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단순한 민족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애굽의 노예 상태를 떠나 40년의 척박한 광야를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입성하기까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걷게 되는 신앙 여정의 영적 도식(圖式)이다.
이 긴 여로는 예외 없이 인생 모두에게 임한다. 그러나 그 여정의 가장 큰 특징은 단 한 사람도 똑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불과 몇 달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짧은 거리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매일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게 하셨다.
삶이란 결코 뒤로 돌이킬 수 없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고라 다단이 저주받고, 뒤돌아보던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각자의 인생에 가차 없이 적용된다. 초년의 배움과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청년기의 불같은 열정을 거치고, 중년의 치열한 삶을 지나 마침내 노년의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노정.
그 치열함이 크고 깊었을수록 말년의 평안과 추수의 결실은 더욱 성숙해지며, 성경은 이를 아름다운 농사의 비유로 증언한다. 젊음의 역동적이던 삶에서 차차 노년의 중후함을 따라 영원한 안식으로 마무리를 지어가는 이치다.
돌아보면 애굽에서의 출발은 세속의 호기심과 혈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곧 홍해를 건너 척박한 광야로 들어서면서 인생의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광야는 애굽에서 즐기던 고기와 파, 마늘의 미련을 끊어내는 곳이며, 오직 자기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이 이어지는 장소다. 그곳에서 인간 본연의 세속적 욕망과 자만은 광야의 거친 모래바람 속에 휩쓸려 사라진다.
앞서가던 스승들과 연단 받지 못한 이들이 모두 광야에서 스러진 후에야,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깊이 낮아진 심령 위에 비로소 가나안 복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성경은 이 혹독한 광야의 이유를 분명히 기록한다.
"너를 낮추사 주리게 하시고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만나로 먹이심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신 8:3)
인생의 교만을 꺾고 철저히 낮추시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광야의 역사를 거울삼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기록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를 경계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1-12)
인생의 노년으로 갈수록 교만을 털어내고, 더 이상 세속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공수신퇴(空手身退)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지혜가 신앙의 신비와 닿아 있는 지점이다.
인생 후반부의 삶은 세상의 비움에 그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경건하게 삶을 마감하는 거룩한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영원한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노년의 길목에서 세상의 지어낸 글과 헛된 지식, 사람의 탐욕이나 명예를 위해 위조된 글들을 멀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성경은 거짓으로 지어낸 말과 헛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 무서운 심판을 경고한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묵 22:15)
진짜 알곡은 화려한 말재주나 어려운 학식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다. 박식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내 언론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고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신의 나타남과 권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노년 알곡의 길은 결코 장황하지 않다.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지도 않는다. 오직 세속의 소란함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가득 품은 채 고요히 영원한 가나안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누구를 가르치거나 책망하려 함도 아니요 쓸데없는 변론과 사탄의 훼방할 틈을 주지 않으려 다만 멀리할 뿐이다.
만가을에는 누구도 각자 심은 대로의 열매를 변개치 못한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역주행도 총천연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