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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시간들
왜 사느냐? 그 어느 누구에게 묻는다면 그는 과연 무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길은 있지만 그 길을 제대로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인생여정. 캔버스 앞 붙든 초보화가의 모습처럼 무계획적인 젊은이의 삶, 곧 정말 자신이 처음으로 개척해나가야 할 인생의 시발점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여기 한 정리되지 않은 삶을 조명해보고 싶었다.
【잘못된 만남】
따스한 봄날 바위틈새 개나리는 남들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린 채 어깨를 으쓱하는 듯 하고, 건듯 부는 바람의 방향도 이젠 북서풍에서 동남풍으로 바꾸어 온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오는 토요일 오전이었다.
해도무역 사무실 김창수. 그의 나이는 올해 서른이다. 그는 지금 책상 위의 전화통을 응시하고 있다. 업무상 전화야 매일 무척이나 많이 와서 피곤함을 느끼는 편이지만 그러나 정작 토요일 오전 늦은 시간인 이때쯤에는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왠지 기다려지기도 한다.
한편으로 궁금증과 아울러 초조해지는 건, 이 시간에 걸려온 전화가 자신의 전화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확률적으로 틀림없이 다른 직원에게 걸려온 전화일 것이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창수로선 간혹 친구들이 퇴근 후 소주나 한잔하자고 전화를 할 때면 갈 곳 없는 노총각인 그로서는 더 이상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였으나, 그러나 요즘은 친구 녀석들에게선 그런 전화도 뜸하다. 왜냐하면 가까운 친구들은 이젠 하나 둘 장가를 가서는 예쁜 마누라와 지내는 재미에 창수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시계바늘은 12시를 넘어 오후 1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이젠 몇 분만 있으면 기다려지는 즐거운 퇴근 시간이다. 다른 동료들도 하나 둘 사무실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창수는 오늘따라 왠지 기분이 씁쓸하였다. 이 좋은 봄날을 또 방구석에서 텔레비전과 눈싸움을 해야 하나? 가볍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그 순간 창수 앞에 있는 전화기의 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역시 누구의 전화일까? 창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해도무역 입니다.”
“저어 거기 김창수 씨 계신가요?”
“네에 제가 김창수인데 그런데 왜 그러세요?”
창수는 순간 자신이 김창수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들었다.
(그래! 내가 김창수다. 나를 찾는 전화였구나. 김창수...)
그러나 마냥 좋아할 상황은 아닌 듯. 상대는 분명히 여자 목소리이긴 한데 도대체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나이가 조금은 들어 보이는 아마도 아줌마인 듯하다. 거래처 사람일까? 제품에 불만을 가지고 따지려는 것일까? 아닐 수도 있다. 기대는 반반이었다.
“저 모르겠어요? 전번에 밀양 갔다 올 때 차안에서 만났던...”
그때서야 어렴풋이 머릿속에 기억이 떠올랐다. 3개월쯤 지났을까?. 그때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오다 차안에서 만났던 여인인 것이었다.
“네에...아 아하...알아요. 어떻게 전화를 다 주시고...”
“오후에 시간 있으세요?”
(당연히 있는 것이다. 여자니까. 할머니가 아니면...)
“예 있어요. 몇 시에?”
“조금 있다가요. 시간되면 근처 다방에 가서 전화 할 게요”
“예 그럼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순간 창수는 왜 그 여인이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지 매우 궁금하기도 하였고, 그래도 비록 아줌마이긴 하지만 여자가 만나자고 하니 호기심도 생겨 싫지는 않았다. 사무실의 직원들이 창수의 전화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창수가 그 여인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었다. 고향친구 녀석이 이웃면에 사는 아가씨와 결혼을 한다고 하였었다. 그것도 시골에서 예전풍습대로 식을 올리는데 교통편이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친구들과 의논을 한 결과 창수와 다른 또 한명이 대표로 가기로 하였었다.
결혼식이 있는 날. 창수는 범일동에 있는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친구를 만나 버스에 올랐다. 창수는 시골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올 때면 기분이 매우 상쾌하였다.
버스는 복잡한 부산 시내를 벗어나 넓은 김해들판을 지난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자동차 통행량이 많았다. 겨울이지만 그래도 근처 야산에는 푸른 소나무들의 울창한 모습이 차창을 스쳐간다. 두어 시간쯤 시외를 달리자 멀리 밀양 읍내가 눈에 들어온다.
밀양! 그곳엔 항상 푸른 강물이 있고, 강가엔 아랑의 전설이 있는 영남루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고향이다!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항상 창수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창수의 고향은 밀양군 단장면으로 중학교까지는 고향에서 다녔고, 부산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그래서 그 어릴 적 소먹이고 시냇가에서 물고기 잡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하였다.
읍에서 버스를 내려서 산내면을 가는 버스를 갈아 타야한다. 마침 오늘이 밀양 장날인지 주차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둘은 아는 사람들이 있나 해서 눈여겨보았지만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버스 주차장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교외를 달린다. 비포장도로여서 먼지가 보얗게 일어났다. 산내면은 밀양읍에서 가지산을 거쳐 울주군 언양읍으로 가는 중간 지점으로 근처엔 얼음골이 있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이곳을 찾곤 한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덜컹거리는 버스는 시골 장날 손님들을 싣고 달린다. 30여분 달리자 드디어 산내면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려 신부 집을 찾아들었다. 시골이라 집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영남루 : 조선후기 창건되었고, 헌종 14년 중건된 것으로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서 밀양아리랑과 함께 어우러진 매우 유서 깊은 곳이며,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여 전망이 매우 좋다.)
결혼식은 신부의 집 마당에서 열리고 있다. 창수는 현장을 확인하고서 근처길가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다시 결혼식장으로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수일행에게 쏠렸다. 그들의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이고 외지에서 온 사람은 몇 명이 안 되었다.
한복을 입은 신랑과 신부. 식장 가운데는 영문 모르고 잡혀온 수탁이 있고, 상가에 온 듯 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한복차림의 사회자의 진행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어졌다. 창수는 이런 구식결혼식은 어릴 적 누나의 결혼식을 통해서 보아왔지만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식이 진행되고 다음 순간 문제가 생겼다. 창수는 친구는 시골에서 한다기에 단순히 참석만 하려고 왔는데 식순에 의하여 우인대표가 축사를 해야 한다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고 물으니 간단하게라도 하는 게 예의란다. 참 난감했다. 창수는 친구들의 결혼식에 사회를 보는 것은 몇 번 해보았지만 이렇게 옛날식으로 축사를 해보는 것은 생각도 안 해 보았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였다.
간혹 예전에 누나들이 시집을 갈 때면 축사라는 문구의 첫머리는 ‘구르는 수레바퀴인양 세월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본 일이 있기는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무어라고 이 자리에서 조금은 지껄여 대야해서 하긴 했는데 창수 자신도 도대체 무어라 하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었다.
우인대표랍시고 잘 차려진 점심을 얻어먹고, 부상(?)으로 씨암탉 한 마리까지 받아서 보자기에 넣고 버스를 타고 다시 읍내로 나왔다. 읍내에 도착해 보니 신부 집에서 가져온 닭이 짐이 되었다. 이걸 가져다가 어떻게 하나? 팔수도 없고, 어떻게 요리를 해서 먹나? 친구 녀석이나 창수 또한 마찬가지로 집에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없는 판에 닭을 처분하기가 걱정이었다.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고민을 하던 중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세 사람은 근처의 선술집에 들러 소주잔을 나누었다. 결혼식에서 마신 술이 아직도 얼얼하였지만 그래도 한창때라 모두들 마다하지를 않는다. 술이 거나해지고 친구에게 닭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들려 보낸 두 사람은 부산행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차에 올라 자리에 잡으려고 하는데 30대 후반정도의 한 여인이 버스에 오르다 다시 내리더니 아는 여인과 작별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창수더러 상대편의 전화번호를 적어야 한다면서 만년필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여인은 다시 차에 오르며 창수에게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창수는 주위를 둘러보니 자리가 많이 비었고, 여인도 혼자 앉아 있어 옆 자석으로 가서 앉으며 같이 이야기나 하면서 가자고 하였다.
제법 세련되어 보이는 여인은 별다른 생각 없이 같이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임 정순 나이는 올해 마흔으로 창수보다는 열 살 위였다. 그녀는 거래처 관계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뻘 여인을 만나려 오랜만에 밀양에 들렸다고 한다.
창수는 그녀에게 누나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였고, 그녀는 옆 좌석에 앉은 창수가 술 냄새가 풍겨도 마다 않고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창수는 그러한 그녀가 고마웠고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깊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거저 평범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같이 간 친구 녀석은 안중에도 없었다. 열시쯤에야 어느 듯 범일동에 도착했다.
창수는 아쉬움이 남아 그녀에게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며 이야기를 더 나누자고 말 하고 싶었지만 모두가 통행금지 시간 안에 집엘 가야하고 또한 같이 갔던 친구를 혼자 있게 한 것이 미안한 생각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창수는 여인에게 아마도 그때 차안에서 자신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주었던 것이라고 여겨졌다.
퇴근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주말이면 고향이 가까이 있는 사람은 고향을 다녀오기도 하고, 그리고 창수처럼 어떻게 휴일을 보낼까 하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있으며, 어쨌든 사람들은 오후 한시가 다가오기가 무섭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창수는 터덜터덜 교통부를 향하여 걷고 있었다. 글쎄 왜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걸까? 그땐 술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긴 했을 것 같은데 기억도 오래되고 그녀가 전화를 해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어려운 부탁이면? 보험아줌마인가? 그래도 잘 대처하면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등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약속한 다방에 갔다.
그땐 술김이라 얼굴은 기억이 잘 안 나니 상대방에서 나를 알아보겠지! 하고 있으려니 단정한 머리에 키가 훤칠하고 오버를 걸친 여인이 웃으며 다가온다.
“김창수 씨!”
“아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나 알아 보겠어요?”
창수는 기억에 나지 않았지만 아는 체를 하는 수밖에 없었고, 여인은 창수를 보자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약간은 설렌다.
“아 예..”
“지난번에 전화번호 받고 한번 안 걸어 보기도 그렇고 해서 전화 했어요. 바쁜데 시간 뺏은 거 아니죠?”
“아니요 전화 잘 하셨어요. 차는 뭘 로 하실래요?”
“커피로 하지 뭐. 안 바빠요?”
“아니 뭘요.”
“사실은 요즘 내가 어딜 좀 다닌다고 바빴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 것 때문이 아니고 그냥 시간이 좀 나서 나왔어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여인의 외모는 다소 큰 키에 몸매는 날씬하고 잘록한 허리에 가슴과 둔부는 풍만한 전형적인 중년 글래머 스타일이다. 얼굴은 귀염성이 있고 머리는 노란색상이 드는 머리는 짧게 카트를 하고, 걸음걸이는 경쾌하며 상대편을 편하게 해주는 정결한 스타일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잠깐하고 날씨 이야기를 하였고, 시간도 많고 하니 가까운 곳에 봄나들이라도 하자며 택시를 잡아타고 송도 바닷가로 향했다. 갯바람을 맞으며 해안가를 걸어 조그만 바위섬으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건너간다.
창수는 예전에도 이곳에서 자주 노닐던 추억도 있어 구름다리의 쇠줄을 흔들어 여인에게 장난을 쳤고, 여인은 어지럽다고 창수더러 그만하라고 소리를 쳐댔다.
따스한 바닷가의 널따란 바위위에 앉아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광경이며, 바위에 붙어사는 각종 조개종류, 바위틈을 잽싸게 옮겨 다니는 게의 재미있는 행동들을 보고 봄날은 만끽하며 한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송도해수욕장과 구름다리 : 송도해수욕장은 부산최초의 해수욕장이며, 구름다리는 1960년대 설치된 것으로
송림공원과 거북바위를 연결하는 송도해수욕장의 상징적인 것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건너다녔으며, 부근엔
다이빙대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오누이처럼 정다워 보였다. 창수는 직장생활 이야기며, 친구들 이야기 등 세상사는 이야기를 많이 했고, 여인은 주로 듣는 편이어서 그러한 창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즐거워하였다.
바위에서 일어서 구름다리로 나올 때였다. 그녀는 자연스레 창수의 팔을 잡았다. 순간 창수는 그녀의 그러한 행동에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여자는 여자가 아닌가? 막연히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그래서 구름다리를 건널 땐 창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건너왔다.
두 사람은 송도공원 아래의 바닷가 횟집이며, 바다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각종 바닷고기들, 평소에 자주 보던 고기와 먼 해양에서 잡혀온 이름 모를 고기들이 손님들을 기다리고, 도로가 가판대에는 소라와 대합 등 조개종류가 있고, 작은 고둥을 삶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해가 질 무렵 공원 계단아래에 있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해산물을 겸하여 소주를 시켰는데 그녀는 소주를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다않고 서너 잔을 받아 마셨다.
이윽고 바닷가엔 조금씩 어둠이 내려지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계단을 올라 한적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본격적인 관광시즌이 아니라 공원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항구 바깥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 항구를 향하여 들어오고 있는 배들과 그리고 가까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바라다보며 한동안 명상에 잠겼다.
소나무 아래 언덕바지에서 제법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한동안 바다를 응시하던 창수가 말을 꺼낸다.
“여기 괜찮지요? 옛날에 자주 왔던 곳인데”
“아가씨 하고 데이트 많이 했나보네.”
“그게 아니고 어릴 적에 이 근처에 살았거든.”
“응 바다가 잘 보여서 좋네. 상쾌하다”
“이런데 안 와봤어요?”
“여긴 처음이야”
어느 새 말투가 끝이 가벼워져 있었다. 공원에서는 시내는 물론 근처 바다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용두산 공원의 타워는 벌써 불빛이 깜빡이고 있고, 자갈치시장 너머 영도다리엔 수많은 차량들이 불빛 선을 그으며 이동하고 있고 간간이 항구의 뱃고동 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 영도 바닷가는 안개와 어두움으로 가려있고 산동네엔 여기저기 올망졸망한 불빛들이 삶의 현장임을 실감나게 한다.
이젠 저녁노을 빛이 점점 사라지고 공원은 어둠이 짙어짐과 아울러 가끔씩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창수와 여인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로 창수의 무용담이야기며, 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간다. 창수는 여인더러 자신은 여자 친구도 없으니 때로는 누나처럼, 때로는 술도 같이 마시고, 야외에도 친구처럼 같이 다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녀 또한 남동생이 없어 평소 남동생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더라고 하였다.
저녁시간에 마신 소주 때문에 제법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수는 여인과 앞으로 어떤 사이를 유지해야 좋을까에 대하여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그냥 누나처럼 평범하게 만나 이야기하고 노니며 지내는 것도 좋기는 한데 상대는 아직은 가슴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여인이다.
해운회사에 다니는 친구 중 한 녀석은 영도에 사는 연상의 한 여인을 사귄단다. 그녀의 남편은 출장이 잦아 친구 녀석과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녀석이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할 때면 겉으로는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론 왜 그렇게 부럽게 느껴지든지. 지금은 창수에게도 원한다면 그러한 기회가 주어 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는 유부녀이다. 엄연히 가정을 가진, 남편이 도사리고 있는 연상여인과의 연정이 가능할까? 그러나 창수는 아무 꺼리 낄 것 없이 혼자 버려진(?) 야생마와 같은 처지로서 뭇 여성들의 사랑을 다 받아 들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자꾸만 현실을 일탈하고 싶은 선택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자제할 수 없었다.
창수는 용기를 내어 살며시 자신의 오른 팔을 여인의 어깨에 걸쳐 보았다. 여인은 낮 동안부터 창수와 계속해서 지내왔고, 소주를 마신 탓인지 창수의 행동을 내버려두고 있다. 창수는 여인의 어깨에 걸친 팔에서 전해오는 촉감으로 야릇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 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상대가 아가씨라면 몰라도 남의 여자를...젊은 상대라면...)
술기운을 빌어 그녀의 채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남은 왼쪽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본다. 그녀는 아무런 제지하는 행동 없이 창수에게 손을 맡기고 있다.
공원의 보안등 불빛으로 보는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띄고 있고, 굴곡 있는 몸매는 순간 노총각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다. 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댄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야릇하다. 그리곤 잡고 있던 왼손은 힘을 더하여 그녀의 왼손을 꽉 잡았다. 창수의 가슴속에선 고동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창수는 처음 버스에서의 만남이후 이번의 만남이 처음인데 엉뚱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무엇인가를 저지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상대는 열 살이나 연상인 큰 누나 같은 가정주부. 그래도 여자는 여자인데 설마?
그녀가 남자인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질까? 그 것을 알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창수는 자칫 함부로 대했다가 분위기라도 깨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자꾸만 억누르고 있었다.
(에잇 미친척하고 한번 대시해 봐? 아니지 잘 못되면 개망신 당할지도 몰라. 어쩐다?)
창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몇 번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곤 하였다.
창수가 여인의 어깨에 올렸던 팔꿈치를 내리다 여인의 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볼륨감이 크게 느껴져 오는 여인의 가슴이 가볍게 출렁인다. 어쩌면 두 아이들을 키워낸 성스러운 인간의 신체 일부분 일뿐이다. 겉보기보단 풍만한 느낌이다.
곁눈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또다시 팔꿈치를 뻗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을 의식한 듯 자세를 바로잡아 앉으면서 창수에게도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표정을 하고서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창수의 손바닥을 긁는다.
(이상하다. 이 여자가 마음이 있다는 애긴가?)
순간 창수는 여인이 자신의 행동엔 부담감이 있으나 그래도 자신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다고 생각한 창수는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야! 아프다. 이러지마!”
“잠깐만요. 조금만...”
“누가 보면 어쩌려고...그냥 있자.”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요”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된다.”
“너무 좋아서 그래요.”
창수는 손으로 여인의 팔을 만지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여인의 얼굴을 만지는 건 어린애가 하면 모성에 대한 무한정한 사랑일 테고. 남편에 의한 행동은 사랑과 인륜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를 벗어난 이성에 의한 행동은 똑 같은 신체의 접촉이지만 금지된, 또한 이상야릇한 감정이 이입된, 그리고 갑작스럽게 서로의 조작된 심정이 합치된 감정을 만들어 내게 하는 도구로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어째든 지금 이 순간 여인은 사내의 숨소리가 조금은 거칠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 이제 그만. 아프다. 이제 놔라! 누가 오면 어쩔래?“
“조금만 더.. 너무 좋다”
“동생처럼 생각해서 참고 있는데 다른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여인도 창수가 싫지는 않았고, 주변에서 다른 남자와 염문을 뿌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듣고 해서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무려 열 살이나 위이고 가정이 있는 여인으로서 창수와의 관계에서 확실한 선을 그어야겠다는 생각은 확고했다.
다만, 창수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결정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이 어린 사람이 자기를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감정을 상해가며 제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잠자리를 요구하는 정도는 당연히 거부를 해야겠지만...
어둠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린다. 이야기는 평범하게 진행되었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어색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사내는 팔을 여인의 등 뒤로 올려 어깨를 꽉 잡았다. 다소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이젠 공원의 주변은 완전히 어두움으로 둘러싸였고, 바닷가엔 크고 작은 배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공원 한 구석 저 멀리엔 서너 쌍의 남녀 아베크족들이 어둠속에 사랑을 나누고 있다.
창수는 밤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도시의 그을린 대기위로 초롱초롱한 별이 빛나고 있다. 이젠 시계의 시침이 아홉시를 넘고 열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공원을 나가서 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골라 타고 4,50분 거리이고, 정류장에 내려 집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가 걸린다. 여인의 집은 창수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다.
“이젠 가자! 집에서 애들 기다리겠다.”
“알았어. 가야지”
“다음엔 이러면 안 된다. 누나처럼 대한다더니...”
“미안해...갑자기 안고 싶어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해서 겁이 나더라”
창수는 싫지는 않은 모양이라서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공원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소나무 숯을 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횟집들이 나타나고 유원지라면 흔히 있는 여관과 여인숙들이 늘어서 있다. 창수는 연의 손을 잡고 여관부근을 지나면서 또 다시 마음속에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집에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도 다 되어 가고 상대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가 아닌가?
욕망을 억제하며 창수는 여인과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심야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이대로 집에 가야한다니 창수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창수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창수의 가슴까지 전해져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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