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6명의 왕들중에서 "군"의 명칭을 가진 2명의 왕이있다.
한사람은 조선의 10대왕인 연산군과 15대 왕인 광해군이다.
연산군은 온갖 폭정을 일삼다가 박원종등이 중심이 된 세력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고,
광해군은 이귀(李貴)··김류(金瑬)·이괄(李适) 김자점(金自點)등 서인세력들의 쿠테타에 의해 실권을 하게된다.
역사는 광해군을 패륜아로 규정하고 있지만,
광해군이 쿠테타 세력들에게 쫓겨날 정도로 폭정을 했는지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광해군의 이름은 "혼"이며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는 임해군이 있었으며 어릴적 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에개는 후사가 없었으며, 이에 송강 정철이 맏이인 임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인빈 김시의 소생인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있던 선조의 미움을 사 삭탈관직 당하고 귀양가게 된다.
이에 동인세력들은 서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지는 의견과, 온건하게 처벌하지는 의견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전자는 북인으로 후자는 남인으로 갈리어지게 된다.
남인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으며 북인은 남명 조식의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경상도에서는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퇴계의 고향이 안동이며 남명의 고향이 함양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영변(寧邊)에서 갈라졌다.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分朝)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撫軍司)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1597년 정유재란(임진왜란 중 왜군의 2차 침략을 따로 부르는 말)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당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反正)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비록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궁궐 조성공사에 힘을 다하여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덕궁(경희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지(城池)와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군사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國境防備)에 힘썼다. 명(明)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에서 원군요청이 있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함과 동시에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능란한 중립외교솜씨를 보였다. 일본과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회답겸쇄환사로 오윤겸(吳允謙)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쇄환하였다.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선조실록(宣祖實錄)》 등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광해군의 불운은 조선의 왕들중에서 가장 무능했던 왕중의 한명인 선조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점과,
또 한명의 무능했던 왕 인조에게 권력을 빼았겼다는 사실이다.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손녀뻘 나이인 인목왕후와 결혼 하였으며,
광해군은 자신보다 18세나 어린 인목왕후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다.
선조는 재임시 잦은 양위파동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광해군은 석고대죄를 해야했다.
광해군은 탁월한 식견으로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이중외교를 펼쳤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하던 서인세텩들에게 의해 왕위에 추대된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삼천리 강산이 청나라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고
청나라 황제에게 아홉번이나 무릎을 굽혀 절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실제 인조는 광해군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으며,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실록을 없앴다고 한다.
또 영민한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독살했으며, 재임내낸 청나라에게 시달려야 했다.
광해군의 실책은 분명히 있는건 분명하나, 폭군이라고 불려지는건 서인세력들이
그들의 쿠테타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과장하게 부풀린 점이 다분하다.
청과 명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이중외교로 나라를 지켜낸 광해군,
임진왜란 7년의 참화를 복구하기 위해 힘쓴 왕....그러나 광해군은 결국 당쟁의 희생물로 사라진 비운의 왕이였다
세검정의 모습 - 서인들이 검을 씻으며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했다는 세검정.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조식의 학풍을 따르던 북인들이
실권하고 주기론을 믿는 서인들이 정권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 후 서인들은 숙종때 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나누어
지지만 조선중기에서 말기까지 권력의 한축을 담당한다. 서인의 집권으로 조선의 국토는 청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고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민초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수 없었으리라
대원군의 병장인 석파정의 일부 건물을 옮겨놓은 석파랑
숙종때 건축된 홍지문의 모습
바위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는 김윤희 회원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회원들
뒷풀이 장면....홍제동 시장과 이건 회원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