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을 하면 공납금이 면제다.”. 또래보다 키가 한 뼘씩은 더 컸던 소년은 그 말에 어려운 가정형편이 떠올랐다. 별 망설임 없이 소년은 “하겠다”고 대답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적어도 공납금은 면제받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금강장사 2회 타이틀 보유자. 김삼식(47) 장사. 그의 씨름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금강장사 2회= 큰 키를 활용한 밭다리, 안다리 기술이 일품이었던 키다리 김삼식 장사. 웃는 모습이 마치 순박하기 그지없는 시골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그런 그에게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저 말인가요’ 라는 말로 깜짝 놀란 듯 했다. “저 말고도 잘한 선수들이 많은데...” 며칠 전 그는 부여에서 열린 전국시도대항 장사씨름대회에 창단 1년째를 맞은 산청중 씨름부를 데리고 참가했다.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제자들을 지켜보는 게 그저 즐겁단다. 그런 그에게 1983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씨름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금강장사에 오른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프로씨름이 갓 출범했고 대학생을 비롯해 실업 선수들까지 가세해 그 어느 때보다 씨름의 인기가 높던 해였다. 초대천하장사에 이만기가 오르며 전국이 떠들썩했던 당시였다. 그러나 이 대회서 김삼식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초대 금강장사 타이틀을 놓치고 많이 아쉬웠어요. 그래서 그해 열린 2회 대회 때는 제가 가진 모든 열정을 불살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우승을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차분히 생애 처음 금강장사에 올랐던 순간을 풀어내던 그 역시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김삼식의 금강장사 등극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당시의 대회방식은 현재의 토너먼트 방식이 아닌 리그전 방식. 6명의 선수가 한번씩은 겨뤄보고 종합성적을 따져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김삼식은 승승장구, 4승1패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또 한명의 장사가 똑 같은 성적을 기록했는데, 그가 바로 손미현(현 동아대 감독)장사였다. 동률일 경우에는 단판승부로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 규칙에 따라 손 장사와 장사 타이틀을 걸고 맞붙었다. “손 선배는 힘도 좋고 기술도 좋아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이 승부에서 김삼식은 그의 주특기인 발기술로 손 장사를 꺾었다. 승리가 확정되던 순간, 모래판위에서 두 팔을 벌리며 환호하는 그의 머리 속에는 힘들었던 지난날이 마치 흑백필름처럼 흘러갔다. 이후 11대 금강장사 결승전에서 남제현 장사를 꺾고 또다시 금강장사에 등극하면서 그의 씨름인생을 불태웠다.
◇씨름과의 만남= 김삼식은 1964년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청군 단성면 길리마을에서 태어났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소문난 산청은 선비의 고향이자 지리산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이기수, 김칠규 등의 씨름장사도 많이 배출했다.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김삼식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진주봉원초로 전학을 간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진주로 유학을 떠날 때였다. “집안사정이 넉넉지가 못했어요. 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시면서 남의 일도 돌보고, 어머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면서 생계를 꾸렸죠” 2남 3녀 중 맏이었던 김삼식이 공부에 소질을 보이자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뒷바라지를 위해 과감히 유학을 보낸 것이다. 그때만 해도 씨름과는 별 무관한 삶을 사는 듯 했다. 그러다 진주남중에 입학한 김삼식은 씨름부에 입단하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또래에 비해 한 뼘은 더 큰 키와 호리호리한 체구가 단연 눈에 띈 것이다. “사실 제의를 받고 별 망설임이 없었어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는데다 무엇보다 공납금까지 면제시켜 준다기에 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의 대회 첫 입상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전국장사씨름대회 고등부 2위에 오른 것이 처음이다. 남들보다 입상경력이 늦어도 한 참 늦은 셈이다. “당시는 체급분류가 없이 덩치가 크나 작으나 함께 시합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처럼 힘이 적은 선수는 큰 체구의 선수들을 이기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의 두각은 경상대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키가 1m82에 달했지만 몸무게가 불과 82㎏로 호리호리한 체구였던 김삼식은 약점인 힘을 극복하기 위해 큰 키를 이용한 발기술을 익히는데 주력했다. “승부를 빨리 내려고 했어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 지니까요. 그런 전략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경기시작과 함께 빠른 발기술로 승부를 내버리는 그의 씨름은 관중들에게 ‘시원시원해서 재밌다’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 전국체전, 대통령기 등을 잇 따라 석권한 김삼식은 86년 일양약품에 입단, 자신만의 씨름스타일로 금강급의 강자로 모래판을 달궜다.
◇지도자의 길= 일양약품에서 3년간의 프로생활을 마친 뒤 은퇴한 김 장사는 이후 교편을 잡으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현역시절 금강장사 2회 제패와 두 번의 천하장사 16강을 기록했다. 그의 은퇴 이후 씨름계도 많이 변했다.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대학선수들 경기를 보면 패턴이 거의 일정해요. 다들 살만 찌워서, 경기를 보면 상대를 들어올려서 이기는 경기가 거의 없어요.” 먼저 힘 빠지는 선수가 지는 패턴이 반복돼 마치 일본의 스모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경량급의 부활이 반갑다고 했다. “백두급이나 덩치가 큰 선수들은 중심이 한번 무너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샅바를 놔 버리면 체중 때문에 알아서 무너지거든요. 그런데 경량급 선수들은 달라요.” 모래판에 확실히 넘어질 때까지 누가 이겼다는 소리를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치는 게 바로 경량급의 매력이란다. “체급이 자꾸 불다 보니깐, 큰 사람 위주로 가다보니깐, 흥행도 안 되고 기술을 가진 애들이 사라지는 겁니다. 씨름에도 체중제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도자의 길로 나섰지만 제자들에게 1등을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시합을 하다보면 질수도 있지 1등 부담감을 안고 생활하면 될 것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이들이 부담 없이 씨름을 즐기고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이 나중에 커 나갈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기본기를 다지는데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가 맡은 산청중 씨름부는 지난 2008년 7월 2일 창단했다. 김 장사는 창단팀을 이끌고 지난 일년 동안 제자들과 모래판에서 동고동락을 했다. “여기가 제 고향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후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애들이 씨름에 재미를 느끼고 조금씩 기량이 늘어나는 것을 볼 때가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