 때문에 영적생활이 미지근해졌다고 생각했다. 제발 세상과 손을 끊기를 원하는 마음이 이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영단’은 믿음이다. 영단!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은 좋으나, ‘단’이 문제입니다. ‘단’이라면, ‘결단, 판단’ 등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재판,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단’에는 세상과 영합하지 않으려는 신앙의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그 제목들을 보면, ‘회개하자, 핑계하지 말라, 허영과 외식, 감각이 없는 사람, 세상을 이기는 비결, 천사냐 악마냐?’ 등 세상과 짝하여 사는 것보다 하나님 섬기기를 택하는 글들이다. 사람들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선생의 삶을 만날 수 있다.
영단은 특히 손글씨 책이다. 이진구 선생이 등사원지에 철필로 쓰고, 함석조 선생 등이 등사에 협조를 하였다. 책의 모양이 세련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송 선생도 “등사가 추하게 되는 때가 가끔 있어 섭섭하였다.”고 하였다.
그 유명한 ‘모두가 은혜로다’라는 글도 영단에 있다.
눈물도 은혜요, 한숨도 은혜이며, 실패도 은혜요, 손해도 은혜로다. 그런 것일수록 참은혜요, 가장 큰 은혜일 것이다. 알았다. 이제야 알았다. 나를 미워하는 자 은인이며, 나를 저주하는 자 은인인 것을, 나를 이용하는 자 은인이며, 짓밟는 자 은인인 것을.
영단은 길게 가지 못했다. 22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새로운 잡지의 약속을 하고 있어 새로운 잡지의 예고글 같다는 느낌도 든다.
박석현 형은 은근히 속간을 부탁하였고, 노평구 형은 “나이가 몇인데?” 하고 책망하였으며, 안학수 형님은 “복음전파 외에 네 할 일이 무어야!” 하고 호령하셨습니다. 또 “영단에는 독특한 사명이 있으며, 무식하거나 구변이 없거나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성심성의껏 계속하기만 하라.”는 격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단‘을 ’永斷‘하고 새로운 ’영단‘을 세상에 내 보내기로 합니다. 그러나 ’영단‘, 이 이름으로서는 작별입니다.(1950.2.1. 영단22호)
3. 숨은 살림
인천과 강화에서 시골살림을 하다가 송 선생은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성서잡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잡지재개의 변을 보기로 한다.
안학수 선생이 찾아와 “송 형 어찌할 거요? 무엇하면 어릿광대 노릇은 내가 할 터이니 제발 좀 나와요. 이 늙은 것을 부끄럽게 하지 말고.” 하고 다지시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러면 또 한 번 추태를 연출하여 보나요?” 하고 어림도 없는 결심을 하였다. 서울 아현동으로 돌아와 살게 되니, 다시 잡지를 계속할 생각이 슬그머니 난 것이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있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이신 분을 바라보면서 살자는 생각에서 표제를 ‘숨은 살림’이라고 붙였다.
숨은 살림은 남이 볼까 봐, 누가 알까 봐, 칭찬이 올까 봐, 값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면서 숨은 가운데서 남모르게 살려는 살림. 이것은 분명히 하늘의 살림, 영의 살림, 하나님 상대의 살림이라고 1호에서 밝혔다.
그 외에도 ‘숨(영이신 하나님)이 살(육신인 사람)이 되사, 임하셨다(세상에 오셨다)는 뜻도 있고, ‘숨이 살린다’ 또는 ‘영만이 살게 한다’는 뜻도 있다. 송두용 선생의 재치 넘치는 해석이 참 흥미롭다.
‘숨은 살림 하자’라는 글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가 있으니, ‘숨은 살림’이 그것이다. ‘숨은 살림’은 주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감화하사 우리를 살리시는 숨(영)의 살림인 것을.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는 골방에서 문을 닫고 하며,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살림이 곧 ‘숨은 살림’이다. 그대는 이 살림을 원하지 않는가?
선생은 사실 고요히 들어앉아 ‘무엇’을 좀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은근히 속에 있었다. ‘무엇’이란 영단의 속간이었다. 노평구 선생은 ‘성서연구’에 광고까지 실어주며 영단의 속간을 재촉하였다.
선생의 강화 살림에 금이 나기 시작했고, 어떤 커다란 힘이 자신을 섬에서 몰아내는 것만 같았다. 숨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몇 몇 친구들이 선생을 서울로 이끌었고, 선생도 벅찬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이것이 ‘숨은 살림’의 유래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숨은 살림 2호까지 낸 후, 3호를 준비하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또다시 인천-덕적도-군산-부산-가덕도-김해로 3년간의 고단한 방랑길이 시작되었다.
숨은 살림부터는 박윤규 선생의 명품 손 글씨로 만들어졌다. 너무나 반듯하고 아름다운 글씨여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4. 성서인생
한국전쟁이 끝나고, 오류동으로 돌아와 새로운 신앙잡지를 발간한. 나이도 50이 넘었으니,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살아볼 생각에 ‘성서인생’이라 이름을 붙였다. 성서를 떠나서는 바르고 참된 인생을 생각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기에 ‘성서인생’이라고 제호를 붙인 것이다.
성서인생 2호에서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서를 인생 속에, 인생을 성서 위에 살리려는 일, 세우려는 일, 이것이 ‘성서인생’이며, ‘성서인생’의 임무일 것이다. ‘성서인생’은 결국 ‘신앙인생’을 주장하고 지향한다. 인생은 오직 ‘성서 신앙 인생’만이 있을 뿐임을 믿고, 그 살림을 힘써 하면서, 또한 그 일을 부지런히 증거하는 일을 본분으로 하는 하나님의 그릇이며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서인생’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랑하는 동포에게 ‘성서인생’을 살자고 권하는 바이다.
선생은 이 ‘성서인생’을 내던 때가 스스로도 인생의 황금시대였다고 말하였다. 성서인생을 통해 10년간(1955.6-1964.3) 발표한 글의 양도 많을 뿐더러, 그 내용도 활달하다. 특히 선생의 성서공부 중 ‘빌레몬서 연구’와 ‘요나서 공부’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선생은 비교적 짧은 책을 공부하였는데, 그 까닭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예수의 전기는 못 쓴다 하여도, 네 복음서 중에 하나쯤은 철저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여, 사도들의 편지 중에서도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또는 히브리서나 요한일서 같은 것을 한 번 착실히 연구해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나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 어떠하랴?
요나서 공부를 택한 동기가 지극히 친근하다.
나는 아무런 참고서도 없거니와 원래 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학문적 연구를 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다만 요나서는 생활기록인 데다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어딘지 모르게 자서전이나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어 나의 체험을 통하여 생각해 보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으로는 별로 값이 적을지는 모르나, 그래도 약한 심령에게는 조그마한 지팡이나 등불이 되어서 신앙생활에 약간의 도움이 된다면 다행인가 싶어 감히 시작하는 바이다.
사실 위의 글은 선생의 겸손일 뿐이다. 선생의 성서공부에는 학자를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으나, 지명·인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며, 한 절 한 절 낱말의 뜻을 풀이하고, 학자의 주해까지도 빠짐없이 소개하였다. 무엇보다도 쉬운 문장으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짧고 간결하게 썼다. 또한 선생 특유의 감성이 들어간 표현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붙잡았으리라 생각한다.
성서연구는 아무리 역사에 자세하고, 문장이 훌륭하며 굉장한 철학과 사상과 신학이 들어있을지라도 그것은 학문 연구는 될지 모르나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신앙을 자라게 하는 데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거나 오직 하나님을 배우며 그리스도를 깊이 알면 된다. 또한 그것만이 인생에게 더욱,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5. 성서신앙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바뀌었다. 전 정권의 잡지들은 모두 등록 무효가 되어 ‘성서인생’을 지속할 수 없었다. 공보부의 재등록 허가가 나기까지 3년이 걸려 1964년 드디어 ‘성서신앙’으로 재출발하였다. ‘성서인생’에서 ‘성서신앙’이 된 것은 ‘인생’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60이 넘었으니, 이제는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이었다. 선생이 밝힌 ‘성서신앙’의 취지를 보면 그 뜻이 확실하다.
나는 믿은 후부터 오직 믿음을 생각하고 말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벅차있기 때문에 언젠가 단순히 ‘믿음(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잡지를 쓰고 싶었기에, 이 기회에 ‘성서신앙’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기독교의 독점물이 아니기에, 기독교의 믿음 즉 ‘성서신앙’이라고 하였다. 처음도 나중도, 언제 어디서 무엇에고 믿음만을 생각하고 말하며 살 것 뿐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가 표어요, 좌우명이니 말이다.
성서신앙은 3년 정도 지속되었는데, 격변하는 사회의 소용돌이 시대 탓인지 사회와 정치관련 이야기들이 심심치않게 눈에 띄는 점이 ‘성서신앙’의 특징이 되기도 한다.
6. 성서신애
‘성서신앙’을 내게 되면서, 공보부에서는 매월 잡지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우편으로 꼬박꼬박 발송하였는데 2년이 지날 즈음, 갑자기 잡지 등록취소 통지가 날아왔다. 우편배달사고로 1년 10부 제출의 기준을 채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애를 써보았지만, 새로운 잡지의 등록을 명령받아, ‘성서신애’가 탄생하였다. ‘성서신앙’과 이름이 유사하여 안 된다는 것을 고집하여 허가를 받았다.
송 선생은 ‘성서신앙’이 더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그러나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성서신애’에도 애정을 표시하였다. ‘하나님께서 추수가 가까워지니 자신과 같이 채 익지 않은 것까지도 걷으시려고,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하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여 아래와 같은 의미 풀이를 해주었다.
기독교는 십자가교다. 믿음을 세롯대(縱)로 한 위에, 사랑을 가롯대(橫)로 한 십자가가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위로 하나님께 향한 믿음과, 옆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곧 신앙생활, 아니 인생의 전부인 것이다.
성서신애는 유달영 선생이 써준 한글로 된 ‘성서신애’라는 표제를 달고, 5년간 송 선생 개인잡지로 발간되었다. 선생은 장봉섬에 거주하면서, ‘푸른 학원’을 운영에 힘을 쏟았는데, 매월 20일이 되면 서울로 나와 성서신애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차츰 나이 70이 되면서, 동인지 형태로 전환하여 잡지를 계속하기로 한다. 김정환, 박석현, 유희세, 고병려, 김유곤, 이진구 등이 글을 쓰기로 했고, 선생은 주필로써 통신란을 맡았다. 이때 제호가 한자 ‘聖書信愛’로 바뀌었다.
드디어 1980년 1월, 성서신애 권두문으로 ‘작별의 말씀’이 발표된다. 이는 성서신애를 종간하고, 새로운 잡지를 내려고 작정한 제자 이진구의 요청으로 최후의 소감을 쓴 것이다.
이진구 선생은 새로운 이름의 잡지를 발간하고자 했으나, 관청은 내용의 유사성을 문제삼아 불허하였다. 그래서 성서신애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C. 나가며
송두용 선생의 생애를 신앙잡지의 변천을 통해 살펴보았다. 영단- 숨은 살림-성서인생-성서신앙-성서신애, 다섯 개의 잡지 제목만 보아도 한 사람의 생애가 압축되어 있는 듯하다. 게다가 잡지 앞면에 표어처럼 쓴 짧은 구호는 더욱더 선생의 신앙관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영단 :
숨은살림 :
성서인생 : 세리와 죄인의 벗(마태), 우리없는 양들의 꼴(요한)
성서신앙 :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는 속죄본위의 복음신앙으로
성서신애 : 믿으면서 사랑하는 기독교는 십자가교
믿음은 구원, 사랑은 평화, 너나가 없는 하나의 세계
무교회 기독교(자) 평신도의 잡지
생명과 빛이신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송두용 선생을 책으로만 만났다. 책으로 본 송두용 선생은 서울역 화장실 청소를 한다거나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 주었던 실천가, 숨은 살림을 하자는 사람답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도우시다가 그 많던 재산을 바쳤던 겸손한 신앙가, 이런 이미지였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단한 카리스마 지도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예배시간에는 너무 엄격해서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고, 지각하는 사람에게는 돌아가라고도 했다는 것. 또한 직업도 선생이 정해주는 대로, 심지어 결혼까지도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한다. 굉장한 지도자였다. 결정적인 것은 제자들이 스승과의 추억담을 말할 때 엄청난 존경심과 자부심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인생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송두용 선생의 제자되시는 분들이야말로 정말로 큰 행운을 누렸다고 생각한다. 송두용 선생 스스로도 “내 손가락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것을 바로 보고 바로 믿어서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살아왔다는 신앙고백이다.
과연 송두용 선생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열매들을 보면 안다. 이진구, 백충현, 최옥순, 송기영 등등 제자들이 보여준 순수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 은 송두용 선생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와는 비록 일면식도 없지만, 오류동 집회원인 이상, 나에게도 이 신앙유산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여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