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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영국에서의 성공회(聖公會)
1. 성공회(聖公會) 란 ?
성공회(聖公會)란, 문자 그대로 거룩하고(Holy) 공적인(Catholic) 교회를 말하며 (Anglican Communion)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교황권의 관할과 교리상의 지배에서 분리되어 나온 3대 종교 집단(다른 두개는 루터교와 개혁 교회이다)의 하나인 영국 교회 후신이다.
오늘날 세계 성공회는 164개 국가에 약 1억의 신자가(우리나라 약 2만의 신자)같은 믿음과 나누며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각 나라마다 교회의 명칭은 달라서 영국에서는 국교이기 때문에 Church of England, 미국에서는 Episcopal Church, 카나다나 호주에서는 Anglican Church, 아시아권에서는 성공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각국의 교회들은 캔터베리 대 주교를 영적 지도자로 하는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호협력 관계를 이룹니다.
성문화된 종류는 별로 없어도 많은 묵시적인 충성에 관한 것들과 헌신의 관례를 지닌 교회들의 가족의 하나이다.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캔터베리 대주교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하여 공동 충성하고 <성공회 기도서>에 규정된 교리들과 관리들을 동의 하는 것으로 통합을 이루고 있다.
2. 영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시작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50일에 있은 성령 강림의 역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공회도 역시 초대 교회의 성령 강림의 역사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회이다. 그런데 성공회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발전되었기 때문에 성공회를 바로 알려면 영국 성공회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주의나 전형적 프로테스탄트 주의와는 다른 모습으로 교회 생활을 계속한 성공회(거룩한 공회)는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에 발맞추어 자라났습니다. 전 세계에 펴져 있는 모든 성공회는 실로 수세기 이전의 영국 교회로부터 그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역사적 성공회를 안다는 것은 교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회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것이다.
초대 영국 교회 100년간에 걸친 자료는 극히 적습니다. 사실 4세기 초 최후의 박해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그리스도교에 관한 사항은 역사 무대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박해시기에 유명한 영국인 순교자는 알반(Aldan)이라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체포되려는 한 사제를 숨겨 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숨겨 준 장소가 발각됨으로써 알반도 체포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영국이 낳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알반은 약한 자를 도왔다는 이유에서 또 그의 새로운 신앙을 지켰다는 점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제 2 장 성공회의 역사(歷史)와 전통
성공회는 지역적으로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 어떻게 영국에 전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서기 175년경 이미 교회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공회의 기원은 초대 교회로 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성공회는 6세기에 로마 교회와 병합되어 발전을 거듭해 오다가 16세기에 대전환을 맞습니다.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종교개혁의 파장은 영구에도 큰 영향을 주어 루터가 주도한 독일(루터교가 탄생), 칼빈이 주도한 스위스(장로교가 탄생)와 더불어 3대 종교개혁의 온상이 됩니다.
바로 이 개혁의 과정 속에서 성공회는 몇 가지 중요한 신앙적 특징을 형성했습니다.
첫째, 중용적인 신앙입니다.
당시 루터교와 장로교가 극단적인 개혁의 노선을 추구했다면 성공회는 이와는 달리 중용의 입장에서 구교와 신교 사이의 극단적인 것을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려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세계 교회 일치(에큐메니컬)운동에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서와 함께 하는 신앙입니다.
무릇 모든 교파가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성공회는 일찍부터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흠정역 성서는 이러한 성공회 전통의 선물입니다.
셋째, 초대 교회적인 신앙입니다.
성공회는 최초의 교회 분열인 동서 교회(로마 교회와 정교회)의 분열 이전의 초대 교회의 신앙을 지킵니다. 그래서 성공회는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교회 분열 이전의 모든 교회가 같이 고백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만을 보유하고 있으며, 초대 교회의 예배 형태인 말씀과 성만찬이 하나로 어울린 미사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주교(감독)제도를 통해서 사도직을 계숭하고 있습니다.
제 3 장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형성기
화이트비 회의부터 1066년의 윌리암 정복 왕이 등장할 때까지의 400년 동안은 색슨 교회가 발전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영국 성공회 형성기라고 한다.
1. 캔터베리의 데오도르 대주교
화이트바 공회 이후 4년째가 되는 해, 타수스(Tarsus)의 데오도르(The
odore)가 로마로부터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주의적 켈트형 수도생활을 베네딕트식 수도원에서 행하는 완고한 공동생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데오도르의 위업 중에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다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직자의 훈육(訓育)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앵글로 색슨에게 도입시켰습니다.
둘째, 교회 생활을 성직, 교회 지도자들의 정기적 의회제도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역시 데오도르의 중요한 위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타수스의 데오드르의 정책은 누구보다 더 색슨 그리스도교에 국가 교회로서의 토대를 확고히 다져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경건과 지식의 자각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캔터베리에서는 데오도르가 세웠고, 요오그(York)에서는 에그버어트(Egdert), 몸스베리(Mal
mesdury)에서는 오드햄(Aldhelm)이 세운 수도원이나 대성당 부속학교가 유명하게 되었고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칼 황제의 서부 신 제국에 들어온 학술 부흥은, 요오크의 알퀸( Alcuin)과 같은 색슨인 학자 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색슨의 문화 부흥의 대주역은 쟈로(Jarrow)수도원의 수도자였던 베다(Bede)였다. 베다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자신의 수도원이나, 위어마우스(Wearmouth)지원에서 지냈다. 그의 최고 위대한 업적은<영국 교회사 THE ECCLESIASIC AL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이다. 켈트 인이나 색슨 시대의 영국 그리스도교에 관한 지식은 오로지 이 책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작품의 가치야말로 세계적인 역사서 중의 하나입니다.
2. 색슨 인의 선교 활동
만약 켈트인의 학식이 어느 정도 인의 지적 문예부흥을 자극했던 말할 수 있다면 켈트 교회의 선교와 전도 정신을 이어받은 것도 마찬가지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색슨 교회의 세번째 주역은, 크레디톤(Credtion)의 윙후리즈(Winfrith)였다. 그는 오늘날 성 보니파스(Boniface)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교 전도 사상 뛰어난 인물입니다. 서부 색슨인 왕국의 일부였던 디본셔(Devonshire)에서 출생하고 엑스터(Exster)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다른 많은 앵글로 색슨인의 선교사가 한 것처럼 눈을 이교의 대륙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3. 덴마아크인과 노르만인의 침략
알프레드(Alfred) 대왕은 덴마아크 침입을 격퇴하고 영국 교회를 보존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과 학문의 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라틴어 서적을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수도원과 많은 교회를 세웠다. 알프레드의 노력은 50년 후에야 열매를 맺게 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클라이스튼베리의 성 둔스탄(Dunstan) 지도하에 10세기 중엽의 색슨 교회에서 재차 학술과 경험으로 진지하게 부흥되었다.
영국 지배권을 목표로 했던 덴마아크인, 노르만인, 색슨인의 삼자 대립에 의해 색슨 영국은 그들의 시야로부터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마침내 1066년 침입해 온 맹장 노르만디의 윌리암즈 군대에 돌아가게 되었다. 윌리암즈의 승리는 영국 역사를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서구와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놓은 결과가 되었다.
4. 대륙의 영향
노르만 족의 침입 결과는 색슨 영국의 사회 경제기구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 생활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암흑기가 지난 유럽의 새 질서는 봉건제도였습니다.
당시의 표준에서 본다면, 윌리암즈 1세는 우수한 크리스챤 통치자였습니다. 자기 신하의 정신 수양에 중대 관심을 가졌던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교회에 부여하는 선심을 썼으며, 이로써 교회는 대재산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현명한 주교와 수도원장의 인사 임명은 영국 교회에 강력하고 열심있는 지도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윌리암즈 왕의 신뢰가 두터웠던 노르만 교회인 베구의 란프랜스(Lanfrance)였습니다.
1070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교육가로서, 정치가로서, 노르만디 신학자로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분이었습니다. 이 외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란프랜시스의 후계자이며 베구에서 한때 학생이었던 성 안셀름 입니다. 이 수도사의 경건성과 학식은, 중세기, 초의 위대한 성도로서도 또 신학자로서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위인과 그 동지들은 전력을 다해 색슨식 고립주의로부터 영국 종교생활을 떼어놓는 데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의 노르만 건축이 라고 부르는 특징 있는 건축 양식이 나타났습니다. 12세기의 대성당이나 수도원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군사적 보루로서도 충분한 방비 역할도 해냈습니다.
5. 봉건제도와 영국 교회
봉건주의는 노르만인의 영국 주교를 완전히 영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주교는 신앙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성직의 선임 상급자였고, 목자라기 보다는 통치자에 가까왔습니다. 중세기가 진행됨에 따라 주교는 점차 귀족이 되어갔고, 자기 교구의 관료적인 교권 조직을 통해 주교가 일반인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는 저 무서운 종교 재판소였습니다. 이러한 중세 주교직의 불행한 상태를 개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봉건제도는 특권과 통치권이 서로 결합된 조직을 기본으로 하여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봉사에 의하여 유지되었습니다. 황제 때부터 천한 농노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는 아래에서 바쳐서 위로 상납하는 신성한 충절의 복종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법률과 교회법의 발달은 주교 직무에 변화를 초래케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의 본질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했습니다. 12세기는 그리스도교 사회를 통일한 교회법의 발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법은 봉건국가의 세속적인 권위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교회적인 수련이 실시되어야 할 인간 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세계적인 교회에게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은 교회의 권한이 신앙인의 내적인 생활을 규정하는 것에 국한되지만 그러나 중세에는 유대인과 이교도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세계적 교회의 회원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법은 종교에 관한 법령뿐만 아니라 점장이나 이단 신앙상의 범죄 그리고 남녀의 일상생활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참견을 하였습니다.
6. 토마스 베켓트와 헨리 2세
베켓트와 헨리 2세 와의 싸움은 교회법에 관해 일어났다. 둘의 싸움은 종교 재판권과 국왕의 법정은 어느 곳을 경계선으로 정하는 가가 문제였다. 양자 모두 각각 관할 지역이 있었지만 쌍방이 관계하는 그 중간에 법적인 무인지대가 있었다. 윌리암즈 정복 왕과 같이 강한 성격 소유자의 국왕 시대에는 국왕의 법률은 안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기에 교회는 국왕의 특권을 억압하고 범위를 넓혔던 것이다.
118년에 걸친 내란 후 1154년, 헨리 2세는 자기 선조가 일찍이 구축해 놓았던 왕권을 회복하려고 큰 결심을 갖고 즉위하였다. 각 영주의 독립은 비교적 용이하게 억제하였지만, 고대 영국의 습관에로 돌아가려고 교회의 권위를 공격했을 때 헨리는 완고한 교회의 적개심을 눈치챘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베켓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같은 죄에 대하여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벌을 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성직 파면은 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2세기에는 사후 세상에서 회개하여도 용서받지 못할 영원한 형벌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시대였다. 국왕의 법제 개혁에 대한 대주교의 강직한 반대는 실은 국제적 교회의 독립적 주권을 위태롭게 할 것까지 미리 두려워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 영국과 교황권
토마스 베켓트의 순교 후 100년 동안 영국에서는 교황의 세력이 번영을 누린 때였다. 교황 권력을 즐기던 인노센트 3세는 존(John)왕을 맞이하여 교회의 행사와 재산에 대한 간섭을 중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불행한 국왕으로부터 영국 왕위도 교황의 뜻대로 라는 승낙을 얻었다. 교황 지배권을 제시한 교황 부과세가 수대에 걸쳐 영국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지만, 로마의 인노센트의 후계자는 그들에게 전승한 이 특권을 빈틈없이 이용하였다. 영국 교회의 부에 대한 교황세는 13세기, 14세기에는 막대한 것이 되었고, 동시에 영국에서의 교회 인사. 행정상의 교황 임면권(任免權) 행사의 실정은 영국인에게 교황권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세 징수로 인하여 운영되는 군대는 도처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영국에서 교황청에 납부하는 막대한 금액은 교회의 수입을 감소시켰으며 교회의 재산도 국부(富)의 일부인데, 교황의 정치적 교섭에 지출되는 그 돈이 왕왕 대륙에 대한 영국의 국익을 방해하는 때가 많다.
14세기 교황권에 대한 불만은 교황권이 비종교적인 것까지도 지배하려 한다. 그것은 교황권을 약화시키려는 것을 목표로 한 수많은 의회 결의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최초의 결의를 에드워드(Edward) 1세 치하에서 의회를 통과시켰다는 것에 특기할 만 가치가 있다. 때마침 교황 보니파스(Boniface) 8세는 프랑스 왕에 의해 여지없이 굴복을 당했고, 이 사실은 새로 탄생한 유럽의 여러 국가가 세계 지배를 꾀하는 교황의 야망에 경계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 정세의 변화 : 국가주의의 성장
종교개혁이 있기 전 200년 동안 유럽에 정치 정세는 국가주의의 세력이 점차 성숙되어 가는 시기였다. 14세기, 15세기에는 영국의 정치형태와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경제 및 사회의 변화를 가져 왔다.
영국 사회에서 중류계급의 발흥은 아마도 종교개혁 직전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회 변화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흥계급은 종래의 교회 조직이 곧 다가울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 진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개혁을 바라는 목표가 되었던 많은 폐해는 종교적이라기보다 교회 내의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도리어 과중하게 밀어붙이는 과도한 교황세(稅)와 첩첩이 중첩되는 로마로부터의 간섭은 국가 교회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이 있기 전 100년 동안 널리 퍼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는 사회에 새로운 그룹(Club)이 생기게 하였다.
9. 종교개혁 직전의 영국 교회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미신 타파에 역점을 두었다. 교회는 보통 인간이 종교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면 미신마저도 좋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었다. 전에는 보다 깊은 신앙심으로 인도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경건과 의식 행사나 습관은 이제 그 그림자조차 볼 수 없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연옥(煉獄)의 형벌을 면하게 해준다고 특사 면죄를 파는 금전 매매가 일반화 되었으며, 더욱이 죽은 성도의 유물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칭하는 부적, 뼈, 장신구들을 팔기도 했습니다.
중세 종교 생활에서 신앙상의 최대 위기는 일반 대중이 교회 예배의 중심인 성찬식(흑은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미사 예문이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드려진다는 데 있다. 크리스챤의 공동 예배인 성찬식이 단 한 사람의 사제에 의해 읽어가는 식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을 때, 성도들은 때때로 아베 마리아라든가 주님의 가르친 기도를 소리내어 합창할 뿐 이었습니다.
제 4 장 영국에 있어서의 종교개혁
독일과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 운동은 영국에서도 메아리쳤습니다. 탁월한 개혁자들의 활동은 많은 열성 있는 영국인들의 마음을 교회 조직과 종교상의 악폐를 개혁하자는 쪽으로 나날이 치닫게 했습니다. 캔터리의 워람(Warham) 대주교의 보호 아래에서 새로운 학식을 가진 학자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성서를 연구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시 초대 교회 사부들의 저서와 씨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대륙 종교개혁 물결의 영향은 영국으로 흘러왔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그 처음부터 종교개혁이 아니고 정치상 조직상의 위기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과 교황과의 과거 역사적인 관계가 이 싸움을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통하여 자존심이 강한 영국 국민성과 적의에 찬 외국인 교황에 의한 간섭과의 사이에 쌓이고 쌓인 마찰이 16세기에 평온치 못한 환경 하에서 폭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로마교회의 관리 아래서 영국 교회가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어느 정도 헨리 8세의 주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영국 국토 전부가 일치된 행동을 보여준 결과였습니다. 국왕도 성직자도 의회도 민중도 모두가 한 몸이 되어 국가 교회 안에 존재했던 교황 세력을 격멸하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았다는 점에서 영국에서의 종교 개혁은 대륙의 종교개혁과 차이가 있습니다.
1. 헨리 8세와 교황
영국에서의 교황권 배척의 직접적 실마리는 헨리 8세가 알라곤의 캐더린(Katherine)과의 결혼 무효를 신청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1509년 영국은 재능 있고 매력 있는 왕자 헨리의 즉위를 큰 기쁨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영국인들의 관심은 이 젊은 튜더계 왕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헨리 자신도 서구 세계에서 영국인의 약진을 나타내 보이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 후, 영국의 정치력과 경제의 장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헨리 8세와 캐더린에게 사내아이가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은 왕위를 계승하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 왕국의 계속되는 번영과 안전을 보아온 사람들은 또 다른 튜더 가의 왕자에 의해 평화스러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2. 교황 권위의 부정
헨리의 요구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기가 어려워 이 문제를 되도록 부드럽게 취급할 수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교황 클레멘트는 기다림에 지친 헨리는 로마로부터 희망한 대로의 회답은 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더욱 강경하게 영국에 있어서 교황권에 대한 종말을 고하게 하는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어떤 권리로서 교황은 헨리가 바라는 교섭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것은 당연히 독립할 더욱 인정하는 실례를 남기게 되지는 않겠는가? 그래서 헨리는 교황권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역사적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은 외국 세력 지배로부터 본래부터 자유였다는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이런 점에서 헨리 2세와 토마스 베켓트의 싸움은 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매우 깊은 것이었습니다. 영국교회에 끼치려고 하던 교황의 권력을 방지하려고 중세의 영국은 의회를 통해 수많은 정령을 정하였는데, 이러한 의결록이 지금에 와서는 이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새로운 빛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529년 헨리는 영국 역사상 매우 유명하게 된 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의회에서 황제에 대한 공격은 즉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간에 걸친 의회의 많은 결의록은 영국 교회에서 교황의 지배권을 폐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국의 독립 자주권은 ‘로마 교구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떠한 외국 세력의 간섭’에서부터 자유라고 하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서 의회는 재영 성공회를 영국 성공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교회의 성직화는 로마 교황이 다른 어떠한 외국 주교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엄정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의회가 ‘그리스도계의 전통 있는 카톨릭 신앙에 변경이나 쇠퇴를 가하지 아니한다. 의도가 전연 없다’는 것을 세계에 공약했을 때, 이 국가 교회의 정통성은 높이 선양되었던 것이다.
켄테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토마스 크랜머의해 주도된 주교 회의에서 “지상에서의 어떠한 권위라고 할지라도 성서에서 금하고 있는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을 허가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판결로 안해 헨리와 캐더린과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손에 쥐게 되었고 앤 보래인과의 결혼이 합법적이라는 선언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3. 영국 국가 교회
개혁 의회는 국왕이 “영국 교회의 지상 최고의 수장‘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의회는 ’신앙상의 권위 또는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관에 있다고 승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져 내려온 영국 성공회의 유명한 왕위 지상권입니다.
그러나 개혁자는 누구 한사람도 이 국왕의 권위가 옛날 크리스챤 왕에게 주어진 특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윈체스터 주교인 스티븐 가디너는 “이스라엘의 제왕은 이 특권을 행사하였다”라는 글을 처음으로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이 주교는 헨리 시대의 종교인들 중에서도 매우 완고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오늘 영국을 형성한 같은 사람들에 의해 영국 교회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영국의 머리이신 국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여 헨리의 왕위 지상권이 정당한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교회와 국가와는 요컨대 동일한 사회의 양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중세의 논설이 여기에서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왕의 지상권은 국가 정권의 신성을 설파했던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깊은 성경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 카톨릭 교의를 국왕의 권위로 발포하고 중세기의 교의에 관한 미신적 해석을 추방했습니다. 모든 성직자는 성도에게 신경, 십계명, 주님의 기도를 영어로 가르쳤고, 성공회 신앙의 요점을 때때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구식 순례자라든가 지나친 성상 숭배에 따라서 생긴 미신적 폐해를 없애기 위하여 철저한 탄압법을 만들었습니다.
헨리 8세 시대의 개혁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그가 실권을 장악한 기간에는 국가 교회가 전통적 정통성의 궤도를 벗어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헨리는 교황제에 대항하여 벗어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헨리는 교황제에 대항하여 교황권을 격퇴시키면서도 영국 교회의 카톨릭 주의를 충실하게 고수하였습니다. 헨리는 일찌기 젊었을 때 교황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영국에서의 교황권의 파기는 헨리 재위 중엽 때에 시작되었고, 약 20년 후 영국 교회는 확고하게 국가 카톨릭주의로 그 방향을 취하였습니다. 전통 있는 신앙 행사에 충실했던 20년 동안의 효과는 지속성의 원칙을 소위 앵그리칸니즘(성공회 주의)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통해서 과거로부터의 지속을 강조하는 것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영국 교회 전체의 개혁 과정을 통하여 이 중심 원칙이 교의의 개정과 종교 생활의 미화(美化)에 진력한 여러 가지 운동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 프로테스탄트의 시험과 카톨릭의 반동
1549년, 헨리 8세의 서거를 계기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영국은 종교적으로 3개의 파로 갈려 있었습니다.
첫째는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외국 교회의 간섭이나 교리, 예배 의식을 싫어하는 국교회파가 있었고, 둘째는 교황청 세력을 회복하려는 로마 카톨릭파가 있었으며, 셋째는 대륙의 종교개혁을 도입하려는 신교파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에드워드(Edward)6세 치하에서 6년 동안은 프로테스탄트를 새롭게 시도해 보았고, 메어리 여왕 6년동안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드워드 치세는 의회가 이단 탄압 법령과 옛 종교를 억누르기 위해 사용한 벌칙을 폐지한 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547년에는 성직자의 결혼이 합법적으로 공인되고 교회의 예배는 모두 국어인 영어로 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결국 에드워드 치하의 종교개혁은 평판이 극도로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1553년, 이 젊은 국왕의 돌연한 죽음은 이 프로테스탄티즘이 실제로 국가에 침투해 들어온 정도는 별것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헨리 8세와 알리곤의 캐더리린과의 사이에 태어난 메어리 튜더는 전 영국을 흔들어 놓고 열광리에 즉위하였습니다.
5. 크렌머(Cranmer) 대주교와 예전의 개혁
크렌머는 캠브리지(Camdridge) 대학의 학생 시절부터 새로운 학문에 열성이었고 철저한 반교황주의자였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의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크렌머는 전 그리스도교회에 끼치고 있는 교황의 지배권 주장이 성서에 의해서 난 초대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1547년 헨리 8세의 죽음으로 예배 개정 사업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교회 권력과 그 소유 재산에 공격을 가하고 있던 에드워드의 평의회는 대주교가 순수한 종교개혁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그래서 즉시 국어(영어) 예배를 목표로 세우고, 수단을 강구하였다.
에드워드의 의회가 교회의 고대 관습으로 돌아가서 “지금부터 신도는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도 받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고, 크렌머는 1548년 신도들을 위해 간단한 성찬식 문을 발행할 준비를 갖추었다.
1549년 크렌머는 영국 최초의 공도문을 만들었다. 그 해 성신강림일에 개정, 번역된 여러 가지 예식이(새 공도문) 발표되고, 국내 도처에서 이것의 사용을 명령하였다. 이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에는 대주교의 예배 개혁 방침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잘못된 교의(敎義)나 미신에서 유래한 옛부터의 예배를 제거하는 것이 그 임무였으나, 그것 외에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옛날 예식(式)을 간단하게 만드는 일이 크렌머가 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일과기도(Breviary,日課祈禱) 성찬식문(Missal) 모든 예배(Manual)의 예식문이 정리되고 번역되어 하나의 훌륭한 기도서가 된 것이다.
6. 엘리자벳 1세의 종교 정책
1558년도에 이르자 영국 종교개혁은 최후의 건설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지난 20년 동안의 여러 사건을 거치면 최후 단계의 성격도 대략 결정되었습니다. 엘리자벳 여왕은 다른 누구보다 문예부흥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정치적 교활성에 에라스무스(Erasmus)의 인도주의를 가미한 사람과 같은 여왕은 백성들의 정신적 경향을 잘 읽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 헨리 8세의 반교황 법령이 다시 영국 교회 헌법의 기초가 되었고 여기에 에드워드 6세의 종교 법령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왕위 지상권도 회복했으나 자기 아버지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회복했으나 자기 아버지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다소의 수정을 가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다음 가는 영국 교회의 지상 최대의 수령은 실로 영국 왕이다”라는 설명문은 더이상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왕은 이 나라에서만 최고의 통치자이다”라고 잘 다듬어진 교서가 선언되었습니다. 이 최고 통치자의 권위에 대하여서는 1559년의 <명령>과 후에 나온 39신조에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엘리자벳의 종교 정책은 영국 교회의 법헌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왕의 사후 40년을 지나 국왕 찰스 1세의 전제정치 때의 의회는 혁명을 일으키고 마침내 승리를 얻어 일시 영국 교회의 국가 교회로서의 조직을 폐지하였고 영국을 종교상의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1660년, 스튜어드 왕가가 돌아옴에 따라 엘리자벳 정책은 다시 국가 교회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몇 번이고 수정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벳의 방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국 성공회의 법헌적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엘리자벳의 종교 정책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1570년부터 지금까지 영국은 교황청을 적으로 보았으며 이 교황청은 이미 40년 전 헨리 8세가 르네상스기에 부패한 교황으로서 비웃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7. 영국에 있어서의 퓨리탄 반란
영국에서의 전쟁은 퓨리탄(청교도, Puritan)의 반란으로 나타났습니다. 광신적인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엘리자벳 여왕의 종교 정책에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메어리 튜더 여왕 때 박해를 피하야 외국으로 도망하여 칼빈주의 정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제네바의 모범에 따라 영국에 개혁파 교회를 재건하려고 결의하였습니다. 실로 20년 동안 엘리자벳 1세와 주교들은 모든 프로테스탄트의 공세와 싸워야 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공도문을 개신교의 예배서로 바꾸기를 원했고, 모든 종교 생활에서 카톨릭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며, 주교직와 교구 조직을 고위 대륙이나 스코틀랜드에서 볼 수 있는 같은 형태의 장로 조직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진지하고 열심 있는 푸리탄들은 실제로 영국 교회의 개혁에서 보여준 많은 폐해를 하나하나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교회로부터 지속해 온 여러 가지 폐해가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직자 양성과 교육 수준이 저하된 일, 한 성직자가 수많은 교회를 겸직하면서 관할 사제가 관할 지역에 상주하지 않는 일, 비용도 많이 들고 판결도 늦은 교회 법정과 같은 성가신 제도들이 아직도 여러가지 면에서 늦은 교회 법정과 같은 성가신 제도들이 아직도 여러가지 면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제약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튜더 왕조는 끊어지고 스튜어트 왕조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점차 상업 경쟁의 시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벳 치하에서는 머리를 들 수 없었던 퓨리탄이 다시 스튜어트 왕조하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종교전쟁은 폭발했습니다. 그 결과 찰스 1세의 전제주의 정치에 반대한 의회와 결탁한 퓨리탄은 반란기에 일시적으로 승리를 획득했습니다.
제 5 장 18, 19세기의 영국 성공회
1. 18, 19세기의 영국 성공회
18세기 초기 20년 동안 영국 성공회는 국가 생활에 정신적, 도덕적 힘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단지 영국의 전통적 제도의 하나로서 존재로서 게으르게 낮잠이나 자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옥스포드의 진지한 청년들의 작은 그룹이 1729년에 종교 동호회를 결성했습니다. 이 회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한 그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동지들의 교제는 별로 이렇다고 볼만한 것이 없었으며 단지 그 시대의 일반 풍습이나 많은 의견에 따르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래는 금욕적인 모임으로서 청년들이 교회 규정에 의한 기도와 단식 그리고 성서읽기, 일주일 한번씩 성찬식 참석, 기타 당시에 “고교회 High Church”라고 제껴놓았던 공부를 통하여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깊고 견고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룹의 주도자는 에프워즈 주임 사제의 아들인 찰스 웨슬레와 존 웨슬레 두형제였습니다.
이 그룹의 규칙 혹은 신앙방법(method)(이후에 메도디스트의 이름이 여기에서 생겼다)은 이 열심적인 경건한 두 사람에 의해 결성되었습니다. 이와같이 경건하고 진지한 그룹은 처음부터 성도의 교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역사적 중요성은 요한 웨슬레가 받은 영향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요한 웨슬레는 전 생애를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로서 지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도디스트주의는 성공회 원칙에 두 가지의 도전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 하나는 회심의 필요로 하는 근본적인 웨슬레 교의는, 성공회의 성서적 혹은 카톨릭적 성격과 본질적으로 다른 내면적인 면에 치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도디스트 주의의 주장에는 국가 교회의 원칙보다도 신교 각파의 교리에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둘째로 개종한 자들로 결성한 이 종교 결사에는 처음부터 독립 분파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컨대, 이 사람들은 성공회로부터 제적된 대다수로서 소위 비국교파로 모졌다든가 혹은 대개 프로테스탄트라고 보이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영국 성공회 생활 안에 보다 차분한 한복음운동이 활기를 띄고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이 모든 부흥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윌리암 로멘은 런던 시내 여러 교회에서 박력 있는 설교를 하여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과 교제하였다.
2. 그리스도교 해외 전도
일세기 이상 계속된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교의 대선교 운동이 앵그리칸니즘(성공회)의 해외 발전에 하나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영국 성공회의 발전도 순수한 선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영국인 교회가 영국인과 함께 해외에 진출했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폐하가 계신 모든 영지에 종교와 지식을 널리 고하고 알게 하기 위하여” 1666년에 설립한 그리스도교 지식 선포회(Society for the Promotion of Christian Knowedge)는 주로 영국 식민지에 있는 영국인 식민지 개척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식민지 여러 교회에서 일한 사제 혹은 동인도회사 설치 운영 지구에서 공식 관할 사제로 일하는 사제들의 생활비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들 협회의 주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3. 미국에 있어서의 영국인 교회
미국에서의 성공회 성장과 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주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50년간 이상 식민지 교회를 지도하며 감독권을 집행하고 교회 생활을 지도하는 주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선교상에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시켜 극단에 이르렀고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성직서품를 바라는 사람들이 길고 험한 여행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왕복하며 영국에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S.P.G와 선견지명이 있던 역대 런던 주교들에 의해 주교파송에 대한 계획이 몇 번씩이나 수립되었지만 영구 정부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이 문제는 미국이 정치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 앵글리칸 카톨릭 부흥
18세기의 성공회 활동에서 의의 있는 특징은 복음주의 운동이었으며, 19세기의 특징은 카톨릭주의 재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엽경 복음주의 운동은 영국 성공회 생활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성공회 전도와 박애에 자극되어 개인의 종교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는 교회가 직면한 혁명기에 있었던 새로운 과제에 해답을 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소책자 운동의 목적은 영구인이 종교 개혁에 즈음하여 보유하고 있던 본래의 카톨릭 유산의 의의를 영국 성공회에 가르쳐 주는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이 바랬던 과제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충분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근대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만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것은 과거 100년 동안 전 성공회를 통하여 확대되어 가고 있던 옥스포드 운동의 큰 영향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옥스포드 운동
옥스포드 운동이 던졌던 파문은 영국 성공회만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옥스포드 운동은 빠르고 강한 영향으로 교회 생활에 새로운 면들을 느끼고 하였습니다. 1824년에 이르러 살리스버리 주교는 이 운동을 어떤 면에선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이 운동에서 있었던 성직 훈련의 방법 개선, 신앙의 북돋음, 경건 훈련 각종 성사 등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 수단으로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복원된 것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신학 연구가 교회의 주요한 관심사로 됨을 인정하였습니다.
옥스포드 운동의 영향은 영국 교회와 해외 자매교회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공회의 영적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공회의 영적 생명은 보편적 교회에 속했던 공교회적 헌신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깊이 된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기독교적인의 전통인 공교회적 교의를 넓게 그리고 강한 모양으로 만들려는 용감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새로운 신학자가 속출하게 되었던 그들은 근대 세계의 인간을 둘러싼 여러 조건과 카톨릭 신앙과의 관계를 부각시켰습니다. 그 외에 옥스포드 운동은 복음주의 재흥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도덕적 양심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빈민가나 멀리 떨어진 농촌과 같은 낙후된 지역 주민에 대한 헌신적인 목회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옥스포드 운동은 성공회 안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사상이나 행동의 틀로 정형화 되어질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 운동 때와 꼭 마찬가지로 카톨릭 부흥도 잊어버렸던 유산과 전통을 성공회에 다시 생각나게 했던 것이며, 해가 갈 수록 그 가치는 성공회 특유의 풍성한 정신 속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6 장 형성 과정을 연대순으로 정리
1. 잉글랜드 내에서 발전
성공회 모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① 3세기 초반 - 잉글랜드에 교회가 생긴 시가로 테르툴리아누스와 오 리게네스의 증거자료를 통해 볼 수 있다.
② 4세기, 314년 - 교회가 충분히 확립되었고 아를 교회 회의에 3명의 영국 주교들 - 로디니움(런던) 주교,에보라쿰(요크)주교, 콜로니아리 눔(링컨)주교 - 를 파견하였다.
③ 5세기 - 일루투스가 웨일즈에서 선교 사업을 수행 되었고 파트리키 우스는 아일랜드에서 선교하였다. 5-6세기에 기독교는 브리튼섬에 서 활동적으로 진행되었다.
④ 563년 경 콜롬바는 이오나 섬에 수도원 선교 정착지를 세웠다.
⑤ 597년 로마의 수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의 요구 에 따라 잉글랜드로 가서 켄트에 상륙하고 켄터베리 대주교구를 설 립했다.
⑥ 634년 아이단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선교 사업을 수행했는데 이 결 과 잉글랜드 내 카톨릭 초대사는 세 경향으로 나타났다. 즉, 로마- 브리타니아식, 켈트식(웨일즈와 아일랜드), 로마식으로 나타났다.
이 세 가지 경향으로 16세기에 이르러 영국 국교회라고 정식으로 지칭 될 수 있었던 흐름 속으로 발전되어 갔다.
성공회라는 말이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기까지는 3세기가 소요 되 었다.
2. 종교 개혁 부터 19세기 까지
영국 국교회는 여러 가지 내부의 논쟁과 발전 과정들에 휩싸여 왔었다.
① 1547년 - 헨리 8세의 사망 후 개혁파 로마 카톨릭에도 회심이 일어 났다.
에드워드 6 세는 개혁을 장려하였고, 그가 죽은 후 이복 여동생인 메리가 교황청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② 1588년 - 메리 사망 후에 엘리자 베드 1세는 1550의 두 법령을 통 해 영국 국교회를 로마로부터 다시 독립시켰다. 엘리자 베드의 종 교정책인 개혁된 카톨릭 주의는 예배와 풍습에서는 개혁되나 교회 와 관행에 있어서 카톨릭적인 교회를 열망한 사람들은 만족시켰으 나 일부 어떤 자들은 더 광범위한 개혁을 원했다.
③ 17세기 -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④ 18세기 - 존 웨슬레가 이끌어 간 전도 운동에 관심을 둔 수정된 개 혁 운동이 일어났다.
⑤ 19세기 - 여러 가지 개혁들이 단행된 시기로, 교회와 국가 관계 모 두에서 일어난 개혁들과 영국 국교회 카톨릭파 운동, 특히 교육과 사회적 관심 분야들 속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이 있었다.
제 7 장 성공회의 교리관(敎理觀)
1. 성공회의 교리
1930년 람버드 대회는 다음과 같이 성공회를 묘사한다. 성공회는 성경들과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해 해명된 보편 신앙을 따른다.
① 국가 권위를 존중하나 복종하지 않는다.
② 개인의 자유는 존중한다.
③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세계의 도전들을 회피하지도 않고 분리된 삶
은 살려 하지 않는다.
④ 자신을 하나의 사명을 갖는 조직체로 보기보다 하나의 결속된 조직
체로 본다.
⑤ 성경에 그 교리의 기초를 세우고 해석상 많은 폭을 허용한다.
⑥ 39개가 신앙고백의 정신에 군림하나 그 신앙고백에 서명하는 일이
평신도들에게는 필수적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으로 성직자들에게만
요구된다.
2. 성공회 신앙의 기준
성공회 신앙의 기준이 되는 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1888년 전세계 성공회의 지도자(주교)들이 모인 람베드회의( Lambeth Conferencde)에서는 성공회 신앙의 기준을 다음 4개로 결의했습니다.
1. 신.구약 66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외경 14권을
생활의 모범과 도덕의 교훈으로 삼습니다.
2.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교회가 동서로 분열 되기 이전 마지막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을 고백 합니다.
3. 구원에 필요한 성사(성례전)로 세례와 성체성사(성만찬)를 받아 들이
며, 이 밖에 동서 교회가 같이 성사라 인정하는 다섯가지 즉, 견진, 고
해, 혼인, 신품, 조병성사를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인정합니다.
4. 교회의 직제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주교(Bishopo), 사제(신부
Pesbyter), 부제(Deacon)의 삼품성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직자는 원
하면 결혼을 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는 어떤 교파라도 이상의 4개 조항을 믿는다면 형제 교회로 상호 일치와 협력의 관계를 이루려고 한다.
결론
종교개혁에 대한 영국 성공회의 공헌은 루터교나 개혁주의 운동처럼 신학 분야에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이 16세기 이후 영국 교회에 신학자들과 성서 학자들의 뚜렷한 대열이 존재하여 왔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성공회가 특히 예배면, 주교 제도의 면, 전통을 존중하는 면에서 재통합된 어느 교회에서도 보존되어야 할 중심적인 가치를 갖는 요소들을 훌륭히 잘 간직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영국 성공회가 직면하였으나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한 이 문제가 현대의 다원적인 세계에 사는 기독교에 더욱 더 시급한 문제가 되고 있다. 기독교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서 원하셨던 하나의 교회가 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다양한 이해들과 기독교 예배의 다양한 양식들을 보존할 수 있는가?
참고서적
* 대한성공회 저, 성공회의 역사, 대한 성공회 선교회, 1994.
* 대한성공회 저, 성공회란 어떤 교회인가 ?, 대한 성공회, 1995.
* 대한성공회 저, 성공회 입문, 대한 성공회 출판부, 1994
* 윌리엄 A. 스코트 저/ 김쾌상 역, 개신교 신학 사상사,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3.
* 김의환 감수, 교회사, 세종 문화사, 1987.
* 기독교 대백과사전, 기독교 교문사, 1984.
출처 :크리스찬 건강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행복한 사람
