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영생을 얻는 데 있음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이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의 모든 계획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다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함께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온 인류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엡 2:1) 때문에 그 영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영생은 우리가 선물로 받는 방법 외에는 얻을 길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놀라운 수준의 도덕성과 행실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수준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것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가치해 보이는 그리스도인이라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가장 훌륭한 사람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관계의 차이란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과연 이 생명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그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두 번째 주제를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우리가 지금 깊이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 속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 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생을 얻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설명과 해석이 가능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두 가지가 다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전반적으로 우리가 영생을 어떤 방법으로 얻는지를 묘사하는 진술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자기 나름의 문체를 쓰고 있습니다. 잘 보시면 여러분은 사도 요한이 언제나 특이한 방법으로 사물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하나의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3:19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문체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구절과 참으로 정확한 평행 구절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문장은 같은 표현 방식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3:19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한 번 설명해 보고 싶습니다. 사도 요한은 "정죄(罪)는 이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정죄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정죄의 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틀림없이 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원인, 즉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들을 좀더 들어 보겠습니다. 요한 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 5:20)고 선언합니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분은, 즉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의 원인이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 설명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표현으로 말씀 드리자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영생의 본질에 대한 정의보다는 영생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이 두 가지를 분리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분이 곧 영생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그 방법을 받아 누리는 것과 동시에 영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따로 떼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이제 영생이 우리에게 어떻게 오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함께 그 과정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모두가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놀라운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써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아서 진실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길을 가면서 나의 후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주셨습니다. 육체적 죽음이나 무덤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유산(신의 성품)을 결코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여기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변화된 생활 모습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의 위대한 생명에 대한 보증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 어디에서나 제시되어 있는 큰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영생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편지를 받게 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기쁨을 그들도 함께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도 너희의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나오는 기쁨이다. 우리는 놀라운 친교를 나눌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일 1:3).
여러분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이런 말을 얼마나 자주 말하고 있는지 보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에 대해서 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계속 말합니다. 여기에 가장 위대한 것-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그 두 가지를 간단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대조법(對照法)의 형식으로 이 진리를 진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하나님은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이라는 단어와 '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다른 어느 것과도 극명히 대조하여 표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우상들과 거짓 신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런 것들을 대단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것이 바로 이 백발이 성성한 사도 요한이 유아기의 교회들에게 쓴 고별 편지의 마지막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몇몇 이단들에 대해서 경고해 주고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경고는 1세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는지"를 회상하게 해 줍니다(살전 1:9).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사도 바울이 아덴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문화의 도시 아덴에는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무척 많았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온갖 신들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혹시나 빠뜨린 신이 있을까봐 어떤 신전을 지어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헌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3). 우리 앞에 살아계신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항상 제시하는 것이 성경의 위대한 임무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오늘날이나 1세기나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옛날 이교도들이 섬겼던 신들을 똑같이 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들이 했던 대로 철학적인 추상들을 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우 학식 있는 어조로 절대자, 궁극적인 원인, 모든 존재의 원천, 우주 속의 생명 등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제법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거나 철학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일종의 철학적인 미지수'(x)입니다.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어떤 큰 힘이나 에너지로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은 그 모든 오류에 빠지지 말도록 부단히 우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성부 하나님께 하신 말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성경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관해서 알아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체(a Person)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렇지만 사활을 좌우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that [WHO, NIV] I AM)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전체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생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던 모세와 기타 여러 신앙의 영웅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의 신앙 생활과 성공적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나서 그 비결은 믿음, 즉 하나님과의 관계였다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만일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서 살고 싶으시다면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즉 이 성경 구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잘못된 방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몇 해 전 매우 자주 인용되었던 매우 유명한 찬송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나를 뒤덮고 있는 밤에
모든 것이 칠흑같은 구덩이처럼 캄캄해도
나는 모든 신들에게 감사하리라
내 무적의 영혼을 주신 것에 대하여.
헨리(W. E. Henley)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시입니까! 이런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절대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그런 종류의 지독한 어불성설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무슨 신에게라도' 라는 이상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필연적으로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는 어떤 용어나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에 대한 완벽한 주해를 원하신다면 구약성경에서 백성들이 섬겼던 거짓 신들에 대한 기록들을 읽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이사야서 46장을 연구해 보라고 권하는 바입니다. 거기에 보면 선지자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던 거짓 신 바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 바알 신을 이곳에서 저곳에서 옮겨야 했습니다. 바알 신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를 옮겨 줄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어째서 자기 자신을 옮기지도 못하는 그런 신을 섬기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15편에 기록된 거짓 신들에 대한 묘사도 생생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6-8절).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 기록된 가장 영광스러운 풍자적 묘사(sarcasm)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깊이 생각하고 있는 이 구절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우주의 창조자이시라는 이 엄청난 진리를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만 깊이 생각한 나머지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면서도 우주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빛이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세상에 빛이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만물은 그분의 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주의 주인이시고, 창조자이시고, 존재하는 만물을 통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고 선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아뢰기 전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오셔서 응답해 달라고 구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사실들을 확실히 마음속에 붙들고 계셔야 한다는 것을 절대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과 전능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분이 생명이시며,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너무나 정결한 분이기 때문에 악을 그냥 참아 보실 수 없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온 세상의 재판관께 말씀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the only true God)이라는 짧은 표현에 의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거짓 신들이나 철학적 추상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원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시고 언제나 계셨던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전(前)으로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 출발점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리의 마음과 머리의 차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 소리는 그저 막연한 신에게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친히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요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한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전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 이라고 표현하시면서 자신의 인격적 속성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절대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눅 4: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과 신앙을 철저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계시와 진리를 붙잡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에 비추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특질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자신을 친히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또한 우리가 그 길로 그분께 나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그분께 말씀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6). 여기 요한복음 17장에는 그 말씀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이것은 틀림없이 의미 심장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일차적인 경고는 거짓 신들과 이교도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경고는 유대인들에게 대한 경고였는데, 즉 하나님을 구약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노력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차원에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고, 은혜의 관계 속으로는 도무지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크고 중요한 구원의 축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성경이 가진 영광입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다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부분을 다 취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구약성경만 따로 떼어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약성경만 따로 떼어 취급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입니다. 초대 교회로 하여금 그 둘을 함께 해석하도록 이끌어 주신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구세주이실 뿐 아니라 오직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되신 삼위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생명이신 하나님께 강조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생명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 특별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품으신 은혜롭고 궁극적인 목적이 이미 우리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런 것들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벽하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표현으로 진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과 상관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생명을 공유하거나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이 궁극적이고 참된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 즉 구원을 얻게 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 들어 있는 모든 단어는 참으로 의미 심장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 "참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사실을 대번에 파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되고 유일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같은 범주에 속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구상에서 사신 분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범주에 속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일신론자들(Unitarians) 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의 특별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애써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친히 '참 유일하신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정지함으로써 이 의미심장한 진리 전체, '참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도외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원히 동등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으로서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참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참되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기를 영원하고 참된 하나님과 같은 반열에 두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라는 말을 우리는 할 수 있는 권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자 여기에 '예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인간 예수가 되셨다는-성육신의 진리를 생각나게 해 주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차원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참 유일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해 주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이 특별한 일을 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즉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강력한 교리가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호두열매 하나 속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다거기에 있습니다. 궁극적 목적은 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나이다" (25절). 이 말은 사실상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저희가 알았기 때문에 저희가 아버지를 알고 영생을 얻게 되었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고 계시하셨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을 제거시키셨습니다. 죄의 장벽을 제거하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과 계시는 우리에게 아무소용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강해를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이 진술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원래 먼저 구약의 하나님 계시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가 다른 모든 이방신들이나 우상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은 친히 자신을 십계명, 도덕법, 선지자들 가운데 계시하셨습니다. 이제 “나를 본 지는 아버지는 보았나니” (요 14:9)라고 말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그분이 친히 계시하신 모든 것들을 계속 살펴봅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어서 우리의 눈과 총명을 멀게 하여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죄의 장벽을 예수님이 제거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서 멈추시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십니다. 주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훨씬 더 깊은 방법으로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방식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분을 참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이미 보았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전 15:22). 물론 이것은 심오한 교리입니다. 우리는 다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아담은 첫 사람이요, 인류의 아비이기 때문에 전체 인류는 다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 전체 인류가 타락한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우리의 대표자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안에, 그의 혈통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사망이 우리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과 대조적으로,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놀라운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마치 모든 자연인이 아담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우리는 그분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그분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며, 그분에게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에 아담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일부로 삼아 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방법,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사활이 걸릴 만큼 중요하고 본질적인 분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과의 이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것이 영생 자체요 영생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그리스도를 안다면, 우리가 만일 그분을 믿는다면, 우리는 영생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