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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산에서 치악산, 오대산, 선자령의 전모를 보다
1. 일자 : 2010. 1. 16 (토)
2. 장소 : 백덕산 (1350m)
3. 행로 및 시간
[문재(09:40) -> 925봉(09:50) -> 헬기장(10:20) -> 1125봉(10:50) -> 전망바위(11:02) -> 책바위(11:10) -> (암릉 우회) -> 당재(11:25, 1210m, 백덕산 2km) -> 작은당재(11:52, 백덕산 1.2km, 관음사 3.2km) -> 먹골 삼거리(12:13, 백덕산 0.5km) -> (‘N’자 나무) -> 정상(12:30, 1350m) -> 먹골 삼거리(12:45, 헬기장 0.3km) -> (헬기장) -> (공병효동판, 가파른 내리막) -> 먹골재(13:26, 백덕산 3.2km, 먹골 2km) -> (전나무 숲, 겨우살이) -> 먹골(14:12)]
4. 동행 : 홀로, 산죽산악회
< 백덕산 산행을 준비하며 >
작년 겨울 한 철 열심히 안내 산악회를 따라 다닌 탓에 올해는 새로운 산행 행선지를 찾아 내기가 쉽지 않다. 겨울 산이 태백산, 덕유산, 소백산, 선자령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금주는 용케 산죽산악회에서 백덕산엘 간단다. 화요일, 일찌감치 예약을 하고 인도어 클라이밍에 들어 간다. 지도상으로는 치악산 부근에 위치해 보이고 몇 년 전 강형이랑 대식이 보러 태백엘 갈 때 원주를 지나 국도 변에서 진입 이정표를 본 기억이 있어, 내게 백덕산은 원주의 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거기에는 원주에 사는 친구 홍규에 대한 생각도 보태졌을 것이다.
그러나 산행 준비를 위해 지도를 자세히 보니 백덕산은 원주의 산이 아니라 횡성, 영월, 평창에 걸쳐 있는 산이다. 서쪽으로 치악산이 있고 북동쪽으로는 계방산, 오대산, 선자령 동쪽으로는 가리왕산이 보인다. 백덕산 산행 묘미 중 하나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이웃 산의 파노라마라 했으니 인근에 위치한 산들의 이름과 방향을 머리 속에 집어 넣는다. 이렇게 하고 나니, 마치 시험 전 잘 외워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시험장에 앉으면 기억이 나지 않고 새롭게 다가 오는 학습거리처럼, 산에 가면 상대적 위치고 나발이고 머리 속은 하얗게 변하고 그저 ‘아 멋지다’라는 생각만 남지만, 그래도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계획한 산행 코스를 살피니 문재에서 925봉, 헬기장을 거쳐 사자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주 능선에 올라 붙은 후, 당재, 작은당재를 지나 정상에 오르고 먹골재를 통과하여 먹골로 하산하는 전형적인 ‘ㄷ’자형 산행이다. 오름 길에 3시간, 내림 길에 2시간이 걸릴 것이고, 휴식/식사 시간을 고려하면 5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겨울 산이라 조금은 걱정도 되지만 최근의 설산 경험이 많아 우려할 수준은 아니고, 시간이 지체되면 휴식을 조절하면 되니 얼추 계획대로 맞출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아쉬운 것은 백덕산이 백대명산 반열에 든 이유 중 하나는, 5대 적멸보궁인 법흥사를 품고 있다는 것인데, 코스가 달라 직접 가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멸보궁’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라는 뜻이다. 마음만은 오늘 산행을 통해 번뇌망상을 떨쳐버리고 싶다.
< 희망사항 >
지난 연말 계룡산 송년 산행을 준비할 때도 추운 날씨를 걱정했으니, 수 십 년 만이라는 금년 겨울의 추위는 벌써 한 달 째 지속되고 있다. 연일 영하 10도를 내려가는 것은 기본, 15도가 넘는 날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도 코 큰 찡하고 내뿜는 숨결에 김이 묻어 나오는 계절에 산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뉴스에서 오늘 기온도 영하 9.3도 란다. 내 기억으로 이렇게 한파가 한 달 간 지속된 적은 없었는데, 삼한사온이라는 말을 무색케한다. 그래도 저 얼음장 밑으로는 봄을 준비하는 생명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희망생각’이 든다.
백덕산은 그 이름에서 풍기듯이 흰 눈이 장관인 순한 육산이라 한다. 사자산 갈림길 부근과 정상부의 암릉이 있고 관음사 계곡 길도 험로이지만, 내가 오늘 택한 코스는 겨울에도 그리 위험하지 않은 비교적 완만한 길이다. 추운 날씨와는 달리 하늘이 화창하다. 오늘은 이 좋은 날씨에 백덕산에서 강원도 산들의 파노라마를 눈으로나마 섭렵해 보고 싶다.
< 백덕산 가는 길에 >
산죽산악회가 다른 안내산악회와 비교되는 점은, 산악회 역사와 산행코스 선정과 산행대장의 인상 등으로 볼 때 전문산악회의 풍모가 풍긴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느 산악회보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것도 특이하다. 오늘도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출발하여 집을 나섰다. 7시 10분 정각에 복정역에서 버스에 탑승했다. 복정에서 탑승자가 나 혼자이니 나를 위하여 예까지 온 정성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30분 일찍 출발했고 이동 거리도 멀지 않으니 오늘 귀가는 무척 빠르겠다 하고 기대해 본다. 애들 엄마가 해외여행을 가고 아들 혼자서 외할아버지 식사 챙기는 것을 두고 온 나로서는 산행 후 빠른 귀가가 가능성이 무엇보다 반갑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아들과 최근 주고 받았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금 확인한다. ‘게임, 알아서 학습, 습관’ 등의 단어들이 머리 속에 스친다. 윽박지르기 이전에 아들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아빠가 되어 달라는 아들의 부탁이 새삼스럽다. 지키도록 노력하자.
복정 출발 체 1시간도 되지 않아 여주휴게소에 도착한다. 30분이나 주어진 긴 휴식시간에 밥도 먹고 용변도 본다. 매번 도시락을 준비하다 오늘은 이른 점심을 매식을 하기로 한다. 마음은 편한데 너무 일찍 밥을 먹은 탓에 산에서의 배고픔이 걱정되어 식사와는 별도로 호도과자를 조금 사서 비상식량으로 준비한다.
9시 30분 문재터널을 지나, 오늘의 산행 들머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올려다 본 파란 하늘에는 비행기 두 대가 솟아 오르고 있다. “나의 산행을 축하해 주기 위해 공군에서 비행기까지 보냈나 보다”. 혼자만의 착각이겠지만 반갑고 기쁘다. 오늘 산행은 사진기가 없는 산행이라, 대장에게 단체사진 찍고 가자고 제안하여 쉼터 인근에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산행 준비를 마친다.
< 문재에서 백덕산 정상 >
문재터널 옆으로 난 길을 오른다. 초반부터 된비알이다. 다행히 눈은 걷기에 편하게 러셀되어 있다. 10여분 심한 비탈을 오르니 이정표가 보인다. 925봉인가 보다. 백덕산까지는 5.6km가 남았다 한다. 북쪽 사면에서 남쪽으로 오른다. 햇살이 얼굴을 비추는 것이 싫지만은 않다.
이정표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헬기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걷는데 영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대신 좌측 평창 방면으로 멋진 산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히 산만이 아닌 운무가 낮은 하늘에 떠다니는 풍경이 마치 선계(仙界)에 들어선 느낌이다.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취는 먼 산의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카메라가 없는 것이 원망스럽다.
해발 1019m에 위치한 헬기장까지는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려 도착했다(10:20). 고도가 1000m가 넘어서 인지 주위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다. 서쪽 편으로 완만한 긴 능선 중간에 뾰족이 튀어 나온 봉우리 하나가 보인다. 치악산 비로봉이다. 멀리 보이지만 사다리병창 험로가 느껴질 만큼 정상부의 암릉이 인상적이다. 오늘 등산에서 확실히 건진 것 중 하나는 치악산의 장엄한 모습이다. 치악산 밖에서 치악의 정수를 확인한다.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관조하며 바라다 보는 행위가 ‘훔쳐보기’의 묘미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여전히 운무가 남아 있는 오대산, 계방산, 선자령 산줄기는 여전히 멋지다.
헬기장 이후 완만한 능선이 이어져 사자산 갈림길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곱게 다져진 눈을 밟으며, 아들에게 빌려 온 mp3를 통해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대체로 최근 노래들인데 조용한 발라드풍의 노래가 다수다. 부자지간의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흐뭇하다.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는데, 커가면서 아들에게서 나의 습성들이 하나 둘씩 나타남을 볼 때마다 적쟎히 놀라곤 한다. 좋은 습성보다는 내 스스로 고쳤으면 하는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인지상정일까? 그것 때문에 아들을 닦달하고 욱박지른 것들이 후회로 다가 온다. 아들의 말대로 서로 변해야 하나 보다.
초반보다는 급하지 않지만 계속되는 오르막 산행 끝에 1125봉 사자산 갈림에 도착했다(10:50). 헬기장까지의 우려와는 다르게 소요시간은 당초 머리 속에 넣어 두었던 것과 크게 틀리지 않았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사자산을 넘어 법흥사 계곡으로 떨어질 것이다. 길을 좌측으로 잡는다.
지도에는 여기에서부터가 암릉지대라 한다. 길은 다행히 암릉 능선으로 난 것이 아니라, 산허리 우회로로 연결되어 있다. 우회로라 하더라도 바위 길이라 발을 헛뒫으면 바로 골짜기로 추락할 것 같아 조심스레 걷는다. 초반에 꼬리를 물던 일행도 모두 흩어졌다. 고즈녁하게 홀로 산 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갈림길에서 10여분을 걸어 작은 봉우리를 넘으니 로프길이 이어진다. 순간 당황했으나 다행히 험한 길은 짧다. 험로를 내려서니 우측으로 낭떠러지가 보이고, 그 위로 전망바위가 솟아 있다(11:02). ‘파란 하늘에 운무가 떠다니고 산들의 굽이가 깊게 파도 치는 광경’, 수억의 돈을 준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주위를 지나던 대장도 그 경관에 감동한다. 그의 고급 사진기에 멋진 장면들이 담겼다가, 산악회 홈페이에서 다운로드 받았으면 좋겠다.
산허리 길을 돌아 계속되는 길가에 마치 시루떡이 켜켜이 쌓인 듯한 범상치 않은 바위가 눈에 띤다(11:10). 이런 형상의 바위를 대개 책바위라 한다. 변산 채석강에서 비슷한 이미지의 바위들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여러모로 카메라를 두고 온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당재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고도가 1200m 부근에서 머문다. 카메라가 없으니 눈으로 사진을 찍느라 신경이 집중된다. 카메라가 시간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니 머리 속에 시간까지 기억하다가, 당재 부근에서는 핸드폰이 기록의 매체로 둔갑한다. 산허리 길에서 움푹 꺼진 안부에 도착하니 이정표가 있다. 당재다(11:25), 사자산 삼거리에서 35분이 소요되었다. 역시 예상과 들어 맞는다. 좌측으로는 비네골로 하산길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는 백년폭포를 거쳐 관음사로 하산하는 길도 있는데, 겨울철 위험을 고려하며 표식을 없앴나 보다.
아침도 먹고 휴게소에서 굴국밥도 한 그릇 해 치웠는데, 슬슬 배가 고파온다. 뱃속에 버러지가 들었나 보다. 앉을 장소가 마땅치 않아. 선 체로 호두과자와 우유를 꺼내 걸으며 먹는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 하겠다. 그래도 좋다. 보는 이 없어 좋고, 입이 즐거워 좋고, 속이 차서 좋고, 걸으며 보는 경관이 멋져 더욱 좋다.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걸으니 체 30분이 안되어 작은 당재에 도착한다(11:52). 백덕산까지는 1.2km, 관음사까지는 3.2km가 소요된다 한다. 앞으로 길어도 1시간 내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쉼 없이 앞만 보고 걷다 보니 시간이 많이 남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버스가 3시 반에서 4시에 서울로 출발한다 하였으니 서두르지 말고 즐기며 걷자 하고 다짐한다. (맨 날 다짐만 하고 실제로는 끊임없이 걷는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다짐도 무색하게 다시 걷기 시작하니 걸음에 탄력이 붙는다. 이놈의 집중력, 산에서도 놀랍다. 작은 당재를 지나며부터는 다시 오르막이다. 고도계는 이미 정상부근의 고도를 가르치고 있어 신뢰하지 않는다. 한 굽이 봉우리를 오르니 진행 방향으로 쌍봉의 형태를 한 백덕산 정상부의 모습이 보인다. 시꺼먼 털이 달린 흉물스러운 지저분한 모습이다. 문득 오전에 멀리서 본 치악산의 단아한 모습이 떠올라지며, 치악산에서 본 백덕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산에서 멀리를 그려보는 여유도 생기고 나름 많은 진보가 있었구나 하고 혼자서 흐뭇해 한다.
점점 더 정상의 모습이 뚜렷해 질 즈음, 먹골재 삼거리에 도착했다. 정상에 오른 후 다시 내려와 이곳에서 먹골재 방향으로 하산할 것이다. 눈으로 도장을 깊게 찍어 둔다. 삼거리 모퉁이를 돌자 해가 유난히 잘 드는 바위 밑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해바라기를 하며 점심을 먹고 있다. 내겐 먹을 음식도 없고 오전에 대장이 점심은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며 먹자던 생각이 나, 잠시 서서 해바라기를 하다 이내 정상으로 향한다. 고도가 조금 높아져서 그런지 길가의 눈의 양도 많아지고 바람도 제법 분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가에 백덕산의 명물 ‘N’자형 나무가 서 있다. 특이한 모양이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데, 웬 여성이 나타나 나무 위로 올라 앉으려 한다. 다리가 짧아 몇 번을 실패하더니 아이젠을 신은 체 나무 위로 기어 오른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 “아이젠을 신고 나무에 오르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렸다. 여자가 움찔한다. 소리를 지른 나도 놀란다, 내게 이런 ‘의협심이 있었나 하고’. 그녀는 내 소리에 놀라서 인지 아니면 자신의 짧은 다리 탓인지 오르는 것을 중단하고 사진 한 장을 찍고 달아나 버린다. 고얀 인간. 자기만 좋으면 자연은 훼손해도 된다 말인가. 집에서 아이들에게 평소에 어떻게 교육을 시키는지 궁금해진다. 문뜩 내 경우를 반추해 본다. 길가에 소변 누는 것이 환경오염이라면 큰일이다. 이것 말고는 산에 죄를 짓는 느낌은 없다.
< N자형 나문 >
N자형 나무를 지나며 정상 부근 바위 지대를 도는 오르막이 길고 급하게 느껴진다. 체력도
많이 소진되고 정상으로 향하는 마음도 급해져서 인가 보다. 어렵사리 한 발 한 발 오르니 드디어 백덕산
정상이 보인다(12:30).
정상의 첫인상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 온다. 황홀함에 숨이 멋는다. 서쪽으로 치악산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다. 남쪽으로 이름 모를 산들이 파도치고 (정선 백운산, 민둥산 등이 아닐까 한다), 동쪽으로는 오대산, 가리왕산 등과 함께 연초 다녀 온 선자령의 하얀 눈과 풍력발전소 단지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 온다. 운무는 여전하여 멀리 보이는 것이 산인지 구름의 모습인지 구분이 어렵다. 한참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 백덕산 정상에서 >
산 정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며 ‘파노라마’라는 표현을 평소 자주 쓰는데, 오늘은 정상의 나를 정점으로 사방의
산들이 내게로 몰려 드는 기분마저 든다. ‘영상 품평장’에서 3D 입체 사진들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마침 사진을 찍고 있는 대장에게
부탁하여 독사진 한 장을 찍는다. 고수가 찍은 사진이 기대된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보니 모자를 눌러 쓴 모습이 영 아니다. 성능은 뒤지지만 내가 환경 설정한 내 사진기에서의
내 모습이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오늘 산행에서는 독도법에 많은 신경을 쓰며 걸었다. 지도를 정확히 읽지는 못하지만 방향은 의식하며 걷자는 생각에 여러 번 지도를 꺼내어 본다. 방향 인지부터 시작하여 독도법을 조금씩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어 보아야겠다. 정상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몰려드는 인파에 떠 밀려 내려 온다. (이후 하산을 너무 일찍 하여 버스에서 기다리며 정상에서의 황홀한 풍경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항상 여유가 부족한 내 자신이 밉다.)
< 백덕산에서 먹골 >
정상에서 반대편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길이 보였으나, 왔던 길을 되 집어 내려 간다. 한 번 와 본 길이라고 오를 때보다는 힘이 덜 든다. N자형 나무를 지나 양지 바른 바위 옆에서 자스민차 한 잔을 마시며 속을 달랜다(12:45). 부근에서는 라면을 끊여 먹는 이들도 있다. 맛나겠다. 일행 없이 혼자 걷는 설음을 오늘도 달래며 서 있는데 대장이 헬기장 부근에 일행들이 있으니 자리를 옮기잔다. 식사를 준비한 것도 아니라 굳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 갈림길에서 헬기장까지는 0.3km 거리다. 산허리를 돌아 드니 양지바른 곳에 일행 2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뻘쭈미 서 있기가 민망해 내 갈 길을 간다.
먹골재로 향하는 하산 길은 제법 가파르다. 산죽산악회 일행 중 하산은 내가 선두인가 보다. 작년 1년 나 홀로 산행을 자주하면서 산행 스타일이 변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대체로 오를 때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중간이나 후미에 있다가도 정상부근에 오면 어느덧 선두 권에 다다르게 되고 하산을 하고 나면 남들보다 많이 빠른 하산이 되곤 한다. 아마도 길게 쉬지 않고 걷기 때문인데 좋은 습관인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특히 점심도 준비해 오지 않았고 마땅히 쉴 곳이 없어 한 번도 앉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헬기장에서 30분이 걸리지 않아 먹골재에 도착했다(13:26). 오면서 등산 사고를 당한 산악인을 추모하는 동판이 바위에 붙여져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주변이 낭떠러지 길이라 동판 주변에는 가 보질 못했다. 한 영혼이 고이 잠들기를 기도한다.
하산길이 하도 비탈져 뛰듯이 내려왔더니 2.5km가 넘는 길을 단숨에 와 버렸다. 이제 먹골까지 남은 거리는 2km다. 큰일났다, 너무 일찍 와 버린 것 같다. 고도와 지도를 보아 하니 가야 할 길의 사정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한데, 잘못하다 가는 2시도 안되어서 산행이 끝나 버릴 것 같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달리 할 일도 없이 천천히 길을 내려 선다. 하산 길 초입 우뚝 솟은 전나무가 인상적이다. 굵기는 가늘어도 그 높이는 하늘을 찌른다. 잎이 무성한 여름날에는 장관이겠다.
길은 완만한 내리막인데 고도는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아이러니다, 힘든 하산 길에서는 생각보다 빠르게 낮아지지 않는 고도를 원망했는데 오늘은 꺼꾸로 다. 하산 시간을 늘이려고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뒷사람들이 연거푸 추월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길을 간다. 눈 덮인 임도 길을 내려오는 기분이 한갓 지다. 한참을 내려오다 길 사정이 더 이상 가파른 내리막은 없을 듯하여 아이젠을 벗어 버린다. 족쇄를 벗으니 발목이 시원하다. 내 산행의 안전을 책임지느라 내 발이 오늘도 묵묵히 자기 본분을 훌륭히 해 주었다. 무엇으로 상을 주어야 하나 늘 미안하고 안쓰럽다.
한 두 집 민가가 보인다. 가장 높이 있는 집은 아직 눈도 다 치우지 못했나 보다. 마을까지는 꽤 먼데 차가 다닐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집들이 하나 둘씩 많아 지는 지점, 머리 위 나무에 무언가 많이도 걸려 있다. 처음에는 새 집인지 알았는데, 지나가는 산꾼에 말을 엿들으니 ‘겨우살이’란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의 가지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사는 기생식물로 사철 푸른 상록수로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해서 겨우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보통 오동나무, 팽나무, 밤나무 가지에 기생하는데, 나뭇가지에 ‘흡기’라는 빨대 모양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빨아 먹고 산다. 생명체의 삶의 방식은 참으로 다양함을 실감한다.
주차장에 세워진 버스가 반가워 창을 두드리니, 기사가 깜짝 놀란다. 벌써 왔냐고(14:12). “천천히 왔는데도 이렇습니다. 일행도 곧 오겠지요” 라고 말하고 내 자리에 앉는 것으로 백덕산에서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자리에서 내 발에 채워진 또 하나의 족쇄, 스패츠를 풀어 준다. 내 발에 대한 조그만 한 예의다.
< 하산 길 전경 >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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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백덕산 산행은 참으로 행복했다. 좋은 날씨, 고운 눈 길, 오름 길 내내 감동을 주었던 치악산의 모습과 오대산 등 동쪽 산 능선의 파노라마, 하늘의 핀 운무까지 무엇 하나 실망스러운 것이 없었던 산행이었다. 산이 있어 늘 감사하다. 내가 어디서 매주 이런 좋은 광경을 보며 호사를 즐길 수 있겠는가? 산 말고는.
여기까지는 최상의 산행이었다. 너무 일찍 내려 온 탓에 주위를 살피니, 오전에 누군가 문을 닫았다던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 가니, 10여명의 산꾼들이 제각이 음식을 먹고 있다.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안 그러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을 듯하여, 백반을 하나 시킨다. 별 반찬은 없어도 따뜻한 국과 새로 한 밥이 먹음 짓 했다. 그 사이 가게로 사람들이 몰려 들더니 이내 시장통이 된다. 도시 사람들을 상대 하기에는 느리고 순박한 아주머니들, 반찬을 더 달라는 도시인들에 성화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럴 땐 성질 급한 산꾼들이 미워진다. 사람 좀 보아 가며 몰아 세워야지 이 사람들아. 음식 값을 치른다. 6천원. 반찬에 비하면 과한 금액이지만, 우리 어머니 같이 순한 얼굴이 몰려 드는 손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나라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하며 돈을 드린다. 먹은 쟁반을 주방에 달라 주니 동동주 한 잔 하라고 권하신다. 정중히 사양하고 버스에 다시 오른다.
무료한 시간을 핸드폰 정리에 쓰고 있는데, 왕대장이 일행 중 몇 몇이 인근 식당에 닭백숙을 주문했으니 같이 먹으로 가거나 버스에서 기다리거나 하란다. 버스는 4시에 출발한 단다. 제길 2시 조금 넘어 내려 왔는데 2시간을 기다리라니, ‘산에 X먹으로 왔나, 헬기장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에 라면에 많이 들 X먹더니, 내려 와서 2차를 하려나’, 갑자기 화가 났다. 오늘은 집에 모처럼 일찍 갈 수 있을까 했는데, 틀려 버렸다. 나 혼자만의 산행이 아닌 안내산악회의 한계인가 보다.
아들에게 집을 맡기고 떠나 온 산행. 일찍 출발하니 일찍 오겠지 하는 환상은 여지없이 깨진 산행. 사진기 없는 산행 그래도 행복했던 오늘 산행.
집에 돌아와 하루를 지내고 산행일기를 쓰며 검색해 본 산죽산악회 홈페이지에는 기대했던 산행 사진들이 올라 와 있다. 모자를 엉뚱하지 써서 몰골이 말이 아닌 내 얼굴도 그 안에 있었다. 어색한 미소가 색다르다. 이 모습이 내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