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11)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더욱 실추된 왕실의 위상, 그리고 레드셔츠와 탁신의 갈등
더욱 실추된 왕실의 위상
'2010년 4~5월에 발생한 사태'는 태국 군주제에 대재앙적 사건이었다. 반-왕정주의에 관한 대중적 정서는 2006년 9월 19일의 군사 쿠테타 이후 출현하기 시작했고, 2008년 말에 진행된 사태들 이후 물밀듯 확산됐다. 그리고 2010년 4~5월 사태 이후 그러한 현상은 더욱 일반적인 현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 총리 정부가] 자신들에 대한 탄압 노력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드셔츠 운동'(UDD)은 마치 그러한 일을 무시하기라도 하듯이 2010년 9월 19일 '2006년 쿠테타' 4주년을 맞이하여 [연초의 대규모 항쟁 집회장이기도 했던] '라차쁘라송'(Ratchaprasong) 사거리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선 군주제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이 공개적으로 폭발했다. '라차쁘라송' 사거리에 모인 군중들 중 한 그룹이 구호를 외치자 수백명이 반복해서 그 구호를 연호했다. 그것은 태국에서 특히 매도당하는 동물인 "왕도마뱀"(monitor lizard)이란 말로서, 일종의 욕이었다. 아마도 영어에서 그 말에 해당하는 낱말은 "후레자식"(bastard: 사생아, 서출, 잡종 등을 의미)이란 말일 것이다.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후레자식이 살인을 명령했다. 후레자식이 살인을 명령했다." |
여기서 "후레자식"이란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이었다. 또한 시위대는 '센탄 원'(Central World: 센트럴 월드) 쇼핑몰 주변에 설치한 평범한 구호들을 담은 게시판들에 공공연한 반-왕정주의 그래피티를 그려넣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전례없는 사태의 전개였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태국이 이제 영원히 변화할 것임을 보여주는 폭탄선언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태국 언론들과 외신들은 이날의 일을 무시했다. 하지만 [언론자유 운동가이자 중견 언론인인] 쁘라윗 로짜나프룩(Pravit Rojanaphruk, ประวิตร โรจนพฤกษ์)은 자신의 기사에서 이 구호를 용감하게 보도했다.
금년 4월과 5월에 발생한 91명의 사망사건을 두고, 분노한 레드셔츠들 중 많은 이들은 "아피싯 퇴진!" 및 "후***이 살인을 명령했다"는 구호를 반복해서 연호했다. |
쁘라윗은 또한 <눈가리개를 벗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It may be time to take off the blindfold)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 이단적인 그래피티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이 해의 보다 나중에 개최된 레드셔츠 집회들에서는, 그러한 구호가 다시 한번 변화하면서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까지도 포함시켰다.
"후레자식이 살인을 명령했다. 개 같은 년(bitch)이 발포를 명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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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동영상) 2012년 5월 19일 방콕시위 강제진압 2주기를 맞이하여, 레드셔츠들이 2010년의 집회장이었던 라차쁘라송 사거리에 모였다. 그들은 이날 <흙먼지의 전사>(낙수 툴리딘, นักสู้ธุลีดิน)를 합창하면서 죽어간 형제자매들을 추모했다. '태국의 정태춘' 찐 깜마촌(จิ้น กรรมาชน: 본명-꾼삭 르엉콩끼얏[Kunsak Rueangkhongkiat])이 작곡한 <낙수 툴리딘>은 2010년 4~5월의 방콕시위에서 실탄을 발사하는 특수부대에 맨주먹으로 맞서다 죽어간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 되었다. 레드셔츠 지지자들은 각종 추모제 때마다 이 노래를 합창한다. 레드셔츠들이 가진 한(恨)과 비애는 국제사회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깊은 것이다. [크세] |
2010년 12월,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대사관 비밀 외교전문들 중에서도 가장 폭발성을 지닌 문건이 공개됐다. 그것은 동년 1월에 작성된 '제10BANGKOK192호' 외교전문으로,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 전 총리, 추밀원 위원인 싯티 사웻실라(Siddhi Savetsila: 1919년생) 예비역 공군대장 등이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에 관해 경멸적인 혹평을 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는 [이 외교전문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12월15일자 헤드라인으로 <태국의 플레이보이 왕세자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회의들>(Doubts over suitability of Thailand’s playboy prince)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와치라롱꼰은 이미 그들 3인의 국가원로 정객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일에 적극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총체적으로 공개되고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면서, 긴장관계는 더욱 고조됐다.
2011년 초, '아랍의 봄'(Arab spring)이 전개되면서 SNS(소셜 미디어)에 힘입은 대중적인 군중 운동이 장기 독재정권들을 전복시켜나갔다. 태국 군부와 기득권층은 고통스럽게도 그런 모습이 자신들에게도 명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오싹하는 공포감을 갖고 지켜봤다.
왕실은 실추된 이미지를 개선을 위해 나섰지만, 그런 노력이 도리어 상태를 악화시켰다. 2011년 4월, [푸미폰 국왕의 막내딸] 쭐라폰 왈라일락(Chulabhorn Walailak: 1957년생) 공주는 '우디' 밀린타찐다(“Woody” Milintachinda: 1976년생)와 인터뷰를 가졌다. '우디' 밀린타찐다는 기득권층 젊은이로서, 잘난 체를 잘하는 TV 토크쇼 진행자이다. 인터뷰 도중 우디는 예기치 않게 코믹 신을 연출했다. 그는 땅바닥에 앉아 굽신거리면서, 국왕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글썽거리고, 쭐라폰 공주의 애완견용 비스켓을 먹으며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쭐라폰 공주는 다시 한번 2010년 4~5월에 발생했던 시위대의 사망사건들은 무시하면서, 빌딩들이 불타거나 피해를 입은 일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라가 불타면서 국왕 폐하와 왕후 전하께 깊은 슬픔을 안겨드린 바 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걸음걸이 연습을 하고 계셨는데, 그때 쓰러지셨습니다. 열도 나셨고, 생리 식염수 링거 주사를 맞으시며 침대에만 누워계셔야 했습니다. 왕후 전하께서도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왕후 전하께서는, 심지어 우리나라 '아유타야 왕국'(Ayutthaya)이 버마인들의 침략으로 불탔던 때보다도 더욱 슬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같은 동포인 태국인들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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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쭐라폰 공주와 우디 밀린타찐다의 인터뷰 중 2011년 4월 3일 방송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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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쭐라폰 공주와 우디 밀린타찐다의 인터뷰 중 2011년 4월 10일 방송분. 애완견 사료를 먹는 문제의 장면은 14분20초 무렵부터 시작된다. |
게다가 쭐라폰 공주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연루된 사악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주제의 성스러운 아우라는 더욱 더 엷어졌다. 쭐라폰 공주의 연인이었던 차이야촌 로짜른꾼(Chaichon Locharernkul)은 ['쭐라롱꼰 대학' 의학부 교수로서] 존경받는 의사였다. 그런데 그가 2010년 말과 2011년 초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행방불명됐다. 이 사건에 관한 내용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하지만 공주와 박사 사이의 불륜관계가 드러나자,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그러한 뉴스들에 격노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숨의 위협을 감지한 차이야촌은 방콕(Bangkok)을 벗어났다. 미확인 귓속말 소문들에 따르면, 차이야촌이 이후 --- 세간의 존경을 받다 2011년 1월 30일 세수 97세로 입적한 --- 루웡따 마하 부워(Luangta Maha Bua: 1913~2011) 스님의 사찰로 가서 일정 기간 출가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차이야촌의 모습은 그 이후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가족과 가까운 소식통들은 차이야촌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서, 오지의 승원에서 승려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실 은폐를 위한 협박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태국의 매우 고위층인 또 다른 소식통들은 차이야촌이 살해됐다고 말한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소위 법치주의를 존중한다면서 민주국가라고 주장하는 21세기 태국에서, 차이야촌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일은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반대하는 태국 기득권 엘리트들에겐 왕세자가 만일 차기 국왕인 라마 10세로 즉위할 경우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인지를 불길하게 상기시켜준 일이었다.
2011년 7월 3일 총선
한편, 아피싯 총리와 그의 [보수정당] '민주당'(Democrat Party)은, 부리람(Buri Ram) 도를 지역기반으로 가진 네윈 칫촙(Newin Chidchob: 1958년생)의 부패한 '품짜이 타이 당'(Bhumjai Thai Party: BJT, 태국의 자랑 당)과 동맹을 맺었던 일보다도 더욱 마뜩챦은 일을 해야만 했다. 아피싯과 '민주당'은 [2011년에는 의무적으로] 총선을 실시해야만 했고, 태국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투표하도록 확신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인 북부지방 및 북동부지방에서 네윈의 '품짜이 타이 당'이 탁신을 견제하도록 하는 부정적인 계획을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 이러한 일은 아직도 그들이 지난 10년간의 정치적 과정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징표였다. 또한 그들이 아직도 태국의 빈곤층 유권자들을 무식한 백치들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빈곤층 유권자들의 표를 단돈 몇백 바트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새롭게 강화된 군사조직인 '국내안보작전사령부'(ISOC)는 '민주당' 및 그와 한패인 '품짜이 타이 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했다. 현 육군사령관인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은 21세기 태국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 거의 코메디 수준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국가를 위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아는 착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을 선출하라"면서 어설픈 지침을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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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1년 6월 14일 밤에 방영된 쁘라윳 짠오차 태국 육군사령관의 대국민 TV 연설 장면. 그는 이날 연설을 통해 태국의 유권자들에게 총선과 관련된 "조언"을 하면서, 잉락 친나왓 후보가 이끄는 친탁신계 '프어타이 당'이 승리할 경우 "군부가 개입"할 가능성이 있음도 시사하며 은근히 위협했다. |
태국의 유권자들은 탁신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1967년생) 후보가 명목상 이끌었던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에 압도적인 투표를 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프어타이 당'은 75%의 지지율과 [국회의원 의석 총 500석 중] 265석을 획득하면서 원내 다수당이 됐다. 기득권 세력이 '프어타이 당'의 선거 승리를 방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승리는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역주)
아피싯의 '민주당'은 159석을 획득하여, 또 다시 1위와도 큰 차이로 뒤진 2위에 머물고 말았다. 네윈의 '품짜이 타이 당'은 (태국의 납세자들에게 착취한) 막대한 자금을 유권자 매수에 쏟아부었지만, 겨우 34석만 획득하여 결정적인 말로를 보였다. [극우 보수 왕당파] '옐로셔츠 운동'(PAD)이 펼친 투표거부 운동 역시 대실패로 끝났다.
아피싯과 네윈은 선거에서 굴욕감을 맛봤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총선에서 완패한 그들이 아직 차기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기 전인 2011년 7월 중순, 그들은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연루된 또 다른 위기와 씨름해야만 했다. 이번 사건 만큼은 왕세자 본인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태국에서 도로공사를 수주했다 파산한] 독일 기업 '발터 바우'(Walter Bau AG) 사에 빌려줬던 채무를 변제받기 위해, 채권단이 태국 정부에 청구한 배상금 담보로서 왕세자의 전용기 (국영)'타이 항공' 소속 '보잉 737' 기를 [태국 정부 자산으로 분류하여] 뮌헨의 공항에서 압류 했던 것이다. 그것은 왕세자의 개인적 채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발터 바우' 사 관련 채권단은 태국 정부의 채무 지급을 압박하기 위해 왕세자 전용기에 가압류 조취를 취했다.
전통적인 태국 기득권층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중진 인사 대부분도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맹렬한 반대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용기 가압류 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왕세자에게 충성스런 신하처럼 보이도록 강요했다. 그런데 '민주당'의 어설픈 해결 노력은 가뜩이나 나쁜 상태를 최악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들은 독일 사법부가 태국 사법부와는 달리 독립성을 지니고 있고, 독일 사법부가 자국 정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태국 정부는 이 사건의 중재자로서 성격 불안자인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 1944년생) 외무부장관을 현지에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태국 정부는 [독일 사법부에] 압류된 '보잉 737' 기가 [정부 재산이 아니라]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사적 재산이라고 주장하려 했다. 이 주장은 많은 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왕세자는 제2의 "개인적" 737기 1대를 뮌헨 공항으로 더 불러들였고, 이 항공기를 기존에 가압류된 항공기와 나란히 계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사태 해결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로운 당사자들
2011년 8월, 왕세자가 2번째 결혼 생활에서 얻었던 아들 4명이 사전에 기획된 도발적인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왕세자는 2번째 부인이었던 수짜리니 왕자비(유와티타 뽈쁘라셋: 별명-'몸 벤츠')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4명을 [자신의 자식들이 아니라며] 의절한 상태였다. 이들의 공개서한은 태국인들에게 그들의 존재감을 새롭게 상기시켜주었다.
친구 여러분.
금년은 우리가 고국을 떠난지 15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인터넷이나 여타 경로를 통해, 국내 및 해외에 거주하는 태국 국민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안부 말씀에 진심어린 감사드리며, 너무도 많은 분들이 저희를 잊지 않고 있으신 것에 사의를 표합니다. 저희는 일부 국민들께서 지난 몇년간 저희들의 안부나 행방에 관심을 갖고 계셨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혼동과 잘못된 소문들을 없애기 위해, 저희는 이 기회를 빌어 저희들의 상황을 알려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는 우리의 삶이 어찌하여 이토록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희들이 왕실 법도에 따라 살아야 하며, 저희가 감사나 존경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점도 상기시켜주려 하셨습니다. 당시 저희의 상황은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나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는 자신들의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 공부했고, 왕실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네 형제 중 장남인] 쭈타와촌(Juthavachara: 1979년생)은 항공 전자공학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항공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쭈타와촌은 이후 항공산업에서 종사하다가, 현재는 법학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차남인] 와차레손(Vacharaesorn: 1981년생)은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법학석사(MLL)를 거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개업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3남인] 짜끄리왓(Chakriwat: 1983년생)은 화학을 부전공으로 하면서 정신생물학(psychobiology)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는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면서 곧 임상의 생활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막내인] 와차라위(Vatchrawee: 1985년생)는 국제통상학 및 금융학을 복수 전공했고,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현재 법학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공부 중입니다.
또한 저희는 짜끄리윗의 건강에 관해 많은 소문들이 떠돌고 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씀드린다면, 짜끄리왓은 13세 때부터 '신경 섬유종증'(Neurofibromatosis: 제2형)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 질병은 신경계를 따라 종양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매년 수술이나 방사능 치료가 필요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종양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짜끄리윗은 너무도 많은 방사능 치료를 받아서 청각 신경에 일부 장애를 갖고 있고, 한쪽 귀는 청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는 금년 8월에 다시 한번 수술을 받을 예정입니다. 짜끄리윗은 이렇게 정기적으로 탈진에 이를 정도의 과정들을 겪어야만 하지만, 자신의 의학 공부를 완료할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저희들의 상황에 관한 추측을 하면서, 잘못됐거나 악의적인 소문들을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공개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군주제에 누가 될 우려도 있으므로, 저희들은 그런 데 대응하기보다는 침묵을 지켜왔습니다. 저희는 이번 서신을 통하여 아직도 저희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져주시고 계신 많은 태국인들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 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도 명확히 해두고자 합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희는 단 한번도 태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고국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귀국이 허락될 때까지, 왕실에 대한 충심을 갖고 조국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쭈타와촌, 와차레손, 짜끄라왓, 와차라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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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쭈타와촌 형제들이 자신들의 블로그에 게시한 사진. |
(사진: 위키피디아 태국어판) 좌로부터 짜끄라왓(3남), 쭈타와촌(장남), 와차레손(차남), 와차라위(막내). |
이 공개서한이 등장하게 된 것은 태국 기득권 세력의 계획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왕위계승 과정에서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배제시킨 후, 왕세자의 어린 아들인 티빵꼰 라서미촛(Dipangkorn Rasmijoti) 왕자를 라마 10세로 즉위시키고 시리낏 왕후를 섭정으로 하는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인 티빵꼰은 이제 겨우 6세였고, 그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미 대사관이 2009년 11월 말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제09BANGKOK2967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그(=티빵꼰)는 육체적, 정신적 발달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음. |
이 어린 왕자는 결코 국왕이 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짜끄리 왕가'(Chakri Dynasty)의 '마히돈 가문 계보'(Mahidol line)에서 티빵꼰 이외에 왕위계승 적통을 지닌 남성 계승권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엘리트 계층의 여러 인사들은 오랜 기간 [국왕의 차녀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Maha Chakri Sirindhorn: 1955년생) 공주가 차기 국왕이 됐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짜끄리 왕조'의 군주제를 위한 장기적 관점의 해법은 아니었다. 독신인 시린톤 공주에겐 자녀들이 없었고, 이미 56세의 나이였다.
더구나 왕세자가 그런 일을 결코 허용하지도 않을 터였다. 태국의 엘리트 계층의 원래 계획은, 왕세자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왕세자에게 막대한 왕실 자산의 접근권을 허용하고 그의 자식 중 한명을 국왕으로 즉위시킨다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선에서 양보를 얻어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엘리트 계층은 왕세자가 시린톤 공주의 즉위만큼은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그 경우 왕세자가 모든 것을 동원해 방해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왕위계승 과정에서 충격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려면, 와치라롱꼰의 자녀들 중 한명을 즉위시키는 것 밖에는 현실적 대안이 없는 상태였다. 일각에서는 왕세자의 장녀인 파차라끼띠야파(Bajrakitiyabha 혹은 Patchara Kittiyapa: 1978년생) 공주를 선호하는 견해도 있었다. [검사로도 근무 중인] 파차라끼띠야파 공주는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왕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순수한" 혈통도 갖고 있었다. [왕세자의 첫번째 부인인] 그녀의 어머니는 시리낏 왕후의 질녀인 솜사왈리 끼띠야꼰(Soamsavali Kitiyakara: 1957년생) 왕자비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층은 여성 국왕의 탄생 전망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특히 파차라끼띠야파 공주가 시린톤 공주 만큼의 대중적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왕세자와도 사이가 가까운 것으로 보여 더욱 더 그러했다. 따라서 기득권층이 보기엔, [쭈타와촌을 비롯한] 위와차라웡(Vivacharawongse) 4형제가 다른 후보들보다는 훨씬 더 수용할만한 대안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엘리트 계층의 일부 인사들이 미국에 있던 이들 형제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와치라롱꼰 스스로 의절해버렸던 그의 아들들이 이제 왕위계승 투쟁이란 무대로 불려나오고 있었다.
잉락의 집권 : 정치적 역학 변화
잉락 친나왓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갈등의 역학구조는 다시 한번 변화했다. 탁신 친나왓이 다시금 정상에 복귀했다. 만일 푸미폰 국왕이 사망하여 '추밀원'이 왕세자의 즉위를 어줍쟎게 조작하려 시도한다면, 탁신은 의회를 이용해 그런 시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됐다. 기득권 진영은 국왕의 권위가 붕괴로 휘청거리던 상태에서 의회의 통제권까지 상실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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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1년 6월, 선거유세에 나선 잉락 친나왓 후보. 잉락은 2011년 총선에서 일약 '프어타이 당'의 후보로 지명되기 전까지는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비록 '프어타이 당'의 광역지역 책임자로서 몇년간 활동한 전력은 있었지만,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후광이 없었다면 그녀가 태국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거운동 과정부터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친화감으로 유권자들의 감성을 파고 들었다. 그녀는 2011년 8월부터 임기를 시작하지만, 불과 2달 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홍수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이하여, 이후 약 3개월간 재난 극복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이 여성 총리는 2014년 5월 7일, 헌법재판소의 직권남용 판결로 물러날 때까지 약 1천일 동안, 갖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총리직을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크세] |
(사진) 2011년 7월 총선에서 잉락 친나왓 후보의 '프어타이 당'이 사용한 선거운동 로고. 기호는 1번이었다.
게다가 탁신은 자신의 여동생이 거둔 압도적인 승리를, 자신의 부정부패 유죄 판결을 뒤집는 데 필요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이 빼앗겼던 막대한 자산도 되찾고, 자유인으로서 귀국할 수도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이러한 일을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기득권 세력은 탁신이 귀국해 다시금 총리가 되거나, 아니면 정계를 은퇴한 척 하면서 매우 명시적인 권력중개인으로 행세할 경우, 자신들이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올바른 것이었고, 탁신이라는 거대한 힘이 그들을 으스러뜨릴 터였다. 탁신은 심지어 해외 망명생활 중에도 자신이 가공할만한 적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한 그가 귀국할 경우 게임은 끝나는 셈이었다.
많은 이들은 군부가 나서 권력을 장악하고 잉락 정부를 축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쁘라윳 육군사령관 체제의 군부가 2011년 중반까지 발언은 거칠게 했지만, 실제 군부의 상황은 심각한 전략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군 수뇌부는 육군이 위험할만치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급 장교들이나 사병들 중 엄청난 수가 탁신 진영에 우호적이거나 적극적 지지층이었다. 또한 탁신의 정치적 전망이 또 다시 공개적으로 공격당하거나, 혹은 '레드셔츠 운동'(UDD)에 대한 강제진압이 다시금 발생할 경우, 그들이 용납하지도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만일 쁘라윳이 그런 시도를 한다면, 태국 육군은 그의 발 아래서 분해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둘째, '아랍의 봄'이 21세기가 SNS(소셜 미디어)의 시대임을 보여준 것이란 점을 태국 군 수뇌부가 깨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트위터'(Twitter)가 총보다 강했고, 군중들의 시위가 군대보다 강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전세계에 걸쳐 '페이스북'(Facebook)의 영향력에 힙입은 혁명들이 권위주의 정권들을 쓰러뜨리는 드라마틱한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매체든 새로운 매체든 군부의 개입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것이고, 군부의 개입이 초래할 결과 역시 매우 다른 형태가 될 터였다.
셋째, 군부는 전년도(2010)에 방콕에서 레드셔츠 시위대를 학살하여 대중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고, 그로 인해 태국 내에서 정치적 활동자로서의 적법성이 매우 취약해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심지어는 추밀원 의장 쁘렘 같은 광신도조차 마음 속으론 실용주의자였다는 점이다. 태국 군부의 주된 목표는 항상 군부의 권력과 특권을 보존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싸움을 한 역사가 없었고, 이 시점에서 그런 싸움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육군사령관 쁘라윳은 자신이 두 여성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리낏 왕후는 아직도 자신이 [버마 침략기에] 코끼리를 타고 싸웠던 수리요타이 왕후(Queen Suriyothai)처럼, 스스로 섭정이 되어 나라를 파괴하려는 적으로부터 태국을 구할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상황은 쁘라윳 사령관에게 계속해서 강경 노선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엘리트 계층은 잉락 총리가 정치적 신참이라며 경멸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가해진 압력에서 재빨리 벗어나려 했고, 실제로 자신의 미숙함과 악의 없는 태도에서 도리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려운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유쾌하면서도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태국의 기득권 세력은 그녀를 악마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태국 원로 정객들의 대부분은 차마 그녀를 미워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일정 정도 부성애적 보호본능까지 갖게 됐다. 그러다보니 쁘라윳은 두 여인 사이에 낀 입장이 돼버렸고, 종종 사교적 실수나 심술궂은 감정분출을 보이며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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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CC / Flickr) 잉락 총리는 군 수뇌부와도 비교적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여 2013년 7월부터 국방부장관을 겸직, 태국 최초의 여성 국방부장관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잉락 총리(중앙)가 태국 군부의 실질적 최고 실세인 쁘라윳 짠오차 육군사령관과 군대의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 |
탁신의 부활
숀 크리스핀(Shawn Crispin)이 <아시아 타임스>(Asia Times)에 2011년 6월 30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탁신은 2011년 2월 브루나이에서 군부 및 왕실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이 협상의 참석자들은 탁신의 측근 와따나 므엉숙(Wattana Muangsook, วัฒนา เมืองสุข: 1957년생), 시리낏 왕후의 시녀 짜룽낏 티까라(Jarungjit Thikara), 그리고 당시 [아피싯 정권의] 국방부장관을 맡고 있던 쁘라윗 웡수완(Prawit Wongsuwan: 1945년생) 장군이었다. 이 협상의 참석자들은 만일 '프어타이 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집권을 허용키로 합의했다고 한다. 크리스핀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브루나이에서의 협상에 관해 잘 아는 소식통에 따르면, 군부는 '프어타이 당'이 신 정부를 구성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는 대신, 탁신으로부터 2006년 쿠테타 및 작년(2010)의 유혈진압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나 사법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고 한다. 탁신은 또한 연례 군 인사이동을 포함하여 군 내부의 광범위한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군 수뇌부의 자체적 결정에 맡긴다는 다짐도 했다고 한다. 쁘라윳 짠오차 육군사령관은 왕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왕후근위대'(제21연대) 계파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의 직책를 앞으로도 3년간 더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이 협상에서 탁신의 대리인은 자파 진영 내부의 반-왕당주의 분파들을 관리할 것이라는 점도 밝혔다고 한다. 여기에는 '레드셔츠 운동'(UDD) 및 '프어타이 당' 내부의 분파들이 포함된다. 많은 왕당파들은 최근 몇년간 왕실모독과 관련된 정보들이 홍수처럼 밀려든 것과 관련하여, UDD의 해외 지부들이 익명으로 인터넷 상에 올린 정보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
크리스핀의 추측은 부분적으로만 옳았다. 탁신은 실제로 군부 및 왕실과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루나이에서의 대화는 주로 왕실과의 화해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으로서, 군부와의 협상은 아니었다. 국방부장관 쁘라윗 장군은 [군부가 아니라] 푸미폰 국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그곳에 갔던 것이다. 쁘라윗은 지난 몇년간 푸미폰 국왕의 측근 그룹에서 핵심 인사로 부상하여, '라마9세의 해결사'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이전에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이나 아난 전 총리가 맡았던 역할과 마찬가지였다.
탁신은 이 대화 기회를 이용하여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의 대리인들에게 자신이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킬 의도가 없음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탁신은 진심으로 왕당파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탁신은 군부에 대해서도 자신이 군대의 예산 문제나 인사이동에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려 했다. 하지만 탁신은 당시의 협상에서 왕실이나 군부 중 어느쪽과도 아무런 타협을 이뤄내지 못했고, 심지어는 비공식적 결과조차 도출하지 못했다.
탁신은 이후 자신의 귀국 길을 정지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전환했다. 스스로 해외 망명을 선택한 이 재벌 출신의 정치인이 태국의 정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것 같은 전망이 압도적인 상황으로 변하자, 와치라롱꼰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발을 담갔던 기득권 진영 인사들은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탁신은 넉넉한 보상을 약속하며 그들의 전향을 유도했다. 즉, 자신이 승리자가 되어 귀국만 하면, 그들에게 적절한 자리를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 방식이었다. 심지어는 손티 분냐랏끌린(Sonthi Boonyaratglin: 1946년생) 같은 인물도 탁신과의 동맹에 스스로 이끌려 들어왔다. 손티는 나약하고 부패한 예비역 대장으로서, 2006년 쿠테타 당시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이 쿠테타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인물이다. 기득권 진영은 탁신과 와치라롱꼰을 반대하는 일에서 비교적 단결된 전선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단결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다.
탁신은 자신의 말에 충실하여, [집권 여당이 된] '프어타이 당'에는 군부의 일에 개입하지 말도록 지시했고, 정부 당국에도 가혹한 악법인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 및 [아피싯 정권에서 새로 제정된] <컴퓨터 범죄법>(Computer Crimes Act)에 따른 단속을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
* 왕실모독 처벌법 단속
2011년 11월 23일, 당시 62세였던 암폰 땅너파꾼(Ampon Tangnoppakul: [역주] 감옥에서 사망)이란 노인이 <왕실모독 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20년의 충격적인 형량을 선고받았다. 그의 혐의는 [레드셔츠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이 진행 중이던] 2010년 5월의 암울한 시기에, 아피싯 총리 측근의 휴대폰에 군주제를 모독하는 문자메세지(SMS)를 송신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냈다고 고발당한 문자메세지들은 다음과 같다.
1번째 SMS (2010-5-9): ขึ้นป้ายด่วน อีราชนีชั่วมันไม่ยอมเอาเพชรไดรมอนด์ไปคืนซาอุฯ ราชวงศ์หัวควยมันพังแน่ [긴급히 게시판에 올릴 것. 사악한 왕후가 그 다이아몬드를 사우디 아라비아에 돌려주길 거부했다. 이 엿 같은 왕국은 망할 것이 분명하다.]
2번째 SMS (2010-5-11): อีราชีนีชั่ว อีหีเหล็กมึงแน่จริงมึงส่งทหารเหี้ยๆ มาปราบพวกกูซิวะ โคตรอีดอกทอง ชั่วทั้งตระกูล [사악한 왕후, 좆 같은 년. 네 년이 자신 있으면, 나를 잡으러 군대를 한번 보내봐. 포주 같은 년, 콩가루 집안 출신아.]
3번째 SMS (2010-5-12): 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อยู่หัวหัวควย อีราชีนีหีเหล็ก ไอ้อีสองตัวนี้มันบงการฆ่าประชาชน ต้องเอาส้นตีนเหยียบหน้ามัน [병신 같은 국왕 폐하, 좆 같은 왕후, 너희 둘이 백성들을 죽이라 명령했다. 구두 굽으로 얼굴을 찍어주마.]
4번째 SMS (2010-5-22): ช่วยบอกไอ้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อยู่หัวหัวควยกับอีราชินีหีเหล็ก และลูกหลานมันทุกๆ คนต้องตาย [병신 같은 국왕 폐하께 고하라. 좆 같은 왕후 년과 그년 자식들, 전부 죽을 것이라고 전해.] |
암폰 노인의 혐의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들은 이례적일 정도로 빈약했다. 검찰은 이 노인이 어떤 방법으로 아피싯 총리의 비서 전화번호를 획득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문자메세지가 전송된 전화기의 번호 역시 암폰 노인의 전화번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검찰은 메세지를 전송한 전화번호의 '국제 이동단말기 식별번호'(IMEI)가 암폰 노인의 전화기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암폰 노인의 친인척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암폰 노인이 평소 국왕과 왕후를 존경했다는 증언을 얻어냈다. 11세 된 손녀딸은 법정진술을 통해, 할아버지가 2009년에 국왕의 건강을 기원하는 방명록에 서명을 하기 위해 자신을 데리고 [국왕이 입원 중이던] '시리랏 병원'(Siriraj Hospital)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또한 변호인단은 IMEI를 복제하는 일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를 법정 내에서 증명해보이기도 했다. 약간의 기술적 지식만 가진 이라면, 자신의 휴대폰이 가진 고유 식별부호를 드러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문자메세지를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인도 그런 방식을 이용해 암폰 노인의 휴대폰 IMEI로 위장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재판부는 암폰 노인의 범죄 혐의를 증명하기엔 검찰측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이유는 암폰 노인이 자신에게 적용된 의심을 걷어낼 만큼 충분한 증명을 못했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해당 문자메세지의 내용은 국왕 폐하 및 왕후 전하에 대한 사전에 계획된 모독이자 악의적 표현으로서, 그 분들의 고상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증오와 경멸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명예훼손이다. 또한 태국 전역의 국민들이 폐하 부처께서 자비로운 분들이라는 점을 이미 배웠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그릇된 본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중략)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해당 혐의에 관해 피고인은 유죄이다. |
이 판결은 대부분의 태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국제적인 비난 여론도 일어났다.
2011년 12월 8일, 이번에는 미국 시민권자인 조 고든(Joe Gordon)에게 왕실모독 혐의가 적용되어 2년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재미교포인] 고든은 [태국에서 금서로 지정된] 폴 핸들리(Paul M. Handley)의 <왕은 절대 웃지 않는다>(The King Never Smiles)를 [미국의] 온라인 상에서 태국어로 발췌 번역해 공개한 혐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보석을 신청했지만 거부됐고, 결국 신속한 재판과 국왕의 사면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말았다. 잉락 총리 정부의 출범과 함께 <왕실모독죄>에 관해 보다 이성적인 단속을 기대했던 태국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 2011년 대홍수 재난
2011년의 마지막 몇달 동안 방콕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의 많은 국토가 재앙적인 대홍수에 침수됐다. 이 사건은 푸미폰 국왕의 아우라가 더욱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나약하고 의기소침해 있던 보수 야당 '민주당'은 이 자연재해를 잉락 정권 공격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잉락 총리 정부의 재난 대처 능력은 과거 정권들 만큼은 서툴지 않았다. 태국 정치에서 무능과 부정부패는 고질적이고 체계적인 문제로서, 결코 '프어타이 당'만의 독특한 문제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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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여성 총리의 눈물. 방콕 홍수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도한 채널4 뉴스의 2011년 10월 27일자 보도. 초반에 나오는 붉은색 부분은 홍수로 침수된 지역이다. 잉락 총리에게 한 여기자가 "울고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아니다.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다"며 부인한다. |
도리어, 대홍수로 인해 이념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당사자는 푸미폰 국왕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재위기간 동안, 그를 둘러싼 신화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는 푸미폰 국왕이 태국 수자원을 관리하는 데 신비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홍수방지 수단을 고안해내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많은 태국인들이 2011년 대홍수의 격렬함으로부터 (정확하게) 도출해낸 메세지는 푸미폰 국왕이 수문학적 천재라고 떠들었던 것이 또 하나의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몬테사노(Michael Montesano)는 <자카르타 글로브>(The Jakarta Globe)에 10월27일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이번 홍수는 태국 국왕의 역할에 관해 정치적, 이념적 논쟁을 촉발시켰다.
[쓰나미 재난 예언으로도 유명한] '기상청'(Department of Meteorology) 청장 출신의 서밋 탐마소로차(Smith Dharmasoraoja, สมิทธ ธรรมสโรช: 1937년생)는 최근 며칠간 발생한 홍수 위기가 태국의 잘못된 물관리 방식 때문이라고 발언했다. 최근 태국에서는 유수지의 저하와 마구잡이식 도시개발과 산업화, 그리고 댐 관리에 관한 아이디어가 부족한 수자원 관료들의 경직성 등 장기적 요소들에 관한 이해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근 몇달 동안의 엄청난 폭우에서 기인한 이번 재난의 발생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태국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물관리 분야에 관심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푸미폰 국왕의 개인적 유산과 결부될 것이라는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국왕의 치적과 관련시킨 이러한 이념적 갈등이 이번 홍수만큼이나 국가에 대한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
탁신의 귀국 시도
2012년 초, 탁신은 자신의 귀국이 결정적 국면으로 접어들도록 할 계획을 세웠다. 탁신은 자신이 군부와 기득권 진영을 달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자신의 귀국에 동의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탁신의 변호사인 너빠돈 파타마(Noppadon Pattama: 1961년생) 전 외무부장관은 2012년 3월 <쁘라차찻>(Prachachat) 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탁신이나 '프어타이 당'을 보수 진영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탁신은 태국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이 점을 확신해주길 바란다. |
탁신이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지 묻자, 너빠돈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가 그들 진영이 갖고 있는 현재의 지위들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면 된다. 우리는 태국의 주된 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군 인사에 개입하기 위한 <국방부 행정법> 개정과 같은 엄청난 야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또한 <형법 제112조>(=왕실모독 처벌법)도 개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
그것은 사실이었다. 탁신은 태국의 기본적인 권력구조를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기존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이 최정상에 서고자 했다. 즉,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국왕으로 즉위시킨 후, 자신은 총리로서 태국을 수십년간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말로 바로 태국의 전통적 기득권층이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일이 필연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탁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런 결과를 수용할 수가 없거나, 아니면 와치라롱꼰의 확고한 적대세력인 쁘렘이나 아난 같은 이들의 인맥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완감함은 부서져나갔고, 확고한 지지도 상실했으며, 마치 포위된 형국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엘리트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최후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탁신 친나왓의 귀국을 막는 것을 의미했다.
탁신의 귀국 계획은 국회 내에 '국가화합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일도 포함했다. 이 위원회의 다수는 탁신의 '프어타이 당' 소속 인사들이었지만, 그 성격은 불편부당한 중립적 기구라고 전제했다. 그리고 [2006년 쿠테타의 선봉을 맡았던] 한때의 적이었다 이제는 동지로 변한 손티 분냐랏끌린 예비역 대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3월 국회에서, 손티는 추밀원 의장 쁘렘 장군이 2006년 쿠테타의 배후 기획자인가를 묻는 단도직입적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것이 명확한 사실일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질문에 관해선, 설령 죽더라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때가 되면 사실은 저절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
2012년 4월 초, '국가화합 특별위원회'는 '국가적 화해를 위한 권고사항'을 발표했다. 탁신이 문안을 작성한 이 권고사항에서, "화해" 계획의 핵심은 극도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2가지 제안이었다. 첫째, 2010년 레드셔츠 시위 유혈진압 사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2006년까지 소급해서 적용하는 포괄적인 사면령이다. 이 조항은 [2010년 학살 책임자 처벌을 바라는] 레드셔츠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둘째, 2006년 군사 쿠테타 직후 설치됐다 사라진 '자산조사위원회'(Assets Examination Committee)가 탁신 자신 및 그의 행정부에 적용했던 모든 종류의 부패 혐의를 무효화시키는 일이다. 이 조항은 다른 모든 이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 국가화합안이 탁신 개인의 협소한 사익을 추구토록 만드는 연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 이번만큼은 일정 정도 정확한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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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12년 4월 라오스를 방문한 탁신이 메가폰을 잡고 자신을 보러 태국에서 라오스까지 온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
탁신과 레드셔츠 사이의 균열
탁신은 '국가화합안' 중 첫번째 조항은 기득권 진영이 충분히 수용할만큼 타협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그 어느때보다 태국에 가까이 있으며 조만간 귀국하게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전통 설날인 송끄란(Songkran)을 전후해] 태국의 국경선 주변을 돌아다녔다. 라오스를 방문한 데 이어, 캄보디아의 시엠립(Siem Reap)도 방문했다. 4월14일의 시엠립 집회에는 태국에서 온 수많은 레드셔츠 지지자들도 참석했다. 탁신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저는 조국의 공기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저는 금년이 아주 좋은 한해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올해는 왕세자 저하가 60세가 되시는 해이고, 왕후 전하께서 80세가 되시는 상서로운 해입니다. 제가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귀국할 것이라는 징후가 많이 존재합니다. |
탁신은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점을 고국으로 전파시키기 위해, 갑작스레 예정에도 없던 <마이 웨이>(My Way)를 부르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시기가 너무 안 좋았고, 조율된 일정보다 계속해서 앞서나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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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2년 4월 14일, 캄보디아의 시엠립에서 열린 집회에서, 탁신은 들뜬 마음에 <마이 웨이>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
탁신의 행동은 그의 지지자들 중 많은 이들의 심기를 참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2010년 4~5월의 시위 과정에서 체포됐던 레드셔츠 수감자들은 아직도 감옥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리고 <왕실모독 처벌법>을 통한 탄압 역시 그대로였다. 많은 이들은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전까지는 태국 사회의 불공정과 2중 잣대는 극복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닉 노스티츠(Nick Nostitz)는 빠툼타니(Pathum Thani) 도에서 진행된 레드셔츠들의 송끄란 파티에 다녀온 후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들이 그와 유사한 느낌을 표출했음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자주 등장했던 화제는 국가화합 절차와 사면안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국가화합안은 [국회 산하 싱크탱크인] <쁘라차티뽁 국왕[라마 7세] 연구소>(King Prajadhipok's Institute: KPI) 발행 보고서에서 시작되어, 정부가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지 사람들은 예정된 사면안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찰름 유밤룽(Chalerm Yubamrung: 1947년생) 부총리에 대해 더욱 그러했다. 현지 사람들은 찰름 부총리를 레드셔츠 운동 진영의 인물로 보지 않았고, 매우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사면 이전에 먼저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은 '프어타이 당'이 국민의 위에 있을 수는 없다면서, '프어타이 당'이 먼저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 위의 지도자들 중 한명은 발언에서, 자신들은 아직도 여전히 탁신을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투쟁이 탁신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어선 안 된다고도 말했다. 그는 아피싯 웻차치와,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 '옐로셔츠 운동 '(PAD) 지지자들도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면서, '암맛'(Amart: 양반귀족 계층)은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만 있으면서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빠툼타니 지역의 몇몇 지도자들은 현재 추진 중인 국가화합안과 사면안 계획이 '레드셔츠 운동' 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일부는 사면안을 지지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것이다. |
솜삭 찌얌티라사꾼(Somsak Jeamteerasakul: 1958년생) 교수는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의 뛰어난 역사학사로서, 현재의 태국 정치에 관해 가장 날카로운 논평가 중 한명이다. 그는 레드셔츠들 스스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자문해봐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탁신을 태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중요한지, 아니면 정치적 투옥자들이 중요한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솜삭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용감하면서도 냉소적 재치를 지닌 발언을 많이 게시하여, 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소셜 미디어의 영웅으로 부상한 인물이다. 젊은이들은 솜삭을 단순히 정치적 통찰만 제공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감성적인 도덕적 지침의 제공자로 여긴다. 솜삭의 논평은 탁신의 전술에 쉽지 않은 부담감을 안겨줬다.
2012년 5월 19일, 수천명의 레드셔츠들이 '라차쁘라송'에 모여 2010년의 대규모 시위 강제진압 2주년을 추념했다(본 게시물 상단 동영상 참조). 탁신은 이날도 화상중계를 통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집회장에 있던 많은 지지자들 및 전국의 레드셔츠들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탁신은 이날 연설에서 레드셔츠들의 조력에 감사를 표했지만, 더 이상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여정의 끝에 당도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국민들이 저를 위해 노를 저어 강을 건너도록 해준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산을 올라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배에서 내려] 자동차로 갈아타야만 합니다. 저를 산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국민들이 보트를 어깨에 둘러메고 산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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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12년 5월 19일에 있었던 '라차쁘라송' 추모집회에서의 탁신 화상연설 장면. 웃고 있던 레드셔츠 지도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간다. |
레드셔츠 운동의 저명 활동가 솜밧 분암아농(Sombat Boonngam-anong, สมบัติ บุญงามอนงค์: 1968년생)은 2012년 5월 24일의 발언을 통해, '레드셔츠 운동'이 "이기적인" 후견인의 그늘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레드셔츠 운동의 동지들에게 큰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여행을 계속해야만 한다. 두바이에 있는 재벌(=탁신)은 우리를 떠났고, 우리는 이제 그가 없이 생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
['탐마삿 대학'의 정치학자] 차이랏 짜런신오란(Chairat Charoensin-o-larn)은 2013년에 발표한 논문 <2012년의 태국: 진실, 화해, 그리고 지속되는 분열>(Thailand in 2012: A Year of Truth, Reconciliation, and Continued Divide)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탁신은 [2012년 5월 19일의] 연설에서, 레드셔츠들에게 정의 이전에 단결을 요청했다. 간단히 말해, 탁신 자신의 사면이 2010년 5월의 강제진압에서 죽어간 레드셔츠들의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탁신과 잉락 정부 사이의 관계가 지닌 참다운 본성이 드러난 한 사례로서, 진심을 다해 탁신을 위해 싸웠던 레드셔츠들에게는 2번째의 '눈뜸'(따사왕[taa sawang])이 이뤄지는 계기가 됐다.(역주) |
(역주) 태국어 낱말 '따사왕'은 원래 불교의 '깨달음'을 말한다. 레드셔츠들에게 있어서 첫번째 '따사왕'은 2008년 10월 13일 시리낏 왕후가 옐로셔츠 시위 참가자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다. 이 사건을 통해 태국의 반-왕정주의자들은 '왕실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구호가 지닌 기만성에 눈을 떴고, 그날을 '완 따사왕'(깨달음의 날)이라 부른다. 이에 관해선 본 시리즈의 제5편을 참조하라. |
탁신은 2010년 4월의 라오스 방문 당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귀국을 위한 "부드러운 방식"을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옐로셔츠 진영이 자신의 귀국을 막는 데 그토록 단호한 자세를 보일 것이란 점을 심각할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2012년 5월이 되자, 기득권 왕당파들과 왕실, 그리고 '옐로셔츠 운동'(PAD)과 '민주당', 반-탁신 성향의 주류 언론매체 등이 총망라된 엘리트 계층의 새로운 공조 노력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2011년에 푸미폰 국왕의 건강은 심각하게 악화됐었고, 국왕이 당시 진행 중이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실험적인 줄기세포 치료법에 힘입어, 2012년 5월 무렵에 푸미폰 국왕의 건강은 약간 회복됐고, 산 송장 같은 신세는 면하게 됐다.
기득권 진영은 푸미폰 국왕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를 이용해, 국왕이 시리낏 왕후와 부부 동반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나타내도록 설득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일은 국왕과 왕후 사이에 의견충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릇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일이 될 것이고, 반-탁신 및 반-와치라롱꼰 진영에 희망을 제공하게 될 것이었다.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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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띠빵콘 이 아프군요. 왕실이라 참 ,,, 자식이 귀한데 아프니 참 다행인지 난감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